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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르심에 응답하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작성자김세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11 조회수1,621 추천수6 반대(0) 신고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


<나는 양들의 문이다>
+요한 10.1-10




 


부르심에 응답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기 빕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를 신앙에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고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의 봉사직에 부름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하는 날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성소(聖召)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르심 중에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하느님자녀에로의 부름입니다.‘성소’라고 하면 성직자나 수도자의 부름만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성직자, 수도자 이전에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이전에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받은 것이고 이미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각기 부르심을 받은 대로 그 부르심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의 충직한 삶을 살아야 하고 결혼에로 부름 받은 사람은 혼인 안에서 가정을 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성소는 더 높고 낮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양들을 알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이웃을 위한 희생, 봉사에 한 몫을 다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부름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양도 목자를 알게 되고 또 그의 음성에 기쁘게 달려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 반가워야지 부담스러우면 피하게 됩니다. 기왕이면 반가운 목소리, 기다려지는 음성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10,14).고 하셨습니다. 더군다나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10,7).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통하여 구원의 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만큼, 나도 주님을 알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분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내가 그분을 모르면 그의 양이 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정 안에서, 또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알고 서로의 음성에 귀 기울여 주는 넉넉함이 그 구성원임을 확인해 줍니다. 한 주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이웃을 위한 희생 봉헌의 삶을 새롭게 하시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제51차 성소주일을 맞아 담화문을 발표하셨습니다. 이 담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성소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고 참다운 교회 생활에서 서로를 섬기며 형제애를 경험하는 가운데 싹 틔운다”며 서로를 섬기는 형제애를 강조하셨습니다. 형제애가 넘치는 가정, 공동체에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본당을 시작하신 임가밀로 신부님을 생각하면, 첫영성체를 준비할 때의 가정의 환경과 어머님의 말씀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영성체할 때 드리는 기도는 꼭 들어 주신다는 어머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알아들어 ‘성인 신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평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다짐하였으며 요한 사도가 성모님을 모신 것처럼 ‘자신도 성모님을 모시고 평생을 사제로 살다가 천당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사제성소의 꿈은 성장하여 1888년9월16일 19세의 어린 나이에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1893년 5월27일 성모성월에 사제로 수품되었습니다. 그 때 나이 24세였습니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한국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1947년 10월25일 ‘성모님 저를 구하소서’를 반복하며 임종을 하셨고 오늘도 성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는‘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라는 말씀을 늘 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사랑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 프랑스로부터 한국에 오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셨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재촉하였습니다. 이곳에 오셔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구원의 기쁨과 희망을 안겨 주셨는지 모릅니다. 신부님께서는 성체신심과 성모신심의 고양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세상에 기쁜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 사람의 주님께 대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베푸는 사랑의 바탕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바로 가정입니다. 기도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신심이 깊은 사랑 많은 부모가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이 기도하는 가정, 형제애가 넘치는 가정이 되길 희망합니다.

 



교황님께서는 “모든 성소는 자신을 벗어나 그리스도와 복음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을 요구한다”며“혼인 생활을 하든, 봉헌 생활을 하든, 사제생활을 하든,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사고, 행동 방식을 극복해야 한다”고 밝히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내적인 변화를 이루고, 이웃을 위한 구체적인 봉사로 말씀의 씨앗을 드러내라고 권유하셨습니다.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사고, 행동방식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객선‘세월호’침몰사고를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이 가슴아파하고 있습니다. 이 시련의 시기가 길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고 잘못한 많은 이들을 단죄하며 심판하면서도 정작 나는 원칙을 무시하고 있으며 정도를 걷지 않는다면 결국은 나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부터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며 행동으로 옮길 때 선한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숭고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다보면 때로 시류를 거스르고 안팎의 난관에 부딪히기” 마련이지만,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다는 것, 곧 주님의 제자이며 하느님 사랑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 큰 이상, 큰일에 우리의 마음을 열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주님께서는 사소한 것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위대한 것을 향하여 나아가십시오. 고귀한 이상을 위하여 여러분의 삶을 거십시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일에 대해 분명하게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력의 음모와 폭력에 철저한 무저항과 비폭력으로 맞서심으로써 폭력을 오히려 무력화 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 부활한 다음에 여성들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그들이 사회적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나 남편의 보호막이 없으면 세상에서 가장 무방비 상태에 놓인 연약한 신분”에게 먼저 다가간 것은 “작은이들에게 당신의 승리와 영광의 증인이 되고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벗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강우일). 우리도 난관에 부딪칠 때 마다 누구의 눈치를 보지 말고 주님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들이 많이 나와야 영적 풍요로움에 도움이 되고 길을 주님께서 가신 길을 제시할 수 있느니 만큼 고귀한 부름에 응답하는 젊은이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우리 본당에서도 가까운 시기에 성직자 수도자가 배출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누가 신학교 입학의 동기를 물으면 ‘오기(傲氣)로 갔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께 지나가는 말로 “신학교 갈까?” 하고 던져놓은 것이 어머니에게는 큰 고민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저에게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날 버스터미널에서 친구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대뜸 “너 신학교 가야 되겠니? 신부 되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께 효도 해야지. 어머니께서 걱정하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 어머니 하고 제 어머니하고 그러셨답니다.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 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 실은 그 여자 친구보다 더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어째든 그 말씀을 듣고 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신학교 갈까?가 아니라 어머니, 저 신학교 가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반대는 시작되어 “신학교 가면 학비는 물론 용돈도 주지 않을 것이고 너와 나는 끝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기가 생겨서 “그래도 갑니다” 하고 버텼습니다. 그때 후원자가 생겼습니다. 바로 위 누나가 공무원 이었는데 학비를 마련해주겠다고 제 편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때 누나가 열심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안배였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흘러 원서를 준비할 때가 되었습니다.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본당신부님께서 추천서를 써 주실까? 실은 본당을 떠나 공부하였기 때문에 신부님을 잘 몰랐습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나?

 



그런 가운데 시골 공소를 방문하신 테오필라 수녀님의 “하느님의 뜻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러니 힘들게 하지 말고 기쁘게 보내라” 는 말씀에 어머니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입학할 때는 학비도 살림살이도 모든 것을 어머니가 준비해 주셨습니다. 신학생 신분으로 있을 때 여자에게 전화만 오면 걱정하시고 신부가 되어서도 자나깨나 걱정이십니다. 이 놈이 끝까지 잘 살아야 할 텐데….그러면서 매일 기도하십니다. 어떤 때는 기도하시면서 꼬박 꼬박 졸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묵주기도 한번을 몇 시간을 하시는 줄 모르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도 나오고…… 그냥 주무시라고 해도 상관하지 말래요. 당신이 할 것은 다해야 한답니다. 졸음을 지적하니 자존심이 상하셨나 봅니다. 이런 어머니의 기도가 저를 여전히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여자 신자 분이 옆자리에 앉으신 것을 보고 ‘보기 좋지 않다’. ‘뒤를 돌아다 보지 마라’고 편지를 쓰셨어요. 미국 와서도 한번 편지를 받았는데 ‘공부할 때 용돈을 제대로 주지 못한 게 가슴이 아프고 신학교 간다 할 때 반대 한 것이 안타깝고 면목이 없으시다’고 쓰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신부님 생각하면 한없이 기쁘다. 앞날을 보고 사는 것이 인생이니까 어려움을 잘 견뎌라. 당신 생각하지 말고 잘 지내길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째든 하느님의 부르심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옆에서 잘 부추겨 줘야 하고 어떤 사람은 오기가 생기도록 해 주어야 하고요. 사실 ‘제가 신학교 갈까?’ 하고 얘기한 것도 시골 공소 회장님이 “너는 신부가 됐으면 좋겠다” 는 말씀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시골 공소에 어울리는 4명이 있었는데 하나는 시집가고 하나는 수녀가 되고 둘은 신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한마디 말이 귀한 열매가 맺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응답은 나의 몫입니다. 하느님은 부르시고 나의 협력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젊은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은총을 입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참된 목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꺼이 선택하는 응답을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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