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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혜윤수녀님의 구약노트 2강
작성자이경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16 조회수1,543 추천수4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

지난 시간에는 성경이 어떤 책인지 다시 한번 짚어보자 라는 의미에서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다 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행복에 대한 얘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행복을 위한 책이다. 성경을 읽어보시면 복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많은 분 들이 좀 의아해하실 거 같아요. 행복 그러면 경건하고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런 것과 좀 이율배반적 인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시는데 하느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시기 위해서 당신 축복을 내려주시는 분이죠.

성서에 복에 대한 내용은 행복과 축복이라는 내용으로 구별됩니다. 히브리말도 행복은 ‘아쉬레’. 축복은 ‘바락’이라고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락이라는것은 그야말로 하느님께서만 주어이신 거예요. 그분이 내려주시는 본질적인 복, 그것을 축복, 바락 이라고 얘기하구요, 성서를 읽어보시면 행복하여라~한 사람들 뭐 이런 거 많이 나오쟎아요. 이때의 행복이라는 거는 바락이 아니라 아쉬레 라는 단어를 씁니다.

 

 

아무튼 성경도 행복이라는 내용과 결코 유리된 책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드리는데 여기서 문제를 한번 제기해보겠습니다. 우리는 행복 하려고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많은 걸 억압당하고 규제 당하고 다 포기하고 이러면서 오로지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자가 되기 위해서 살쟎아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야 저 사람은 진짜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가졌다. 돈도 많으시고 지위도 높으시고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의외로 그런 분들 중에 많은 사람이 본인이 행복하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많으신 거에요.

 

 

제가 굉장히 충격적으로 읽어서 머릿속에 남아있는 단어가 있는데요. 불행중독 이라는 단어예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그리고 만약에 자기가 조금이라도 행복한 순간이 오면 좋긴 뭐가좋아하면서 스스로 문제를 발생을 시켜버리는 것이죠. ‘나는 저 사람 때문에 힘들어. 나는 이것 때문에 힘들어이렇게. 이런 것들을 불행중독이라고 한다고 하죠.

 

 

하느님이 원하시는 겸손한 삶은 아닌 거 같습니다. 문제가 되는 거는요, 내가 언제 행복한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남이 이 정도 되면 행복하다고 봐주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거 이게 문제입니다. 내가 행복한 길을 찾아야 되는데 남이 행복하게 봐주기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뭐가 행복한지 언제 행복한지 이런 것들을 모르는 거 예요. 그저 남이 보기에 내가 행복한 사람으로 보여지기 위한 몇 가지 아우라를  갖추려고만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내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행복할 수 있는지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놓치고 있다라는 겁니다

 

 

 

많은 분들이 이정도 대학은 나와야지 행복할 수 있어. 혹은 이정도 연봉은 받아야 행복할 수 있어 그런데 그런 연봉에 턱없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을 사시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이 문제는 그야말로 개인적인 결단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또 왜 라는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 보게 되는데요. 사람들이 알파벳을 만들고 농사를 지으면서 정착해서 살게 되고 이러면서 소위 문명이라는 게 나오지 않습니까? 근데 기원전 몇 십 세기부터 나와있던 문명에서 인류가 끊임없이 행복의 조건으로 집중했었던 요소는 뭐냐 하면 소유입니다. 내가 더 많이 가져야지만 행복하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던 거죠. 그래서 더 많은걸 가져야 되고 그랬을 때 조금 더 내가 자유롭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더 많이 소유해서 자꾸 쌓아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그래 봤자 하느님 없이 쌓은 탑은 바벨탑밖에 될 수 없는 거거든요. 하느님 없이는 절대로 그게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이죠. 이제 소유라는 거, 이걸로는 우리가 그다지 행복할 수 없다라는 것을 많은걸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불행하신 그런 분들을 보면서 저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근데 사실은 이것이 그다지 스캔들스러운 일이 아닌 게 인간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거에요. 소유라는 걸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게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는 본성을 가지고 있대요.  내가 만약에 평생을 10억을 모으는 게 목표여서 거기에만 매진하여. 나름대로는 굉장히 성실하게 그런 것을 이루었을 때 그 성실함이 정말 나에게 어떤 가치를 주느냐 요것을 잘 계산해보자는 게 제 말의 요지입니다.

 

 

어느 날 소원대로 10억을 통장에 모았을 때, 며칠 행복하고 그 다음에는 행복하지 않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소유했으니까 그립지 않은 거죠. 마찬가지로 내가 50평으로 이사를 가고 싶다. 이사 가고 나면 딱 2-3일정도만 여한이 없으시다는 겁니다. 금새 또 또 다른 그리움의 대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거에요. 저 사람하고 지내면 평생 좋을 것 같아서 결혼도 하지만 일단 결혼하고 나서 한 일차적인 공간에서 살다 보면 이게 그리움의 대상이 아닌 거죠. 왜냐하면 이미 내 것이 되어버렸으니까.. 그죠?

그래서 내가 아 이것을 좀 가져야겠다. 혹은 내가 박사학위를 꼭 따야 되겠다. 내가 교수가 꼭 되야 되겠다. 이번에 승진을 꼭 해야 되겠다. 문제는 그걸 안 해도 행복하고 해도 행복하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되는데 남들이 볼 때 박사면 좋으니까 남들이 볼 때 사장이고 이러면 좋으니까 그거에 맞추다 보니까 결국 그것을 해도 획득을 해도 행복하지 않다 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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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소유라는 방식, 인류가 수 천년을 끊임없이 매진해왔던 이 방법에 대해서 성경은 제동을 거는 겁니다. ‘정말 그렇게 행복해?’ ‘그런다고 진짜 행복할까?’. 아주 최고의 권력과 모든걸 가진 분들. . 아무튼 그런 사람들은 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얼마나 좋을까? 자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 라는 거죠

 

진시황제의 이야기 잘 아실 겁니다. 자기가 천하를 재패하고 싶은 거죠. 열심히 싸워 모든 걸 갖게 되죠. 누구도 그에게 대적할 수 없는 황제가 되죠. 그렇게 했었던 이유는 불안 때문이었다고 그래요. 누군가가 있으면 나를 전복시킬 수 있으니까 미리 제거하고 미리 없애버리고 이런 식으로 했었다는 건데요. 최종적으로 불안이 그로부터 완전히 거세당할 수 있냐 그렇지 않다 라는 거죠. 최종적인 불안은 죽음이었습니다.

 

 

죽음. 근데 누구도 여기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어요. 모두다 공평합니다. 이런 것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게 구약성경 지혜문학과 같은 작품들이거든요. 그래서는 결국 그 진시황제가 나중에는 미쳐가죠. 광기를 막 부리면서 결국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얘기를 하고 불사하려고 하는 데 불가능한 일이죠.

 

결국 소유라는 방식으로는 우리가 행복할 수 없다라는 거, 진정한 행복의 길은 성경에서는 다르게 얘기하고 있다라는 것을 말씀 드려야 되는데 얼마 전에 읽은 책 중에 법정스님말씀이 있더라구요. 굉장히 공감하면서 읽었어요

 

산은 내 개인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바라볼 수 있고 내 뜰처럼 즐길 수가 있다.’ 무소유라는 책에서 나온 건데요, 산이 아름다운 거는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겁니다. 내 것이면 어떻게 해야 되죠? 계속 감시해야 되쟎아요. 담배꽁초 버리나 사람들이 여기 와서 라면 끓여먹나 이런 거를 다 규제하려고 하면 나는 그 산을 행복을 누리면서 볼 수 없다라는 겁니다. 기가 막힌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쌓아놓고 소유하는 것은 축복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행복할 틈이 없다는 거 이거는 정확하게 직시해야 하는 인생의 실체입니다. 아이러니하다고밖에 얘기할 수 없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정말 난 행복하길 원하는데 그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이런 질문들을 던지시는 건데 역시 성경과 연결됩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서만 우리는 본질적인 행복에 들어갈 수 있다 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예수님 그리스도는 신이신데- 물론 100퍼센트 사람이시면서 100퍼센트 신이시쟎아요- 하느님을 어떻게 따라가냐 우리 인간이,,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는데 어렵지 않은 방법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그분도 아까 말씀 드렸듯이 하느님이셨지만 100퍼센트 인간이셨기 때문에 당신이 우리와 느끼는 동일한 한계나 이런 것들을 다 가지고 계셨던 것이죠

 

 

성모님이나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본인에게 가해지는 고통. 억울한 누명! 어떨까요?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으시는 재판 장면이 십자가의 길에 제일 먼저 나오는 장면이죠. 근데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이 재판이 무의미하다는 걸. 이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될 수밖에 없는, 이미 짜고 하는 판결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당함과 나를 희생물로 만들려고 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다 알고 계시면서 이런 재판 내가 보이콧하겠다 이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수용을 하신 거구요. 예수님도 제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 하시쟎아요.. 성모님도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를 하셨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하느님이 면제해주시지 않아요

 

우리 엄마가 이렇게 아프신데, 우리아버지가 저러신데, 왜 하느님은 이렇게 하십니까! 예수님도 성모님도 그냥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나는 이거 안 하니까 거부합니다’. 하고 문제를 해결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정상적인 인간보다 더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게 하느님을 따라간다는 게 아니라 그분이 보여주셨던 그 인간성, 사람으로서의 그런 모습들을 우리가 따라갈 때 오히려 행복하다 라고 가르치는 게 저희 성경입니다.

 

 

가톨릭교회를 라틴어로하면 가톨릭쿠스보편적이라는 뜻입니다. 보편적이라는 얘기는 뭐냐 하면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누가해도 동일한 결과를 내는 거. 이걸 보편적진리라고합니다. 1+1=2쟎아요. 미국에서 더하든 한국에서 더하든 2000년전에도 2000년후에더해도 2입니다. 동일한 결과를 내는 이런걸 보편적진리라고 하는데 교회는 보편적 진리를 성경을 통해서 제시하고 그래서 그 진리가 2000년전 예수님께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진리인, 그런 진리를 담고 있는 교회 라는 것이 가톨릭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모범, 그 모델을 따라감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백만장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충만한 삶을 지금 여기서 살 수 있다 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갈 때 가장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라는 건데 여기에서도 또 걸림돌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보여주시는 방법이 복음과 십자가예요. 십자가를 질 때 우리가 오히려 행복하다는 거 이걸 우리가 어떻게 수용해야 되겠느냐 그 얘기를 좀 해드리죠.. 분명히 역설이죠. 십자가를 안 지려고 우리는 이런 노력을 하는데 오히려 질 때 훨씬 더 니가 행복할 수 있어. 그게 2000년전에도 보편적 진리였고 지금도 그래. 이렇게 설득하고 계시는 거거든요

 

 

몇 가지 성서 구절을 제가 준비를 좀 해봤는데요. 마태오복음 61절에서 4절인데요. 요즘 자기피알 시대라서 어떻게든 본인을 드러내려고 노력을 하게 되는데요. 오히려 남들에게 부각되려고 하지 마라. 그럴 때 오히려 니가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수용하기가 좀 어려운 내용 이예요. 내가 착한 일 할 땐 사람들이 좀 봐줬으면 그리고 사람들이 볼 때만 기도도 좀 열심히 하고 이러고 싶은 게 우리 본성입니다. 근데 그 본성대로 했을 때는 네가 결코 행복할 수 없으니 오히려 남들한테 신경 쓰지 말라는 거죠. 본질적인 부분에만 집중을 하라는 겁니다

 

여기서 젤 중요한 것은요, 우리가 지나치게 너무 주변을 신경 쓴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여력을 다해서 신경을 써야 되는 건 지금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거든요. 보통 저희는 남이 볼 때와 보지 않을 때 전혀 다른 모습이 되고, 사람들이 없을 때 아주 본능적으로 행동을 한다는 거죠. 참 문제가 되는데요. 주변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신경을 쓰라는 겁니다.

 

 

지독히 역설적이지만 그것만이 보편적 진리다.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이렇게 얘기하시는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성서를 보시면 옛날얘기다 라고 보실 수 없는 게 그 구약성경 안에서 나오는 인간 삶의 모든 것들이 여전히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문제들입니다. 예수님 제자들 나올 때 누가 1등이냐 다음에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 될 것이냐 이것 때문에 맨날 싸우거든요. 심지어는 루가복음 같은 데서 보면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상을 하고 계시는데 -그 만찬을 끝내고 체포되시는 상황이거든요-

 

 

 이 상황에서도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냐 이거 가지고 싸워요. 그러니 우리모습 그대로이죠. 그래서 그 당시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셨던 진리가 결코 고리타분한 진리라고 볼 수가 없다라고 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셔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우리는 절대로 종이 되지 않기 위해서 자리다툼이 크쟎아요, 여기서도 재미있죠! 일등 되기를 원해? 그래 좋아. 일등 하는 법 가르쳐 줄께, 그게 뭐냐 하면 꼴찌가 되면, 꼴찌라는 말보다 더 의미 있는 말이 무언가 하면 종이라는 말이죠. 항상 얘기가 되는 게 미천한자들, 겸손한자들 심지어는 그래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 정도까지 자기가 중심이 되지 않으려고 하는 자세가 중요하구요.

 

 

또 한가지 말씀 드려 볼까요? 마태오복음 538-42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악한 자들은 맞서야 되잖아요. 그래야지만 정의가 구현되잖아요. 그런데 정의 구현을 하느님이 하신다는 거예요. 우리는 때로 어떤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 교회를 개혁하고 세상을 바꾸고 그런다면 정의가 구현될 수 있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성경은 또 교회는 전혀 다른 입장을 제시합니다. 교회를 이끌고 교회를 수호하며 세상을 바꾸는 존재는 하느님 밖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해야 되냐? 하느님께 집중함으로써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살아내는 것. 이거예요. 최근에 보면 바티칸에서 카리스마 적인 인물들을 성인성녀 반열에 올리지 않는데요. 오히려 공부도 되게 못했다고 하고 교회 내에서 고해성사 말고는 하신 일이 없다고 하는 비안네 성인. 비안네 성인 같은 경우 교회 안에서 박사도 아니었고 주교님도 아니셨고,, 근데 모든 교구사제들의 가장 모범적인 모습으로 제시가 되죠.

 

 

소화데레사 성녀도 마찬가지입니다. 24살에 너무 일찍 아파서 돌아가시고 교회 내에서 한 일이 없어요. 한 거라고는 일기 쓴 거 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이분의 모습을 보면 하루하루의 삶이 너무나 투쟁적이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사실은 하루하루 자신에게 주어지는 많은 문제들, 많은 오해들, 많은 소외들, 이런 것에서 오히려 더 투쟁적인 투사로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라는 겁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더군요. 교회를 지키고 뭔가 큰일을 하고 이런 거 보다 교회가 주목하는 더 진정한 성인 성녀의 모습은 지금 내게 주어지는 자질구레하지만 나에게 굉장히 위협이 되는 순간순간마다의 전쟁을 잘 치러내시는 거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악인에게 맞서는 거, 원수 갚는 거, 그것은 내 몫이다 라고 얘기하시는 겁니다.

 

 

형벌에 대한 아주 고전적인 법철학적 논의 논쟁이 하나 있습니다. 뭐냐 하면 보복을 통해서 정의를 회복한다라는 거예요. 만약에 사람을 죽였으면 너도 사형, 이런 식으로 해서 범죄를 줄이겠다는 아주 기본적인 고전적 명제죠. 자 근데 저희가 아시다시피 그렇게 많은 흉악범들을 끊임없이 처형을 하고 감옥에 가두어도 삶은 더더욱 흉악해 지잖아요. 그래서 보복이라는 단순한 단세포적인 접근을 통해서는 범행이나 범죄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오른뺨을 치면 자기도 때려야 하는 게 정상인데 차라리 왼뺨까지 내어줄 때 오히려 그이는 더 이상 가혹한 짓을 못할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건데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 굉장히 부당한 것을 요구하고 나를 힘들게 할 때 저희가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아 이런 상황에서 내가 정당하게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은 나도 똑같이 그렇게 하는 거다. 라고 해서, 본때를 보여준다는 말이 있잖아요. 아주 강력하게 조처를 하게 되는데요. 문제는 그래서 아 저이가 무서운 사람 이었구나, 내가 함부로 하면 안되겠구나 이렇게 상대편이 꼬리를 낮춘다 라고 합시다.

 

 

그랬을 때 성경은 그래서 이제 행복하니?’ 라고 물어보는 겁니다. 니가 똑똑하고 니가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이고 그래서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으니 행복하니? 라고 물어보는 거죠. 오히려 그렇게 됐을 때 관계는 복음적 관계로 거듭날 수는 없습니다. 이미 그 상황에서는 이제 앞으로는 절대 보지 말거나 표층적으로 밖에 만날 수 없는 진심으로 만날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웬만한 부분, 즉 나를 무시한다거나 아주 건방지게 한다거나 이랬을 때는요. 그런 정도의 사안이라면 그거에 대해서 리액션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까 말씀 드렸듯이, 이 복음과 십자가에 나오는 내용처럼 여러분들한테 지금 십자가에 처형시켜 이러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걸 따라가라는 게 아니죠. 근데 누군가가 근거 없이 나를 모욕하거나 이랬을 때 굉장히 화가 나게 되는데요. 거기에 대해서 내가 화를 내건 혹은 어떤 식으로 하건 모든 것들이 어떤 상황으로 문제가 좋게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그다지 많지 않다라는 거죠.. 그래서 저 사람을 어떻게 해야 되나, 이런 것에 고민하실 시간에 오히려 예수님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왜 나에게 저런 주변인들을 주셨는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가 영성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도구로 씌워지는 사람들이 주변인들이예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은요. 아무리 나를 괴롭혀도 아유 그런 사람이 있구나그렇게 되는데 혹시 자녀분들이 괴롭히신다거나 하면.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저렇게 하나..힘들어집니다. 그럴 때 이제 저걸 어떻게 해야 되나 생각하시는 게 아니라 우선적으로 예수님께 집중하시라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 깊고 더 본질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다라는 겁니다. 이게 보편적 진리라는 거예요. 여전히 우리가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그 다음에 왜 성경이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거냐? 복음과 십자가뿐만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서를 보면 결국 사랑의 얘기 거든요. 많은 구약의 율법들이 나오는데 이 율법들 중에서 제일 중요한 율법이 뭡니까? 이래서 저희는 황금률이라고 하죠.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고.

 

 

사랑이라는 것을 법으로 주실 정도로 사랑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의아해하실 수도 있을 거예요. 왜 경건한 성경에서 사랑에 대한 얘기를 이렇게 많이 하시는가. 그런데 놀라실 이유가 없는 게 예로부터 사랑은요 거의 신성을 가진 거였습니다.

 

 

로마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신성을 가진 게 4개가 등장해요. 너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라는 건데 첫 번째로는 빛입니다. 빛 없이는 다 죽잖아요. 그러니 빛이 신성을 가진다라는 거고 그래서 빛의 신이 제우스입니다. 그 다음으로 두 번째,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이길 수 없을 만큼 큰 힘을 가진 게 시간입니다. 크로노스 라는 신이 있는데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이 늙고 병들고 이러는 것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시간이 신성을 가집니다. 세 번째는 하늘입니다. 제가 유럽으로 유학을 가서 하늘을 보면서 하늘이 저렇게 넓구나 하는걸 처음 알았어요. 아무튼 어디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최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이 하늘이기 때문에 하늘도 역시 신성을 가진 거였습니다. 우라노스 라는 신이 있어요.

 

 

그리고 네 번째가 사랑입니다. 사랑의 신은 에로스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역동성을 가진다는 거, 생명을 준다라는 겁니다. 사랑을 하면 생명도 태어나잖아요. 또 사랑을 통해서만 사람이 클 수 있다는 겁니다. 전쟁 중에 태어난 아기들이 불안할 수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사랑을 극진히 받은 아기들은 평상시 태어난 아기보다 훨씬 건강하대요. 그러니까 조건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엄마의 사랑이 얘를 살리는데 최고의 조건이 된다라는 거죠.

 

 

그리고 신성로마 제국에 프리드리2세라는 왕이 있었는데. 굉장히 참혹한 생체실험을 하는데요. 너무나 놀라운 사실은요. 아주 좋은 환경에서 위생적으로 하고 이랬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쓰다듬어주지 않은 애기들, 스킨쉽이 없던 애기들은 100%죽었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조건이 안 좋아도 온 마음을 다해서 엄마의 사랑을 줬을 때와 아닐 때 상황은 굉장히 달라진다는 거죠.

 

 

그래서 사랑이 이렇게 중요한 건데요. 완벽한 사랑을 담아놓고 있는 예가 모성입니다. 사랑의 종류가 굉장히 많잖아요. 그런데 왜 모성이냐 하면 남녀간의 사랑이나 뭐 이런거는요, 헤어지고 안보면 생각이 안 난데요. 그래서 자연적으로 이별이 된다고 그럽니다. 근데 헤어져도 헤어지지 못하는 거, 이별 못하는 게 엄마의 사랑이래요. 여러 종류의 사랑 중에서도 가장 완벽에 가까운 사랑은 모성인데요. 모든 모성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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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엄마들이 청소년들이 문제가 있다고 했을 때 얘네들의 문제라기 보다는 우리 부모님들의 문제인 거죠 사실은. 그럼 또 우리 부모님들은 왜 그러냐, 우리 부모님들의 부모님들, 해방, 6.25 뭐 이런 거 하면서 그렇게 교육을 못 받으신 상황이 된 거죠. 자 그래서 이런 부분들이 성경에 이미 제시가 되어있습니다.

 

 

이사여서 4915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엄마의 사랑이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가장 절대적이고 완벽한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거죠.

 

 

정리해서 말씀 드리면,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수가 없는데, 역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건 그 사람 잘못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우리는 절대적이고 완벽한 사랑으로 거듭날 수밖에 없는데 그건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느냐, 하느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 말고는 길이 없다는 겁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고,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했고 평생 내내 너를 사랑했고 너를 구해주고 너를 보호해주고.. 사실 우리는 숨조차도 우리가 조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주셨기 때문에 숨을 쉴 수 있는 거고 제 손가락 상처 하나도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이거는 하느님만이 치유해주실수 있는 거죠. 그리고 오죽하면 나를 십자가에 처형함으로써 까지 그 몸값으로 너를 살렸다. 그래서 이런 사랑을 생각하면서는 저희가 눈물을 안 흘릴 수 없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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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거는 사랑을 통해서 행복할 수 있는데 오히려 주변의 사랑을 얘기 할 때는 배신만 당해가지고 더더욱 불행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거고 우리를 행복할 수 있게 하는 사랑은 바로 하느님 사랑밖에 없다는 그 스토리가, 그 드라마가 성경에 제시된 겁니다. 구체적으로 원수지지 말아야 되고 원수를 사랑하고 이런 모든 것들을 구체적으로 내가 다 알려줬다. 이렇게 얘기하고 계시는 겁니다. ,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진리는 성경에 계시되어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다음은 짧게 말씀드릴 건데요. 성경은 만남의 책입니다. 갑을 두 사람이 사랑을 시작 할 때는 항상 만남이 필요하죠. 만나야지 사랑을 할 꺼 아닙니까. 근데 성서도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신약성경 구악성경 전부 다 창세기부터 씌어지지 않습니다. 이 기막히게 두꺼운 책이 언제 시작이 되냐 하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해메고 그들이 너무나 힘들게 살고 있을 때 어떤 존재를 만났다는 거예요.

 

 

 

근데 그 존재가 나에게 주는 기가 막힌 구원이 너무나 큰 생명의 구원과 관련된 것이라서 이스라엘은 그것을 원체험 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전에도 여러 체험을 해 왔지만 어떤 분을 만남으로써 이스라엘은 새롭게 거듭날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 그가 누구냐, 야훼하느님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게 되면서 쓰여지게 되는 게 구약성경입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예요. 신약도 그냥 살아가고 있는데 어떤 존재를 만남으로써 나는 이제 전혀 다른 삶으로 초대되었다는 거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만남이 주는 사건이 너무 컸기 때문에 라는 건데 대부분 그게 예수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발생했다라는 겁니다. 아주 절대 절명의 만남 이라는 거죠. 신약성경의 대부분은 절름발이 문둥병자, 나병환자, 창녀, 세리 등 다 너가 인간이냐이런 상황 이었거든요. 그런데 거기에서 그렇게 주저하고 있는 그들에게 너를 위해서 내가 목숨까지 줄 수 있어라고 이야기 하시는 바로 이 체험이 원체험이 되면서 너무 아름다운 이 만남을 글로 써야 되겠다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에는 필요가 없죠. 근데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 이제 체험자들이 증언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이 또 돌아가시면서 기록으로 남겨야 되겠다. 라고 해서 만남과 그 원체험이 만들어낸 일종의 드라마가 성경인 것입니다. 드라마는 대부분 만남에서 시작이 됩니다. 우리 시청자는 전지적 시점을 가지고 있지만 주인공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살잖아요. 이스라엘인들이 기가 막힌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잊어버리고 다른 조건을 찾고 배신하고 다른 절대자를 찾고 이런 배신의 드라마라고 보시면 됩니다 

 

1624부 이런 드라마 나갈 때 처음에 만나서 바로 결혼하고 이러지 않잖아요. 저 여자가 저렇게 문제가 많은데 남자주인공은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서 1617회 이렇게 가시는 거잖아요.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계약을 먼저 파기하기 때문에 더 이상은 계약이 성립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하느님은 갑을 이라는 관계 안에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느님의 모습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계속해서 그 드라마를 진행하는 것이 구약성경이고 신약성경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보시면 조금 성경을 대하시는 느낌이 조금 편안해 지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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