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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24강 고대근동과 성경의 가시나무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20 조회수1,346 추천수2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원준 박사님의 구약성경과 신들/ 제24강 고대 근동과 성경의 가시나무

 

안녕하세요? 한님성서 연구소 주원준 토마스아퀴나스입니다.

성호경 바치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자,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 그리고 집에서 TV를 시청하시는 시청자 여러분, 일주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자, 평신도 신학자가 설명해 드리는 구약성경과 신들을 오늘은

24회 강의로서 가시나무에 대해서 다루는 두 번째 강의입니다.

 

저희는 지난 시간에 길기메쉬 서사시, 인류 최초의 장편 서사시 길가메쉬 서사시의

내용을 물론 여러분들이 나와 있는 책을 직접 읽어보셔도 좋지만 제가 이제 간단하게

그 내용을 이렇게 초간단 핵심 요약 정리를 해 드리고 있는데요.

 

얘기 하다가 저번 시간에 마쳤습니다. 저번 시간에 들으신 일주일 전의 내용을 여러분이

한번 상기시키는 의미에서, 길가메쉬라는 큰 영웅이 있었어요. 굉장히 힘이 센 영웅이었

는데 그가 그의 친구 엔키두라는 그에 못지 않은 큰 영웅이었고 둘이 아주 큰 우정 속에서

모험을 많이 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모험이 뭐냐 하면,

 

산에 있는 괴물, 아무도 무찌르지 못한 깊은 산속에 사는 어마어마한 호랑이 같은 괴물을

우리가 무찌르자. 그래서 무찔렀어요. 무찌르고 나서 이 둘은 정말 영웅이 되었는데 그때

어여쁜 여신이 나타나서 청혼을 했어요. 마음을 빼았겼죠.

 

그런데 아직 청년이고 여자를 어떻게 다룰지 모르고 자기 자신의 야심이 더 큰 길가메쉬

는 여성을 무시했어요. 그러니까 그 여성이 질투에 휩싸여서 결국 자기 아버지 하늘의 신

아누한테 이야기를 했고, 아누가 신들의 회의를 열어서 결국 여러 가지 처방을 내렸지만

가장 큰 처방은 길가메쉬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 엔키두를 죽이는 거였어요.

 

* 친구 '엔키두'와 함께 괴물 '훔바바'를 무찌른 영웅 '길가메쉬'에게 여신 '이쉬타르'가

  청혼을 하지만 ... '길가메쉬'는 이를 무시하고 질투심에 휩싸인 여신이 하늘의 신

  '아누'한테 청해 결국 '엔키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전에 엔키두하고 길가메쉬는 과연 죽음이 두려울까?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 둘이 혈기왕성하고 어린 청년 시절에는 세상도 모르고, 여인도 모르고 그런 거 아무것

도 모르고 그냥 지나갔어요. 하지만 길가메쉬가 조금 나이가 들고, 자기의 소중한 친구를

잃고 나니까 아, 세상에 다 필요 없다. 정말 권력도 필요 없고, 이런 영웅, 내가 명예도

필요 없고, 영생, 우리가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되는 거구나.

 

그래서 길가메쉬가 죽음을 해결하고 영생을 찾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기로 했는데 주위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영생의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 딱 한 명이 있는데

바로 이게 '우트나피쉬팀'이다. 이름도 복잡하죠? 우트나피쉬팀이 있어요.

 

* 소중한 친구를 일고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길가메쉬'는 영생의 비밀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마치 노아의 홍수처럼 최초에 있었던 태초의 홍수를 겪고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다. 이 사람을 만나면 그가 어떻게 영생을 얻었는지 알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한다. 죽음의 강을 건너는.

여기까지 여러분, 저번 시간에 말씀드렸고요.

 

이제부터는 죽음의 강을 건너기 위해서 우르샤나비라는 뱃사공이 있어요. 그런데 뱃사공

도 그냥 건네주지를 않아요. 거기까지 어떻게 어떻게 길가메쉬가 이제 갔는데 이 사람은

힘이 세고 영웅이니까 가는 건 문제가 없었는데 아, 이 사람이 죽음의 강을 건너려고 뱃사

공에게 "건네 주시오!" 그러는데 안 건너 줘요. 그래서 또 거기서 이 사람이 결국은 건넜어

요. 자, 건너서 드디어 우트나피쉬팀을 만났어요. 이게 이 길가메쉬 서사시 스토리의 최고

절정이예요.

 

* 태초의 홍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우트나피쉬팀'을 만나기 위해 죽음의 강을

  건너는 '길가메쉬' ...

 

그리고 우리가 제일 보고 싶어하는 가시나무가 이제 나와요. 여기서부터는 조금 자세히

볼께요. 길가메쉬는 영생을 원했어요. 그래서 태초의 홍수를 겪고 살아남은 ?우트나피쉬

팀을 만나기를 원했고 우여곡절 끝에 그는 정말 만났어요. 그런데 우트나피쉬팀한테

"나는 죽음이 두렵소. 영생의 비밀이 무엇이오?" 하고 물어보니까  이 우트나피쉬팀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돌아가시오!" 안 가르쳐 줘요. 길가메쉬는 낙담했어요.

 

* 우여곡절 끝에 '우트나피쉬팀'을 만난 '길가메쉬'는 영생의 비밀에 대해 묻지만

  "돌아가라"는 대답을 듣게 되고 ...

 

내가 친구 엔키두를 잃은 다음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막판에 이걸 안 가르쳐 주나?

쉽게 얻는 게 아닌 거 같애요. 거기까지 가도. 그래서 길가메쉬라는 이 큰 영웅이 어깨가

축 늘어져서 빈손으로 돌아가려고 우르샤나비, 그 뱃사공한테 방향을 돌렸어요.

 

이때 이 불쌍한 길가메쉬가 가엾어 보여서 우트나피쉬팀의 아내가, 여자한테 잘 해야 돼

요. ^^*~~~ 이 아내가 마음이 움직였어요. 그래서 그 아내가 자기 남편 우트나피쉬팀한

테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교재 181쪽이예요."길가메쉬는 여기까지 오느라고 지쳤어요."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큰 영웅이 초라한 모습으로 보이는데 그냥 빈손으로

보내지 말자.

 

* 낙담한 채 돌아서는 순간 '길가메쉬'를 가엾게 여긴 '우트나피쉬팀'의 아내 덕분에

  영생의 비밀에 대해 듣게 된다

 

이것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진리는 우리가 힘이 세 가지고 명예와 권

력이 있다고 오는 게 아니라, 어쩌면 맨 마지막에 힘이 다 빠져 가지고 바닥을 쳤을 때

찾아오는 거 같아요. 그래서 우트나피쉬팀이 완전 여기서부터 반전이 일어나요.

 

우트나피쉬팀이 드디어 아내의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꿔요. 그래서 신의 비밀을 알려줘요.

그게 뭐냐 하면 영생을 얻는 그것이 뭐냐 하면, 가시나무예요. 읽어드릴께요. 길가메쉬

서사시의 한 장면이예요. 교재 181쪽.

 

" 길가메쉬 ... 네게 비밀을 말해 주겠다. ...식물이 하나 있는데 ... 가시덤불 같은 ...

  그 가시는 장미처럼 네 손을 찌를 것이다. 네 손이 그 식물에 닿으면 너는 다시

  젊은이가 될 것이다!"

 

길가메쉬, 네게 비밀을 말해 주겠다. 식물 하나 있는데 가시덤불 같은, '키마에데키'

아카드어로 키마에데키인데 키마는 히브리 말의 '크'하고 비슷해요. 그러니까 ..같은,

가시덤불 같은. 그 가시는 장미처럼 네 손을 찌를 것이다. 장미처럼. 네 손이 그 식물에

닿으면 너는 다시 젊은이가 될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여기서부터 곧장 절정으로 치달아요. 드디어 길가메쉬는 원하는 바를 얻었어요.

"가시나무구나!" 그래서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가시나무를 움켜 잡아요. 가시덤불을

움켜 잡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쓰라려요. 피가 나요.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무릅쓰고 가시

덤불을 움켜 쥐는 길가메쉬의 모습은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고통을 반드시 무릅써야 된다.

그거를 말해주는 거 같아요.

 

* '우트나피쉬팀'으로부터 영생의 비밀 '가시나무'에 대해 알게 된 '길가메쉬'는 주저하지

  않고 가시덤불을 움켜 잡는다

 

고대 근동의 지혜를 말해주는 거 같아요. 진리를 만난 사람은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진리는 얻으려고 해요. 길가메쉬는 이 말을 듣자마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가시를 움켜

잡았어요. 길가메쉬 서사시는 그거를 어떻게 얘기하고 있냐 하면, 굉장히 간단하게

"손은 찔렸지만 식물을 움켜잡았다." 이렇게 얘기해요.

 

드디어 길가메쉬는 소망하던 영생의 비밀을 얻었어요. 여기서 영생의 비밀은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그는 기쁨에 겨워서 이 가시나무의 이름을 뭐라고 지었냐 하면

'늙은이가 젊은이가 되다'로 지었어요. 그 가시나무 이름이 '늙은이가 젊은이가 되다'예요.

아까 우트나피쉬팀이 그랬잖아요. 그 식물이 네 손에 닿으면 너는 다시 젊은이가 될 것이

다. 그랬고 길가메쉬는 그 말을 받아서 이 나무의 이름은 '늙은이가 젊은이가 되다'이다.

 

 백성을 사랑하는 지도자 길가메쉬가 이름을 짓고나서 한 행동은 뭐냐 하면 내 이 나무를

많이 가져다가 우리 고향 땅에 가가 지고 노인들한테 나눠줘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 드디어 소망하던 영생의 비밀을 알게 된 '길가메쉬'는 고향으로 '가시나무를 가져가

  노인들에게 나누어 주려는 계획을 세운다

 

진리를 얻은 사람은 그 진리로 돈을 벌 생각을 안 하고, 참 진리를 얻은 사람은,

참 깨달은 사람은 그거를 나누고 싶어해요. 많은 사람이 이거를  알고 깨달아서 더 잘

살면 좋겠다. 즉 길가메쉬 행동 그대로예요. 내가 이걸 갖고 가서 이거 하나당 얼마에

팔아먹어야지. 얼마 남겠지. 이런 생각 전혀 안 하고, 우리 동네, 우리 고향 땅 노인들

한테 이걸 다 먹여야 되겠다. 그래서 길가메쉬가 갖고 와요.

 

약간 여담을 하면, 진리와 사이비를 구별하는 기준점은 무엇인가 그러면 저는 어떤 종교

가 어떤 말을 하는가를 들어보지 마시고 거기의 돈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를 보시면

되요. 그게 가장 정확할 거 같아요. 그리스도는 진리는 선포하시다가 돈을 벌기는 커녕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요. 우리 한국 천주교의 조상들은 돈을 벌기는 커녕 오히려

가문이 다 박살나고 박해를 당하셨지요. 지금도 예수님은 나를 다르려면 십자가를 져라

라고 하지 돈을 벌라고 하지 않으시거든요.

 

가톨릭도 그런데요. 일부 개신교 신학이 가톨릭에 안 좋은 영향을 준 게 한국 사회에서

잘못된 상식으로 들어온 게 예수님 믿고 천당 가자예요. 예수님 믿고 성공 하자. 이게

둘이 완전히 다른 문제거든요. 물론 우리가 세속적으로 성공할 수 있어요. 예수님 믿고

열심히 하다가.

 

그럼 우리가 그 사람 시기하지 말고 박수 쳐주고 아참, 훌륭하다라고 축하해 주고 그래야

되고, 돈 번 사람은 겸손해야 되죠. 하지만 성공한 사람은 은총 받은 사람이고, 하느님이

사랑한 사람이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그러면 어떻게 되요? 하느님한테 저주받은 사람

이 되잖아요. 오히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거든요.

 

우리 마리아의 노래에 잘 나오죠.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을 따라가려면 그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그 사람하고 같이 연대를 해야지, 돈 버는 사람은 성공

한 사람에게, 나 돈 버는 사람에게 붙어야 되겠다. 이런 식으로 처신하는 게 그리스도인이

아니데 오히려 좀 잘못된 상식이 들어왔죠. 돈은 절대적인 게 아니예요. 하느님은 돈이

아니죠. 훨씬 크신 분이예요.

 

만약에 우리가 하느님 믿어 돈을 번다면, 500원 넣으면 어디서 500원 만큼 내가 어디서

돌려 받고, 1000원 넣으면 1000원 만큼 내가 어디서 돌려 받고, 그럼 2000원 넣어서

500원 거슬러 받고, 그렇게 돈이  들어가고 나가고 하는 게 아니죠. 하느님 하고 관계를

그렇게 세속적 성공하고 너무 탁 달라붙어서 생각하시면 안 될 거 같고,

 

그게 예수님의 삶이나 우리 한국 초대 순교자들의 삶에서 잘 나와요. 그들의 삶은 돈을

많이 번다든지, 장수한다든지 이런 거 하고는 관련이 없었어요. 길가메쉬 서사시도 그런

거를 알아요. 길가메쉬는 그 영생의 진리는 얻자마자 자기 고향 땅 노인들한테 다 먹일

생각을 했어요.

 

자,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우리가 생각을 해 봐야 하는 게 영생이 뭔가 하는 거예요.

영생이. 영생은 영원히 사는 거죠. 우리 죽음을 넘어서 영원히 살고 싶은 거예요. 영원히

사는데 여러분들이 만약에 영원히 산다고 그래서 병원에서 식물인간이 돼 가지고 영원히

산다. 그런 거 우리가 원하지 않지요.

 

영원히 사는 건 내가 팔팔히 돌아다나고, 맛을 보고, 그 다음에 내가 할말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또 예쁜 것을 보고, 또 사랑도 하고, 또  봉사도 하고 이렇게 사는 게 영원히 사

는 거죠. 그래서 영생의 본질은 그냥 영생이 아니라 영원한 젊음이예요. 하나도 힘도 없이

영원히 살래? 그러면 아무도 그걸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영생의 본질은 영원한 젊음이예

요. 길가메쉬 서사시는 그거를 알아요.

 

그래서 그 가시나무의 이름이 뭐냐 하면 '늙은이가 젊은이가 되다'예요. 우트나피쉬팀도

그걸 알아요. 그걸 먹으면 니가 다시 젊은이가 된다는 거예요. 영생의 본질은 그것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몸도 주체할 수 없는 나이에서 그렇게 그냥 수명만 계속 연장

하는 게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닌 거죠.

 

김수환 추기경님의 죽음이나 아니면 훌륭하신 분들이 돌아가시는 걸 보면 우리가 잘 알

수 있죠. 그런데 이제 길가메쉬 서사시는 이런 면에서 여러모로 이 텍스트를 보고 성찰해

보면 아, 깊은 의미가  담긴 텍스트다라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정말 정말 마지막 페이지에는 완전한 반전이 일어나요. 길가메쉬가 이제 드디어

다 이루었어요. 인생에서 정말 어렸을 때부터 돌아보면 다 이루었어요. 그래서 이제 그

샘물가에 가서 자기가 피곤한 몸을 뉘이고 샘물가에서 목욕을 하러 누워서 잠깐 잠들었

어요. 그런데 그때 뱀이 나타나서 그 식물을 가져가 버렸어요. 없어요.분명이 얻었는데

잠깐 쉬는 사이에 뱀이 나타나서 물고 가져가 버렸어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수포로 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요.

 

* 소원을 이룬 '길가메쉬'가 샘물가에서 잠시 잠든 사이 뱀이 나타나 영생의 비밀인

  '가시나무'를 가져가 버리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가 버린다

 

저는 그런데 이 마지막 장면이 더 마음에 남았어요. 왜냐 하면 이게 아, 마치 신적 진리를

잘 이야기 해 주는 거 같애요. '늙은이가 젊은이가 되다'라는 가시나무가 그 영생의 식물,

우리를 영원히 젊게 만들어 줄 식물이 없어졌으니까 그가 헛수고를 한 건가? 지금까지.

 

그런데 길가메쉬는 그 가시덤불을 움켜 쥔 체험이 그의 몸에 남아 있어요. 그 순간의 체험

이 그의 몸과 마음과 머리 속에 남아 있어요. 어쩌면 우리가 깨달음이란 이런 것일지도

몰라요. 아픔처럼 남아 있는 것. 불교에서도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하잖아요. 문득 깨달

았는데 그 깨달음이 계속 가는 건가?

 

길가메쉬 서사시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제가 이 책에도 자세히 썼지만 이 이야기는 마치

동양 문화권에서 자란 저한테 아, 이거 정말 불교 못지 않은 큰 깨달음을 주는 텍스트일지

도 모른다. 가시에 찔린 아픔은 어쩌면 깨달음에 대한 비유예요.

 

우리는 저도 보통 사람이라 큰 깨달음에 대한 이런 건 아직 못 얻었지만 여러분도 마찬가

일 거예요. 성경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우리가 작게 뭔가 알아들을 거 같은 때가 있어요.

아, 하느님이 이런 거구나. 우리가 우리 머리 속에서 아주 조금이나마 알아들을 때가 있어

요. 예수님 말씀 듣고 보면 아, 정말 이게 내가 어렸을 때 읽은 거랑 달리 지금 읽어보니까

조금 깊은 뜻이 있구나. 그걸 알 때가 있죠.

 

그런데 그런 깨달음도 조금 있으면 다 잊어먹어요. 그때는 분명히 내가 엄청 깨달아서 기

도도 하고, 나누기도 하고, 일기장에도 적어 놓고 대단했었는데 며칠 지나면 그냥 일상 속

에서 없어지는 거 같애요. 마치 아픔처럼 상처가 났어요. 그 가시나무를 꽉 움켜쥐고 나한

테 피가 나고, 상처가 나고. 그런데 이 딱지가 다 없어지고 내 손이 다 없어지는 것처럼, 마

치 나의 체험도, 깨달음도 작은 거였지만 없어지는 거 아닌가?

 

그거는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어느 순간 내가 깨달을 수가 있거든요.

TV를 보면서 그럴 수도 있고, 영화를 보면서 그럴 수도 있고, 자녀들과 대화 속에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강의를 들으며 여러분이 그러실 수도 있어요.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이

가시가 좋은 깨달음이로구나라고 깨달을 수도 있는데 이것도 나중에 다 잊어먹을 거예요.

 

길가메쉬는 그런 걸 말하는 거 같애요. 그럼 면에서 아, 정말 깨달을 수도 있어요. 정말 인

간이 갖고 있는 깨달음의 본질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거 같애요. 그래서 저는 이거 최초의

수메르 판본은 거의 BC 3천 년 경이고 우리가 갖고 있는 표준 바빌론 판본은 한 8-9세기

정도 되는데 인류 최초의 서사시가 이 정도로 성찰을 축척할 정도였다면은 이 서사시가

나오기 전의 인류는 신석기 시대예요. 얼마나 수준 높은 종교적인 체험을 했던가? 

 

그리고 과연 구약성경은 이것이 나오고 나서 또 1000년, 1500년 후에 나왔기 때문에 얼마

나 수준 높은 책인가? 이것도 다 넘으면서 또 나왔으니까. 구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

근동의 문헌이 구약성경보다 수준이 낮거나, 지금 우리보다 수준이 낮은 문서가 절대 아

니예요. 이런 걸 보면.

 

고대 문헌의 본문이 가리키는 어떤 아득한 무게감이나 종교적인 성찰의 축척함 같은 게

있어요. 여러분들이 그거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고, 성경을 읽으실 때도 그런 걸 느끼시면

좋겠어요. 이 서사시의 마지막을 어떻게 끝나는지 아세요? 이대로 끝나요. 알아들을 사람

은 알아들으라는 거 같애요. 여기서 그냥 끝나요.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다는 거 같애요.

 

앞에는 제가 초간단 요약을 왜 해드렸냐 하면, 굉장히 사설이 길어요. 만나면 또 연애하고

뭐하고 뭐 이런 저런 얘기도 많고, 그런데 마지막에는 정말 정말 재미있어서 가시가 뭔가

라고 할려고 하는데 여기서는 본문이 없이 그냥 끝나요. 그것도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 같애요. 나중에 여러분이 길가메쉬 서사시를 보시면 한번 제가 지금 말씀드린 거와 같이

한번 보시기 바라고요.

 

다시 한번 구약성경은 이런 문헌적인, 문화적인 배경을 안고 태어났어요. 구약성경이 등장

하기 이전에 이미 인류는 상당히 수준 높은 종교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고 어찌보면 현대인

들 보다도 더 높은 수준일 수도 있어요. 현대인들은 물질문명은 발달했지만 정신문명은

오히려 퇴보했을 수도 있어요.

 

* 구약성경은 '길가메쉬 서사시' 같은 셀 수 없이 많은 고대 근동의 체험의 축척,

  문화적 배경을 안고 있는 책이다

 

고대 근동인의 삶과 성찰은 구약성경이 탄생하고 자랄 수 있게 된 마치 거름 같은 거예요.

배경이 되는, 베이스가 되는 거죠. 이런 면에서 구약성경은 제가 계속 강조하지만 배타성

의 책이 아니예요. 다른 종교의 문화적인 것을 충분이 그 바탕 위에서 이스라엘이 가진

아주 독특한 믿음, 그 야훼 하느님을 향한 유일신 믿음을 표현하가 위해서 굉장히 수준

높은 문학적으로 표현한 문헌이라는 거죠.

 

* 구약성경은 고대 근동의 다른 종교들의 삶의 성찰과 문화적 토대의 바탕 위에 이스라엘

  이 가진 독특한 믿음을 표현한 수준 높은 문학적 표현으로 배타성의 책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구약성경은 어떤 교류, 다른 문화와의 충분힌 대화를 전제한 책이지 그게 남

들과 전혀 대화 안 하고 꽉 가로막힌 상태에서 오직 우리, 우리 주님 이렇게 나온 책이 아

니라는 점을 여러분이 잘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가시가 얼마나 중요한 상징이었는지 여러분 아실 거예

요.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 가시덤불에서도 가시가 있었고, 그 다음에 길가메쉬 서사시'

에서도 결국은 이야기 끝에서 그 가시나무가 나왔어요. 이제 다시 구약성경으로 갈 거예요.

구약성경으로 가기 전에 앞에 있는 화면을 잠시 봐 주세요.

 

 

 

앞에 화면을 보면 아까 제가 길가메쉬 서사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서 '카마에데티'라

고 말씀드렸죠? 아카드어로. 가시나무에 해당하는 말이 '엣데투'예요. 원형이 그런데 히

브리어로 가시나무가 뭐냐 하면은 '아타드'예요. 비슷하죠? '아타드'는 지난 시간에 우리

가 가시나무에 대해서 세 가지 말로 했는데 그 중에 하나였어요. 거기 해당하는 아카드어

죠. 셈어는 거의 뿌리가 같기 때문에 이렇게 언어가 비슷한 게 많이 있어요.

 

자,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아다트'가 언제 나오는가를 제가 몇 가지 말씀드릴 거예요.

시편 58,10을 여러분한테 말씀드릴 거예요. 거기 뭐라고 나오냐 하면은 교재 183쪽에,

 

* 시편 58,10: 아타드(가시나무)가 너희 솥을 뜨겁게 하기도 전에 주님께서는

  날로든 태워서든 그 안의 것을 없애 버리시리라

 

가시나무, 아타드가 너희 솥을 태우기 전에, 가시나무가 솥을 태운다. 가시나무에 불꽃이

일어서 뭔가 태운다. 그래서 이 말은 탈출기 3장을 이야기 하는 거 같애요. ?참고로 지금

말씀드린 시편 58편 시편은 제가 직역을 했어요. 우리나라 말에서는 잘 안 드러나서.

 

여기서 이 아타드, 가시나무가 주님의 별칭이라고 주장하는 De Moore 같은 학자들도 있

어요. 하느님의 별칭이 여러 가지가 있지요? 우리 주님이라는 말도 있고 여러 가지 말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로 하느님을 가시나무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가시덤불에서 원래 나

오셨던 분이니까, 가시가 큰 상징이었으니까.

 

또 하나는 여러분한데 말씀드릴 거는 이번 시간의 중심적인 내용인데요. 요탐의 우화예요.

판관기 9장에 나오는 요탐의 우화. 판관기 9장의 요탐의 우화 여러분이 아실 거예요. 참된

임금은 어찌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시는 구절이죠. 마치 우리나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런 것처럼 참된 임금은 이래야 된다를 우화를 만들어서 그 우화를 사람들한테 들려

주어서 깨닫게 만드는 그런 것이죠.

 

자, 나무들이 있었어요. 나무들이 있었는데 우리가 임금을 정해야 되겠다. 그러니까 그

나무 중에 나무들이 처음으로 간 게 올리브 나무예요. 올리브 나무한테 가서 야, 우리들

의 임금이 되어 달라. 그러니까 그 올리브 나무가 거절을 했어요. 그런데 거절 할 때 뭐라

고 얘기하며 거절을 했냐 하면 이유가 두 가지예요. 하나는 나는 올리브를 내야 한다.

두 번째로는 다른 나무들 위에 가가 지고 내가 흔들거릴 수가 없다. 꺼떡 댈 수가 없다라

는 거예요. 이렇게 말씀을 하지요.

 

* 판관 9,8-9: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임금을 세우려고 나무들이 길을 나섰다네.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고 올리브 나무에게 말하였네. 올리브 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난 말인가? ㅡ '요탐의 우화' 中에서 ㅡ

 

두 가지예요. 나는 올리브를 내야 된다는 거 하고, 하나는 다른 나무들 위에서 흔들거릴

수가 없다. 그러자 나무들은 무화가나무한테 갔어요. 그러자 나무들은 무화과나무한테

갔어요. 그리고 포도나무한테 갔는데 둘 다 대답이 똑같애요. 뭐라고 얘기했냐 하면,

 

* 판관 9,11-13: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이 달콤한 것 이 맛있는 과일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포도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의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 주는 이 포도를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

  거리란 말인가? ㅡ 요탐의 우화 中에서 ㅡ

 

거절당한 나무들은 가시나무를 찾아가요. 그리고 가시나무, 거기서 나오는 단어가 뭐냐

하면 지금 보셨던 '아타드'예요. 아타드를 찾아가요. 그리고 아타드한테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네가 임금이 되어 달라." 그러니까 아타드는 이렇게 얘기를 해요.

 

* 판관 9,15: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이거를 예전에는 성경해석에서는 어떻게 해석을 했냐 하면, 이 아타드는 가시다. 가시덤불

로 해석을 했어요. 그래서 가시덤불은 다는 나무처럼 열매를 내지도 못하고 또 키도 작은데

그 위에 와 가지고 숨으라고 하니까 이거는 임금 감도 아닌 것이 우쭐대고 끄떡거린다.

그러니까 이 임금이 이러면 안 된다라는 식으로 해석을 했어요.

 

그런데 최근에 성서 식물학(Ziziphus spina ㅡChriti)에서 성서에서 나오는 식물만을 따로

연구하는 학문이 있는데 성서식물학에서 이 나무를 덤불로 보지 않고 10m 이상 자라는

나무로 봐요.

 

 

 

그런데 이 나무의 현대 이름이 재미있어요. christ Thorm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가시나무'

예요. 이 나무로 예수님의 가시관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나무가 바로 이 나무다라고 보

는 거죠. 그래서 학명도 Ziziphus spina ㅡChriti 라고 그래 가지고 학명도 그리스도라는 이

름이 들어가고 일반 나무 이름에도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들어가요.

 

 

 

왜 이 나무에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붙였냐 하면 가시관을 만들었기 때문이죠. 이 나무가

10m 이상 크게 자라는 실제로 대추야자 같이 맛있는 열매가 달리는 나무이고 큰 나무이고

훌륭한 나무라면은 이 우화의 뜻은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 그 훌륭한 나무한테 임금이 되

라고 그랬고, 그 큰 나무는 그늘을 드리워서 내 밑으로 들어오라고 했으니까.

 

이거 뭐 당연한 거 아닌가? 이거를 해석하는 데 고대 근동의 지식이 필요해요. 이집트로

가야 되요. 이집트에 가시나무가 있었어요. 이집트 말로 이 나무를 '나바스'라고 하는데

원리 이집트에 '아문신'이라고 있었어요. 이 신이 나중에 이집트  태양신이 되서 태양신

'레'와 합쳐져서 '아문- 레'라는 태양신이 됐는데 아문-레의 문제는 뭐냐 하면 마루둑하고

비슷하게 지방신이었어요.

 

그런데 이 아문을 믿던 사람들이 권력을 잡아서 최고신이 됐어요. 그래서 이 아문이 갖고

있는 성전, 자신의 성전이 있을 거 아니예요? 신전이 뭐냐 하면 '가시나무의 집'이예요.

나바스의 집. 즉 이 나무는 이집트의 나바스 그러니가 이 아문, 이집트의 최고신을 상징하

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우화는 무엇을 말하는 거냐 하면,

 

이집트의 파라오를 풍자하는 거예요. 가시나무가 파라오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

라엘의 임금은 이집트의 임금 같은 임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뜻이예요. 이집트의 임금

은 비록 크고, 강하고 키가 커서 내 밑으로 와서 들어와라, 내 밑으로 숨어 와라 할 수 있는

그런 훌륭한 임금이지만, 그리고 이스라엘의 임금은 그보다 작은 보잘 것 없어보이는 임금

이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의 임금은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더 훌륭한 임금이다라는 것을 말

하는 것이죠.

 

실제로 최근에 나온 가톨릭계 주석서 Renz/R0llig 신부님이 쓰신 판관기 주석서 굉장히 좋

은데요. 거기서도 이렇게 나와요. 이 우화의 참 뜻은 이스라엘의 참된 임금은 이집트 임금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이집트 임금의 영향력에서 독립해서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의 뜻으로 나라는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라는 뜻으로 나오는 거죠.

그렇게 읽으면은 판관기 전체의 맥락하고도 맞아요. 역시 여기서도 가시나무는 보통 나무

가 아니라 큰 것, 대단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어요.

 

자, 그렇다면 잠시 여기서부터는 구약성경 밖으로 나가보겠어요. 구약성경 밖에서도 그리

스도의 가시나무가 얼마나 큰 나무인지를 보겠어요. 가시나무를 말하는 단어 중에 우리가

저번 시간에 본 게 '스바크'라는 단어가 있는데 스바크라는 단어도 역시 나와요.

 

지금부터 알려드릴 건 제가 사진을 못 구했는데요. 토기 조각 하나를 말씀드리려고 해요.

토기 조각은 옛날에 사람들이 토기 조각에 이름을 썼는데 그 이름을 쓴 토기 조각이 발견

게 있어요. 앞에 보시면 라키스에서 발견된 작은 토기 조각이 있어요. 사진을 못 구해

와서 죄송하고요. 책을 보니까 가로 12.5cm, 세로 8,5cm 그러니까 우리 명함 정도 되는

조그만 토기 조각인데 거기에 이 이름이 나와요.

 

 

 

'스바크야후'라고 읽을 수도 있고요. 이거를 저는 어떻게 읽었냐 하면은 '스바키야후'라고

읽었어요. ?이렇게 써 놔서 잘 모르시겠죠? 모음 없이 자음만 이렇게 써 있는 스바트야후인

데, 이게 뭐냐 하면은 사람 이름으로 지금 보고요. '스바크'는 '가시나무'라는 뜻이고 '야후'

는 야훼신, 우리 하느님이시니까 '하느님은 가시나무다'라는 이름이예요.

 

고대 근동에는 사람 이름에 신의 이름을 넣는 일이 흔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많이 알죠.

'엘', '엘로힘' 하느님으로 끝나는 이스라엘, 라파엘, 가브리엘, 임마누엘도 마찬가지고,

엘자 이름들이 많고, 그 다음에 많은 게 '야'자 이름들이죠. 야훼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이사야, 예레미야, 엘리야 등 '야'로 끝나는 이름이 많아요. 이게 스바크야후가 이름 중에

그런 이름이예요.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를 알 수 있는데 아, 성경 밖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러니까

이제 문제는 그거 먼저 말씀드려야 되는데 스바크야후라는 이름이 나왔잖아요. 그런데

학자들이 야, 이게 인제 우리들이 갖고 있는 고고학적인 토기 조각으로 이스라엘 시대에

나온 조그만 토기 조각이 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누구인가? 그래서 성경 안에서 이 사람

이름을 찾아요.

 

혹시 우리가 히즈키야 임금의 어떤 것을 발견한 건 아닌가? 혹시 우리가 다윗 임금의 어떤

것을 발견한 거는 아닌가 해서. 그런데 문제는 스바크야후라는 이름이 성경에 안 나와요.

성경에 안 나오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의 이름을 우리가 지금 하나 확인 한 거예요.

 

두 번째로 이름에 분명히 '야후'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아, 그때 분명히 이스라엘

에 야훼 신앙이 존재했다는 증거예요. 성경에 안 나오는 데도 야훼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썼으니까 이스라엘이 어떤 환상 속에 있던 고대 나라도 아니었고, 어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 하느님을 믿었던 이 나라가 이 땅에 분명히 있었구나라는 결정적인 증거로서 이게 작

용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게 스바크야후라는 이름이죠. 이 이름이 하느님을 가시나무로 생각했던

어떤 종교심이 그 당시에는 분명히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이 토기 조각의 보존 상태가 좋지 못해서 제가 독일 쪽, 프랑스 쪽, 영국 쪽 이렇게

연구소를 찾아 봤는데 학자들 마다 요 두 번째, 오른쪽에서 두 번째 들자를 다 좀 다르게

읽어요.

 

그런데 제 지도 교수님, 테오도로 자에드리라고 뭰헨 교구 신부님이신데 그 지도 교수님을

독일 말로 '독토파터'(Doktorvater)라고 그래요. '독토'가 이제 박사고, '파터'는 아빠예요.

독일은 도제식이잖아요. 그러니까 한 지도교수님 밑에서 다 배우는 거기 때문에 지도교수

그러면 '독토파터'예요. 그런데 우리 지도 교수님의 지도 교수님도 있을 거 아니예요?

그러면 '독토그로스파터'예요. 그로스파터는 이제 할아버지죠.

 

그러니까 이제 우리 지도 교수님과 함께 같은 교수님 밑에서 박사 하신 분들이 있잖아요.

그러면은 우리가, 독일 사람들이 농담으로 '독토옹케이'라고 그래요. 박사 삼촌이라고.

이렇게 가족처럼 이렇게 얘기하는데 제 독토그로스파터 이분도 역시 뭰헨 교구 신부님이

셨는데 볼프강리스터라는 분이 여기에 대해서 논문을 썼는데,

 

제가 인제 솔직히 고백하면 그 논문보다 그 다음에 나온 논문을 지금 인용을 한 거예요.

그분은 다르게 해석을 했어요. 독토그로스파터를 제가 어겨서 좀 죄송하기는 한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좀 이게 맞는 거 같애서 여러분들한테 이렇게 설명을 했고, 이거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했는데 저는 이제 '스바키야후', '나의 가시나무는 야훼 하느님이시다'라고

읽었고 여러분들한테 그렇게 설명을 해 드렸어요. 조금 복잡한 얘기였지만 하여튼 그런

식으로 논쟁을 하는 게 있다라는 걸 알아 두시면 좋겠고요.

 

자, 그러면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또 한 구절을 잠시 구약성경으로 들어와서 읽겠어요.

구약성경에서도, 구약성경 밖에서도 하느님을 가시나무로 표현한 구절이 여기 있다면,

구약 성경 안에서 하나 찾을 수가 있어요. 그게 어디 있냐 하면, 신명기 33,16절에 있어요.

 

* 신명 33,16: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에에 나는 값진 선물과 가시덤불(= 떨기나무, 덤불)

  에 사는 분의 은총으로 복을 받아라. 이 모든 복이 요셉의 머리 위에, 형제들 가운데에서

  뽑힌 그의 정수리 위에 내리리라(신명 33,16).

 

하느님이 어떤 분이냐 하면은 가시덤불에 사시는 분이예요. 지금 잠깐 이제 조금 깊게 들

어 가겠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하느님을 표현하는데 가시덤불을 쓰는 걸 이제 여러분들이

익숙하게 생각하실 수 있을 거예요.

 

최고신, 가장 중요한 영생을 얻는 것, 가장 중요한 인간의 어떤 신적 체험, 하느님을 직접

만나는 것,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모든 길가메쉬 서사시가 다 추구했던 인간이 어렸을

때는 힘을 추구하고, 돈을 추구하고, 명예를 추구하고, 어떤 권력을 추구하지만 그런 거

친구를 잃고 난 다음에 가장 인간이 정말 맨 마지막에 추구하는 바로 그것이 바로 가시나무

였어요. 모두가 다 가시예요. 최고의 핵심적인 상징은 가시라는 것이죠.

 

* 구약성경과 고대 근동의 문헌에서 최고신,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중요한 신적 체험 등

  최고의 핵심은 '가시'로 나타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구약성경에서 떨기라는 말이 나오거나 덤불이라는 말이 나오거나 할 때

제 책을 참고하시면서 아,이게 가시가 있구나라는 걸 염두에 두시는 게 교양을 넓히고 성경

을 조금 더 깊게 이해하시는 방법이 될 거예요.

 

그리고 이것이 우리나라 말로 옮기려면 할 수가 없어요. 다른 우리나라 말에는 이런 게 안

드러나니까. 다른 언어로 다 식물의 이름을 옮겨야 되는데 그렇다면 이게 막 흩어지겠죠.

가시 상징이. 그래서 고대의 식물학과 현대의 식물학이 다르다는 것도 아셔야 되고요.

 

다시 한번 앞을 봐 주세요. 구약성경 안에서 하느님을 가시로 상징했다는 가장 중요한 걸

말씀드렸고, 다시 구약성경 밖으로 나가면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

가 우가릿이었죠. 이 우가릿에서 나온 토판이 이런 토판이 있어요.

 

 

 

 

토판 위를 보시면 위는 이제 잘 마무리가 됐는데 아래하고 옆은 다 깨져 가지고 양쪽 옆은

잘 알 수가 없지요. 이런 토판이 나오면 학자들이 참 답답해 해요. 이걸 어떻게 읽어야 될

까? 그래서 할 수 없어요. 읽을 수 있는 글자만 읽는데 여기에 왼쪽 칼럼에 여덟 번째 줄이

죠. 어떤 말이 들어가냐 하면 일루- 데라고 들어가 있죠.

 

요 가시가 가시나무 신이라고 '신 가시의'라고 나와 있어요. 잘 모르시겠죠? 제가 그렇다

그러니까 그렇다고 보시는 거죠. 이 토판의 보존 상태는 그렇게 좋지 못해서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어요. 원래 얼만  했는지, 얼마나 떨어져 나갔는지 알 수 없고 그냥 학문적

으로 KTU1.20이라는 학문적인 이름만 남아 있는 신이예요.

 

그런데 여기에 가시나무의 신이라고 신하고 요렇게 가운데 요거 찍은 거는 단어를, 지금

말하면 빈칸이예요. 단어와 단어를 이어주는 것이죠. 여기는 사실 들어가야 되는데 안 들

어간 거예요. 가시나무의 신이라는. 아, 가시나무의 신이라는 신이 우가릿에 있었구나.

고것만 알고 나머지는 몰라요. 이게 쭉 이야기가 훓어지면 그 ?신이 어떻게 하고, 이게 왜

그 신을 어떻게 불렀고 다 알 수 있는데 그게 안 나오고, 신들의 이름이 쪽 나오는데 그것

만 알 수 있어요.

 

우가릿어가 그래서 구약성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데 우가릿어 사전과 문법이 우리

나라 말로 사실 나와 있는데 이상하게 한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우는데 공포감

이 있는 거 같애요. 그래서 어려워 하는 거 같은데 제가 여기서 잠깐 말씀드리면 이 말은

이제 죽은 말이예요. 더 이상 사람들이 말을 해 내지 않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어요.

자기 편한대로 발음하면 되고 단어도 얼마 없고 그래서 공부하기 쉬워요.

 

그러니까 히브리어를 조금 하시는 분들은 욕심을 가지고 우가릿어나 이런 걸 공부해 보

시면 좋겠어요. 지난 시간에 제가 성경과 관련된 훌륭한 고대 문서가 굉장히 많은데 그

거를 우리가 다 번역을 못하고 있고, 한국 교회에서도 그런 걸 관심을 가져야 된다고 말

씀을 드렸는데 이런 문서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문헌도 다 번역을 해야 되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신자들, 우리나라는 원래 선비의 전통이 있거든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전통이 있었고 더군다나 천주교를 처음에 도입한 분들은 공부를 되게 잘 하

는 전통이 있었고 더군다나 천주교를 처음에 도입한 분들은 공부를 되게 잘 하는 분들이

었어요. 책으로 갖고 오신 분들이었거든요.

 

그런데 왜 이렇게 신학적인 공부가 잘 관심이 없을까? 이제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걸 지적하는데 실제로 신학을 본격적으로 한지가 몇 년이 안 되요. 왜냐하면 우리는

처음 초반 백 년 간은 박해 당하느라고 신학교는 커녕 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정도

였으니까. 그러고 나서 일제시대 거쳤죠, 또 한국 전쟁 거쳤죠. 한국 전쟁 직후 그때부터

시작한 거라고 보면 되는데 초창기는 굉장히 어려웠잖아요.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한 게 한 50년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예요. 250년 남짓 한 역사에서

실제로 한 건 그러니까 사실은 신학의 역사는 좀 짧구나 할 수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이

선교 3백 년대 들어가고 신자수가 이렇게 늘어나면 공부에 대해서 조금 관심을 더 가질

필요는 있을 거 같고, 많은 평신도, 저같이 . 많이 참여하시면 우리 교회도 큰 힘이 될 거

같애요. 마지막으로 그러면 이번 시간에는 그리스도로 가겠습니다.

 

  

 

히브리 말로 우리가 가시나무를 '스네'라고 한다고 배웠죠? 이거를 칠십인역이 그리스

말로 번역을 할 때 어떻게 번역을 했냐 하면 '바토스'로 번역을 했어요. 이제부터 여러분

좀 아시겠죠? 바토스 그러면 인제 그리스 말로 가시나무예요.

 

모세가 탈출기에서 가시덤불에서 하느님을 뵙는 장면이 있지요? 그게 몇장, 몇절인지

여러분 아세요? 예, 3장 2절 아시는데, 이런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성경을 외우실 때

몇장, 몇절 이런 걸 잘 아시는 분들이 있어요. 주로 천주교 보다는 개신교가 훨씬 많고요.

천주교 신자들은 잘 몰라요. 제가 보니까 신부님도 잘 몰라요. 그리고 저는 명칭이 성서

학 박사고 그런데도 저도 몰라요. 왜냐하면 그렇게 공부를 안 해 봐서 그러는데,

 

신약성경에 보면요. 마르코 복음 12장 26절을 보잖아요. 그러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이거 되게 재미있는데,

 

* 마르 12,26: 모세의 책에 있는 '바토스(가시덤불)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루카 20,37 참조)

 

가시덤불 대목, 모세의 책에 있는. 모세 오경이죠? 바토스 대목, 가시덤불 대목 그러면

뻔하죠. 가시덤불에서 나오는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는 대목이죠. 거기서 하느님이 모세

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너희는 알지 않느냐? 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 신약 시대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몇장, 몇절을 말씀하시지 않아도 괜찮을 거

같애요. 오히려 그냥 몇장, 몇절 그러면 더 잘 할 수도 있지만 헷갈릴 수도 있거든요.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는 게 어떨까 해요.

 

아브라함이 75세에 고향을 떠날 때 그 이야기. 그럼 창세기 12장이 됐던, 13장이 됐던

그것보다는 그 이야기가 눈에 다 들어오죠. 예를 들어서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릴 대

그 대목. 이런 식으로 말한다든가, 이스라엘이 기근이 들어 가지고 야곱의 자손들이 이

집트로 이주했을 때 그 이야기, 아니면 삼손이 데릴라의 꼬임에 넘어 가가 지고 머리카

락을 잘릴 때 이야기. 이렇게 얘기하면 다 서로 알아듣기 쉽죠.

 

그러니까 이제 몇장, 몇절들을 외우지 않으셔도 될 거 같애요. 오히려 신약시대에 했던

것처럼 '바토스 대목', '가시나무 대목' 이렇게만 해도 우리가 어딘지 알 수 있으니까,

그것만 해도 충분할 거 같애요.

 

그런데 이제 지금 아브라함이 뭐 나올 때 이야기, 뭐 삼손이 이럴 때 이야기. 이런 애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 얘기 해도 우리가 아, 대충 그때 어떻게 이야기가 됐

었지 하는 걸 다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마르코 복음서의 이 대목은 '바토스 대목'이라고만 했어요. 그냥. 바토스

오는 거, 가시나무 나올 때. 모두가 가시나무 그러니까 모세 오경에 있는 가시나무 대목

그러면 아, 그때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이 나오실 때 이 이야기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다는 거죠. 그만큼 유명한 이야기였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였어요.

 

'바토스'라는 그리스 말을 성경에서 찾아보면은 '부쉬' 관목이라고 안 나와요. 굉장히

두꺼운 사전이 있거든요. 천 페이지가 넘는 거. 거기에 보면은 '가시덤불'이라고 나와요.

바토스 역시 가시덤불이었던 거예요.

 

성경에서 가시덤불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절정에 달할 때가 예수님의 가시관이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로마 병사가 예수님한테 가시관을 씌우고 뭐라고

조롱을 했냐 하면 '유다인의 임금님'이러면서 모욕을 주었어요.

 

수난사화 가운데에서 매 장면이 몰론 십자가에서 다 중요하지만 이 장면은 우리가 굉장

히 인상 깊게 남은 장면이예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이 세상에 우리 죄를 구하러 오신

분이 황금관을 쓰셔도 모자라는 분이 황금관을 쓰시지 않고 가시관을 쓰셨어요.

 

그리고 가시관 안에 예수님의 머리가 들어 있었어요. 마치 탈출기 3장에서 불타는 떨기

안에서 불이 나와서 거기서 하느님이, 그 안에서 천사가 말하였다 하는 것고 굉장히 비

슷하게 그 가시관 안에 예수님이 들어가 계셨어요.

 

최초로 하느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모습과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매달리

시기 직전에 그 십자가에 올라가실 때 가시관을 쓰시고 올라가셨잖아요. 그 모습이 어

쩌면 그렇게 가시라는 상징을 통해서 하나처럼 나오는 것이죠.

 

 

 

여러분이 지금 가시를, 그 고통의 가시를 꽉 움켜 쥐었을 때 쓰라리고 아픈, 따끔따끔한

그 가시가 바로 이 하느님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구나라는 것을 우리만 안 게 아니라

히브리서 저자도 알았어요. 히브리서 2장 9절에 보면,

 

* 히브 2,9: 그러나 우리는 "천사드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 가시관은 영광과 존귀으 관이었어요. 이 가시관이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알

수 있는 것이죠. 인간은 이런 걸 보면 한 시대를 살다 가요. 자기 시대 안에서 보는 것만

보는데 성경을 통해서 과거 일을 다 알 수 있는 거죠. 최초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실 때의

그 가시덤불 그리고 구약성경 안에서 요탐의 우화에서 중간 중간에 나오는 '가시'라는

상징.

 

런데 이스라엘 뿐이 아니라 주변 나라에서도 가시의 신도 있고, 막 여러 가지 가시 상

징도 나오고, 더군다나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는 길가메쉬 서사시에는 가시가 굉장히 중

요한 상징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역사를 쭉 통해 가지고 가시가 이렇게 중요한 상징일

수 있을까? 성경을 이해하는 코드 중에 하나일 수도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상식, 배경 지식이 될 수 있다. 신자들이 이걸  꼭 알면 좋겠다 하는 데서 이번

강의를 준비했습니다.

 

*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부터 구약성경,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관통해 나가는

  '가시'는 성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신.구약의 중요한 상징을 보았는데 다음시간부터는 예수님의 가시관을

조금 더 들여다 보고, 교부 중에 아주 훌륭한 성찰을 하셨는데 뭐냐 하면, 가시에 나오신

그분, 모세한테서 말씀하셨던 그분이 바로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올라가셨다.

그래서 가시를 통해 삼위일체을 이야기합니다. 최초로.

 

그 대목은 일주일만 참으시면 다음 시간에 제가 말씀드릴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강의 잘 들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 다음 시간 강의 예고: 제25강 가시 상징과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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