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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삼용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랑이 되어라!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24 조회수1,265 추천수10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부활 제6주일


<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 >


복음: 요한 14,15-21







 성령강림


Restout, Jean 작, (1732), 캔버스유화, 465 x 778 cm, 파리 루브르 미술관


         한 남자가 네팔의 눈 덮인 산을 걷고 있었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에 눈보라까지 심하게 몰아쳐 눈을 뜨기조차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리 걸어도 인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멀리서 여행자 한 사람이 다가왔고 둘은 자연스럽게 동행이 되었습니다. 동행이 생겨 든든하긴 했지만 말 한 마디 하는 에너지라도 아끼려고 묵묵히 걸어가는데 눈길에 웬 노인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대로 두면 묻히고 추위에 얼어 죽을 게 분명했습니다. 그는 동행자에게 제안했습니다.

이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 이봐요, 조금만 도와줘요.”

하지만 동행자는 이런 악천후엔 내 몸 추스르기도 힘겹다며 화를 내고는 혼자서 가 버렸습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노인을 업고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몸은 땀범벅이 되었고 더운 기운에 노인의 얼었던 몸까지 녹아 차츰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난로 삼아 춥지 않게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얼마쯤 가자,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의 입에서는 안도의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으아, 살았다. 다 왔습니다 할아버지.”

그런데 두 사람이 도착한 마을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일까?’

그는 인파를 헤치고 들여다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에워싼 눈길 모퉁이엔 한 남자가 꽁꽁 언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시신을 자세히 들여다 본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마을을 코앞에 두고 눈밭에 쓰러져 죽어간 남자는 바로 자기 혼자 살겠다고 앞서가던 그 동행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쩌면 상대에게 따듯함을 주기 위해 자신이 따듯해지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무언가를 해 주어서가 아니라 상대에게 따듯함을 주려다가 자신이 뜨거워져 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태양은 스스로 자신을 태우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 자신이 뜨겁기 때문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사랑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따듯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아기 원숭이를 관찰하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수건을 깔아 주었는데 그 수건을 절대 안 놓으려고 집착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에 영감을 받아 색다른 실험을 했습니다.

젖병을 꽂아놓은 철사로 만든 가짜 엄마와 젖은 안 나오지만 천으로 감아놓은 포근한 엄마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원숭이는 어떤 엄마를 더 좋아했을까요? 새끼 원숭이는 젖을 주는 엄마에게 젖을 빨 때만 붙어있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 동안에는 천을 감아놓은 엄마에게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것이 나타났을 때도 젖을 주는 엄마가 아닌 천을 감은 엄마 품으로 안기고 숨었습니다. 결국 새끼 원숭이가 바라는 사랑은 먹을 것을 주는 엄마가 아닌 포근한 엄마의 품이었던 것입니다.

 

시골을 한 어머니가 맏아들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를 위해 온갖 좋은 것을 다 해 주었습니다. 결혼을 해서도 아들 집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빼앗아 간 며느리까지 사랑할 수는 없었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등살을 이기지 못하고 세 번씩이나 친정으로 짐 싸서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에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맏이는 이런 어머니를 다시는 안 보겠다고 서울로 가버렸습니다. 이 때 어머니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평생 너를 위해서만 살았는데, 네가 이럴 수 있니?”

그러나 결국 어머니가 평생 한 것은 사랑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듯함은 없고 그저 젖만 주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듯 행위를 하기 이전에 따듯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 먼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하는 것들은 다른 사람도 다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겐 식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엄마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곧바로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보호자이신 성령님과 연관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님의 9가지 열매 중 첫 번째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시면 나에게 저절로 맺혀지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따듯함입니다. 그러나 열이 가해지지 않고 스스로 따듯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음식을 안 먹으면 배고파지고 몸이 차가와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먼저 에너지가 들어와야 따듯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마치 연탄에 불을 붙이듯, 성령께서 내 안에 오시면 나를 태워서 내가 뜨거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태양이 아무 것도 안 해도 우리에게 생명의 빛과 열을 주듯이, 사랑하는 사람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 안에 따듯함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옆에 있는 것만 해도 커다란 위안과 휴식을 얻게 됩니다. 사랑으로 뜨거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 불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들의 몸이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끄러움이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무 뒤에 숨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하느님 앞에 정의롭게 설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노력의 힘이 아닌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계단을 쌓았던 것이 바벨탑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겠다는 인간의 교만과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 안에서 사랑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자동차 안에서 기름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은 바벨탑처럼 우리가 쌓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사다리처럼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받아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내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연탄에 불을 붙이면 스스로 타서 소진되듯이 그렇게 내 자신이 소진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소진되는 따듯함이 다른 이를 구원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당신 집에서 쫓아내면서도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시기 위해 가죽옷을 해 입히십니다. 가죽옷은 어떤 동물의 죽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들의 부끄러움이 가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을 직접 대면할 수 없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은 당신 자신을 성령의 불로 태워 우리를 따듯하게 덮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즉 당신 안에 성령의 불로 당신을 소진시켜 당신을 받아들이는 누구나 그 따듯함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사랑이 이것입니다. 성령의 불로 나를 소진시켜 따스함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소진되면 이웃이 그 따스함을 입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신부님이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을 되돌아볼 때 매우 어두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하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함께 자야만 했던 그런 가난의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어머니가 문 밖으로 나가서 연탄을 갈기 위해 시뻘겋게 달아오른 연탄을 들고 계셨고 그 붉은 빛이 온 방으로 퍼져서 어둡지만은 않았던 그 순간만이 자주 떠오른다고 추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안의 불, 그 따사로운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그것 자체로 어둠을 밝히는 빛이요 사랑입니다. 그 따사로움은 저절로 온 세상을 밝히고 많은 이들에게 힘을 주고 위안을 줍니다. 사랑, 그것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불이 내 안에서 나를 태울 때, 그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성령을 통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불로 불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바로 성령의 불을 받으라는 계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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