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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성모성당 신부님
작성자김세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25 조회수1,376 추천수7 반대(0) 신고




부활 제6주일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
+ 요한 14,15-21<또는 17,1-11ㄴ>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그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이며 십자가에 목숨을 내놓기까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 시간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일까요? 쌍방 통행일까요? 예, 좋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베풀고 또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식에게, 배우자에게 이웃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는데 남는 것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주고받는 것, 곧 쌍방통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하면 상대방이 알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채워줄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수고와 땀의 보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일방통행’이지만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죄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으시고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사랑입니다. 오히려 죄가 클수록 은총도 넘치는 사랑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하시며 죄인이 잃었던 권위를 회복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우리도 베푸는 사랑에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청하여 영원히 함께하실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안다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야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을 바라고 그분 계명을 지킴으로써 삶 안에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해 드려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정서적 사랑이 아니라 아낌없이 내어주는 행위로 이루어지는 실질적 사랑입니다. 말로 충분한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그 사람에게 좋은 것을 사랑하고,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을 행하고자 하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청하여 아버지께서 보내주시는 보호자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하나가 되고자 합니다.

 

보호자는 누구이십니까? 진리의 영이십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을 갈망해야 합니다. 진리의 영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삶을 체험하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살 때 영을 알아보게 되고, 육적으로 사는 사람은 영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고, 보호자를 만나고자 한다면 우리의 육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천상을 갈망하는 삶으로 바꿔야 합니다. 아니 천상을 여기서부터 살아야 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말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 우리는 새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서 있다는 믿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도 많은 상처를 주고 또 받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사랑의 결과입니다. 사랑을 하면서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내가 이만큼 베풀었으니 너는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느냐는 보상심리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방식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써 상대방을 소유하고 지배하며 마음속에 묶어두면 사랑을 빌미로 상처를 더해갑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상대의 고유성을 인정해 주고 그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보상은 사랑입니다. 사랑함으로써 주어지는 기쁨과 평화, 보람이 이미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입니다.

 


저의 집안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큰형님께는 장남이 아들, 둘째가 딸입니다. 형과 형수님께서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아들이 장가들 때가 되니 며느리감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들에게 애인이 생기니까 마음이 흔들리셨습니다. 형님은 그저 좋으셨습니다. 이래라 저래라 하질 않으십니다. 곧 며느리가 생긴다는 것만 생각해요. 그런데 형수님은 ‘저 놈이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하면서 서운함을 자주 표현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데,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짜증을 내셨습니다. 마침내 결혼을 하였지만 아들을 통해 며느리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며느리에게 아들을 빼앗겼다는 생각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다가 딸을 출산하였는데 둘 다 직장을 나가기 때문에 아이를 형님과 형수님이 맡게 되었습니다. 그 손녀가 누구를 따를까요? 할머니에게 안가고 꼭 할아버지께 가는 거예요. 늘 형님 등에서 잠이 들어요. 이것을 어머니가 보시면 사뭇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더라고요. 도대체 ‘에미는 뭐하고 네가 그리 업고 다니느냐’고….

 


그 다음에 딸을 결혼 시켜야 되는데 딸을 놓지 못해요. 떨어져 있지만 매일 전화하고 사사건건 ….형수님께서는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지만 자녀에게는 사사건건 잔소리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움켜쥐지 않으면 빼앗길 것이 없어요.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소유하고 있으니까 이제 딸을 빼앗겨야 할 때가 다가옵니다. 사위하나 얻는다고 생각하면 좋은데 빼앗기고서는 가슴앓이를 하게 됩니다. 때가 되면 떠나보내야 하고 떠난 놈은 부모에게 기대지 말고 스스로 서야 하는데 그것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나 봅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장가간 아들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며느리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딸은‘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불행한 여자시리즈도 있는데 불행한 여자는‘며느리를 딸로 착각하는 여자’, ‘사위를 아들로 착각하는 여자’, 그중에 상태가 아주 심한 것은 ‘며느리 남편을 아직도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는 여자’랍니다.

 


어찌 되었든 서로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고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제자들이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실현됩니다. 그것은 동시에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푸신 무조건 사랑에 대한 응답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은 우리의 밥이 되어주신 사랑입니다. 모두를 내 놓는 사랑입니다. 목숨까지도.

 

우리 옛말에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설사 자식에게 업신여김을 받아도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랑이란 내리 사랑이므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능가한다.’는 의미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는 많아도 아랫사람이 윗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윗사람이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이 전수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지 내방식의 사랑을 고집하여 상처를 키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 3장 1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14,21)라고 하셨습니다. 인격적인 사랑은 인격의 지성, 정서, 의지에 일치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대한 인격적 사랑은 그분의 비전과 열정에 동화될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실천하는 것입니다.‘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쁨, 예수님의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하는 가운데 평화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의 정신과 가르침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내적 진실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요구를 헤아리고 그 것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도 하나 해내지 못하느냐? 이해하지 못하느냐?”하며 불평불만하지 말고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음을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우리 인생이 기계라면, 미움은 모래이고, 사랑은 기름입니다.”기계에는 반드시 윤활유가 필요합니다. 우리 삶에는 사랑이 필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주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주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듯 우리가 서로에게 다짐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사랑을 증거 합니다. 약속 이행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느님과의 약속 배우자간의 약속, 부모와의 약속 자녀와의 약속 그리고 이웃과의 약속에 충실한 만큼 사랑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첫 마음에로 돌아가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과 이웃의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14,18)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영을 약속해 주셨고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을 무시하고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결코 떠나 본 적이 없다.’네가 나를 원망하는 그 순간까지.......

 

“아버지의 품 안에는 아홉 자식이 있을 곳이 있지만 아홉 자식의 어느 집에도 아버지가 있을 곳은 없다.”는 말이 크게다가옵니다. 부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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