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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치기신부님의 말씀산책]기쁨과 희망의 성인, 필립보 네리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26 조회수1,099 추천수14 반대(1)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기쁨과 희망의 성인, 필립보 네리



세월호 대참사를 비롯해 이런 저런 우울한 현실 앞에 다들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로마도 비슷한 분위기였나 봅니다. 당시 교회의 중심 로마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저버리기 시작했습니다. 15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가톨릭교회는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 섰습니다. 절대적 권위는 무너졌습니다. 지도층 인사들은 각자의 몫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교회도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현실에 희망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심각한 경제난에 허덕이던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앉았습니다. 한 마디로 도시 전체가 울적했습니다.


이런 어두웠던 시절 하느님께서 당시 시대에 보내주신 특별한 선물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필립보 네리(1515~1595) 성인이었습니다. 그는 성인, 사제의 분위기보다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풍부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였으며 매력과 다정다감한 인품을 지녔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기 전 늘 웃음꺼리를 제공할 수 있는 농담 몇 개를 준비했습니다.


필립보 네리의 삶은 언제나 기쁨과 활기와 재치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분 주변에는 남녀노소 그분의 추종자들, ‘광팬들이 셀 수도 없이 모여들었습니다. 필립보 네리와 한번이라도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기도모임에 같이 참석했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필립보 네리를 알게 된 그 날은 내 인생 가장 축복받은 날이었습니다.”


그는 교회 역사상 가장 명랑한 성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웃음과 활기를 잃어버린 동시대 사람들의 얼굴에 희미하나마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필립보 네리 신부였습니다. 이 어둡고 우울한 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다른 필립보 네리로 세상 앞에 서야겠습니다. 존재 자체로 위로요 기쁨이며 희망인 그리스도인들, 그래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이 늘 옆에 있고 싶은 그리스도인들...


필립보 네리의 사목활동은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반드시 병행되었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의 집이나 병원, 노숙인 수용소 등을 찾아다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대적인 모금운동도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필립보 네리의 노력은 서서히 결실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환멸을 느끼고 떠나려 했던 사람들도 필립보 네리의 삶을 보며, 아직도 교회 안에 희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교회 쇄신 작업의 최 일선에 서서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했던 것입니다. 필립보 네리는 하느님께서 당시 교회에 보내주신 선물이 틀림없었습니다.


필립보 네리 시대, 영성생활이나 사도직 활동은 주로 성직자 수도자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하게도 필립보 네리는 1551년 부제로 서품되기 전까지 평신도로서는 보기 드물게 기도와 사도직 활동에 헌신하였습니다.


1515년 탄생하셨으며 36세에 부제품, 40세에 사제품을 받으셨으니 꽤나 늦깎이 성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상 사제나 수도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 탁월한 성덕의 길을 개척한 사람들의 삶을 보면, 먼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양성과정을 거치고, 마침내 사도로서의 충만한 사도직에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필립보 네리는 반대였습니다. 평신도 사도로서 열심히 영성생활과 사도직활동을 해나가던 중 사제로서의 부르심을 받은 특별한 케이스인 것입니다. 필립보 네리의 하느님으로부터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은 참으로 다양한 형태로 다가오며, 또 언제 다가올지 모르니 항상 하느님께로 우리의 안테나를 고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은 지속적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피렌체 출신의 필립보 네리는 18세 되던 해 부유한 숙부 로물로의 사업을 돕기 위해 로마 남동쪽 120Km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 위치한 산제르마노란 곳으로 가게 됩니다. 성격이 원만하고 호탕했으며 다재다능했던 필립보 네리였기에 숙부로부터 큰 신임을 얻게 되어 세속적인 앞길이 활짝 꽃피어나는가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필립보 네리는 산제르마노 가까이에 있는 한 수도원을 방문하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적지로 유명한 몬테카시노 수도원인데, 그곳 분도회 수도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수도원은 방문이 가능한데 꼬불꼬불 굴곡진 도로를 타고 한참을 올라 구름 위에 세워져있습니다. 당시 분도회 수도자들의 영적생활에 대한 전념, 세상으로부터의 이탈, 극단적 청빈의 삶이 청년 필립보 네리의 삶 전체를 뒤흔들어놓았습니다.


깊은 영적 체험 이후 필립보 네리는 보다 본격적인 평신도로서의 사목활동을 위해 큰 물-로마로 떠나게 됩니다. 길거리에 나앉은 수많은 환자들, 걸인들, 매춘부들의 비참한 실상을 발견한 필립보 네리는 즉시 팔을 걷어붙이고 로마의 뒷골목을 샅샅이 뒤져가며 사목활동을 시작합니다.


당시로서는 거의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나이 40에 뒤늦게 사제서품을 받은 필립보 네리는 오라토리오회를 창설하게 됩니다. 오라토리오회는 수도회처럼 엄격한 회헌회칙이나 청빈생활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첫 서원이며 종신서원도 없었습니다. 재산의 포기와 청빈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지금 있는 그 자리를 꽃자리로 여겼습니다. 지금 이 자리를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이른 통해 행복한 사제 생활을 엮어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오라토리오회 설립의 목적이었습니다.


당대 오라토리오 회원들은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몇 권의 영성 서적과 성인전을 필독서로 선정해 같이 읽고 느낀 바를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교구 사제들이 쇄신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본당이 쇄신되고 교회의 심장인 로마 교구가 쇄신되기 시작했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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