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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26 조회수1,578 추천수8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5월 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When the Advocate comes
whom I will send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proceeds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to me.
so that you may not fall away.
(Jn.15,25-26...16,1)
 
 
제1독서 사도 16,11-15
복음 요한 15,26―16,4ㄱ
 

요즘이야 흙장난 같은 것을 할 나이가 지나서 하지 않지만, 어렸을 때에는 흙을 가지고 놀 때가 참 많았습니다. 하긴 지금처럼 놀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흙장난을 제일 많이 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친구들과 흙장난을 하다가 개미 한 마리를 발견했지요. 저는 개미가 가려는 길 앞에 돌 하나를 놓았습니다. 그러자 얼른 방향을 틀어서 다른 길로 가더군요. 친구와 저는 개미가 가려는 길 앞에 계속해서 돌을 놓았지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계속 막는 저희의 행동에 개미가 포기하고 그냥 주저앉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조금의 틈만 있어도 그 틈으로 도망가고, 심지어는 가지 못하게 막아놓은 돌을 기어서 올라가는 등, 개미의 앞길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지요. 결국 개미가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저희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이 기억을 종종 하게 됩니다. 하찮은 미물이라고 여기는 개미도 포기하지 않는 이 모습과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나라는 존재는 조그마한 문제에도 쉽게 포기했었던 모습이 크게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대신 쉽게 얻기만을 원하고,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주어지기만을 원했던 적은 얼마나 많았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에 조금 노력하다가 그만둔다고 합니다. 금연, 금주를 다짐했다가 갖은 이유를 들어 다시 시작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학 공부를 비롯해서 자신의 스펙을 쌓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하고서도 작심삼일이 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주님과 약속에 대해서도 공수표를 얼마나 많이 날렸을까요?

조금하다가 그만두는 것은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등산가는 “난 해내고 말 거야.”라고 진심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최선을 다하겠다.”, “노력하겠다.”라는 말만 하는 사람은 산을 절대로 정복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떠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진심으로 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하시면서 제자들을 환난에 대비시키십니다. 다가올 박해에 대한 예언인데, 이를 견뎌내어야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박해는 사람들의 외면 받으며, 오히려 박해자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시지요. 정말로 견디어 내기 힘들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기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다고 무조건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이 길이 바로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라면 정면으로 마주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 스스로 모범을 보여주시지요.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당신을 외면하는 그 순간을 직접 겪으시면서,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그저 말로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조금 하다가 그만 두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됩니다. 앞서 개미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듯이, 주님을 따르는 이 길에 있어서 포기하지 않고 용기 있게 나아가는 모습이 반드시 필요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길 뒤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이 있으니까요.

위기는 기회이며 벼랑 끝에 선 자가 가장 강한 법이다(이지성).


 

용기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성경을 보면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쪽 뺨을 내밀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를 사랑의 모습인 것처럼, 또한 복수해서는 안 되는 말인 것처럼 알고 있지요. 이 말씀에 대해 어떤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려면 어느 손을 이용해야 할까요? 왼 손을 이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왼손이 부정한 손이라고 해서 남을 때리는데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른손으로 어떻게 오른편 뺨을 때릴까요? 당시 노예나 하층민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지배층들이 오른 손등을 이용해서 뺨을 때렸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른편 뺨을 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예수님께서는 왼쪽 뺨을 내밀라고 합니다. 이제 왼쪽 뺨을 어떻게 때릴 수 있을까요? 이때 때린다면 정상적으로 오른 손바닥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는 대등한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의미합니다. 즉, 노예나 하층민이 아니라 평등한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구나 싶더군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는 과연 왼쪽 뺨을 내밀 용기를 가질 사람이 있을까요? 오른편 뺨을 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큰 지위를 가지고 있을 테고, 반대로 맞는 사람은 지배를 당하는 하층민일 수밖에 없는데도 평등한 인간으로 대해 달라고 과연 왼쪽 뺨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삶에 순응해서 좌절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어렵고 힘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기에 대한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진정한 용기를 가지고 있을까요? 혹시 사랑이나 기타 좋은 말들을 내밀어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용기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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