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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 수련 제1강 여행을 떠나며 - 영신수련의 여정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27 조회수4,026 추천수8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유시찬 신부님의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1강 여행을 떠나며 - 영신수련의 여정


 

1. 여행을 떠나며

 

산길 알기 어려우매
멀리 보이는 저 나무
눈에 담고 가면 좋아

헤맬 것 같음 눈 들어 보렴
저 나무 향해 가면
언젠간 꼭 닿을 수 있으므로

눈에 담는 것 아득한 게 좋아
높은 게 좋아
먼길 갈 때엔

- 미츠하라 유리의 시집 '길'에서 -

 

2. 영적 여정은 살아 움직이는 물건이다
    - 성령의 현존과 활동

3. 존재의 대사슬 (영원의 철학)
    - 성장하는 하느님 나라
    - 물질(materials) -> 몸(body) -> 정신(mind) -> 혼(soul) -> 영(spirit) ->

                                성령(the Spirit) -> 신성(die Gottheit)

4. 고요에서 오는 힘

5. 영신수련의 구조
    - 영신수련의 목적: 정신활동, 무질서한 애착을 없앰, 내적 자세를 갖춤, 영혼 구원,

                               하느님의 뜻을 찾음
    - 영신수련의 구조
       [23] : 원리와 기초 - 1주간, 2주간, 3주간, 4주간
       [230 ~7] :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 여행을 떠나며 ㅡ 영신수련의 여정

 

안녕하세요? 예수회 소속 유시찬 신부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하고 26주간 동안이나 긴 여정을 하게 되는데 사실 뭘 말씀드려야 될지

잘 모르겠고, 앞으로 이 프로그램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 저도 사실은 자신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제가 볼 때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저희들 신자들 뿐만이

아니고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어떤 정신이라고 그럴까? 의식 혹은 영성이 한 단계 업그

레이드 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됐으면 하는 게 제 간절한 바람입니다.

 

저희들 이 긴 여정에 있어어 큰 제목으로는 성이냐시오의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이런 식으로 타이틀을 잡아 놨는데 여기에 여러 가지 면들이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을 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빌린다면은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죠?

"이 세상을 다 얻는다손 치더라도 너 자신을 잃어버리면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정말 저희들이 이 긴 여정을 통해서 진짜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존재인지

이것을 깊이 알아갈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됐으면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 자신이 누구인지

를 깊이 아는 가운데 정말 참된 행복한 삶을 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겟다. 나름대로 여러분

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고, 또 사람에 따라서는 행복하지

않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행복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든,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있든, 그것이 참된 의미에서

올바르게 그렇게 파악하고 있는가? 이런 점에서 저희들이 한번 이 여정을 통해서 짚어 봤

으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참된 의미에 있어서 내가 행복감을 누리고 있는가? 이것을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에 나오는 표현을 빌린다면은 각자 우리 자신은 저마다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 영신수련: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가 영신수련을 수행하는 이들을 위해 쓴 지침서

 

영신수련이라는 것은 적어도 제가 알아듣는 바로는 각자 자기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그것을 완전히 꽃피워내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영신수련이 가지고 있는 어

큰 목표라고 보여지는 거예요. 영신수련이라는 이것은 일종의 ?텍스트이기 때문에 영신

수련들을 주는 사람들에 따라서 여러 가지 해석이 주어지기 마련인데, 제가 볼 때는 영신

수련의 목적을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의해서 그 영신수련의 여정을 걸어가는 가운데 기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것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이런

작업이 병행되어 나갈 때예요. 그런데 이럴 때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도 무슨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을 내가 찾아서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측면이 아니고, 내 자신의 고유

한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것. 내 자신의 고유한 생명, 고유한 아름다움을 향해서 하느님

의 뜻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 이것을 찾아내는 거죠.

 

# 영성에 대한 목마름

 

우리가 IMF라든지 금융파동 같은 이런 경제적인 위기를 겪으면서 경제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죠.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만사가 빛과 어둠이 함께 있는 것처럼

경제적인 위기라는 것도 그저 부정적이고 어두운 요소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애요.

사실 요즘 와서 근래에 보기 드물게 영성에 대한 묵마름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거 같애요.

 

이 말은 그동안은 돈이라든지 권력이라든지 여러 가지 세상적 가치의 추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감도 인식하고 거기에 뭔가 인생의 행복이 놓여 있는 것 아닐가? 이렇게 생각

하면서 주욱 움직여 왔는데 거기에 대한 뭔가의 한계점들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 것

아닌가? 이게 어떤 면에서는 경제적인 위기 혹은 경제 ㅍ동이 저희들에게 안겨다 준 하나

의 선물이라고 보이는 거예요.

 

물론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 가지고 경제적인 어려움들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그저 방치

해도 괜찮다 혹은 경제적인 것은 무시하고 정신적인 면, 영성적인 면으로만 나아가자. 이

런 이야기 하자는 것이 전혀 아니죠.

 

오히려 경제적인 면을 충분히 아우르는 가운데 거기에 뭔가 좀 뭐라고 그럴까? 2% 부족하

다고 그럴까? 그런 점에 대한 보완을 통해서 더욱 더 한 단계 높은 으미에 있어서 참된 행

복, 참된 인간다움 이것을 실현해 내는 것. 그것에도 우리가 초대받고 있는 것 아닌가?

 

이제 그러다 보면은 특별히 저희들이 이 영적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꼭 무슨 가톨릭 신자

라든지, 개신교 신자라든지 이런 무슨 기독교 신자들만을 염두에 두는 거는 아니라고 생각

을 하는 거예요. 제가 어느 정도 그 능력이 닿을지는 모르겠지마는 할 수 있는 대로 보편적

이고 일반적인 이야기들을 함으로써 모든 국민들이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은 함께 이런 문제

들을 고민해 보고, 논의하고 지혜를 모으는 가운데 새롭게 우리의 국민들의 의식 수준 혹은

존재의 모습을 한 단계 더 상승시켜 낼 수 있는 이런 일들이 가능할 것 아닌가 그러면서 그

런 쪽으로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은 거죠.

 

# 삶과 신앙의 통합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이 작업을 해 나가되 특별히 이제 신자 같으면은 우리가 보통 겪고 있

는 삶과 신앙이 따로 놀고 있는 이런 어떤 갈등들도 이런 영적 여정을 통해서 통합시켜 낼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그저 단순한 종교 행위라든지 전례 행

위라든지 혹은 기복적인 살아가는 데 대한 요구 충족이라든지 이런 단계를 훌쩍 뛰어 넘어

서 지극히 구체적인 일상의 삶과 신앙이 그대로 접목되고 하나로 통합되는 가운데 하느님

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는 이런 삶의 모습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아

닌가? 여기까지 도달하지 않는다면은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무슨 크게 내세울만한 게 되

고 자랑거리가 되겠느냐는 거죠.

 

#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그 긴 여정의 시작

 

어떻게 보면은 이 여정은 결코 평탄하거나 수월한 것만은 아닐 거라고 보는 거예요. ?그럼에

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 마음으로 힘과 지혜와 뜻을 모아서 한 발자욱 한 발자욱 걸어간다면

은 정말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고 놀라운 열매들을 걷어낼 것 아닌가? 그러면서 무엇보

다도 각자 스스로가 행복하고 이 사회 전체가 행복해질 수 있는, 훨씬 더 큰 생명에 가득찰

수 있는 그리고 훨씬 더 아름다움을 빚어낼 수 있는 이런 일이 이루어질 것 아닌가? 그래서

이런 일을 여러분들과 함께 해 나가고 싶은 게 제 꿈입니다.

 

시작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오늘부터 시작해서 반 년 동안 비교적 긴 기간 동안 영적 여정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모쪼록 저희들 이 시간 동안에 힘과 지혜를 더해 주시고 무엇보다도

성령의 이끄심에 맑게 깨어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성령의 비추임 속에서 저희들 자신과 이웃이 어떤 존재인지를 깊게 깨달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저희들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발견해 내는 가운데 저희들 삶이 참된

행복으로 넘쳐날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십시오. 

 

저희들이 이 여정을 통해서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가 더욱 더 큰 생명과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함께 하시며 필요한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 우리 지금부터 긴 시간 동안 좀 여정을 걸어가야 되죠. 26주간 하게 되는데 짧다면은

짧지만 길다면 긴 여정이죠. 그래서 오늘은 그 긴 여정의 첫 시간으로서 전체적인 우리의

여정이 무엇ㅇ르 바라고 있으며 이 여정이 어떻게 전개가 될 것인지 이런 데 대해서 개괄

적인 얘기를 했으면 싶습니다.

 

우리 안에 뭔가 이렇게 목표점도 설정을 하고, 마음도 모으고, 뭔가 결의 같은

것도 좀 다지고 그러는 가운데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좋은 기운들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으면 합니다.

 

# 시집 <길(道), 이츠하라 유리

 

그러면서 긴 여행 떠나면서 시를 한 수 소개할까 싶은데 여러분들한테 나눠드린 유인물에

도 적혀 있지마는 미츠하라 유리라를 일본 시인이예요. 이분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 개신교 신자도 아닌 것 아닌가 싶은데 어쨌거나 이 길(道)하는 일본말로 한자로

길도(道) 자를 적어 가지고 [미찌]하는 시집에 적혀 있는 시고, 그걸 제가 이렇게 번역을

했더랬습니다.

 

거기에 담겨 있는 내용들도 아주 평이한 거 같애요. 아주 익숙한 쉬운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 영성적인 깊이랄까? 그것은 만만찬다 싶거든요. 그런데 마침 그 시집의 맨 처음

시가 '여행을 떠나며' 하는 시예요. 예, 거기에 보면 이렇게 적혀 있거든요.

 

여행을 떠나며

 

산길 알기 어려우매
멀리 보이는 저 나무
눈에 담고 가면 좋아

헤맬 것 같음 눈 들어 보렴
저 나무 향해 가면
언젠간 꼭 닿을 수 있으므로

눈에 담는 것 아득한 게 좋아
높은 게 좋아
먼길 갈 때엔

- 미츠하라 유리의 시집 '길'에서 -

 

# 26주간의 여정만이 아닌 인생 전체의 긴 여정

 

우리가 여기서 26주간의 영적 여정을 간다고 그러기는 하지만은 사실은 26주간을 통해서

우리 전체의 영적 여정,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 각자의 삶 속에서 걸어가야 할 영적 여정을

가리키는 거죠. 그 여정의 축소판을 이 26주간에 걸쳐서 본다 하는 것이지 사실은 그 26

주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무덤 속에 들어갈 때까지 인생 전체에 걸린 긴

여정의 모습인 거예요.

 

그래서 그 긴 여정을 갈려고 할 때는 좀 더 높은 곳을 향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고, 좀더

이렇게 아득한 것, 아득해서 채 안 보일지도 모르지마는 보다 더 분명하고 크고, 아름답고

높은 것 그것을 가슴에 확실하게 담고 가는 것. 이게 필요한 것 아닌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면에서 어쩌면은 우리가 오늘부터 시작하는 이 여정이 26주간의 긴 여정을

거쳐서 종착점이 도달해야 할 그 모습, 그것을 오늘 이렇게 좀 단편적이나마 제시를 하고

또 그런 여정을 어떤 과정을 거쳐서 걸어가게 될 것인가? 이점을 좀 설명을 할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먼 여행을 갈 때 높은 곳을 이렇게 바라보고 아득한 곳을 향해서 마음에

담아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이걸 성서 구절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은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우리 여기도 지금 이렇게 적혀 있지마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죠.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첫 사도들을 부르실 때, 물고기를 좀 잡았느냐? 이랬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 그러시죠.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이것이 저한테는

늘 어떤 식으로 번역이 돼서 들어오냐 하면은 영적 차원에까지 깊게 들어가라.

 

# 영적 차원까지 깊게 들어가라

 

지성적인 차원에서 늘, 지성적인 차원이거나 심리적인 차원에서만 움직이지 말고 영적

차원에까지 들어가서 거기에서 그물을 치고 생명의 기운들을 끄집어 올려라.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것으로 들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 깊은 데 그물을 친다 하는 것 이것이 영적 차원에까지 깊게 들어가는 것이고

먼 여행을 떠날 대 아득하고 높은 곳을 가슴에 담는 것.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랬을 때 우리가 좀 염두에 두었으면 하는 것은 '영적 차원' 하는 것에 관련

지어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은 '존재의 대사슬' 하는 측면을 좀 알아들었으면 하는 거예요.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 식물도 있고, 동물도 있고, 해도 있고, 달도 있고, 온갖 있는,

있다 하는 것들, 존재자들이 있는데 이 관계들이 어떻는지 전체적인 맥락을 좀 가슴에

담을 필요가 있겠다 싶은 거에요. 그랬을 때 이 '존재의 대사슬'이라는 이야기를 쓰는데

혹은 '영원의 철학'이라는 얘기도 해요.

 

# 존재의 대사슬(영원의 철학)

 

 

 

맨 밑에 하부 구조를 얘기를 한다고 하면은 물질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거예요.

여러 가지 물질들이 잔뜩 있는 것. 흙이 있고, 돌이 있고, 물이 있고, 공기가 있고. 그런데

이런 물질들이 각각 따로 놀고 있다가 그것이 하나로 결합이 되면서 생명 현상이 탄생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생명 현상을 중심으로 하는데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를 펼쳐

본다면은 인간의 몸 차원이 나타나는 거예요. 바디(bady).

 

이 몸이라는 것은 화학적인 성분을 가지고 분석을 한다면은 식물이라든지, 동물이라든지,

심지어는 흙이라든지, 돌이라든지  이런 데에 있는 성분들 하고 같은 성분들이 우리 몸에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하고 엄연히 다른 것은 전체적인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

를 이루면서 생명현상이라는 것이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인간으로 치면은 몸이 탄생되는

거예요. 이 몸이 또 충분히 숙성이 되면은 그 다음에 정신인 마인드(mind) 하는 차원이

나타나는 거예요.

 

이 정신의 차원이 또 충분히 숙성이 되면은 혼(soul) 하는 차원이 나타나고 그 위에 가면은

영(sprirt) 하는 차원이 나타나고 더 가면은 성령, △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신 하느님에

정관사 the를 써 가지고 the Spirit, 대문자로 쓰면은 하느님의 영역까지 가는 거예요.

 

이런 혼이니 영이니 이런 차원들을 이야기하면서 특히 영의 차원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천사들이라는 이야기를 쓰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천사들 안에도 9품 천사들이 있어서

천사들의 계층들이 쭉 있죠. 이게 전부 존재의 등급들인 거예요. 흙이나 물부터 시작해

가지고 아메바 같은 단세포 생물체가 나타나고, 그 위에 식물이 나나타고, 동물이 나타나

고, 그 위에 인간이 나타나죠.

 

인간이 몸뚱아리가 형성이 되고 엄마 뱃속에서 애가 착상을 하면서 자라서 아홉 달이 되면

은 바깥으로 나오죠. 나와서 몸이 튼튼하게 자라기 시작하면은 이제는 말하기 시작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mind, 정신. 여기는 그러니까 지성 내지는 심리 차원들이 나타나기 시작

하는 거예요.

 

 

 

이러면서 여러 가지들을 생각을 하고, 움직이죠. mind 차원이 더 깊어지면은 soul 이라든지

spirit 이런 것들이 나오는데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좀 다루었으면 하는 것은 마인드 차원

에서 소울 내지는 스피릿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이 경계선인 거예요.

 

 

 

예수님의 표현을 빌려서 이야기를 한다면은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시는 이 정신이나 몸 하는

이 부분의 차원이 육의 차원, 육적 차원. 그 다음에 그 위에 혼, 영 하는 이 부분이 영의 차원

영적 차원이예요.

 

 

 

예수님께서 그러시죠. "육적인 것은 필요하지 않다. 영적인 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들을 하죠. 가톨릭이 됐든, 개신교가 됐든, 불교가 됐든, 이슬람교

가 됐든, 신앙생활도 하고 혹은 무실론자로서 제도권의 신앙생활은 하지 않는다손 치더라

도 나름대로 뭔가 궁극적인 목적이라든지, 존재의 근원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찾아 들어가

면서 생각들을 펼치고 거기에 바탕을 두고 이 인생을 살아내고 영의 차원에까지 우리는

진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내용인 거예요.

 

유감스럽게도 가톨릭 신자나 개신교 신자, 불교 신자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가

거의 없으니까 함부로 이야기는 못 하겠고, 그저 신부로서 가톨릭에 대해서 조금 알고 신부

되기 전에 개신교 생활을 먼저 좀 해 놓으신까 개신교 분위기에 대해서 또 조금 알고, 그것

을 이렇게 바탕으로 해서 얘기를 해 보면은,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 이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의 차원에서 머물고

있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 육의 차원에서 머물고 있는, 여기에서 이것

도 바람직하고 괞찮기는 하지마는 예수님 이야기 하시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에서 한 단계 더 뛰어 넘어서 영의 차원에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이야기를 ?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왜 그러냐 하면은 여러분들 지금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하고 물으면은 이거 손을 들까 말까? 하고 여러분들이 막 고민을 좀 하겠죠. 그래

서 뭐 어떤 분은 손을 드시고, 어떤 분은 손 안 드시고 막 그럴 거예요. 그런데 이거 진짜

우리 신앙생활 하면서 혹은 이 인생이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진지하게 한번 불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요. 나는 정말 행복한가?

 

# 나는 정말 행복한가?

 

어쨌거나 여성으로서, 혹은 남성으로서 내가 정말 행복한가? 애기 엄마로서,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혹은 전업 주부로서 현재 내 상황

속에서 정말 행복하다 하는 것이 저 뼛속 깊은 데서부터 올라오는가?

 

만약에 "행복한 데요!" 하고 이야기 하는 분 같으면은 "왜 행복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그 왜라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을 하실 건가? 애들이 착하게 공부 잘하면서 건강

하게 잘 커주고, 남편이나 시부모님이나, 친정부모님이나 아프지 않고 다 건강하고, 남편

이 이번에 승진해 가지고 ?부장이 됐고, 경제적인 여력도 있어 가지고 이번에 50평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차도 좋은 차로 새로 바꾸고 그런 여러 가지 근심 걱정이 없어서

그래서 행복한 데요.

 

만약에 그런다면은 그 행복이 어느 정도 지속이 될까? 하는 거죠. 조만간에 부모님이나

시부모님이나 편찮으시기 시작하실 테고 그러면서 세상 뜨시겠죠. 애가 지금은 내 품에

있는 것처럼 말  잘 듣고, 공부도 잘 하는 것 같은데 에미 속을 썩일지도 모르죠. 남편이

지금은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직장에 잘 다니고 있고 그러는데 건강검진 딱 받았는데

어딘가 중대한 그런 병이 발견됐는데요 하고 진단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죠. 이런 여러

가지들.

 

만약에 이런 변수들이 전부 채워졌을 때 그랬을 때 비로소 내가 행복한데요. 이런다면은

이 세상 천지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그런 여러

지 조건들이 채워졌을 때 행복합니다 하는 것은 육의 차원의 행복일 거예요. 예수님께

그러시죠. 내가 너희들에게 평화를 준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죠.

 

# 세상이 주는 평화와 행복?

 

세상이  주는 평화, 세상이 주는 행복 이것은 건강이라든지, 재산이라든지, 지위라든지,

여러 가지들이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맛 볼 수 있는 평화와 행복인 거예요. 그런데 그부

이 들쭉날쭉하고 여러 가지 혼란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

평화를 누릴 수 있는가? 이 부분이 영적 차원에서 행복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세상

이 주는 행복과는 다른 행복이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 그것 아닌가?

 

그런데 이점에 있어서 우리 진짜 좀 진지해지고 치열해질 필요가 있다 싶은 거예요.

"에이, 그냥 사는 게 그건 거지 뭐. 어떻게 뭐 다 온갖 복을 누리면서 살어!" 이러면서

적당히 체념하고, 적당히 도망가 버리고 그래서 그냥 적당히 세상살이에 타협해 가지고

다람쥐 체바퀴 돌듯이 일상의 타성에 젖은 삶을 살아갈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좀 분노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여러분들 어느 정도

될지 모르겠지마는 앞으로 10년, 20년 혹은 30년, 40년 더 살다가 이 세상 떠나겠죠. 얼마

안 남은 세상 살다가 떠나갈 텐데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쭉 살아온 세상을 앞으로도 그렇

게 더 살다가 떠날 것인가? 그래서 이 세상이 행복하고 좋았노라고 천상병 시인이 노래하

셨던 것처럼 정말 멋진 소풍이었노라고 이런 이야기 우리가 할 수 있겠는가?

 

혹은 매일 매일의 삶이 정말 생명에 차고, 기운 차고 기쁨에 찬 정말 살아있는 그런 삶,

수족관에 걸려 있는 그런 고기와 같은 삶이 아니고 바다 속에서 막 꿈틀거리고 있는 그런

고기와 같은 삶 이런 삶에 대한 열망들, 목마름 이게 우리 안에 좀 끓어올라야 되지 않겠

는가? 어쩌면은 영적 여정을 26주간이나 진행해 나간다면은 여기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그점에 대한 목마름들, 갈증들, 열망들, 열정들이 여러분들 안에 샘솟아져

나오는가? 하는 거예요.

 

이런 얘기하고 있으니까 여러분들 하나도 안 적고 있지요? 이게 정상이다 싶은 거예요.

그런데 뭐 좀 있다가 무슨 존재의 사슬이 어떻고, 영의 차원, 육의 차원 이러면은 이거는

또 뭐나 되나 싶어 가지고 막 적을라고 그러죠. 그건 사실은 아무 필요 없는 거 아닌가?

여러분들 안에서, 내면에서, 마음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있고, 어떤 기운이 올라오고

있는지 이것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그 마음을 바르게 잡아가는 것. 이것이 훨씬 중요하다

싶은 거예요.

 

# 바라는 것이 뭐냐?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러시죠. "바라는 것이 뭐냐?"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시고, 눈먼 사람을 눈 뜨게 해 주시고, 나병을 고쳐주시고 이러실

때도 그냥 마술부리시듯이 손 턱턱턱 얹으셔 가지고 나숴주지 안 그러셨죠. 반드시 물으

시는 것이 "원하는 것이 뭐냐? 바라는 것이 뭐냐?" 하고 물으시고는 실컨 고쳐주시고 나서

는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이 이야기 하시는. 이게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지 않는가?

 

내 안에서 전부 일어나기 시작하고, 나도 모르는 과정을 거져 가지고 내 안에서 모든 결과

들이 탄생되는 것 아닌가? 바오로 사도께서 잘도 이야기 하시는 것처럼 "내가 씨를 뿌리고

물 주고, 거름도 주고 이랬는데 어떻게 자랐는지 모른다. 그런데 밭을 고르고, 씨를 심고,

물을 주고 그러고 자고 났더니 모르는 사이에 싹을 튀우고 나오더라. 그러면서 자라더라."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진짜 바라는 것이 뭐냐? 진짜 행복하기를 원하느냐? 진짜 영적

차원에까지 들어가기를 원하느냐? 그런 생명을 진짜 원하느냐?"

 

'지금도 살아 있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다 이쁘다고 그러고, 건강하다고 그러고, 그래서 잘

살고 있는데 이만하면 됐지 뭐!"

 

그러고 살아가다 보면은 조만간에 그것이 뒤집어질 때가 올 것이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 내가 바라는 것이 뭔가? 이점에 대해서 계속 물어야 되고,

바른 것을 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봐야 되죠.

 

이런 점에서 우리가 육적 차원을 떠나서 영적 차원으로 간다 하는 것이 무슨 이상한 영적

체험 속으로 들어가고 이런 이야기가 아니고, 진짜배기로 내가 생명을 얻고, 정말 내가

름다워지고, 정말 내가 평화를 누리고, 정말 내가 기쁨을 얻기 위해서 영적 차원에 들어가

는 것이고, 깊은 데에 그물을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모습이 틀렸고, 잘못됐다는 거는 아

니예요. 애들 키워보셨으니까 아시죠? 애가 중학교까지는 딴 애들보다 막 키도 훨씬 잘 크

고 바짝 크더니 그래서 반에서 키를 세우면은 1번, 2번 하더니 애가 거기서 그냥 스톱해

버리면서 고등학교 이후부터는 안 커요. 그래 가지고 고등학교에서는 졸업할 때는 반에서

한 40명 있으면 맨 끝 번쯤 밖에 안 돼요. 그렇다면은 보고 있는 에미 속은 얼마나 천불이

나겠어요? 우리 모두는 그렇게 성장해 나가야 된다 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의 모습도 아름답고, 건강하고, 나름대로 양식있게,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고,

나름대로 기쁨이라든지, 행복을 누리고 있고, 그래서 괜찮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부터 한 걸음 더 내디디면서 계속 성장을 해 나가야지, 지금 이 상태가 됐다.

이러고 앉았다가는 됐다고 생각하는 이것마저도 빼앗길 날이 곧 올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은 우리 삶 전체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적 차원으로 갈려

고 하는 것이고 이런 차원에서 좀 더 깊은  데에 그물을 칠려고 하는 것이죠.

 

# 성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

 

그런데 이런 영적 여정을 쭉 걸고 하는 데 우리가 하나의 어떤 수단으로서 가지고 올려고

하는 것이 영신 수련이라는 책인 거예요. 영신 수련이라는 책이라기 보다는 영신 수련이

라는 성 이냐시오께서 쓰신 영신 수련이라는 책, 그 책에서 서술되고 있는 하나의 영적인

여정, 이것을 우리는 하나의 나침판 내지는 지도 삼아 가지고 계속 걸어가려고 하는 거죠.

 

그렇게 했을 때 우리는 가장 효과적으로 깊이 있게 깊은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거의 한 400-500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통해서 검증을 받아 놓은 거죠.

그래서 우리는 영신 수련을 가지고 이렇게 움직여 나갈 것인데 그 영신 수련에 보면은

그 영신 수련에는 각 단락마다 이름을? 붙여 놨는데,

 

# 영신수련의 목적

 

1번에 영신수련의 목적에 대해서 쭉 적어 놨어요. 거기 보면 이제 그런 이야기 하고 있죠.

뭐 걷는 것이라든지, 운동하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전부 몸을 발달시키기 위해서 하

는 게 아니냐? 에어로빅 하는 거 다 그런 거죠. 그런 몸 운동을 하는 것처럼 정신의 운동

들도 필요하다.

 

# 정신에도 운동이 필요하다

 

정신을 강화시키는 것, 의식, 마음을 탄탄하게 해 나가는 것, 이런 작업들이 넓은 의미에

서 보면은 여러분들이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라든지, 묵주알을 돌리는 것이라든지, 혹은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이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도 다 영신수련, 영신에 관한 수련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영신수련 말고, 우리가 이 버팀목 삼아서 걸어가려고 하는 것

은 영신수련이라는 그 책에서 나오는 독특한 구조, 하나의 완결된 시스템, 그것을 이용을

해서 영적 여정을 걸어가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거기에 보면 그래 놨어요. 그런 영신수련,

정신적인 운동을 위해서 하는 것이 잘못된 집착들 그것을 우리한테서 없앤다.

 

# 잘못된 집착 없애기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 대게 어느 한쪽으로 막 기울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잘못된

집착, 애착 이런 것들을 정돈을 해서 바르게 하는 거예요. 그걸 바르게 함으로써 내 마음

내적 태도를 올바르게 갖추고, 그럼으로써 내 영혼을 구원한다. 그러는 가운데 하느님

의뜻을 찾고 발견하면서 나아간다.

 

# 하느님의 뜻 찾기

 

이것도 나중에 우리 깊게 다룰 거예요. 다루는데 하느님의 뜻을 찾고 뭐 이런다. 뭐 영혼

구원한다니까 실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좀 추상적이고 허공에 뜬 이

야기처럼 그렇게 들릴 수가 있죠. 그런데 이것이 무슨 내가 죄인인가? 그래서 영혼을 구

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나는 무슨 타락한 어떤 이상한 존재인가? 뭐 그런 식으로 복

잡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우리 각자는 누구든지 타고난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알

아듣고 있는 거예요.

 

# 하느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나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

 

이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아닌 단 혼자로서 나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고유한 생명이

있다. 이 세상 천지가 어떻게 전부 백합꽃 만 있겠어요? 어떻게 다 장미 만 있겠어요?

그랬을 때 그 장미나 백합을 보고 이쁘다는 생각이 들까? 장미가 있고, 백합이 있는가

하면, 안개꽃도 있고, 코스모스도 있고, 이름 모를 들꽃도 있고, 이런 여러 가지가 함께

어우러지는 가운데 아름다움을 깊게 맛보고, 느끼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우리 인간들도 꼭 마찬가지인 거예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우리 각자는 전부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이 있고, 자기만의 생명이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이것이 뭔지 찾아

내는 것. 그래서 내 타고난 아름다움을 찾아내어서 그것을 꽃피워내는 것. 마음 껏 꽃 피

게 하고 그러기 위해서 온갖 활동들을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거예요.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 내하고 별개로 지엄

하신 하느님으로서, 하늘에 계신 분으로서, 그래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으면은 나

중에 벌이라도 받게 되는 그런 의미에서의 하느님의 뜻을 찾고 움직이는 것이 아닌 거예

요. 나랑 완전히 하나가 되어 계신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아름다움,

그게 뭔지 알아들으려고 애쓰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인 거예요.

 

# 나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계신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아름다움

 

그리고 그것을 만나게 될 때 비로소 누가 뭐라 하든 큰 기쁨과 평화에 빠져들게 된거다

하는 거예요. 요즘 우리나라 교육을 생각을 해 보면은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은 대게 문과 이과 고등학생들 되면 그렇게 나누죠. 이과 같은데

보면은 원체 우리나라 석차 메기기 좋아하니까 1등부터 꼴찌까지 열 세우는 거 좋아 하

니까 1등부터 주욱 서울 의대, 1등이 서울 의대인 거예요.

 

서울 의대, 뭐 연대, 고대, 이러면서 주욱 가서 뭐 지리적으로 비유적으로 이야기 하면은

제주대학 의대까지. 그러니까 전국의 의대를 돈다고 그러는 거예요. 1등부터 해 가지고

전부 의과 대학을 다 돌고 나서 그다음 등수가 서울 대학 공대를 온다 하는 거예요. 제가

볼 때 이거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것 아닌가? 어떻게 다 의사가 되겠어요? 어떻게 다 판

사가 되겠어요? 어떻게 다 교수가 되겠어요?

 

이런 것을 이야기를 하면은 여러분들 지금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는 것처럼. 예, 머리로는

다 알아들어요. 그리고 "니 말, 말도 된다." 이렇게 이야기도 하고. 그런데 내 아들은 말고,

내 아들은 일단 서울 의대 보내 놓고, 네 아들은 공대 가라. 이런 이야기들이 그냥 구체적

인 실례를 들면 이게 다 그냥 육적 차원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인 거예요.

 

영적 차원, 육적 차원 이런다 해 가지고 무슨 우리 신앙생활하는데 있어서 영적 차원이

중요하고 육적 차원은 덜 중요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극

구체적인 우리 일상의 삶의 여러 가지 선택들, 사위를 맞아들이고, 직장을 선택하고,

며느리를 보고, 이런 모든 것들, 대학을 보내고, 사교육을 시키느냐? 안 시키느냐? 고등

학교를 특목고를 보내느냐? 아니냐?

 

이런 모든 것들의 결정들 내지는 움직이는 모습에 있어서 과연 영적 차원의 사람이구나,

육적 차원의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고 그런 면에까지 영이라든지, 육

이라든지 파고들고 움직여지도록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작업들을 하는 거예요.

 

# 우리 삶 속 일상적인 선택들이 육(肉)적인 것인가, 영(靈)적인 것인가

 

얘기가 약간 옆으로 샜습니다마는. 영신 수련이라는 것은 그래서 그런 거예요. 무슨 이상

한 탈혼체험들, 이상한 신비체험들, 무슨 기도 중에 예수님 직접 뵙고, 예수님 손 잡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고, 예수님 음성을 듣고는 뒤로 까무러쳤다가 일어나고, 이런 이야

하자는 게 아니예요.

 

# 영신 수련은 탈혼이나 신비체험이 아니다

 

먹고, 자고, 텔레비젼 보고, 친구랑 차 마시고, 웃고, 울고, 싸우고, 이 모든 것들을 참된

내 모습을 찾아내면서 내 생명이, 내 아름다움이 활짝 꽃피우는 식으로 움직여 내게 끔.

그래서 이 세상이 정말 아름답고 좋았노라고, 정말 즐거운 소풍이었노라고, 나중에 태어

나도 이 땅에 와서 다시 한번 이 배역을 맡아보고 싶노라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끔

우리 뱃속 깊은 데서 그런 탄성이 튀어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영적인 여정을

걸어가고자 하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보여지죠.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내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 내 생명의 고유한 가치, 이런 것들을

마음 껏 꽃피워 낸다 하는 것은 이기적으로 내 혼자 어떻게 하지는 이야기가 절대 아닌

거예요. 그렇게 덤비다 보면은 오히려 자기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생명을 잃어버리

게 될 거라는 거예요. 그럴 때는 늘 내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함께 묶어서 생각하지

않으면은, 함께 받아들이지 않으면은 안 되는 거예요.

 

# 나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때 다른 사람 고유의 아름다움을 함께

 

내 생명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옆에 있는 사람의 생명이 같이 커나가지 않으면은 안 된다

하는 거예요. 이런 차원에 우리가 깊게 머물고 있을 때, 무슨 1등부터 꼴찌까지 석차 메기

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고, 등수 메기는 것을 좋아하고 그러겠느냐 하는 거예요. 성숙한

사람들의 눈에서 볼 때 그것이야말로 너무나 유치하고 어린애 같지 않을까?

 

어릴 때나 니편, 내편 편가르고 그러면서 땅 따먹기 하듯이, 그냥 노느라고 철 없을 때

짓거리지. 어른이 되어서 그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작업들을

우리가 깊게 이 여정을 통해서 들어갔으면 하고, 이 여정을 통해서 우리 안에 중요한 문제

하나는 또 이 마음에 담았으면 하는 것은 우리 내면 안에 있는 고유함을 찾아내는 거예요.

 

# 내면의 고유함 찾기

 

고요로부터 에너지가 나오고 성장이 일어난다 하는 것을 명심했으면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런 영적인 차원에까지 계속 진입해 들어가지 위해서는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있어야죠.

마음은 간절한데 아파 들어누워 있으면은, 의욕이 안 일어나면은, 생각만으로 그쳐버릴

위험성이 있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정말 생각한 대로 또박또박 걸어가기 위해서는 에

너지가, 힘이 솟아나야 되죠.

 

그런데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잘 먹고, 잘 자고, 몸이 건강하면 되는데요. 아니면은

매일 결심을 굳게 하면서 의지력을 강화시키면 되는데요. 우리가 볼 때는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그것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겠지마는 진짜 중요한 힘은 영적인 차원에서 나오

는데 이 영의 차원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고요'인 거예요. 고요의 상태에 머문다.

 

'고요' 하는 것은 그거 아무것도 안 하고 차분하게 있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 고요는 아주 분주하게 움직일 때도 고요속에 확실하게 머물 수 있는 거죠. 따라서 이

고요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내적인 고요로부터 힘이 나오기 시작하면은 온갖 일들을 하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고 에너지가 계속 샘솟듯이 올라오는

거예요. 이 고요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영신 수련에서도 이야기 하는데 불편심에 차

는 거예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마음이죠.

 

# '고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마음

 

양극, 혹은 양변이 있으면은 이 양변을 모두 떠나는 것, 버리는 것. 여기에 고요가 머무는

텃밭이 거기서 생기는 거예요. 영신 수련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은 가난도, 부귀도, 질병

도, 건강도, 모욕도, 명예도, 단명도, 장수도 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은 고요를 잃어버리

는 거예요. 그 조건을 채울 때. 어느 한쪽에 집착을 하고 있으면은 그 고요를 놓치게 되죠.

 

그래서 이 양변을 떠나는 가운데 놓여 있는 것. 이것이 영적 차원의 시금석이기도 하고,

우리가 진정한 자신의 아름다움과 생명을 찾아나가기 위해서 계속 바라보고 걸어가야

할 길이 그 길이기도 한 거예요.

 

그냥 첫 시간이 되엇 그런지 제가 막 한번도 안 웃고 떠들었잖아요. 제가 스스로 먼저

웃어야 전염이 돼 가지고 좀 웃고 할 건대. ^^ 어쨌든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쳤으면

합니다. 영광송으로 마쳤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유시찬 신부님의 아름다움은?

제 자신의 아름다움?

하!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제 아름다움은 제가 판단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서 제 아름다움을 대신

"너는 이런 게 아름다워!" 하고 이야기 해 줄 것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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