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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제2강 인간 존재의 참 모습- 관점의 변화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29 조회수1,079 추천수8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유시찬 신부님의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2강 인간 존재의 참 모습 - 관점의 변화

 

1. 들어가며
    - 기형도의 시 '엄마 걱정'

 

2. 영적 차원의 중요성
    - 인간 존재의 깊이
    - 지적차원의 분석에서 영적차원의 통합에로
    - 영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존재의 대사슬에서 최상층 존재로서의 영성과 각 층위에서의 영성

 

3. 하느님 나라는 성장에 있다
    - 성장을 위해서는 분리 내지 나눔이 있어야 (원심력) : '多' 의 세계
    - 동시에 합침 내지 통합이 있어야 (구심력) : '一' 의 세계
    - 태극의 음양의 상징
    - 창세기 선악과도 같은 맥락

 

4. 전근대로부터 근대로의 이행에 있어서의 문제점
    - 하느님 중심인 중세로부터 각 분야가 분리 독립하면서 성장을 꾀하는 과정 중에 종교

       내지 영성 또한 전체의 단순한 한 부분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과오
    - 통합시키고 구심적인 역할을 하는 영성이 사라짐으로써 근현대 문명의 문제점들 노정됨


오늘 이야기 ...

 

안녕하세요? 지난 주에는 우리 전체의 여정의 조감도 비슷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봤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 전체적인 여정을 쫓아서 오늘 실제적인 첫 시간이 되는 셈이죠. 오늘 이 시

간을 통해서는 제일 먼저 인간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

갖 사건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좀 점검을 해 봤으면 하는 거예요.

 

스님들께서 곧잘 쓰시는 표현을 빌리면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해 놓고 한번 뒤집어

엎죠.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시는데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어릴 때부터 늘 배우고 익혀왔던 그런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말고 혹시 다른 시각에

서 바라보면은 인간이 혹은 이 세상이 좀  다른 식으로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가 도대체 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이 점에 대해서 좀 점검을

해 보고 만약에 시각에 있어서 뭔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면은 좀 바르게 잡고, 좀 더

건강하고 승화된 관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시작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오늘도 이렇게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함께 자리하게 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모쪼록 저희들의 여정에 필요한 힘과 용기를 더해 주시고 성령의 이끄심에 맑게

깨어 있음으로써 저희들 자신을 변화시켜 낼 수 있도록 은총을 더해 주십시오.

 

오늘 이 시간 특별히 저희들이 어릴 때부터 배워왔던, 익혀왔던 그런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과는 다른 당신께서 이 세상을 바라보시고 인간을 바라보셨던 그 관점을 새롭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은총을  더해 주십시오.

 

저희들 눈을 맑게 뜨게 하시고 가슴을 뜨겁게 하시어 머리로 알아들은 바를 바른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은총을 더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잘 지내셨어요? 잘 지내셨겠지마는 당연히.^^*  이 여정이 이렇게 진행이 되면서 나중에 훨

더 괴도를 타기 시작하면은 더욱 더 깊어지고 자연스러워지고 그러긴 하겠는데 아직은

뭔가 좀 허둥대는 면이 있죠. 제 안에서 먼저 그렇다 싶어요.

 

* 지난 시간 ... " 영적 차원까지 깊게 내려가야 한다"

 

그래서 지난 주에 영적 차원까지 깊게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꽃피워내기 위해서는 영적 차원이라는 그런 깊은 데에 그물을 치지 않으면은 안 된다.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그 연장 선상에서 앞으로 우리의 전체적인 여정이 어떤는

가 조감도를 설명을 하는데 그 부분은 그냥 한마디로 언급을 못하고 지나가게 되었죠.

 

그래서 고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강의가 진행됨에 따라서 그때 그때 필요할 때 나오면은

부분적으로 설명을 해 드려도 괜찮다 싶어요. 다만 지금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실 것은 영신

수련이라는 이 흐름을 가지고 나아갈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은 아직 초반전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면에서

는 관점의 변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 관점의 변화: 사물이나 사건들,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 시선을 어떻게 교정할 수 있는가

 

사물이나 사건들, 혹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 시각, 시선을 어떻게 교정할 수 있는가?

지난 시간에 그랬었죠. 육적 차원에서는 참된 행복이라든지, 기쁨을 길어올릴 수가 없고,

자기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가 없고 영적 차원에 들어가야 한다.

 

* 육적 차원에서는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다

 

# 영적 차원에 들어가는 길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길이 뭐냐?" 이렇게 물었을 때, 의지력을 굳게 하는 것 혹은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을 많이 채워 넣는 것. 이런 것이 방법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영적

차원에 깊게 그물을 드리우기 위해서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봐 왔던 그 시각, 관점 이것이 어떤 것인지 한번 재조명

해 보고 이 부분을 먼저 바르게 세운 다음에 영적 여정이 그 기반 위에서 올라가야 될 것 아

닌가 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세상적인 관점에 많이 익숙해 있을 거라고 보여지죠. 그 세상적인 관점의 바탕 위

에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해야 된다. 영성도 깊게 해야 된다. 영적 차원으로 옮아가야 된다.

이러다 보면은 애를 쓰면 쓸수록 본래 도달해야 할 목적지로부터 벗어날지 모른다 하는 거

예요. 이런 점에서 우리는 먼저 이 관점이 어떻게 돼 있는지, 내가 사건과 사물, 사람들을 이

해하는 시각이 어느 토대 위에 서 있는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싶은 거죠.

 

# 사건과 사물, 사람들을 이해하는 시각이 어느 토대 위에 있는지 살펴보기

 

그래서 지난 주에 이어 가지고 먼저 시를 한 수 들려드릴까 싶은데 배경 음악 삼아서 한번

들어 봤으면 하는 거예요. 기형도라는 시인이 쓴 '엄마 걱정'이라는 시의 전문이예요.

 

엄마 걱정

           기 형 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여러분들 쯤 되면은 저랑 뭐 그냥 비슷비슷하게 늙어가신다고 가정을 한다면은 그냥 이

경이 수월하게 그려지죠. 어릴 때 가끔 어머니 외출하신다고 "집 잘 보고 있어라." 이러고

가셨는데 식사 때가 되어도 안 돌아오시고, 해는 지고 이랬을 때 우두커니 방 구석에 앉아

가지고 숙제 빨리 끝내고 나면은 그 다음에 할 일이 없어지고 더 무서워지고 힘들까 싶어서

산수 문제 푸는 것 하나까지도 아주 천천히 한자 한자 적어 가면서 숙제를 하고 있는데도

그래도 안 오시는.

 

엄마가 시장에, 부잣집 엄마도 아니죠. 소나타 타고 휙익 나간 엄마, 왜 엔진 꺼지는 소리가

안 들릴까? 그런 이야기 아닌 거예요. 열무 삼십 단 이고 시골 장 서자 장터에 팔러 갔는데

그 배추잎 같은 타박타박 거리는 엄마 발자국 소리 그 소리가 아직 안 들리는. 찬밥처럼 방

안에 나동그라져 있는 나.

 

얘가 그냥 엄마 걱정을 하는 그런 장면이기는 하지마는 좀 더 깊이 보면은 여기에 나오는

'엄마' 하는 것은 그냥 단순한 엄마라기 보다는 '대모(大母)'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혹은

'태모(太母)'라고 이야기 해도 되는. 뭐 엄밀하게 구분을 하면은 다른 의미로 바뀌기도

하지마는 어쨌거나 큰(大)어머니, 우리 존재의 근원.

 

# 어머니, 우리 존재의 근원

 

애가 바깥에 나간 엄마 돌아오기를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그 엄마를 향한 목마름,

갈증, 그 엄마와 하나 되기 전까지는 마음의 평화나 기쁨이 있을 수 없는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인 거 아닌가? 하느님 당신 자신 안에서 완전히 쉴 때까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표현

이기도 하죠. 그리고 하느님 당신이 주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평화 속에 머물  때까지.

 

그래서 그 예수님과 그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를 이룰 때까지는 아직도 불안하고, 두렵고,

초조하고, 목마르고, 허기지고 이게 우리의 모습인 거 아닌가? 그래서 여기에서 엄마 걱정

하는 게 오히려 얘가 엄마를 막 기다리고 있는 이 모습, 우리 인간들이 하느님을 찾아서 헤

메고 있는, 우리 존재의 근원자리를 더듬어서 막 방황하고 있는 이런 모습들을 빗대어서 이

야기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느낌인 거예요.

 

이 애가 얼마만큼 엄마를 그리워하고 사모하고 있는지, 이 모습처럼 우리 안에 근원을 향한

열망들이, 내 존재의 뿌리에 대한 목마름들이 그렇게 절실히 강하게 있다고 보여지는 거예

요. 그 단적이 표현이 여러분들이 이런 데 앉아서, 딱딱한 의자에서 강의를 들으려고 이 귀

한 시간에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나,

 

혹은 댁에서 TV를 틀고 다른 재미있는 주말 연속극도 많은데 그것 놔두고 굳이 성 이냐시오

의 영신 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하는 이 수면제 비슷^^* ~ 방송을 들어보려고 체널

을 돌리는 이런 모습들이 전부 사실은 의식화 되고 있지는 못하지마는 우리 존재의 근원을

향한 열망들, 그 목마름들이 아닌가?

 

그래서 이 영적 차원, 근원을 향한 목마름을 향해서 나아갈 필요가 있는데 이 부분은 영의

차원 하는 것은 역설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단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싶어요.

 

# 영의 차원은 역설로 가득 차 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지마는 영적인 차원과 육적인 차원 구분을 했었죠. 이 육적 차원 하

는 것이 우리가 보통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쓰는 그 지성이라든지, 감성, 심리, 지식, 이런

이야기들인 거죠. 이런 것들이 중심이 되어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들의 바탕 위에서

쭈욱 움직이는 이게 육적인 차원인 거예요.

 

그런데 영의 차원에서는 이런 지성, 감성 대신에 영성하는 차원이고 여기서는 육적 차원

고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 육적인 차원에서는 철저하게 분리시키고, 분석하고, 경쟁하고,

경쟁하다 보니까 서열을 메기게 되고. 이것이 육적 차원 혹은 세상 차원을 특징 짓는 중요한

요소들인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영적 차원하는 것은 통합을 이뤄내는 거예요. 통합을 이뤄내는 것이고 경쟁

하고 서열을 메기는 것이 아니고 요즘 뭐 잘 쓰는 말로 상생(相生) 한다 그럴까, 조화를 이뤄

낸다고 그럴까? 이런 모습들(통합, 상생, 조화)이 영적 차원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인간 한테는 이 양측면 중에 택일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거예요. 육적 차원에만 떨어져서도

안 되고, 영의 차원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 육적 차원에만 있어소도 안 되고 영적 차원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그런데 물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은 또 이야기의 엄밀성을 이야기를 하면은 좀 다른 차원

이기도 해요. 우리 지난 주에 그런 이야기를 했었죠. 물질이 있고, 몸이 있고, 정신이 있고,

혼이 있고, 영이 있고 그러면서 저 위에 혼과 영을 합쳐서 영의 차원이라고. 그리고 밑을 육

의 차원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죠.

 

그렇게 맨 하위 존재의 형대로부터 상위 존재의 형태로 가면서 영의 차원, 저 상의 존재에

있는 영의 차원을 이야기할 수도 있지마는 또 전체의 각 차원이 전부 영적 차원을 드러낸다.

물질을 중심으로 한 영성 내지는 영적 차원, 몸을 중심으로 한 영적 차원, 그 다음에 정신을

중심으로 한 영적 차원 내지는 영성이라고 그럴까?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는 거예요.

 

 

 

# 전체의 각 차원이 영적 차원을 드러낸다

 

마치 사다리처럼. 사다리는 맨 밑에 거부터 해 가지고 쭉 올라가면서 맨 위에 발판인 사다

리도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다리 전체가 나무로 되어 있는 사다리라면은 맨 밑에 있는

것도 나무로 된 사라리고, 고 위에 단도 나무로 된 사라리고 이래서 밑에서부터 위에까지

전부 나무로 된 사다리인 거예요.

 

그렇게 영성 내지는 영적 차원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아니면은 육과 대비되는 그래서 맨

윗단계로서의 영적 차원을 이야기할 수도 있는 거죠. 어쨌거나 여기서는 어느 한 쪽을 택일

을 하면은 안 된다. 그랬을 때는 두 개를 분리했을 때, 즉 여기서 영적 차원하는 것은 높은

존재 수준으로서의 그 영적 차원, 그것을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것만을 취해서는 안 되고

밑에 있는 육의 차원만을 취해서도 안 된다.

 

우리 이 두 개는 함께 가지 않으면은 안 된다 하는 거예요. 이 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우리가 관점을 변화시킨다. 새롭게 좀 사물을 본다 이럴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두 개를

나누기만 하고 나눈 가운데 그 둘로 나눈 것을 반드시 우열의 차이를 두고, 우월한 것은 취

하고 열등한 것은 버리려고 하는 이런 모습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여정에 있어서 가장 걸림

돌이 되는 관점이다 하는 거예요.

 

* 우열을 나눠 우월한 것만 취하려는 모습, 영적 여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

 

그런데 세상 사는 것 보면은 거의 대부분이 이런 관점에서 살고 있죠. 더 좋은 대학교에 보내

려고 그러고, 더 좋고 비싼 집에 가서 살려고 그러고, 월급 더 많이 주는 직장에 가서만 취직

하려고 그러고,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적당히 무시하기도 하고 이러면서

피라밋의 조직이 되어 있는, 서열이 쭉 매겨져 있는 이런 관점 속에서만 움직이는 것. 이 관

점 혹은 그런 생활 태도가 과연 바람직하고 좋은 것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는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하는 거예요.

 

# 모든 것에 서열을 정하는 관점이 과연 옳은 것인가?

 

우리는 늘 두 개는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서 나눠져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하느님

은 하늘의 하느님으로서 따로 계시고, 우리는, 인간은 서강대학교 위에 이렇게 운동장 위에

따로 이렇게 있고, 남자는 남자대로 이렇게 있고, 여자는 여자대로 있고, 똑똑하고 잘난 사

람은 저기에 저렇게 있고, 못난 사람은 구박을 받으면서, 서러움을 겪으면서 여기에 이대로

있고, 이런 식으로만 쭉 생각하고 움직이는데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근본적인 수정을 가하

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랬을 때 제가 곧잘 예로써 이렇게 들고 들어오는 것이 음양의 태극도인 거예요. 이 음과

양 하는 것. 우리 태극기 안에 있는 그 태극 마크인 거죠.

 

 

 

이 밝은 부분은 양이죠. 어두운 부분을 우리는 음이라고 그러죠. 그런데 이 양 안에 보면은

이렇게 어두운 음이 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어두운 음 안에 보면은 밝은 양이 좀 있고. 이

말은 100% 양이라든지, 100% 음은 없다. 음과 양이 늘 합쳐서 100을 이루고 있고, 그 100을

우리는 이름해서 태극(太極)이라고 그런다. 중요한 것은 이 태극인 것이지 양이 더 좋다든지

음은 더 나쁘다든지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해서는 곤란하다. 늘 관계 지어서, 짝을 이루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관계 지어서, 짝을 이루서서 생각하기

 

제가 곧잘 드는 예들이기는 한대, 여기 지금 여자분들이 방청하고 계시죠. 이 세상에 사람

이라는 사람이 전부 여자들만 있다면은 여자들은 절대 여자라고 안 할거라는 거예요. 여자

라는 것은 남자라는 것을 앞에 대로 세워 가지고 그 남자하고 대비해서 여자고, 남자고. 그

러니까 만약에 남자가 없어진다면은 여자도 없는 거지. 물론 여자들끼리 모여서 자기들 나

름대로 이름을 붙이겠지마는 적어도 그때는 남자하고 짝을 지은 여자는 절대 아닌 거죠.

 

어른과 아이도 역시 마찬가지죠. 전부 어른들만 있다면은, 애가 없다면은 아이도 그 무슨

어른이라고 그러겠어요. 어른 하는 것은 어린애 하고 짝을 지워서 그러는 거지. 아름다움과

추함, 강함과 약함, 높음과 낮음, 똑똑함과 우둔함, 성실함과 게으름, 세상 만사가 전부 그렇

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이거는 우선에 생각하는 차원에 있어서 그런 거죠.

 

하도 이제 여러군 데서 제가 써먹어 가지고 좀 식상한  느낌이 들기도 한데 여러분들 혹시

졸까 싶어서 예를 들면은, 제가 곧잘 드는 표현이 이효리 씨 이야기죠. 탈렌트들 이름을

잘 모르는데 계속 제 귀에 제일 많이 들린 이름이  이효리 씨인 거예요. ?공개적으로 막 이

렇게 사람 이름 호명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마는. 그래서 제 머리 속에는 아름다움의 여신,

화신 이러면 이효리인 거예요. ^^*~~~

 

그런데 이 세상 천지에 모든 여자가 이효리라면은, 이거는 이효리처럼 아름다운 게 아닌 거

예요. 요즘 맞아요. 제 귀에 하나 더 들어온 이름이 김태희 ^^*~~~ 뭐 김태희 씨도 있고, 이

효리 씨도 있고, 아, 우리 서강대학교 MBC 아나운서 손정은 씨고 있죠. 그런 식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많이 있다 이러면은 아마 아름답다 이럴 수도 있겠어요.

 

이런 아름다움도 있고 저런 아름다움도 있고, 그런데 그게 아니고 마치 여러분들한테 유인

나눠 준 것처럼 복사기로 찍듯이 여자가 전부 이효리만 있다면은 똑같이 생긴 거예요.

그러면은 그 이효리를 보고 늘씬하고 멋있다든지, 아름답다든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

느냐?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래 탄탄하게 바쳐주니까.^^*~ 이효리의 아름다움이 그대

로 딱 드러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없어져 버린다 하면은 이효리의 아름다움 내지는 이효리 자체

도 같이 죽어버리는 거예요. 이점에 대해서 우리가 확실하게 설 수 있는가 하는 거예요. 그

관점 위에서 움직일 수 있겠는가?

 

# 서열을 생각하지 않는 관점, 그 위에서 움직일 수 있을까?

 

이거는 무슨 인신론적인 거창한 논리를 펴자는 이야기도 아니고, 무슨 영성적인 탁월한 체

험을 하자는 이야기도 아니고 지극히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인 거예요. 여러분들이 큰 아들

은 공부를 잘해 가지고 서울대를 다니고, 작은 아들은 공부를 못 해 가지고 대학교도 못 가

고 삼수, 사수 해 가지고도 학교를 못 가고, 그냥 낭인처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그때 그 두

아들을 똑같은 값으로 바라보고 점수를 메길 수 있겠는가? 이런 문제들인 거예요.

 

지극히 구체적인 우리의 삶 하고 연결 돼 들어오는데 생각을 하는데 있어서 아름다움과 추

은 같이 있어야 아름다움도 있고, 아름다움도 있어야 추함도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는 그것보다도 더 깊은 것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이 음(陰)과 양(陽)이라는 전혀 반대되는

두 개가 이런 식으로 나뉘어지지 않으면은 안 된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가장

큰 특성은 성장하는 데 있는 거예요.

 

# 하느님 나라의 가장 큰 특성은 '성장'

 

복음서에 보면 여러 가지 비유들이 다 그것을 암시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12살 때 사건,

예수님 12살 때 가출하셔 가지고 아버지, 어머니 애 먹이셨죠. ^^* 그 이야기를 마감 하면서

루카복음 사가가 그러고 계시죠. "예수님께서는 몸과 지혜가 날로 튼튼하게 자랐다."(루카

2,40 참조)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완전 무결한 존재로, 완성품으로 딱 있어 가지고 그냥

그게 그대로 막 진행이 된 이것이 아니고, 예수님 당신 자신도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분이 점점 자라나시는 거예요.

 

밀가루 반죽에 누룩 조금 넣어 놨더니 밀가루 전체가 부풀어 오르는 거예요. 모든 것이 이렇

게 자라는 거예요. 겨자씨 한 알 심었더니 새가 와서 깃들일 정도로 큰 나무가 되는 것. 주의

기도, 기도하는 번 가르쳐 달라고 그랬을 때 주의기도 가르쳐 주신 이것도 그 염경기도, 30초

도 안 걸리는 주의기도를 하고 있는 가운데 그것이 5분짜리 묵상이 되고, 30분짜리 묵상이

1시간짜리 묵상기도로 발전을 하고 관상으로 까지 이어지고 기도가 그렇게 깊어지는 거예요.

 

여러분들 마음 맞는 사람끼리 둘만 ?모여서 내 이름으로 기도해라. 다 이루어주겠다. 아무리

보기 싫은 집단이라 하더라도 거기 가면은 나하고 그래도 말이 통하는, 마음이 통하는 한 명

정도는 있기 마련이죠. 세명, 네명도 아니라 둘만 맞추어라. 그러고 나면 거기에서 마음 맞는

사람이 셋이 되고, 다섯이 되고, 열이 되고 이런 식으로 커나가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렇게 쭉 커나가는 것. 커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누어져야 된다. 서로 다른 둘로.

 

#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누어져야 한다

 

인간이 태어나는 것을 보면은 난자와 정자가 결합을 해 가지고 세포가 형성이 되면은, 수정

란이 형성 되면은, 그때부터 분열하기 시작하죠. 둘로 쪼개지고, 넷으로, 여덟으로 ... 이렇게

계속 쪼개져 나가야. 분리하고 나누는 것. 아까 양(陽)을 육이라고 하면은 이 육은 분리가 가

장 큰 특징이죠. 음(陰)은 영이라고 하면은 분리가 아니고 통합, 일치인 거예요.

 

* 양(陽)  / 육(肉) ㅡ 분리   ㅡ 다(多)

* 음(陰)  / 영(靈) ㅡ 통합, 일치 - 일(一)

 

나누고 결합하고, 결합하고 나누고. 다른 말로 이야기 하면 분리는 다(多)의 세계죠. 多의

세계를 계속 향해 나가는가 하면은 통합(一) 하나의 세계로 계속 움직여져 나가야 되는 것.

그럴 때 비로소 성장이 제대로 일어나는 것. 이것이 여러분한테 너무나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중세 때만 해도 그 모든 인간의 삶의 중심으로, 교회 중심으로만 쭉

지속이 돼 왔죠. 그러다 보니까 예술이라든지, 과학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성장하고 발전하

기가 힘들었죠. 근대에 들어오면서, 르네상스가 오면서 과학이 떨어져 나오고, 예술이 떨어

져 나오고, 도덕이 떨어져 나오고, 교회로부터 분리되는 움직임들이 시작 하죠.

 

그러다 보니까 예술도 훨씬 더 깊은 아름다움이 움터 나오게 되고, 과학도 천동설에서 지동

설로 바꾸게 되죠. 하늘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라고. 그 과학의 발전

때문에 우리는 지금 텔레비젼 보면서 여러분들 휴식하고 그러는 거죠. 핸드폰 다 쓰고 있고.

이런 것들이 분리되어 나옴으로써 전부 엄청난 발전들을 시작하게 된 것.

 

현대에 들어오면서 점점 더 깊은 분화 내지는 전문화 현상이 일어나죠. 요즘은 전문가들 세

상이죠. 의사만 예를 들어도 의사로서 여러 가지 부분을 보는 것이 아니고, 각 전문 분야 별

로 신경외과, 내과, 정형외과, 뭐 치과 각 분야별로 나눠지죠. 하다못해 항문외과. 내가 우수

개 소리로 그러는데 이제는 나중에는 이제 항문 바깥 외과, 항문 안 내과 이런 식으로 또 나

뉠 거다 싶죠. 그렇게 전문화가 되면서 우리의 외연은 삶의 폭이나 넓이나 깊이는 점점 발달

됐죠. 대단히 아름답고 좋죠.

 

# 전문화, 분화 되면서 우리의 삶은 점점 발달, 그런 중심 축이 있어야 함

 

그런데 이것은 가운데서 잡아주는 중심 축이 없으면은 계속 확장되어 가다가 어디로 쳐박혀

버릴 것 아닌가? 이런 점에 대한 반성이 요즘 다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융복합운동' 으로

학 사회 안에서도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나죠. 이제는 전공의 벽을 뛰어 넘는 것. 학과의 벽

뛰어 넘는 것. 전문 영역의 벽을 뛰어 넘으면서 서로 간에 합쳐서, 융합해서, 복합적으로 연

구하고 개발하는 것. 하나가 되는 운동. 그것이 더 중요해지는. 

 

#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해 지는 세상

 

이런 세상으로 접어들기 시작하고 있죠. 이게 역시 나눔과 합침이 끊임없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는 거예요. 돌을 끈에다가 묶어서 돌릴 때, 원 운동이 일어나는

이치하고 꼭 마찬가지인 거예요. 아름다운 원 운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돌이 바깥

으로 튕겨나가려고 하는, 더 큰 원을 그리면서 커져 가려고 하는 원심력이 작동해야 되죠.

그런데 그 원심력만 있으면은 빙빙빙 돌다가 어디든지 손 놔 버리면은 원심력만 있게 되니까

어디 가서 처박혀 버리죠.

 

그런데 손이 꽉 쥐고 있는 것, 잡고서 빙빙 돌릴 때 구심력, 잡아주는 중심축이 있을 때

로소 큰 원운동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것. 이거는 구심력, 하나가 되는 운동, 영의

차원에서 통합시켜 내는 움직임. 이 하나가 딱 잡고 있고 육의 차원에서 지성의 차원에서

끊임없이 분리하고, 분석하고 많은 것을 향해서 펼쳐나가는 차원이 같이 들어와야 된다

하는 거예요.

 

* 영적 차원(통합) + 육적 차원(분화)

 

이것이 우리한테 아주 중요한 것 아닌가? 그런데 만약에 한쪽을 놓쳐버리면은 ?우리의

성장이라는 것은 멈추게 되고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니까 중세 때를 우리가 전근댈고

그러고, 그다음에 르네상스를 중심으로 해서 근대라는 시대를 거치고, 그다음에 요즘

와서 탈근대, 근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 이게 대학으로 치면은 근대에서는 전공

학과가 계속 나뉘어지고 전문화를 향한 움직임이 계속 일어나다가 다시 모아들이려고

하는 움직임. 이런 것들이 일어나는 그런 상황이죠.

 

이 근대에서 놓쳐버렸던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전근대에서는 알다시피 모든 것이 종교

내지는 신(神) 중심으로, 하느님 중심으로, 교회 중심으로 모든 것이 움직여져 왔던 거예요.

사회생활도, 학문적인 활동도, 예술적인 활동도.

 

그런데 그게 나누어진 것까지는 좋은데 그래서 학문이 발달되고, 도덕이 분화되어 나오고,

예술이 쪼개져 나오고 이것까지는 좋은데 이때 전근대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던 '종교'하는

것 혹은 신(神)하는 이 것,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영성이라고 얘기해도 ?좋겠다 싶은 거

예요. 그냥 오히려 이게 더 본질적이다 싶으니까. 이 영성까지 마치 하나의 조각인 양 전락

해 버린 거예요.

 

# 근대에는 영성마저도 하나의 조각으로 전락

 

피자, 피자 한판 사면은 금들 딱딱 그어나 가지고 피자 한 조각씩 떼어 먹게 돼 있죠. 종교

는, 종교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미사를 드리고, 예비를 보고 이럴 때 그것이 하나의

종교이기도 하지마는 전체가 또 하나의 영성이기도 하죠. 영적 차원 하는 것도 맨 높은

단계에 있어서 영적 차원이 있는가 하면은 전체가 또 영적 차원이기도 한 것처럼 종교 내

지는 영성이라는 것은 고부분만 따로 떼 내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마는 전체가 또 하나의

영성이다 하는 거예요.

 

# 영성은 중심축이지 여러 조각 중 하나가 아니다

 

그런데 그 조각 중에 하나로 알아듣다 보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도 그저 주일날 성당에

가서, 교회에 나가서, 미사 드리는 것, 예배 보는 것, 그것으로서 족한 거예요. 종교생활 내

지는 영성생활이라는 한 조각 먹어치운 거예요. 그다음에 애들 공부시키고, 취직하고, 이사

가고, 재테크하고, 이런 거는  또 다른 조각들인 거예요. 이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여러분들

이 신앙인입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이야기 합니까? 우리하고 다른

점이 뭡니까? 하고 묻는 거죠.

 

# 여러분들이 신앙인입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이야기 합니까?

  신앙이 없는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이점이 우리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고 또 되어야 할 문제들이죠. 그러다 보니까 신앙인

이라는 사람들은 더군다나 가톨릭 같으면은 고백성서 제도라는 게 있으니까 막말로 그러죠.

일주일 동안 실컷 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죄 다 짓고, 주일날 가서 고백성사 딱 보면서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해져서 다시 와서는 6일 동안 또 죄짓고.

 

애 학교 보내는 것, 남편 직장 얻는 것, 좋은 며느리 구하는 것 ... 딴 사람들도 누릴 것 전부

다 누리고 거기에다 덧붙여 가지고 마음의 평화까지도 얻으려고 하는 것. 여러분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욕심사나운, 볼성사나운 사람들 아니냐? 라고 이야기를 하면은 딱히 변론할

말이 궁생해지죠. 사실은.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근대가 놓쳤던 점들이, 세상이 놓치고 있는

점이 중심 축으로서의 영성을 놓쳐버리고 있는 거예요.

 

# 세상이 놓친 것은 '중심축으로서의 영성'

 

이러다 보면은 전문화 되고, 세분화 되고 마치 세상이 크게 발전하는 것 같지마는 나중에는

폭파해 버릴 위험이 있는 그런 발전인 거 아닌가? 이것 때문에 영성이라는 것이 그토록 중

요하다. 이래서 나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만이 아니고 합치는 것도 못지않게 대단히 중

요하다.

 

# 나누는 것만큼 합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것을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은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양(陽)을 선(善)이라고 하면은 음(陰)을 악(惡)이라고 할 수 있겠죠.

 

* 양(陽) ?ㅣ 선(善)               음(陰) ㅣ 악(惡)

 

선과 악도 역시 마찬가지로 먼저 생각의 차원에서 모두가 다 선만 있고 악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면은 그걸 선이라고 얘기할  재간이 없죠. 악이 있으니까 악과 비교해 가지고 선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생각하는 차원에서도 그렇지마는 선만 있으면은 계속 선이 자랄거다. 우리

고백성사 같은 거 볼 때 단골 메뉴가 그러죠.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미워했습니다.

 

내 안에 사랑하는 마음만 가득차 있으면은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마는 선만 있으면, 양만 있으면은 이것이 계속 차서 100% 될거라고 생각할지 모르

지마는 오히려 악이 없으면은, 음이 죽어버리면은 선도, 이 양도 같이 죽어버린다. 이점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

 

그래서 금슬 좋은 부부가 한번도 부부싸움 하지 않고 늘 모나리자 사촌 누이처럼 안아주고

예뻐해 주고 ?그러면서 우리는 한평생을 살았다고 그랬을 때, 그 부부가 만들어 내지는 그

사랑의 모습하는 이거는 십중팔고 질이  떨어지거나 가짜라고 보여지죠.

 

그저 큰 소리 안 나면은, 조용조용 하면은, "밥  먹자. 불 꺼라. 자자." ^^*~~그러면은 그

그것이 사랑 인양 알아들으면은 오산인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자고 있는 남편 얼굴을

빤히 보면서 그냥 소리없는 총이라도 있으면은 콱 쏴 죽여버리고 싶은 그런 충동이 안에서

막 불타오르고 있는데, 그렇다 해 가지고 그것이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고, 그 흐름을 감싸

안으면서 남편과 더불어 살아갈 때, 남편을 사랑해 낼 때, 그럴 때 비로소 이 사랑이 생생

하게 살아있는 사랑이 되지 않는가?

 

# 마음까지 감싸 안으며 남편과 더불어 살아갈 때 비로소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랑

 

남편을 향한 사랑은 그럴 때 더욱 더 깊게, 크게 자란다고 보는 거예요. 사랑은 메너리즘에

빠져 가지고 그저 무기력하게 조용히 이렇게 있는 것이 아니고, 다수의 소리와 투닥거림이

있고 그럴지 몰라도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것, 살아서 팔딱팔딱 뛰는 것. 신선도 100% 인 것

그걸 우리는 사랑이라고 분리하자는 거예요.

 

즉, 선악과 이런 문제들도 알아듣는 차원에 있어서만 선과 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선이 크게 자라기 위해서도, 사랑이 크게 자리기 위해서도 악이라든지, 미움이라든지,

무관심이라든지 이런 게 필요하다

 

# 선과 사랑이 자라기 위해서는 악이나 미움이 필요하다

 

물론 그렇다 해 가지고 악이 더 커져 가지고 선이 잡아먹혀 버려서는 그건 또 안 될 일이죠.

여기에 균형을 잡고 움직이는 것. 이것이 고요다.

 

# 선과 악의 균형을 잡고 움직이는 것이 '고요'

 

남편하고 싸우는 거예요. 대판 싸우고 밥해주기 싫고 내가 뭐 이 집에 밥 해주려고 당신하

고 결혼한 줄 아느냐고, 짜장면 시켜 먹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그렇게 고함지르면서 동시에

한편에서는 흔들림이 없는, 고요함이 있는 이 고요. 여기에서 영적 에너지가, 영적 기운들

이 올라오는 거예요. 뭐 막 고함지르면서 막 비분강개해 있으면 한쪽에서는 평화와 고요가

있고, 무슨 정신 분열증 환자냐?^^*~~~아니죠. 이 양자가 분명히 결합이 되고 공존할 수

있는 겅요. 마치 바다와 같은 거예요.

 

바다 표면은 단 한시도 똑같은 표면을 이루고 있을 때가 없어요. 파도 모양이 온갖 파도 모

양을 내는 거예요. 경랑이 일었다가 스나미라 하는 것까지 몰려 왔다가, 그런가 하면 호수

처럼 잠잠했다가, 다양한 문양을 그려내지마는 바다 속은 끄떡도 없이 조용하고, 고요하고

부동이다 할 정도로 가만히 있는 거예요.

 

이 전체의 바다. 우리 영적 차원이 그런 것 아닌가? 영적으로 큰 깨달음을 얻고, 영적 차원

에 깊게 머무는 영적 사람이다 해 가지고 모든 감동이 죽어버리는, 메말라 버리는, 조용하

기만 하면서 무기력에 떨어지는 이런 것들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 영적 차원에 머문다는 것은 메마르고 무기력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그러셨기 때문에 우실 것 다 우시고, 박장 대소하면서 웃으시고, 노래하시는 것도

좋아하셨을 것 아닌가?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영광송으로 마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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