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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5-31 조회수1,324 추천수10 반대(1)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5월 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
 
 
Blessed are you who believed
that what was spoken to you by the Lord
would be fulfilled.
(Lk.1,45)
 
 
제1독서 스바 3,14-18
복음 루카 1,39-56
 

언젠가 어떤 할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할아버지께서는 젊었을 때 아들딸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하셨다고 해요.

“나는 늙어서 절대로 자식 의지하지 않겠다. 우리들은 우리끼리 잘 살 테니까 너희들도 굳이 연락하려고 들지 말고 스스로 알아서 잘 살아라.”

그래서 자녀들과 함께 살지 않고 부부만 서로 의지하면서 살고 있었지요. 처음에는 좋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외로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찾아오고 전화도 자주 해줬으면 좋겠는데 명절 때 외에는 좀처럼 연락 한 번 하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번은 가족 모임에서 아들이 친척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더래요.

“우리 부모님께서는 우리들 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 자식들에게 절대 의지 않겠다고 또 연락도 하지 말라고 일찌감치 선포하셨다니까요. 뭐 저희야 편하죠.”

이제 와서 “내가 그때는 잘 몰라서 그랬어. 이제는 자주 찾아오고 전화도 자주해라.”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면서,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큰 소리를 치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큰 소리대로 되던 가요?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지만, 이 말이 공허한 말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기억하면서, 내가 뱉어내는 말과 하고 있는 행동들 모두에 있어서 겸손함을 잃어서는 안 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겸손함을 마치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겸손하다는 것을 알리려고 하는지 무엇인가를 충분히 할 수 있어도, “저는 못해요.”라고 부정부터 하지요. 그러나 겸손은 무조건적인 부정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겸손은 용기와 짝을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용기를 표현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이런 측면에서 진정으로 겸손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했다는 사실에 교만할 수도 있었지만 엘리사벳을 직접 찾아가는 겸손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자신의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믿는다는 겸손을 표현하시지요.

성모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지위가 높아졌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십니다. 또한 비천한 신분과 위치를 보면서 ‘못 한다’고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있어서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용기를 표현하시기에 진정으로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이 겸손을 우리 역시 배워야 할 것입니다. 괜히 허세만 부리는 모습을 버리고 또 무조건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 역시 버리고, 내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용기를 갖춘 겸손한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행복은 물건의 많고 적음이나 가격의 높낮이에 있지 않아요. 우리 눈이 평범한 것을 얼마나 귀하게 볼 수 있느냐에 달렸지요(와타나베 가즈코).


 

좋은 모범을 본 우리, 이제 우리 역시 좋은 모범을 보입시다.

어느 날,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칠판에 글을 쓰고 있는데 한 아이가 뒤에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답니다.

“선생님! 안 보여요. 대가리 좀 비켜주세요.”

선생님은 너무나도 당황했지요. 그래서 그 아이를 불러서 ‘대가리’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이상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더래요.

“집에서 우리 엄마 아빠는 대가리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집에서 엄마 아빠로부터 늘 듣던 말을 한 것뿐이었지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대가리’라는 말을 쓰면서 잘못 되었는지를 몰랐던 것이고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늘 좋은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범을 직접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 모범을 따라서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범을 따라 사는 우리의 모습을 또 다른 누군가가 보고 그대로 따라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지요. 이렇게 모든 이들이 사랑의 모범을 따를 때, 그때가 바로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된 순간이 될 것입니다.

나는 과연 사랑의 모범을 잘 실천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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