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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이냐시오 영신수련 제4강 인간을 향한 성장 과정- 영신수련의 전체적 흐름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6-03 조회수1,642 추천수5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유시찬 신부님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4강 인간을 향한 성장 과정 - 영신수련의 전체적 흐름


 

1. 과정중심 사고 : 실체중심 사고를 벗어남
    - 경험에 바탕한 현실적존재(actual entity)의 '있음'은 그 '생성' 에 의해 구성된다
    - 多(현실세계) → (창조성을 매개로) → (현재의 '현실적 존재') → 多(객체적 불멸성)
    -창조성은 물질성(수동성, 관계성, 상대성, 타율성)과 정신성 (능동성, 자유성, 절대성,

      자율성) 의 통합으로 구성된다
    - 현실적 존재는 자기초월적주체로서 자기창조적임과 동시에 타자창조적이다

 

2. 영신수련의 구조
    - 영신수련 책 [23] : 원리와 기초 '본래의 나'
    - 첫째 주간 : '있는 그대로의 나'
    - 둘째 주간 : 예수님의 공생애

 

* 그리스도의 나라, 천주강생, 유년시절, 두 개의 깃발 , 세 부류의 사람, 겸손의 3단계,

  선택 작업 및 공생애 관상

    - 셋째 주간 : 수난
    - 넷째 주간 : 부활
    - 예수님 승천과 성령 강림
    - 영신수련 책 [230~237] :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 오늘 이야기 ....

예, 저희들 이제 본격적으로 영신수련의 구조에 쫓아서 영적 여정을 걸어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영신수련의 흐름이라는 것은 대단히 역동적인 내면의 움직임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실체 중심적인 사고에 많이 익숙해 있죠. 이것을 과정 중심

으로 변화 중심의 사고로 좀 시각 교정을 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 실체 중심의 사고에서 과정과 변화 중심의 사고로 전환하기

  영신수련의 구조 살피기

 

그래서 그 점에 대해서 살펴보고 나서 영신수련의 전체적인 구조를 개관하고자 하는데

먼저 원리와 기초로부터 시작을 해서 첫째 주간, 둘째 주간, 셋째 주간, 넷째 주간, 마지막

으로 사랑을 느끼게 하는 관상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작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이제부터 좀 더 본격적으로 영적 여정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영신수련의 전체적인 흐름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그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 좇아가기 위해서 저희들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뭔가 미흡한 점이 있으

면은 바로 잡을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너무나 실체 중심적인 사고에 떨어져 있는 저희들에게 과정 중심적으로, 변화 중심적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도 함께 허락하시어, 모든 사물과 사건들을, 인간들을 좀 더 깊

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영적 여정을 통해서 저희들이 더 큰 아름

다움과 생명력을 길어 올릴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더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제4강 인간을 향한 성장 과정 - 영신수련의 전체적 흐름

 

예, 지금 사실 제 쪽에서  어떤 느낌들이 좀 있는가 하면은 이 방송으로 나가는 내용들이다

보니까 뭔가 이렇게 좀 수위 조절이라고 그럴까? 여기에 어려움이 좀 있는 게 사실인 거예

떤 깊이의 차이가 있으니까 거기에 맞추어서 좀 더 집중적으로 하면 되는데, 이게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불특정 다수의 모든 사람에게 열어 놓고 강의를 하고 방송이 나가고 있는

이러는 상황이죠. 

 

그러다 보니가 이것을 지적인 수준을 어느 정도에 맞출 것인지 그리고 거기에 따른 어떤 

마음의 움직임 혹은 영성적인 측면을 어느 정도 건드리면은 좋겠는지 이런 점에 대해서

어떤 수위 조절하는 게 그거 만만치 않다 싶은 거예요.

 

여기서 뭐 지식하는 것이 그저 대학 시험 준비하는 그런 식의 어떤 지식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영성적인 면을 건드리고, 그런 면에서 어떤 앎,

지식, 깊이 이런 내용이기도 하죠. 다 영성의 이야기가 되고, 참된 앎의 이야기가 되고,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원칙이기도 하죠.

 

# 참된 지식은 삶을 변화시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칫 잘못하면은 이것을 구분하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우리 마음 안에

적지 않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만 해도 뭔가 메모를 할 때가 있는가 하면은 지금

처럼 이런 이야기는 아무도 메모 안 하죠. 이거는 그냥 머리로 가슴으로 듣고 그냥 새겨

버리면 그만인 거예요.

 

그런데 뭐 왕양명 선생이 어떻고, 용장오도가 어떻고, 양지가 어떻고 이러면은 또 이게

무슨 시험에나 나올까 싶어서 막 몇 줄 적으려고 막 난리를 치죠. 그래, 그런 점에서 이게

지적인 어떤 앎, 삶하고 혹은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 하고는 다소 구분이 지어지는 그런

앎의 형태로 딱 분리해서 받아들이는 그런 위험이 다분히 있는 거예요.

 

# 지식을 삶과 분리하지 않도록

 

그래 가장 바람직 하다면은 어떤 면에서는 그런 식의 어떤 설명들이 나가고 있어도 그걸

전부 머리 뿐만이 아니고 가슴으로 함께 들으면서 변화들을, 내 존재의 변화와 삶의 변화

를 얻으려고 거기에 힘을 쏟아야 정상이죠.

 

# 머리만이 아닌 가슴으로 앎을 받아들이도록

 

제가 여기서 이렇게 떠들고 있다고 해 가지고 무슨 큰 깨달음을 얻어 가지고, 또 여러분들

이 또 뭐 이래 알아듣는다면 또 얼마나 깊게 알아듣겠어요. 다 고만고만 하죠. 고만고만한

고 사람들이 계속 한 발자국씩 더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거예요.

 

#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중요

 

그런 식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거기에 의미가 있고 그것을 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바라보고 용기를 얻고 나아가는 것 아닌가? 이런 게 필요한 것이지 여기에서 무슨 대단한

설법을 배우고, 여러분들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막 뒤로 넘어 가면서 탈혼 상태에 떨어지고

있을 수도 없지마는 그런 게 설상 일어난다 해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죠.

 

이게 예수님의 상황의 모습에서 이렇게 비추어서 보면은 예수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셨다 하는 이야기 보다도 거짓말 좀 보태면은 기적을 일으키셨다 하는 이야기가,

맨날 사람들 하고 먹고 마셨다. 여기에 참된 앎, 깨달음 이런 것들이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오늘을 이렇게 봤으면 하는 것은 늘 실체 중심적인 사고에 떨어져

있는데 과정 중심적으로 좀 보면 좋겠다.

 

# 과정 중심으로 바라보기

 

실체 중심이다 보니까 너는 너라는 어떤 실체가, 존재가 딱 있고, 나는 나로서 이렇게 있고

하느님은 하느님으로서 저렇게 계시고, 우리는 우리로서 이렇게 있고, 나무는 나무로서

저렇게 있고, 인간은 인간으로서 이렇게 있고, 선은 선으로서 이렇게 탁 떨어져서 좋은 모

습으로 있고, 악은 악으로서 또 딱 떨어져 있고, 모든 것이 이렇게 개별자적으로, 독립적

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그렇게 알아듣는 것.

 

극단적으로 나가면은 마치 우주 만물이 모든 존재자들과 일어나는 사건들이 마치 시계처럼

하나의 시계 안에 보면은 여러 가지 톱니바퀴라든지 이런 부속품들이 쭈욱 있죠. 그런 부속

품들이 딱 결합이 되어서 째깍째각 돌아가는 것처럼. 그래서 그 중에 톱니바퀴 하나 빠지면

은 다른 톱니바퀴 갔다가 끼워 넣어 버리면은 아무 문제없이 돌아가는 것. 이쯤으로 생각하

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인간은 그런 존재들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 인간은 부속품처럼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다

 

지난 주에도 그런 말씀을 드렸죠. 부분 안에 전체가 다 들어와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런 이야기는 모든 우주 만물의 총 주인이시고 창조주이신 그분께서 하나의 피

조물 속에, 지극히 작은 부분 속에 그대로 들어와 계시는 거예요. 전체가 부분 안에 들어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이 부분은 또 전체 안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관점들 속에서 쭉 보게 되면은 모든 존재자들은 인간 상호간에 뿐만이 아니고 자연과

인간들 사이에 있어서도 서로가 서로 연결 짓고 연결되는 가운데 하나의 존재를 이루고 있

는 것이지 따로따로 별개 독립된 존재, 개별자로서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 현실적 존재의 있음

 

이랬을 때 '있다' 하는 것. 모든 존재자들. 있음에 대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많이 하는데 이

있음 하는 것. 존재하는 것은 생성이 오히려 더 핵심 개념이다. 생성 과정. 자, 이랬을 때

우리가 이 영적 여정을 이렇게 걸어갈 때는 늘 좀 마음 한 켠에 화두처럼 물고 있었으면

하는 것은 과연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예요.

 

#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늘 나는 유시찬 신부인데요. 나는 남자인데요. 나는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

의 형인데요. 뭐 이런 식으로 늘 나, 나, 나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알아듣는

그 나 하는 것이 참된 나인가? 진짜 나인가? 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좀 생각하는

것. 지난 시간에 우리 왕양명 선생의 양지 이야기들을 좀 했었죠.

 

우리 모든 사람들 안에는 참된 앎인 이런 양지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내가 시비선악을 판

별할 뿐만 아니라 호선오악 하면서 참된 선을 행해서, 성장을 향해서, 삶을 향해서 끊임없

이 나아간다. 이런 이야기들을 했죠.

 

그런데 이때 앎 하는 거는 우리도 "너 이거 아냐? 모르겠는데. 이놈아, 이 정도는 대학을

졸업했으면 알아야지." 그리고 대학 시험 본다 이러면은 아는지 모르는지 지식에 대한 테

스트들을 하고 그러죠. 그런 차원에서의 앎하고는 다른 거예요. 양지(良知)는.

 

그런 차원에서의 앎하는 것은 지난 주에 얼핏 이야기 했지마는 성령의 활동하고 닮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죠. 단순한 지식 차원, 의식하고 있는, 생각하고 있는, 그래서 알고

있는. 나는 미사에 대해서도 알고, 대한민국 사회에 대해서도 알고, 정치에 대해서도 알고,

교회에 대해서도 알고, 그런 식으로 안다, 안다 그럴 때 '나'하는 그런 생각하는, 의식하고

있는 주관적인 나. 그렇게 생각하고 몸뚱아리를 이렇게 갖추고 있는 이게 나인가? 이점에

있어서 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왕양명 선생은 그러는 거에요. 먼저 '나'가 누군가 하는 것을 깊게 알아들을

필요가 있다. 깊게 알아들어라 하는 것은 우리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은 깨달음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양지를 지닌 존재로서의 나를 알아들을 일이지 생각하고 몸뚱아리를 가지고

있는 이런 개체적인 형체를 갖추고 있는 이런 나를 '나'라고 알아들으면 안 된다.

 

생각하고 몸뚱아리를 지니고 있고, 이런 나를 맨날 나라고 알아듣고 움직이다 보니까 온갖

어려움들에 떨어지고, 삶의 고통 속에 짓눌리게 된다. 그렇죠. 이 몸뚱아리 이게 나다 그러

면은 이 몸뚱아리 하고 어릴 때의 내 그 몸뚱아리 하고 무슨 이 사이에 연관성 같은 것이

느껴지는가?

 

우리 집에 가면, 누구든지 조그마한 증명사진 같은 흑백사진, 누렇게 빛바랜 거 하나쯤 있

죠. 앨범 뒤적거리는 거 보면. 제 집에도 가 보면은 진짜 증명사진 만한 사진 하나 있는데

조그마한 꼬마가 방바닥에 다리를 쫙 벌리고 앉아 있는 거예요. 어머니가 그때 얘기 하시

기를 "이게 니 세살 때 모습이다." 이러시는데 어머니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니까 "아, 이

놈이 난가?" 이래 생각이 들 뿐이지 그때 그 몸뚱아리 하고 지금의 이 몸뚱아리 하고 이게

외견상 봐서 이런 형체를 띤 이런 존재로 봐서는 전혀 동일성이 인정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생각하는 것도 그렇죠. 어릴 때 이 세상을 이해하고, 제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 요즘

은 세련돼 갔고 초등학교래요. 초등학교 다닐 때 내가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들을 이해하

던 그 모습하고 지금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을 이해하는 그 생각 이거는 아주 다르죠.

 

그럼 그때 그 생각은 뭐고, 지금 이 생각은 뭔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거예요. 그래서 이

런 개체적인, 형체적인 그런 나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고, 양지를 갖춘 그 '나'가 참된 나임

을 성령께서 자리잡고 계시는 그 나가 본래의 나임을 알아들어야 된다.

 

# 개체적인 나에 사로잡히지 말고 성령께서 자리잡고 계신 본래의 나를 찾기

 

이 양지는 나뿐만이 아니고 너도, 다른 존재자들도 모두 다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의

존재를 이루고 있다. 성령 안에 우리 모두는 한 형제 자매다. 이런 이야기들이 전부 같은

맥락 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들 아니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실체 중심으로 다 독립해서 떨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연결지어져서

관계를 맺고 있고 변화되어 가고 있고, 변화되고 있는, 생성하고 있는 그 핵심. 여기에 오

히려 존재의 본질이 놓여 있지 않느냐?

 

# 연결되어 있고, 변화하며 생성되고 있는 존재

 

이것을 과정철학(process theology, 過程神學) 프로세스라고 그러죠. 이 과정철학은 화이

트헤드라는 분이 이 과정철학을 이야기하셨고 신학에서도 이 이론에 바탕을 두고 과정철

학이라는 이야기를 하죠.

 

* 과정철학: 모든 존재 안에 있는 생성, 변화, 창조성을 강조

 

그런데 어쨌거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문창옥 교수님 같은 분이 화이트헤드에 대해서 연

구도 많이 하시고 많은 활동들 하고 계시죠. 어쨌거나 이런 데서 이렇게 보면은 모든 존재

자들 안에는 이 창조성이라는 것이 있고, 이 창조성이 핵심인 거예요. 끊임없이 스스로를

창조해 나가는. 그 창조성이 핵심인데 이 창조성 안에는 정신성과 물질성 양면이 있는 거

예요. 정신성과 물질성 양면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함부로 한쪽만 취해 가지고는 존재에

대한 이해를 그르치게 된다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물질성은 물질적인 면을 계속 그대로 받아들이고 접수해 가는, 받아들여서 승계해

나가는 그런 측면을 이야기를 하고, 그 물질성의 바탕 위에서 새롭게 뭔가를 변화시켜 내

는, 이런 모습들을 정신성에 해당하는 거에요.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예를 들면은 어떨까 싶어요. 이 '부모'하는. 보모라는 점이예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거예요. 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이 부분을 그러니까

화이트헤드 같은 분은 현실적 존재가 하는 것이 존재의 궁극적인 형태다 그렇게 이야기

를 하죠.

 

# 존재의 궁극적인 형태는 현실적 존재

 

이 현실적 존재라는 것이 창조성을 가지고 물질성을 다 승계하고 정신성으로서 존재라는

것이 모습을 만들어 나가고. 뭐 쉽게 이야기를 하면은 이런 식으로 볼 수 있겠다 싶어요.

내가 이렇게 매일 생활을 해 나가는데 나는 몸뚱아리 이 물질적인 측면 거의 그대로 받아

들이죠. 자고 났더니 내가 쌍커풀이 생길 턱이 없죠. 수술하지 않는 다음에는. 그냥 어제의

모습, 오늘의 모습 이대로 받아가는 거예요. 받으면서 지속될 수가 없죠. 물질적인 측면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여건인 거예요.

 

# 물질성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조건(수동성)

 

어제의 몸뚱아리인 내가 오늘도 이렇게 이어받는 거예요. 외부에서 주어지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수동적이고 그리고 상대적인 거예요. 이런 측면이 있는가 하면은

그런데 나는 또 끊임없이 정신성을 통해서 새롭게 내 모습을 가꾸어 나가죠.

 

 

# 정신성을 통해 내 안의 새로운 모습을 생성(능동성)

 

나무를 보면서 새로운 느낌, 새로운 생각을 한다든지,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앎을 집어 넣

으면서 소화시켜 낸다든지, 아 다음 주에는 내가 이런 강의를 좀 더 해 봐야지. 이러면서

뭔가 새로운 꿈을, 희망을 가져본다든지. 이러면서 이 정신성들을 통해서 내 안에 새로운

모습들을 또 막 만들어 나가죠.

 

그런 면에서 이거는 능동성이고, 여기(물질성)에는 타율적으로 주어짐에 비해서 여기(정

신성)에는 자율적으로 만들어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정신성과 물질성 이런 것도 종도

차이는 있지마는 인간만 이런 것이 아니고 식물도 동물도 모두가 다 그런 거예요.

 

개도 그냥 뭐 먹을 게 있다 해 가지고 무조건 다 먹는 게 아니죠. 냄새도 맡아 보면서 얘가

이걸 먹을 건지 말 건지 자기 나름대로 판단도 하고, 움직여 나가는 거예요. 인간에 비해서

정신성에 있어서 좀 양적차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차이가 좀 있을 뿐이지 모든 식물이

나 동물이나 존재자들은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제 이럴 때 우리도 이렇게 보면은 허파만 해도, 폐나 심장에서 움직이는 것만 해

도 외부에서 공기가 들어오고 이러면은 좋은 공기면은 더 많이 받아들이려고 하고, 그러니

까 이 신체 조직이 또 자기 나름대로의 그런 조직을 갖고 있는 겅요.

 

제 인간 전체를 봐서도 창조성을 바탕으로 이래서 움직이지마는 또 안에 일부분인 심장만

가지고, 폐만 가지고 이렇게 봐도 얘는 그 전의 폐의 모습, 심장의 모습, 조직을 그대로 이

어 받는 면도 있지마는 이 공기는 빨리 밷어내는 것이 좋겠다. 밷어낼 건가? 받아들일 것

인가?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것들도 결정을 하면서 나아가는 이 측면도 확실히 있

는 거예요.

 

# 인간 전체만이 아닌 신체 각 부분도 물질성과 정신성의 통합으로 구성

 

그래서 늘 전체 안에 부분이 있는 것이고 이 부분은, 이 작은 전체는 큰 전체의 또 부분으

로서 들어가고, 전부 이런 식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 아닌가? 어쨌거나 이 부모라는 이 측

면을 볼 때 이 부모는, 부모 내지는 남녀의 관계로 보면은 부부가 돼죠. 이 부부는 일(一)

의 존재인데, 하나의 존재인데. 하나인 거예요. 부부일심동체다 이런 이야기 하죠.

 

이 부부라는 모습이야말로 우리는 삼태극 내지는 그냥 태극의 모습 속에서 얼마든지 읽어

드릴 수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남편, 아내 여기에 부부. 이 전체가 또 부부이기도 하고.

 

 

 

이름 붙이기가 좀 뭐 해서 그런데, 어쨌든 부부는 그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 1+1=2의

관계가 아니다 하는 거예요. 남자와 여자가 결합이 되면서 부부라는 게 남자와 여자를 초월

한 당연히 부부하는 것을 보니까 부부라는 게 한 존재인가 해서 딱 보니까 남자하고 여자

하고 둘이가 떡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럼 둘인가? 해 가지고 잘라볼까? 하고 보니까 자를

래야 자를 수가 없는, 남편은 이미 아내 속에 잔뜩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남편으로

떡 있고 아내는 또 남편 안에 잔뜩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내로 탁 있는 거예요.

 

그 전체의 모습이 들어와 있으면서 또 둘로 나뉘어져 있는. 어쨌거나 이 부부하는 것은 하

나의 세계죠. 한 존재인 거예요. 그런데 이 한 존재가 남편, 아내, 남편만 해도 거기에 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기 위해서는 여기에 또 온갖 사람들, 친

척이라든지, 사회생활하면서 맺었던 사람들과의 관계라든지, 먹고 마셨던 음식, 자연이라

든지, 이 모든 게 다 들어와 있죠.

 

그런 걸 보면서 역시 아버지 어머니도 취사 선택을 하면서, 단적인 예가 이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일 건가, 말건가? 결혼을 할 건가, 말 건가? 그 고민을 잔뜩 했죠. 그러면서 이런 결

론들에 도달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것처럼 아버지는 아버지 대로, 어머니는 어머니 대로

또 역시 거기에 따를 부모가 있고 다른 인간들이 있고, 자연이 있고, 온갖 것들이. 이 모든

것들을 딱 취합하면서 '나'라는 한 존재를 만들어 내죠. 아내를 취하고, 남편을 취하면서

부부라는 하나를 만들어 내죠.

 

 

 

여기에 있는 이 모습은 전부 다(多)의 세계죠. 있음의 세계들인 거예요. 모든 이 있음들은

부부라는 이 하나의 생성 과정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렇게 많은 것들이 결합이 되어서

하나를 이루는. 그런데 이 하나는 또 그 다음에 자녀를 낳게 되죠. 자녀를 낳으면서 또 다

(多)의 세계로 다시 퍼져 나가죠.

 

# 많은 것들이 결합되어 이루는 하나

                  하나는 다시 '多'의 세계로

 

여기에는 이 부부는 엄마 아빠로부터 다른 자연 환경으로부터 물질성을 거의 그대로 답습

하죠. 그러니까 자식은 보모를 거의 그대로 닮는 거예요.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이 아까 창

조성 가운데 물질적인 측면은 충분히 이전 것을 고대로 인수인계 받는 거예요. 아빠 엄마

를 그대로 닮지마는 애들은 또 자기 고유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죠. 자기 나름대로 생

각하고, 자기 나름대로 느끼고.

 

이런 이야기들을 시작하면은 전부 창조성을 바탕으로 해서, 정신성과 물질성을 결합시키는

가운데 많은 것들을 모아서 하나로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이 하나는 그 다음에 다시 많은

것들로 나뉘어져 들어가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은 이전에 내가 이런 모스븡로 있었다든지, 지금은 이런 모습이라든지, 다음

에는 이런 모습이라든지, 그런 식으로 실체가 뚝뚝 떨어져 있는 것. 그것 하고는 다르다

하는 거예요. 계속 변화되어 가는 그 과정, 그 과정 자체, 그 변화의 과정이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가? 보고 있는 것이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인 것 아닌가?

 

# 변화 되어가는 과정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 중요

 

실체 중심적인 사고에 너무 많이 떨어져 있는 이런 거는 스님들이 가끔 예를 든다고 그러

시는데 주먹 이야기를 하죠. 주먹 이러면은 주먹이라는 실체가 탁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

예요. 주먹이 뭐냐? 그렇게 물으면 "주먹도 모르냐? 이놈아! 이게 주먹이지 않느냐!" 하고

불끈 쥐어내 보이죠. 그러면은 "그래? 그러면 그 손을 한번 펴 보아라." 펴 버리면은 주먹

이 어디로 가버렸느냐 하는 거예요.

 

주먹이라는 실체가 어디 가면은 탁 있고, 하느님이라는 실체가 어디 가면은, 강남구 송파동

송파동도 강남구인가? 송파구인가? 참 무식해 가지고 ^^*~~~ 하여튼 이런 이야기나 해야

눈들이 빤짝빤짝 떠져 가지고 ^^*~~~잘 듣고 조금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나 한다 싶으

면은 거의 탈혼의 폼들을 잡으려고 ^^*~~~ 그냥 하느님 이러면은 하느님이라는 분이 또

서초구 잠원동 뭐 몇 번지에 가면은 그렇게 탁 계시고 이런 식으로 알아들으면 좀 실체를

정확하게 알아듣는 데 있어서 미끄러져 버리는 거 아닌가 하는 거예요.

 

주먹이라는 것. 이것도 펴 버리면은 주먹이라는 거는 온데 간데없죠. 주먹이라는 것은 무슨

손가락과 뼈마디와 혈관과 힘줄과 이 모슨 것들이 딱 쥐는 이 사건, 이 하나의 변화, 이 하나

의 과정, 이 하나의 생성 이게 중요한 거라는 거. 이런 관점을 깊게 알아들을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우리도 우리 각자들도, 사람이라는 사람도 그냥 이런 존재가, 실체가 이렇게 탁 있다. 어디

든지 가도 유 신부는 유 신부대로 이렇게 탁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아니고, 계속 변화되

어 가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합쳐져 가지고, 적어도 지금은 이 전등 빛 속에서 여러분들 앞

에서 재롱떠는 녀석으로 이렇게 있는, 요것만 딱 지나면은 사무실 가서는 직원들한테 막 고

함 질러대는 그런 사람으로 탁 바뀔지 모르죠.

 

그런 식으로 변화되어 가는 모습들. 그때 그때 여러분들이 저한테 미치는 영향, 여기 공기,

분위기라든지 자연이 저한테 미치는 영향, 이런 모든 것들을 합쳐 내면서 거기에서 취사

선택하면서, 결정을 내리면서 그 다음 모습으로 옮하가고. 그래서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선택과 결정을 내리면서 변화되어 가고 있는 그 변화의 어떤 순간이라고 그럴까?

moment라고 그럴까? 이것이 오히려 존재의 근본적인 모습인 것 아닌가?

 

# 변화의 순간이 바로 존재의 근본적인 모습

 

이런 식으로 좀 알아들을 필요들이 있겠다. 그렇다면은 우리는 이 주체 하는 것이 자기 초

월적인 주체다. 받아들이지마는 초월하죠.

 

# 자기 초월적인 주체

 

그런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인간을 포함해서 자연이랑 그 많은 것들을 나한테 수렴시키는

거예요. 그 수렴을 시키면서 정신성을 통해서 프러스 알파를 시키죠.  프러스 알파를 시켜

가지고는 내가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 주죠. 이미 여러분들 안에도 제가 이미 다 들어

가 버렸죠. 정도 차이는 다 있어요. 여러분들 남편이 여러분들 속에 쑥 들어가는 것 하고,

제가 여러분들 속에 쑥 들어가는 것 하고는 정도 차이는 확실히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제가 여러분들 안에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부모 자식의 이 맥락 속에서 이 비유를 써서 이야기를 한다면은 여러분들이 죽는다 치더라

도,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여러분의 많은 모습들이 자녀들 속에 들어가죠. 생긴 모양부터

시작해서, 생각하는 거나 취미나 재능이나 적잖은 부분들이 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즉 여러분들의 모습은 이 상태세서 그냥 내 죽으면 그만이지, 죽으면은 이제 내라는 실체는

그냥 없어지고 말아버렸다. 이 이야기가 아니고 자녀 안에 들어가서 살아 있죠. 즉 개체적

으로 들어가서 불멸성을 띠는 거예요. 적어도 제가 알아듣기로는 "여러분들이 나를 믿으면

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하는 예수님의 그런 말씀도

이 몸뚱아리가, 이 생각을 가진 이 놈이 천 년, 만 년 살거다. 이 이야기가 아닌 것은 분명

하죠. 그럼 영원히 산다는 건 뭔가? 

 

# 영원히 산다는 것은?

 

이런 상황을 깊이 있게 알아듣고 깨달아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은 지금 니 몸뚱아리라든지

내 생각이 니가 아니다 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들을 필요가 있지 않는가? 이 이야기를 듣

고 나서 여러분들 안에 생각의 변화들이 좀 일어난다면은, 세상을 보는 눈에 뭔가 좀 다른

변화들이 좀 일어난다면은, 세상을 보는 눈에 뭔가 좀 다른 "어? 이게 아닌가 봐!" 하는 생

각이 들면서 뭔가 좀 달리 보고자 하는 내적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일어난다면은 그리고 그

거는 반드시 일어났을 거라고 믿는 거예요.

 

방송을 보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도 일어날지 모르죠. 그려면은 내가 이미 그 사람한테 들어

가서 그 사람을, 타자를, 다른 사람을 창조해 내고 있는 거예요. 가장 확실한 예로는 부모가

자녀를 낳는 과정 속에 확실하게 타자는 창조해 내는 모습이 있죠. 그런데 그 타자를 창조해

내기 위해서는 자기 창조가 먼저 일어나고 있는 거죠. 내가, 나는 어제의 나하고 오늘의 나는

다른 거에요. 한 시간 전의 나랑, 여러분들도 한 시간 전이랑 지금, 지난주랑 이번 주랑 다른

거예요. 자기 창조들을 계속하고 있는.

 

# 인간 존재 안에는 다른 존재를 창조해내는 모습과 나를 창조해내는 모습이 공존

 

여기에 우리 인간들의 참 모습들을 볼 수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이 창조성 하는 것이,

혹은 왕양명 선생의 표현을 빌린다면은 이 양지라는 것이 끊임없이 활동하면서 자기 일을

펼쳐나가는 것 아닌가?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 표현을 빌리면은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 안

에서 활동하시면서 인간들을 참다운 선으로, 참다운 아름다움에로 끊임없이 초대하고 매혹

적으로 끌어 당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시는 성령

 

그래서 하느님 당신 자신의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에 도달할 때까지. 이런 모습들에 우리가

깉게 눈 뜨고 거기에 맞추어서 움직이는 것. 이제 그랬을 때 여러분들은 완전한 존재다 하는

것이 이런 것들, 양지를, 성령을, 창조성을 하느님 이야기 할 때 가장 주된 첫 번째 요소가

창조주로서의 하느님. 하느님 하면 창조주죠. 우리 모두 다 창조주들이다 하는 거예요.

 

# 우리 안에 있는 창조성

 

이런 창조성에 있어서 이런 모든 것들을 한 명 예외 없이 다 갖추고 있는 것. 갖추고 있다

보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서 계속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 이 사실에 깊게 깊게 눈 뜨는

것. 그렇게 되면은 공부를 뭐 더 막 하게 되고, 이것저것 배워야 되고, 나는 불완전하니까

이것도 고치고, 저것도 고치고 계속 고쳐야 되고, 나는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르니까 이

쪽 학문에 박사도 따고, 저쪽 학문의 박사도 따서 계속 지식을 채워 넣고 그래서 앎을 잔뜩

키워내고, 잘못된 부분을 잔뜩 수선을 해 갖고 똑바로 고치고 그래야 여러분들은 구원도

받고 하느님 나라에 갈 것디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뭔가 번지 수를 잘못 잡은 것 아니냐?

 

그게 아니고 이미 다 갖추고 있다. 그런데 온갖 잡다한 자식들, 쓸데 없는 욕망들 이런 것들

이 덕지덕지 뒤덮여 가지고 이런 것들이 있는 줄 조차도 모르고 잊어버렸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이런 것들을 덜어내는 것. 비워내는 것. 이게 필요한 것 아닌가?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면은 밭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냈다. 그래서 가진 것을 몽땅 팔아버리고

그 밭을 샀다. 값진 진주를 발견했다. 진주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보물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완전

하고, 이미 진주가 있고, 이미 밭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 이것을 알아듣고 보기 시작하면은 이

것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는 거예요.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은 거기 쫓아서 "아, 이거 잘못됐구나. 사람을 키우는 것이 이런 것일 줄 알았는데 ...

아, 이것이 아니었구나!" 이러면서 쭈욱 물러 털어내느 것. 이게 왕양명 선생이 이야기한 격물.

거기에서 격물(格物)하는 것은 물(物)에 다가간다가 아니고 이것(格)을 바르게 잡는다. 바를

정(正) 자로 알아듣는 거예요. 뒤틀려 있는, 왜곡된 것을 바로 잡는 것. 이게 영신수련이지 않

느냐 하는 거예요. 영신수련 처음 첫 강의 이야기할 때 우리 그런 이야기 했죠. 잘못된 집착들,

이것들을 바르게 잡아가는 것이다.

 

# 영신수련은 잘못된 자신을 바로 잡아나가는 과정

 

우리가 앞으로 이 영적 여정을 계속 영신수련 해서 잘 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야기들인

거예요. 이런 점에서 자기 자신을 왜곡돼 있는 것을 바르게 잡음으로써 본래의 아름다움과 생

명을 회복시켜 내는 것. 이것이 우리의 영적 여정이다 그랬을 때, 그 여정을 걸어가는 데 있어

서 영신수련이라는 하나의 나침판 내지는 지도를 가지고 움직이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했죠.

 

# 영신수련의 구조

 

그래서 오늘 영신수련 전체의 구조를 좀 이렇게 봤으면 하는데 영신수련이라는 것은 전에도

첫머리에서 이야기를 했지마는 어떤 영적 훈련 활동, 정신적인 훈련 과정 이 모든 것을 그냥

보통 명사로서 영신수련이라고 해요. 그러기도 하지마는 이냐시오 성인께서 특별히 영신수련

이라는 이름의 책을 쓰셨던 거예요. 책 이름이기도 하고, 혹은 그 영신수련 프로그램이라고

그럴까? 영적 여정 전체적인 구조 자체 그것을 영신수련이라고 하고.

 

* 영신수련 : ¡ 정신적인 훈련 과정을 뜻하는 말

                 ¡¡ 이냐시오 성인의 저서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영신수련 하는 것은 모든 정신적인 활동을 영신수련이라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넓은 의미에서 영신수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이냐시오 성인이 쓰신 영신

수련 책에 바탕을 둔 영신수련 피정, 그 영신수련을 좁혀서 그렇게 쓰려고 하는 거예요.

 

* 이냐시오 성인이 쓴 「 영신수련」에 바탕을 둔 영신수련의 과정

 

그런데 이 영신수련의 과정을 보면은 처음에 이 영신수련 책을 보면은 이해가 될텐데 매 단락

마다 번호를 붙여 놨어요. 그래서 영신수련 1번, 영신수련 23번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영신

수련 23번에 보면은 이게 '원리와 기초' 하는 소제목이 붙어 있어요. 이 원리와 기초에다가 그

다음에 첫째 주간, 둘째 주간, 셋째 주간, 네째 주간 그 다음에 끝으로 230번부터 237번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이게 영신수련의 전체적인 흐름인 거예요.

 

영신수련이라는 이 책은 전자제품 매뉴얼하고는 달라요. 전자제품 매뉴얼 같으면은 코드를

꼽는다. 온도를 몇 도로 맞춘다. 뭐 그렇게 적혀 있으면은 적혀 있는 고대로 하면 되죠. 그런

데 이거는 성경과 같은 일종의 텍스트인 거예요. 텍스트다 보니까 해석을 해야 되고, 해석을

해야 되다 보니까 사람들마다 강조하는 점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좀 이런  저런 식으로 액센트가 달라지면서 다른 문양을 드러내기는 하지마는 기본적

으로 전체적인 틀은 이 구조로 가고 있는 것. 이것은 똑같은 거예요. 이것을 음양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 보면은 원리와 기초 하는 것은 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과정이다. 이렇게 생각 하

시면 되요.

 

# [23] 원리와 기초: 본래의 내 모습 찾기

 

 

 

이 본래의 내 모습. 즉 양과 음이 적절하게 균형을 갖추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완전한 모습

이걸 보는 것이고,

 

이 첫째 주간에서는 그 중에서도 양의 모습만 이렇게 보는데 이 양을 나라고 이야기 할 수

있고, 양 속에 음이 조그마하게 박혀 있죠? 이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즉 첫째 주간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기 시작하는 거에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은 안 된다. 그래서 이런 모양을 띄게

되고.

 

* 첫째 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기

 

  

 

둘째 주간에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나타내는데 음을 보는 거에요. 이 음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죠. 이 예수 그리스도 음을 봐 나가다 보면은 나 자신에 대한 이애도 깊어진다. 나 자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과의 맥락 속에서 알아 들어야 된다. 그래서 둘째 주간은 이렇게

되고.

 

* 둘째 주간: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내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기

 

셋째 주간은 수난이고 넷째 주간은 부활이죠.

 

  

 

수난과 부활은 역시 음양인데 양을 부활이라고 그러면은 음은 수난이라고 할 수 있겠죠.

원리와 기초에서 음양의 모습하고 다른 점은 여기에는 대단히 동적(動的)이다. dynamic 한

동적인 모습인 거예요. 생명과 죽음이 맞부닥치는. 그래서 격렬한 움직임이 일어나는 그런

모습을 현상화한 거예요.

 

* 셋째 주간: 수난    * 넷째 주간: 부활

 

그 다음에 이제 끝으로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인데

 

 

 

이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도 역시 또 음양으로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여기는

면은 다시 처음에 우리 출발할 때의 원리와 기초처럼 정적(靜的)인 거예요. 대단히 static한

개념. 이제 이렇게 보다 보면은 ?처음 원리와 기초에서 출발해서 첫째 주간을 지나고, 둘째 주

간을 지나고, 셋째 주간, 넷째 주간을 지나고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으로 돌아왔다.

 

 

 

이건 보면은 본래 출발했던 그 자리로 새롭게 돌아온 거예요. 우리는 이 여정을 또박또박

으로 걸어갈 거예요. 이 사이에 여러 가지 많은 능선들이 나타나고 그것을 넘어야 될텐데

이렇게 걷게 되면은 그저 제 자리 돌아올 거 뭐 할려고 하느냐? 그게 아니고 한바퀴 돌고

나면은 우리 안에 생명이라고 그럴까? 존재의 깊이가 훨씬 더 깊게 자리 잡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우리 여정을 이런 식으로 쭈욱 걸어갈 것입니다.

 

영광송으로 마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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