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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제5강 내 본래의 모습 - 원리와 기초 중 '원리'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6-06 조회수2,117 추천수2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유시찬 신부님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5강 내 본래의 모습 - 원리와 기초 중 '원리'

 

* 오늘 이야기 ...  나의 모습은?

여러분들은 자신의 모습을 어떻다고 생각을 하세요? 그저 몸이 좀 아프면은 어쩔 줄 몰라 하고

돈 욕심 많고 그리고 누가 자존심이라도 건드리면은 파르르 떨고 그런 게 혹시 자기 자신의 모

모습이고 뭐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저 일상의 타성에 젖어서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는지. 그런데 그게 과연 우리의 자신의 본래의 모습

이겠습니까? 이점에 대해서 우리 한번 깊게 짚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시작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이 여정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필요한 용기와 힘을 더해 주시어 감사

드립니다. 나날의 일상의 삶 속에서 바쁘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영적 갈망을 향한 끈을 놓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여정을 통해서 저희들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 깊게 알아들어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채워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오늘 이 시간에는 저희들 자신의 본래의 모습들, 타고난 아름다운 모습들을 깊게 알아

듣고 거기에서 희망과 힘을 길어 올릴 수 있도록 은총을 더해 주십시오. 저희들이 평소에 알고

있던 그런 모습이 아니라, 훨씬 더 아름답고, 깊고, 넓고, 좋은 존재임을 깊게 자각하고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지금까지 관점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

예, 우리 벌써 지금 5주째 들어가고 있지요. 5주째 들어가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관점의 변화라

할까?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좀더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자. 이런 촛점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시켜 왔죠.

 

* 지난 시간 ... '인간은 완전한 존재'

그 연장 선상에서 지난 주 같으면은 인간은 얼마만큼 완전하고 아름답고 좋은 존재인가? 그런

것들을 또한 과정철학 내지는 변화의 관점에서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는가? 이런 점들에 대해

서 좀 봤죠. 이제부터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본격적으로 영신수련의 구체적인 흐름을 타야 된

다 싶은 거예요.

 

* 오늘부터 ... 영신수련의 구체적인 흐름

그 말은 오늘부터 영신수련 23번에 나오는 원리와 기초 하는 내용을 봐 들어가기 시작할 건대

 

# 영신수련 [23] 원리와 기초

지난 시간에 잠시 언급을 했죠. 영신수련의 전체적인 구조

 

# 영신수련의 전체적인 구조 / 영적 여정의 구조

 

 

 

영신수련의 전체적인 구조 하는 것은 영신수련 피정의 구조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영적여정

의 구조라고도 할 수 있고 또 깊게 본래의 의미를 살려서 이야기를 한다면은 우리 인생 전체의

삶의 여정이다. 이렇게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싶은 거예요. 그랬을 때 그때 이제 지금까지는

어떤 면에서는 준비 작업이었던 거예요.

 

# 관점의 변화는 준비 작업

 

관점의 변화라고 해 가지고 새로운 각도에서 좀 사물을 바라보는 것. 이 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준비가 되고, 지금부터는 그 준비에 쫓아서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쭈욱 밟아가는 이런 이야기인

데 영신수련 [23]번 하는 것. 전에 그런 이야기 했었죠.

 

# 지금부터는 우리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기

          영신수련의 [23]번 단락 원리와 기초

 

영신수련 책에는 단락의 번호들이 붙어 있어서 그 단락 몇 번, 몇 번 이러면은 무슨 내용이다.

이런 이야기인데 [23]번 하는 게 원리와 기초예요. 이 원리와 기초에 적혀 있는 내용은 좀 있

제가 한번 좀 길기는 하지마는 읽어드릴까 하는데 이것은 이냐시오 성인으로 치면은 오도송과 

같은 거예요.

 

* 오도송( ?悟道頌 ) : 고승들이 부처의 도를 깨닫고 지은 시가

 

불가에서 선사들이 도를 깨쳤을 때, 깨달음을 얻었을 때 시를 한 수씩 읊죠. 깨달음에 대한 노래

를. 그 감탄과 찬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시를 한 수 씩 남기고 하는 거. 그 오도송, 깨달음을

얻은 노래라는 뜻이죠. 이 불가에서 주로 얘기하는 선사들께서 오도송을 남길 때는 시적 표현

들을 많이 쓰시죠.

 

그런데 이 서양 사람, 이냐시오 성인은 역시 서양 사람 답게 시를 이렇게 한 수 남기는 것보다는

하느님은 어떻고, 인간은 어떻고, 자연은 어떻고, 그래서 우리 인간은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되고

구구절절이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서술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원리와 기초죠.

 

* 동양의 오도송처럼

이냐시오 성인이 기도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후 적은 것이  영신수련

 

 

 

 

 

이냐시오 성인은 나이 서름이 되었을 때 회심을 하시거든요. 그 전까지만 해도 정말 어떤 세상

의 명예와 권력과 지위를 탐하고 그것을 추구하는데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그런 위인이

셨죠. 그런데 이분이 팜플로나 전투에서 부상당하시면서 그게 계기가 되어 가지고 인생에 있

서 완전히 대반전을 이루게 되어집니다. 그게 서른인 거예요.

 

그때 대회심을 하시면서 만데사라는 동굴에 가셔서 1년 조금 못 되는 기간 동안 동굴에서 생활

을 하시죠. 낮에는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돌보고 이런 일도 하시면서 주로 기도와 수행에 정진

하시는데 그때 10개월 내지 11개월 요 정도의 만데사 동굴에서의 생활, 그때 일어났던 체험의

집약판이 이 영신수련 전체고, 그 중에서도 이 원리와 기초가 그 내용인 거예요.

 

#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께서 회심하시면서 도대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

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야 되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게끔 불림을 받고 있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으셨던 거예요. 그래서 그걸 이렇게 조목조목 적어 놓은

것이 이 원리와 기초죠. 그 내용을 한번 읽어 드리면,

 

[23] 원리와 기초

 

사람이 창조된 것은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고 섬기며 이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다른 사물들이 창조된 것은 사람을 위해서, 곧 사람이 창조된 목

적을 추구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이 목적에 도움이 되면 그만큼

사용할 것이고, 자기 목적에 방해가 되면 그만큼 버려야 한다. 또 그 자체로 금지되지 않고 우

리의 자유 의지에 맡겨져 있는 것이 있어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해 초연해지도록 힘써

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편에서는 질병보다 건강을, 가난보다 부를, 불명예보다 명예를, 단명

보다 장수를, 그리고 다른 모든 일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더 원하지 않을 만큼 되고 오직 창

조된 목적에로 우리를 더욱 이끄는 것을 원하고 선택되도록 해야 한다.

 

이게 원리와 기초인 거예요.

 

* [23] 원리와 기초?: 이냐시오 성인의 깨달음의 축약판

 

그래서 이것은 성인의 전체적인 깨달음의 축약판이기도 하고 우리 앞으로의 영적 여정에 대한

전체적인 축약판이라고 그럴까? 그렇게 이야기 해도 된다 싶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번 주하고

다음 주에 걸쳐 가지고 이 원리와 기초의 내용에 대해서 좀 깊게 다루어 봤으면 하는 거죠.

 

# 이냐시오 성인의 기도와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들의 집약

               영신수련 [23] 원리와 기초

 

이 영신수련 피정을 하면서 원리와 기초하는 이것을 비교적 피정의 들머리에, 지금 우리 흐름

에서도 그렇지마는 피정의 들머리에 이것을 기도 자료로 떡 내어주면은 사람들이 좀 어려워하

는 거 같은 거예요. ?말마디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이래 이야기를 하는데 그러면서 기도의

어려움을 느끼고 이래 가지고 이 내용을 좀 풀어서 서 봤어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풀어서 써 준 걸 보니까 더 헷갈린데요. ^^*~~~ 그러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쨌거나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나름대로, 그러니까 현대판이라 할까? 우리 감각에

맞게 끔 풀어서 쓴 것이 이 제가 쓴 한 영신수련 하는 이 책에 실어 놨어요.

 

「 한 영신수련 」바오로딸

 

그리고 앞으로 저희들 이 원리와 기초부터 시작 해 가지고 첫째 주간, 둘째 주간, 셋째 주간,

넷째 주간 그 다음에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까지 계속 이 여정이 이어질텐데 거기에 대한 어떤

기본적인 내용 같은 것은 이 책에 좀 정리가 돼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강의를 들어가면서

혹시 도움이 되면은 이 책을 참고 하면서 보면은 이해하기는 좀 수월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이 자리에서는 굳이 뭐 열심히 적어야 되고 하시는 것보다, 목도 아프고

팔도 아픈데 그냥 이렇게 듣고 있으면서 가슴판에 새기는 것이 더 나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좀 듭니다. 어쨌거나 이 원리와 기초 내용을 현대판으로 좀 풀어서 보면은 이런 내용인 거예요.

어떤 식으로 느낌이 여러분들한테 전달이 될지 모르겠는데 원본보다는 또 좀 더 길죠. 좀 지루

한 감도 있기는 한대 한번 들어 봤으면 해요.

 

# 풀어쓴 「원리와 기초」

 

나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하고 하느님께 봉사한다. 내 영혼이 하느님과 하라를 이루고 있음

을 알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 내 삶 전체를 통해 이 점을 알아듣고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내

존재의 의미요 목적이다. 내 주위에 있는 자연을 비롯한 온갖 사물들도 하느님과 하나를 이루고

있는 내 존재가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운지를 알아듣게끔 도와준다. 사물 그 자체로 귀하고

천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나를 알고 하느님을 알아 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나를 알아가는 여정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얼마든지 이용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손도

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단순히 아픈 것보다 건강이 좋다든지, 가난한 것보다

부자가 낫다든지, 천한 취급을 받아선 안 되고 명예를 찾고 누려야 한다든지, 오래 사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세상의 기준일 뿐이며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관심에

서 먼 사람들이 붙좇는 것일 뿐이다. 끊임없이 나의 관심을 이끄는 것은 나 자신의 완전한 아름

다움과 생명이며 이를 위해 부단히 애쓴다. 그 모든 것들은 이러한 내 존재의 본래 모습을 똑바

로 알아듣기 위한 도구들일 뿐이다.

 

어때요? 이게 더 알아듣기 쉬운가? 대답 안 하네!^^*~~~

예, 어쨌거나 지금 이런 내용이예요. 그런데 이 원리와 기초를 알아듣기 위해서 우리 좀더 구체

적으로 따져서 들어가 보기는 하겠지마는 원리와 기초 이 부분을 예컨대 좀 전에 봤던 부분 그

런 거 있죠. 뭐 이 질병보다 건강을, 가난보다 부귀를, 모욕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를 더 원

하지 않을 것이요. 이런 이야기들. 이거 우리 보통 이야기 하는 것, 전에도 이런 이야기 한번 얼

핏 나왔던 것 같은데 불편심이라고 한다 그랬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

 

# 불편심(不偏심) :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

 

그런데 벌써 이 부분만 보더라도 우리가 보통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움직이는 생각이나 태도

하고는 다르죠. 이런 것들이 그저 말로 액자에 떡 적어 가지고 벽에다가 장식용으로 걸어 놓을

것이 아니고, 내 삶 안에 들어와서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 논리 구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는 좀 다른 관점에서 봐야 되고 그런 점에서 관점의 변화라를 것이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했었죠.

 

그래서 그런 관점의 변화에서 요청되는 것은 이월대립론적인, 둘로 나누고 우열을 짓고, 거기

에서 한쪽을 취하고 한쪽은 버리는 그런 관점이 아니고 이중성 구조 속에서 바라봐야 된다. 이

런 이야기들 했었죠. 이 이중성(二重性) 구조 하는 이 이야기는 지금은 서강대학교에 석좌 교수

님으로 와 계시기도 한대 우리나라 철학계의 거두시죠. 이작 내 이분만큼 학문적 깊이에 있어서

탁월하신 분을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 분으로 여겨지는데 김형효 교

수님이 하이데거 철학을 분석하시면서 주로 쓰신 단어가 이 이중성 구조 하는 거예요.

 

# 이중성 구조(二重性) 구조 ㅡ 김형효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것

 

그래서 서로 따로따로 독립해서 떨어져 있는 그런 존재로 알아듣는 것이 아니고 마치 음양을

이루는 태극처럼 음 안에 양을 품고 있고, 양 안에 음을 품고 있고, 그러면서 함께 하나가 되어

서 어우러져 걸어가는 그런 관점. 그래서 이 관점의 변화를 우리는 좀더 생각을 하면서 떠올려

야 되죠. 이런 이야기들이 화엄학에서 이야기하는 불일이불이 하는 관점하고도 마찬가지죠.

 

# 불일이불이(不一二不二) ㅡ 화엄학

        하나가 아니면 둘도 아니다

 

불일, 하나가 아니다 하는 거예요. 하나가 아니면서 불이, 둘도 아니다. 이것을 우리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면은 일원론적인 관점을 취하자는 것도 아닌 거예요. 이원론적인 관점을 취한

이래 가지고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이래 가지고 이원론적인 관점을 취하자는 것도 아니다

하는 거예요. 일원론적으로 마치 하나도 통합된 듯한 이런 관점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마는

일원론으로 묶어 내려고 하는 여기에는 역시 이원론적인, 둘도 쪼개고 나누는 그 관점이 배경

에 깔려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런 일원론도 아니고 불이, 이원론도 아니고, 불이, 하나가 아니다 해서 그러면 둘인가

하고 들여다 보니까 불이, 둘도 아닌 거예요. 둘이 아닌가? 그럼  둘인가 해서 보니까 아니, 둘이

아니다. 그냥 상징적인 개념으로 그대로 이 음양의 원리 이런 모습인 거예요.

 

 

 

원효스님께서 즐겨 쓰신 표현 그 개념으로 하면은 융이불이입 하는 관점인 겅요. 융이, 둘을

섞는다. 이 말이죠. 둘을 융합한다 하는 거예요.

 

# 융이불이일(?融二不而一) ㅡ 원효

      둘이 융합한다고 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둘을 융합한다 해 가지고 불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하나가 아닌 거예요.

둘을 섞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하나를 떡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지난 주 같으면

은 부부 개념을 들었던 것. 딱 그런 모습인 거예요. 부부라는 그 존재 안에 부부 하나만 딱 있

는가 해서 보니까 엄연히 다른 남편과 아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남편과 아내라는 완전히 쪼개질 수 있는 둘인가? 그러면서 딱 보니까 아니, 남편은 아내

속에 들어가 있고, 아내는 남편 속에 들어가 있는, 하나를 이루고 있는. 그런 관점 속에서 이해

하지 않으면은 원리와 기초를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다 하는 거예요.

 

# 달라진 관점으로/ 원리와 기초 바라보기

 

그래서 이런 좀 다른 관점, 크게 말해서 서양의 관점과는 다른 동양의 관점 속에서 좀 바라보는

거예요. 서양의 관점 하는 거는 일직선적인 선형적인 그런 관점이죠. 직선을 향해서 곧장 나아

가는. 그런데 동양의 관점은 물고 물고 도는 ?원형적인 관점 이게 동양적인 관점이죠. 아주 상징

적으로 멋있게 드러나는 모습이 가위바위보 하는 거예요.

 

가위바위보. 가위에 바위가 이기죠. 바위가 이기는데 이 바위를 또 보가 이겨버리죠. 그런데

이 보는 또 가위가 이겨버리죠. 이 물고 물고 이겨버리죠. 내가 이 사람을 이겼는데 오히려

내가 이 사람을 통해서 도로 져버리는. 이게 그대로 돌면서 엮어지고 있는 그 논리 체계.

승자는 승자대로 패자는 패자대로 딱 구분지어져 있는. 그래서 다른 존재가 아닌 거예요.

승자와 패자가 하나가 되어서 움직여지고 놀고 있는. 하나의 놀이가 있는 이런 모습들. 이게

우리가 존재들을 이해하고 있는 사고방식이다 하는 거예요. 이 관점에서 원리와 기초를 보는

거예요.

 

# 영적 여정의 중심이 되는 것은 사랑

 

그런데 원리와 기초를 이렇게 보면은 지난번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23]번 원리

와 기초부터 해 가지고 우리 앞으로 여정이 그런 거예요. 첫째 주간, 둘째 주간, 셋째 주간, 넷

째 주간, 그 다음에 사랑을 느끼기 위한 관상. 제가 알아듣기로는 우리는 이 영적 여정의 전체

는 사랑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사랑의 긴 터널을 통과해서 나오는, 그래서 우리는 각 단계

별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고 기도들을 하고 더듬어 보겠지만? 하나의 화두는 사랑이예요.

사랑이 뭔지 제대로 알아들으면은 그 모든 것이 풀려버린다.

 

# 사랑이 무엇인가?

 

 

 

이 사랑이 뭔지 알기 위해서 여기서도 찔러보고 저기서도 찔러보고 계속 더듬는 거예요.

온갖 기도 자료들을, 내 모습들을, 사람과 사회의 모습들을 가지고 와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품기도 하고 뱉어보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계속 하겠지마는 알아듣는 것은 사랑

이라는 이 화두 하나라는 것.

 

그러면은 맨 끝에 나오는 여기는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이니까. 아, 사랑... 유감 없이 탁 들어

오죠. 그런데 조금 전에 제가 읽어드렸지마는 원리와 기초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단 한마디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리와 기초를 관통하는 원리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랑이다

하는 거예요.

 

# 원리와 기초의 핵심은 사랑

 

그러니까 여기에는 사랑이라는 말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는 있기는 하지마는 사랑이 원리가

되어서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이 어떤 관계에 놓여지는지 그리고 그렇게 사랑을 아는 사람이

라면은 어떤 식으로 행동을 취하면서 걸어가는지 이런 것들을 조목조목 적어 놓은 거예요.

그래서 이걸 처음에 보면 그러죠. 인간은 뭐 하느님을 공경하고 찬미하고 봉사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조성된 존재다.

 

뭐 이런 이야기들을 쭉 하면은 어릴 때 교리문답 서적 같은 거 보면은 교리문답 책 맨 앞에 나

옴직한 내용들이죠. 그런 것들을 이래 쓰윽 떠올리면서 마치 원리와 기초라는 것이 이 가톨릭

의 교리적인 지식이나 나열해 놓은 것인양 하느님은 어떻고, 인간은 어떻게 그래서 인간은 어

떻게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되는지 그런 행동 준칙을 적어 놓고. 이쯤으로 이렇게 알아들으면

은 완전히 핵심에서 빗나갔다고 보이는 거예요. 그런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지식 늘어놓자는

것이 아닌 거예요.

 

# 원리와 기초는 신학적, 교리적 지식이 아니다

 

이냐시오 성인께서 머리의 차원을 넘어서 훨씬 깊은 데 들어가서 깨달음의 차원에서 모든 존재

를 관통하는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을 관통해버리는 이 원리와 기초를 알아들으시고 그거를 한

마디씩 한마디씩 ?뱉어 놓으신 겁니다.

 

# 사랑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법/사랑으로 살아내고 움직이는 법

 

그래서 그 핵심 속에 사랑이 있으면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 나아가서 자연,

이 상호 관계가 어떻는지 그 사랑 속에서 특히 사람은 어떤 식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어떻게 움직이는 것인지 이런 것들을 쭈욱 이야기를 해 놓은 것이죠.

이런 점에서 역시 원리와 기초도 철저하게 사랑이 중심이다. 그리고 이 사랑을 알아듣는데야

말로 이중성의 구조가 철저하게 녹아들어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것은 혼자서 뭘 사랑하는 것, 짝사랑이라고 해 가지고 단어는 만들어 놨지마는

짝사랑은 본래의 사랑 아니죠. 사랑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받는 사람 두 존재를

상정하기 마련이죠. 두 존재 사이에서 사랑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은 사랑을 한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 이럴 때 벌써 사랑한다 하는 것은 나를

상대방에게 일정부분 내어주는 부분이 있고 또 상대를 일정부분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죠.

 

#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일부를 상대에게 내어주고 상대의 일부를 받아들이는 것

 

이 사랑이야말로 그렇게 보면은 역시 불이이불이(不一而不二) 인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거예요. 반드시 상대를 상정을 하고 나를 내어주는 거죠. 그래서

하나가 아니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은 또 상대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둘을 합쳐서 봐도

그냥 뒤섞여 버리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나대로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역시 나를 내어

주고, 역시 저쪽은 저쪽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는 가운데 내가  또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이

내 안에 들어온다 하는 것은 그만큼 내 자신은 고 부분만큼은 죽어버리는 것이기도 하죠.

 

# 다른 사람이 내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내 자아의 죽음이기도 하다

 

내 자아의 죽음을 이야기하기도 하는 거예요. 이거야말로 또 역시 예수님께서 늘 이야기하셨던

것 여러분들은 죽어야 살 것이다. 살기를 원하느냐? 죽어라. 자아에 대해서. 니가 니라고 생각

하는 그 점에 대해서 죽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사랑에서야말로 참으로 그러지 않느냐 하는 거

예요. 상대방을 사랑해서 그 상대방을 내가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만큼 내 생각을 관철시키고

내 주장을 펴고 싶고, 내 영역을 확보하고 싶은 고 부분만큼 내어줘 버리는, 고 부분만큼 내가

죽는 거예요.

 

그 내 죽음 속에 생명이, 기쁨이, 평화가 그렇게 움터나오는 것 아니냐 하는 거예요. 이런 점에

서 사랑이야말로 역시 이중성의 구조,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라든지 융이불일(融二不一)이라

든지 이런 관점에서 확실하게 서 있는 것이고 이것이 역시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도 철저하게 이중성의 구조로

알아들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 하느님과 인간 / 인간과 자연 / 인간과 인간

 

우리가 없으면 하느님도 없는 거예요. 인간을 이 세상에서 싸그리 싹 쓸어버리고 그러고서도

하느님은 태연하게 당신 혼자 하느님으로서 존재하실 수 있느냐? 없다 하는 거예요. 우리랑

운명을 같이 하시는 거예요.

 

# 우리와 운명을 같이 하시는 하느님

 

그만큼 하느님의 그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게 깊게 깊게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당신

자신을 우리한테 완전히 내어주신 거예요.

 

# 당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

 

이것을 그저 복음을 통해 가지고 하느님께서는 외아드님이신 당신 아드님에게, 예수님에게만

마치 당신 자신을 내주신 것처럼 그렇게 알아들어 가지고는 곤란하죠. 우리 안에, 우리 각자에

게도 그토록 사랑하셔서 그대로 다 내어주신 거예요.

 

그런가 하면은 우리는 완전히 마치 애가 엄마 탯줄에 걸려 있는 것처럼 하느님 당신께 들어가

있는 한 존재인 거예요. 하나인가 해서 딱 보니까 안에 하느님이 계시는 거예요. 그럼 섞여 가

지고 하난가 하니까 또 전혀 다른 나랑 하느님이 둘로 탁 나뉘는 거예요.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가 그러할 뿐만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이 사랑의 논리인 거예요.

 

#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도 사랑의 논리 안에서

 

자연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고 우리가 자연 안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연이라

는 것을 그저 단순히 경제개발의 논리 속에서만 바라보고 인간 중심으로 인간의 생존에 도움이

되면은 마음껏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인 양 생각을 하면은 이거는 착각도 유만부득인 거

예요. 이거는 그저 우리가, 인간이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 자연이 오염되고 자연의 질서가

피괴되다 보니까 우리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자연을 돌보고 가꿔야 된다. 이거는 극단

적으로 얘기하면은 ?서양의 논리인 거예요.

 

자연과 인간을 구분해 놓고 인간이 살아가는 가운데 만약에 인간이 마음대로 자연을 막 사용을

하고 멋대로 다루었음데도 불구하고 자연이 꼬박꼬박 질서를 지키고 먹을 것 계속 공급해 주고

이랬다면은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자연이 꼬박꼬박 질서를 지키고 먹을 것 계속 공급해 주고 이

랬다면은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자연에 대해서 분탕질을 해댔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자연의 질서들이 깨지면서 위험한 상황들이 막 벌어지는까 아니다, 자연을 보

호해야 된다. 이러고 난리를 치고 있지마는 엄밀하게 따져보면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양인

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것은 그 이전에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 자연과 나는 하나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이 자연 속에 충분히 들어가 있고, 자연이 우리 인간

에 들어와 있다고 그렇게 알아듣고 움직이는 거예요. 이거는 단순한 자연보호 운동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이죠.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인간과 자연이 그렇고 인간들 상호간에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나와 이웃 사이에,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전부 그런 식으로 한쪽이

들어가고 한쪽이 나오고 그렇게 어우러지는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는. 그러면서 안에는 각

각 고유한 둘이 다시 나뉘어져 있는 이 원리를 명확하게 알아듣는 것.

 

# 모든 관계 안에서 둘이 하나를, 하나가 둘을 이루게 하는 원리인 '사랑'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보면은 원리와 기초 이러면서 이냐시오 성인께서 원리와 기초라고 나누

어 놨죠. 원리와 // 기초 이런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주로 볼 부분은 원리인

거예요. 원리가 있고 그 다음에 기초가 있고. 이 원리가 기초를 통해서 드러나는 거예요. 원리

는 자기 원리가 드러날 수 있는 살을 취하지 않으면은 원리는 공허애져 버리는 거예요. 그런가

하면은 기초는 또 원리가 없이는 자기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예요.

 

# 원리는 기초(현실세계)가 없으면 안 되고 기초는 원리가 없으면 안 된다

 

그래서 여기서 기초라는 것은 현실세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현실세계의 구체적인 예로써

우리 아까 건강이 어떠니 몸이라든지 뭐 재산, 가난과 부귀라든지, 그 다음에 정신적인면,

모욕이니, 명예니, 그다음에 급기야 삶과 죽음, 생명에 대한 것, 단명과 장수 이런 이야기들을

쭉 하면서 이런 현실세계 속에서 어떻게 이 기초가 움직일 건가? 어떻게 이 살을 취할 것인가?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거죠.

 

* 기초 : 현실세계(몸, 재산, 정신, 생명 ...)

 

#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이 존재하는 원리가 현실세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 원리하는 것은 이 원리에 대해서는 좀 있다가 더 자세히 보겠지마는 하느님에 대한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 다음에 인간에 대한 관, 인간관. 그 다음에 자연에 대한 관,

자연관.  이런 이야기들인 거예요. 이게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이 존재하고 있는 그 존재의

원리, 그 원리가 현실 세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 이런 것들을 보는 거죠.

 

* 원리 : 하느님관, 인간관, 자연관

 

# 원리와 기초 사이에서 매개자로 사람이 존재/

         원리가 사람을 통해서 현실화 / 현실 세계가 사람을 통해서 작동

 

그리고 이 원리와 기초 사이에 사람이 탁 존재하는 거예요. 이 말은 이 사람이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기초 속에, 현실 속에 살아내게 되는. 원리가 사람을 통해서 현실화 되고, 이 현실

세계가 사람을 통해서 작동하면서 움직이는. 이런 면에서 이 사람 속에 모든 것이 통합되어

있는. 이런 차원에서 영신수련, 우리가 앞으로 걸어가는 이 모든 영적 여정은 철저하게 사람

중심인 거예요. 사람 중심 내지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

 

 

* 영신수련의 영적 여정은 철저하게 사람 중심이다/

 

       영신수련의 영적 여정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다/

          사람중심이라는 것은 인본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 중심이라는 것은 다른 존재들이 인간 안에 통합 되는 것

                      

그런데 이럴 때 사람 중심 하는 것은 그저 단순히 인본주의적인 인간이 최고야, 인간이 만물

의 영장이야. 뭐 이 정도의 개념하고는 차원을 달리하는 거예요. 그것보다도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인간이 뭔지, 다른 존재자들이 어떻게 인간이라는 이 상징성 안에 전부 통합될 수

있겠는지 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인간인 거예요. 이런 원리들. 그 다음에 기도다 이런

이야기인데 이 원리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보면은 먼저 하느님에 대한 관이죠.

 

# 구체적인 원리들 ㅡ 하느님에 대한 관

            영신수련 [23] 원리와 기초에 나타난 '하느님에 대한 관'

 

하느님에 대한 관 이거 여기에 보면은 아까 이렇게 읽어드렸지마는 앞에 이래 놨죠.

사람이 창조된 것은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고 섬기며 또 이로써 자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합니다.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경배하고 섬기며', '우리 주 하느님을' 하는

목적어 하나만 딱 넣어 놓고 그 긴 문장 속에 하느님에 대해서 설명이 일절 없어요.

 

# 하느님에 대한 설명이 없다

 

뭐 하느님의 속성이 이렇다는 등, 하느님의 어떤 생각이라든지, 하느님께서 움직이시는 원리

가 이런 것이라는 등 그런 이야기들이 일절 없죠. 원리와 기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만큼 중요한 내용이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언반구(一言半句) 도 없다. 하느님에

대해서. 제가 볼 때는 이거야말로 이냐시오 성인의 그 깨달음의 깊은 경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점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듣고 하느님을 쫓아서 나아가는데 정말

깨어 있어야 될 대목이 아닌가 하는 거예요. 무로써의 하느님을 함께 알아듣지 않으면은 안

되겠다.

 

# 무(無)로서의 하느님

 

우리는 하느님. 이러면은 늘 창조주로서의 하느님, 무로부터 유를 만들어내는 그런 존재로

(有)를 중심으로 늘 하느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 하느님의 속성이 전지전능하고

다음에 뭐 불변이시고, 정의롭고, 절대자이시고 이런 이야기들 이런 부분들을 알아들을 때도

우리는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서 사실은 이러

쿵 저러쿵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에 대해서 오해할 여지를 낳게 되는 것 아닌가 ?

 

# 하느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에 대한 오해를 만들 수 있다

 

우리 곧잘 이야기하면서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그 다음에 하느님은 불변이시다.

변치 않는다. 그 다음에 하느님은 절대자이시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하느님의 그 전지

전능에 대해서 우리 인간은 능력의 한계가 너무 많고, 불변이심에 비해서 우리 인간은 또 너무

나 변덕스럽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고, 조만간에 변화되어 버리고. 그 다음에 절대적이

지도 않고, 상대성에 좌지우지 되고, 이쯤으로 생각을 하면서 하느님은 전지전능이니, 불변이

니 하느님이 이런 분이다 하고 막 이야기 하고 있고.

 

그래 가지고는 이런 식으로 나누는 이런 것 자체가 이미 상대적인 지평에서 서로 나누고 있는

이야기들이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음과 양을 떡 나누어 놓고는 그 중에 한쪽 이것을 하느님이

라고 그렇게 이야기 하면은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가 좀 엉뚱한 곳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마치 달을 가리키면서 "저게 달이야" 이러면은 달을 보고 아, 저게 달이구나 이래야 는데 손

끝을 보면서 저게 달아야 이러니까 손끝을 보고 앉았다는 거예요.

 

이거는 이중적으로 오류에  떨어져 버리는 거예요. 달을 못볼 뿐만 아니라 손끝을 달이라고

알아들어 버리는 거예요. 하느님이 전지전능이라는 둥, 불변이라는 둥, 절대자라는 둥 이런

식으로 이렇게 알아듣고 있다 보니까 그리고 뭐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둥, 하느님은 공의로

우신 분이라는 둥 이런 으로.

 

이 말들이 틀렸다라기 보다는 어느 차원에서 이 이야기들을 알아듣고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 반대되는 상대적인 거를 둘로 나눠 놓은 가운데 그 반쪽만을 가지고 하느님은 이런 분이야

하다 보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은, 남편이 덜렁 중병에 걸려서 누워

버리면은, 부모님이 갑자가 교통사고라도 떡 당하시면은,

 

사랑이신 하느님, 공의로우신 분, 전지전능하다는 분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난리

를 치는 것.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가 이야기 하다시피 존재자와 존재를 엄격하게 구분할 필요

가 있는 거예요. 존재자로서의 하느님이 아니고 존재로서의 하느님, 모든 존재자들을 있게

만드는 그 근원, 그 근원으로서의 그 하느님을 생각해 보면은,

 

# 존재로서의 하느님 ㅡ 모든 존재자들을 있게 만드는 근원

 

하느님의 속성이라든지, 무슨 하느님의 본성이라든지 이런데 대해서 함부로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 하기가 곤란하다는 거예요. 오히려 이야기를 해 버리면은 그 언어적 표현에 사로잡혀

가지고 하느님의 참다움을 알아듣는 데 어긋나 버린다. 그래서 오히려 하느님에 대해서 침묵

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에 대해서 ?훨씬 많은 것을 웅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아닌가?

 

# 하느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오히려 훨씬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하느님만을 알아들으라고 축구하면은 너무 여러움들이 많으니까 하느님께서 예수

라는 사람을,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의 모습을 어림잡아서 추량해 낼 수 있도록, 더듬어서 ?측

해 낼 수 있도록, 더듬어서 알아낼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계시는 것 아닌가? 이런

이야기죠. 그런데 알아듣는데 지장 없어요?

 

이래 시간이 별로 없고 이러다 보니까 계속 뭐 좀 이야기도 하고, 질문도 던지고, 여러분이

버벅거리고 있으면은 질문에 대해서 답하느라고 그것도 이렇게 좀 보고, 놀리기도 하고, 뭐

이러면서 이 시간이 진행되면 정말 좋겠다 싶은데 늘 이 자리에서 마이크만 잡고 서면은 갈

길이 먼 거예요. 그래서 부리나케 달려야 된다고 막 달리다 보니까 그저 한 시간 내내 혼자서

막 떠들게 되는 이런 불상사가 자주 생기죠.

 

그래서 바라고 싶은 것은 좀 차선책인데 지금 이런 가운데에서 여러분들이 질문 같은 거를

해 주시면 더더욱 좋기도 하지마는 그게 정 안 되면은 메일로라도, 편지로라도 개인적으로

어떤 질문들, 혹은 소개들, 느낌들 그런 것을 좀 나누어 주면은 그런 걸 제가 여기 들고 와서

적절히 이거는 답변을 하는 것이 좋겠다 싶은 그런 질문이 있으면은 그 내용을 읽어드리면서

풀어주고 이러면은 여러분들도 듣는데 있어서 훨씬 좀 더 창문 틈으로 새로운 바람도 들어

오고 존 덜 빡빡하고 괜찮을 거라는 거죠. 그죠?

 

자, 영광송으로 마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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