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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6-07 조회수1,151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6월 7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Jesus said to him,
“What if I want him to remain until I come?
What concern is it of yours? You follow me.”
(Jn.21,23)
 
 
제1독서 사도 28,16-20.30-31
복음 요한 21,20-25
 

언젠가 전자상가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한 매장 앞에 있는 모니터를 보고서 저는 흠칫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니터에는 제 모습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모니터에 비친 제 모습을 제대로 보기가 쉽지 않더군요. 쑥스럽기도 하고, 또 평소에 생각했던 제 모습과 달리 약간의 불쾌감도 느낀 것이 사실입니다. 분명히 제 실제의 모습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급하게 그 자리를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전자상가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그 매장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까의 기억이 떠올라서 다른 곳으로 갈까 했지요. 그런데 그 매장 앞에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신나해 하고 있었습니다. 모니터에 나오는 자기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신기했나 봅니다. 각종 포즈를 취하면서 모니터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재미있어야 합니다.

저와 다른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왜 피하려고 했을까?’ 싶더군요. 모니터에 제 모습이 나온다고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왜 쑥스러워하고 불쾌했을까요?

순수함을 잃어서일까? 그보다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적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들만을 바라보았지, 스스로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 모습이 어색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남들에 대한 평가는 냉철하면서 자기에 대한 평가를 잘 내리지 못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그래서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기만 했던 것이지요. 남보다는 나를 자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울도 바라보고, 내 내면을 바라보기 위해 더 많은 묵상과 기도의 시간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를 보면서도 환하게 웃으면서 즐길 수 있는 아이와 같은 모습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요한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처럼 우리 역시 내가 아닌 다른 이에 참 많은 관심을 갖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즉, 참 오지랖이 넓게 살지요. 이것도 관심이 가고, 저것도 관심이 가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단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외에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소문에는 요한이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그 역시 요한이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뒤에도 일흔세 해를 더 살다가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이렇게 소문에 연연하고 있는지…….

‘너는 나를 따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 자신의 모습에 더욱 더 충실하도록 합시다.

자기가 얼마나 자주 타인을 오해하는가를 자각하고 있다면, 누구도 남들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지 말고, 내 할 일에 충실하십시오.

어떤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해도 그것은 인간으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시기에 어떤 시도를 했는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뿐이지요.

개가 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개의 짖는 소리가 그렇게 경쾌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 개는 잘 짖지 못하는군. 60점!”라고 말했다고 개가 실망하고 좌절했을까요? 아마 ‘내 목소리를 가지고 네가 뭐라고 하는 거야?’하면서 비웃지 않을까요? 고양이가 쥐를 쫓다가 놓쳤습니다. 잡는 것을 실패했다면서 절망에 빠질까요? 놓쳤다고 푸념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놓칠 수도 있는 일이며, 다시 쥐를 쫓아가면 되니까요.

이 논리를 우리에게도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의 평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실패에 주저앉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요.

에디슨을 생각해보세요. 그가 첫 번째 실험에 실패한 후 그 실패를 가지고 자신의 가치를 저울질했더라면 자신을 실패자라고 단언한 채 세상을 밝게 하는 일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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