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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6-13 조회수1,045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6월 13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If your right eye causes you to sin,
tear it out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of your members
than to have your whole body thrown into Gehenna.
(Mt.5,29)
 
 
 
제1독서 1열왕 19,9ㄱ.11-16
복음 마태 5,27-32
 

자기 자신의 행복은 중요할까요? 중요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나의 행복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행복을 위해 우리는 행복의 길을 찾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커다란 것들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행동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군요.

‘자진해서 설거지를 한다.’, ‘낯선 사람의 무거운 짐을 들어준다.’, ‘돈을 잘 빌려준다.’ 등등...

반면에 불행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조금만 아파도 징징대며 투덜거린다.’, ‘직장 상사를 속인다.’, ‘개를 발로 찬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일상의 삶 안에서도 쉽게 발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일상의 삶 안에서 긍정적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그에 반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폭력적이고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자그마한 일에 대해 자신이 어떤 모습을 취하느냐에 따라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행복’이 결정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사회에서 범죄라고 칭하는 것들만 행하지 않는다면 깨끗하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요? 물론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자그마한 잘못들에 대해 무관심해질수록 큰 죄를 범할 확률도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그마한 죄를 통해서 악으로 조금씩 기울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주님께서는 죄의 근본부터 끊어버릴 것을 우리들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간음만이 죄가 아니라, 간음을 하게끔 하는 음욕 역시 죄이기에 아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한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면 아예 빼어 던지는 것이 나으며 오른 손이 죄를 짓게 하면 아예 잘라 던져 버리라고 하면서, 죄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는 것이 우리 영혼을 위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작은 것에도 소홀히 하지 않고 충실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언젠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박수치기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한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이를테면 몇 걸음 걷고 주저앉으면서 박수를 치고, 엄마 아빠라고 말한 뒤에도 얼른 박수를 칩니다. 왜 이렇게 박수를 치나 싶었더니만, 아기의 엄마 아빠가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박수를 쳐 준 것입니다. 이 소리가 좋았는지, 아기도 자그마한 행동을 하고서 스스로 박수를 치는 것이지요.

박수를 치는 이 행동 하나 때문에 아이는 더 열심히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엄마 아빠 말 외에도 다른 말을 말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힘든 동작을 해서 박수를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자그마한 동작 하나로도 아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지요.

좋은 행동이든 또 반대로 나쁜 행동이든 작다고 해서, 또 별 것 아니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작은 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이웃을 변화시키고,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한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여행’ 중 하나일 것이다(우르술라 누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어느 날, 소설로 유명해지면서 타락에 빠진 프랑스 작가 빅톨 위고의 외동딸이 센 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위고는 죽은 딸 앞에서 자기의 타락한 삶을 후회하며 통곡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장례식 후, 위고는 딸의 방에서 딸이 자기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아빠! 이제는 꼭 집에 돌아오세요. 집에서 하느님과 엄마와 제가 기다리고 있어요. 아빠가 집에 돌아올 수만 있다면 저는 죽어도 좋아요.”

위고는 그 딸의 편지를 읽고 자기의 타락한 생활을 완전히 정리한 후 섬김의 삶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뭇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프랑스의 교육부장관까지 지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딸의 죽음으로 새 삶을 찾았습니다. 죽음은 고통스럽지만 인생의 교훈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왜 꼭 죽으셔야 했을까? 또한 인간적으로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해야만 했을까?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만 보여주면서 힘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을까? 빅토르 위고의 이야기를 보면서, 예수님의 죽음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됩니다. 만약 힘으로 모든 것을 억눌렀다면 그 순간에는 예수님 말씀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겠지요. 그러나 진정으로 변화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커다란 사랑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지요.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비참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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