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창녀와 세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6-14 조회수1,104 추천수10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삼위일체 대축일


<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복음: 요한 3,16-18






그리스도


렘브란트 작, (1661)


     < 창녀와 세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 >

        

오래 전에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차이나타운에는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목재가구와 나무십자가를 만들어 동생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습니다. 여동생은 집안일을 열심히 돌보았지만, 남동생은 도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동생이 도박을 하다가 돈을 모두 잃었는데, 그 도박판에서 싸움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형은 간신히 동생을 다치지 않게 빼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자신이 도박 빚을 많이 져서 당장 갚지 않으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은 하는 수 없이 동생에게 자신의 통장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그 돈으로 다시 도박을 했고 이번에는 운 좋게 많은 돈을 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깡패들이 따라붙었고 그들과 싸우다가 살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고 밖에는 신고를 받고 온 경찰들이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피커로 자수하라고 외쳤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자수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동생을 돌려세운 형은 동생의 피 묻은 옷을 입고 자신의 옷을 동생에게 입혀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던 나무 십자가를 동생의 손에 쥐어주고는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형은 경찰의 정지명령에도 계속 달렸고, 결국 경찰들이 쏜 총에 쓰러지고 맙니다.

경찰은 죽은 것이 동생이 아니고 형임을 알았지만, 이미 형이 죗값을 대신 치렀기에 동생을 사면해줍니다. 그 후 동생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고, 형 대신 나무 십자가를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볼품없었지만 차차 형이 만들던 것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하게 조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형의 묘소에 자신이 만든 것, 형이 만들었던 것, 두 십자가를 꽂아두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에는 이렇게 형에게 보내는 성경구절을 적어놓았다고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 요한은 삼위일체에 대해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조금 더 단순하게 써 보겠습니다.

1.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다.

2. 사랑하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모든 것, 당신 외아드님을 주셨다.

3. 외아드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아 죽으셨다.

4. 그래서 믿는 이들은 외아드님 안에서 더 이상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위의 이야기에서 형이 동생을 대신해 동생의 옷을 입고 동생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었기 때문에 동생이 더 이상 그 죄의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 깨끗한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시고 당신은 우리 죄를 입고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 즉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니코데모와의 대화의 뒷부분입니다. 니코데모는 구원에 관한 원리에 대해 알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아벨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로 잠깐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카인은 아벨을 죽여 그 피가 땅에 스며들게 합니다. 그 피가 스며든 땅에서 카인은 더 이상 살 수 없게 됩니다. 그 피가 하느님께 정의를 부르짖기 때문입니다. 그 피를 흘리게 한 자가 그 땅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자기 가족을 죽인 자와 한 집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정의로운 분이시기에 땅에 그 피를 흘리게 한 카인을 쫓아내십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어둠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빛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피가 땅에 스며들었습니다. 그 피가 하느님께 정의를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기에 그 피가 스며든 땅에서, 즉 이미 정의가 이룩된 땅에서 정의롭지 못함, 즉 죄를 몰아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피로 우리를 적시면 우리 안에 그분이 살게 되어 하느님이 보시기에 우리에게 정의가 치러진 사람이 되는 것이고 우리를 정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 자체이신데, 그분의 의가 우리 안에 스며들어 불의를 몰아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스며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죄로 상징되는 구리뱀을 장대에 높이 단 것처럼 당신도 죄인으로 높이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피가 땅을 적시기 위해서는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멸시받는 죄인으로 높이 올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난다는 의미는 바로 그분의 피가 우리 안에 들어오셔 이제는 우리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 안에서 사시게 되어 그분의 정의만이 하느님께 드러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난자가 영원히 사는 방법은 정자를 받아들임으로써입니다. 정자는 제 주인을 떠나 난자를 향합니다. 난자는 정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열어젖힙니다. 정자는 난자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주인을 떠남으로써 죽음을 감수한 것입니다. 주인 안에 있으면 살 수 있지만 주인을 떠나 죽으면 난자 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영원히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찾고 두드리고 구해서 얻은 바로 그 성령님으로 우리가 구원되기를 원한다면,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의 피를 흘려 다른 이에게 자신의 생명을 넣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리스도께 저에게 고통과 멸시를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당하여 높이 들어 올려지는 고통을 당하셨듯이, 요한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멸시받고 죽는 것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누군가에게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넣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뜻, 자기비허의 계명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뱀입니다. 자아입니다. 교만이라고도 하고 마귀라고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의심하고 불순종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교만이 있는 이들의 밭에는 아무리 씨가 떨어져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따라서 교만한 이들에게 삼위일체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고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것은 성령님이고, 진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쥐가 말씀을 듣고 성체를 영한다고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그런 쥐에게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고 하는 바로 그 위에 이런 내용이 앞서나옵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우리 자신의 눈에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냐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아들, 즉 진주를 주셨는데 이 세상 사람들은 개요 돼지였다는 것입니다. 그 개요 돼지인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남을 판단하는 이들이란 것입니다. 그들의 교만이 믿지 못하게 합니다. 믿지 않는 것이 곧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받아들여야 그분이 내 안에 사시게 되는데 받아들이지 못하면 삼위일체는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 내가 먼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대로 해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율법을 철저히 지켜온 바리사이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죄만 짓고 온 세리가 의인으로 인정받고 갑니다. 의인은 자신을 높이는 이가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세리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상대를 판단하는데 바리사이가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의가 세상에 오셔도 그 의가 그 안에 들어갈 수 없기에 의화(義化)’ 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로마 8,9-10)

그러나 그분의 의로움을 내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가 개요 돼지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개요 돼지임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어둠을 사랑하는 이들이고 이미 자신들은 눈이 보인다고 착각하는 이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하고 대답하셨다.”(요한 9,41)

예수님은 우리에게 눈이 되어주시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어둠을 좋아하는 이들은 빛이 자신 안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나의 힘이 아니라, 율법을 잘 지키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로써만이 내가 의화될 수 있음을 믿는 세리와 창녀와 같은 이가 되지 않으면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짜 개와 돼지들은 자신들이 정의롭게 잘 살기 때문에 개와 돼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들이 개요 돼지라고 고백하는 이에게 당신 성령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하고 말하였다.”(마태 15,27)

그렇습니다. 이 이방인 여인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만이 믿음이 있는 여인이기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의화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마귀는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딸의 병이 고쳐지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행위인데 그 믿음이 있는 이들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고통 받는 죄인이 되었듯이, 우리 또한 만인 앞에서 그렇게 고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받기 위해 주는 행위인 것입니다.

 

유다와 타마르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타마르 주인으로부터 유산상속을 거부당합니다. 그의 남편이 죽었고 그 동생들도 그녀에게 상속하기를 원치 않아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정자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을 오나니즘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정자를 땅에 흘려버리는 행위와 같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정자를 준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 생명까지 포함하는 모든 것을 준다는 뜻입니다. 타마르가 주인의 씨를 얻는 길은 창녀가 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는 창녀로 변장하고는 시아버지 유다와 정을 통하고 그 징표로 인장, , 지팡이를 받았습니다. 인장, , 지팡이는 모두 성령님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나중에 자신의 며느리가 창녀 짓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며느리를 죽이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는 자신보다 더 며느리가 정의롭다고 칭찬합니다. 그 아들이 바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순결한 창녀라고 합니다. 창녀가 되어야만 순결한 것이고 그래야만 그 안에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 성령을 주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교만한 사람이 되어 내 안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게 됩니다. 그분이 내 안에 살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가 가장 멸시받는 모습으로 세상에서 들어 올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고통과 멸시를 통해 우리 피가 이웃에게 뿌려지고 그러면 그들은 우리 피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내세우려고 하지 말고 우리 이웃들의 피 묻은 죄를 짊어지고 고통과 멸시를 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것이 내 안에 삼위일체를 실현시키는 자기를 버리고 매일 십자가를 지는 삶인 것입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