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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체와 성혈, 왕의 광대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6-21 조회수1,422 추천수10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


  
복음: 요한 6,51-58





구세주


 모스크바 화파 작, (1330 경)

 


     < 성체와 성혈, 왕의 광대 >

 

              

2005년 말에 개봉해 천만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영화, ‘왕의 남자를 기억할 것입니다.

광대로 살아가던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공길은 여인보다 더 예쁜 남자 광대입니다. 어느 날 공연 중에 양반이 공길을 원합니다. 이에 장생은 공길을 데리고 도망쳐 한양으로 올라옵니다.

장생은 자신들이 만난 패거리들과 왕을 가지고 놀기로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왕이었던 연산군(정진영)은 기생출신 뱀 같은 애첩 녹수(강성연)의 치맛자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것을 풍자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공연이 기대보다 훨씬 히트를 치자 결국 궁궐에서 이 광대들을 잡으러 나왔습니다.

그들이 왕을 풍자하고 비하하였기에 죽음의 위기를 처하게 된 것입니다.

왕이 보고 웃으면 희롱이 아니잖소! 우리가 왕을 웃겨보겠소!”

그러나 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왕 앞으로 나갑니다. 물론 왕이 보고 웃지 않으면 목을 치겠다는 말을 들은 상태입니다. 왕은 자신의 이야기인데도 결국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그들을 궁궐 안에 살게 해서 왕의 광대로 삼습니다.

이젠 왕을 대놓고 풍자할 수 없게 되자 썩어있던 궁궐 중신들을 풍자합니다. 뇌물을 받고 부정한 정치를 한 이들을 풍자할 때 왕은 좋아하지만 중신들은 당장 광대들을 쫓아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왕은 그 풍자에 따라 탐관오리들을 무참하게 제거해 버립니다.

풍자를 하는 족족 칼바람이 불기 때문에 이젠 경극을 해보기로 합니다. 그러나 왕은 그 경극을 보고도 자신의 생모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아 죽었던 것을 상기해 내며 선왕의 여자들을 칼로 베어 죽입니다.

왕 또한 예쁜 남자 광대 공길을 좋아해 그에게 쏙 빠져 버립니다. 왕의 눈물을 본 공길도 왕에 대한 연민이 생겨 궁에서 도망을 치지 못하고 남게 됩니다. 신하들 속에서 아무 힘도 없이 휘둘리고 기생과 과거의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왕, 이 왕에 대한 연민이 그의 발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에 장생이 줄을 타며 왕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풍자합니다. 그런 장생을 왕은 달궈진 인두로 눈을 짖어 장님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반란이 일어나는데 눈이 먼 장생과 이도저도 할 수 없는 공길은 다음 생을 약속하며 임금과 녹수를 향해 몰려오는 반란 세력들 위로 줄을 힘차게 튕겨 날아오르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떨어져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왕의 시대는 그렇게 저물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광대는 다시 태어나도 광대를 할 것이라며 하늘 높이 치솟았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시는 생명의 빵입니다. 이 생명의 빵을 먹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 생명을 주는 빵이 당신의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란 단어는 말씀이 살이 되셨다.”라고 할 때 쓰인 같은 단어인데 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말씀이 그저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이 되셨음을 말하기 위해 쓰인 육체를 의미하는 구체적인 단어인 것입니다.

가끔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당신의 살이 말씀이나 은총을 의미하는 식으로 해석하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이 되셨듯이, 그 구체적인 을 먹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살을 어떻게 먹느냐고 많은 이들이 그분을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게 되지만 예수님은 그 말씀을 바꾸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을 말할 때 그 몸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자신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이 세상에서 지니고 사셨던 살과 피, 즉 하느님이시면서 인간이신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성체와 성혈을 영할 때마다 약간은 거북함을 느낍니다.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 안에 들어오시는 그분이 바로 궁궐을 풍자하기 위해 들어오는 광대와 같기 때문입니다. 광대가 왕도, 애첩도, 중신들도 모두 풍자를 하여 심기를 괴롭히듯이 예수님도 당신 사랑의 성체로써 그렇게 내어주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괴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불편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는 사람은 그 사람 때문에 불편합니다. 겸손한 이가 있으면 교만한 사람은 힘이 듭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그 빛 때문에 불편합니다. 그래서 눈을 짖어버리는 것입니다. 내어 쫓고 죽이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사랑의 완전한 표현인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지만 우리가 그 풍자를 이겨낼, 그래서 우리 자신이 변화될 의지가 없다면 더 이상 참아내지 못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올바른 왕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들어오시는 광대, 세상에서 광대보다도 더 낮아진 그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왕으로써 살던 내가 광대보다 못한 존재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아니 참 임금을 몰라보고 내가 왕 노릇한 것을 뉘우쳐야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아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만든 것이 나의 죄 때문임을 깊이 고백해야 합니다. 그 때에야 그 땅에 피가 스며들어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체와 성혈을 보며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던 나의 죄인인 모습을 보아야합니다. 우리가 화낼 때 살인죄를 위해 그분이 대신 죽으셨고, 내가 음탕한 눈으로 쳐다볼 때 그분의 눈이 대신 뽑히셨고 내가 오른 뺨을 맞을 때 왼 뺨을 대지 못해서 그분이 대신 맞으신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인 것입니다.

 

카인은 아벨이 너무나 싫습니다. 눈에 가시입니다. 카인은 악이고 아벨은 선입니다. 카인이 왕이고 아벨은 광대입니다. 왕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광대가 싫어서 그를 죽입니다. 마찬가지로 카인도 아벨을 죽입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 적셔집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의 양심으로써 왜 죄 없는 아벨을 죽였느냐고 카인을 나무랍니다. 카인은 자신이 한 짓이 들통이 났습니다. 그 때서야 땅을 포기하고 멀리 떠나갑니다. 우리는 성체와 성혈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한 짓이 들통이 나야합니다. 마치 간음하다 잡힌 여인처럼 그렇게 만인 앞에 죄인임이 들통 났을 때 그분은 나에게만 자비를 베풀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광대가 풍자로 사람들의 간악한 마음이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성체와 성혈도 우리 부당함을 세상에 폭로하는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이 카인을 그리워한다면 다시 그 곳을 돌아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카인을 죽이지 않게 표를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내 안의 자아도 뱀도 절대 완전히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깊이 인식한다면 그 왕이 물러가고 내 안에 뿌려진 그리스도의 피, 그 피를 통해 그분께서 나의 왕으로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와 성혈의 신비입니다.

성체성혈을 받아들이면서도 내 죄가 폭로되지 않는다면 그냥 비타민처럼 영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들의 탓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체와 성혈이 자신들의 탓이 아니라고 믿는 이들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19851114, 전재용 선장이 이끄는 참치 원양 어선 광명 871년 동안의 조업을 마치고 부산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남중국해를 지날 무렵 SOS를 외치는 조그만 난파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난파선 위에는 96명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서로 엉겨있었습니다. 어선 회사로 전화해 보니 상관하지 말고 그냥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 선장은 그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상태로 표류하던 베트남인들이었습니다. 전 선장은 회사의 방침을 어기고 그들을 끌어올립니다. 선원 25명이 도착할 때까지 먹을 10일치 식량밖에 없었지만 그것들을 96명과 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떨어지자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참치 잡은 것이 많이 있으니 그것을 먹으며 버티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성과 아이들에게 먼저 선원들의 침실을 배정하고 노환자와 병자들은 선장실에서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은 당시 부산에 도착하여 난민소에서 1년 반을 수용되어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사가 된 피터누엔이 19년 만에 전재용 선장을 찾으면서부터였습니다.

수소문 끝에 전 선장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전 선장은 그 일로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회사에서 퇴사 통지를 받았고 그 이후에도 어떤 해운 회사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양식업자로 통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이 한 생동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일이 없다고 적었습니다.

전 선장은 20048, 자신이 구조해 준 많은 베트남 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미국 공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당시 25척의 배로부터 외면당하며 죽기만을 기다리던 바로 그 성체와 성혈들, 그 가장 보잘 것 없게 된, 우리 양심을 괴롭히던 바로 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성체 성혈 대축일의 의미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난과 고통 속에서 우리에게 외면당한 채 죽어가는 이들이 곧 광대로써 우리의 죄를 낫낫이 드러나게 만드는 성체와 성혈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와 성혈을 보면서 우리 마음은 풍자를 당할 때의 마음처럼 쓰라려야 합니다. 갈등이 일어야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안에 두어 계속 우리를 풍자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무관심과 이기심, 세상에 대한 집착, 권력과 돈이나 사람에 대한 애착 등이 만인 앞에 적나라하게 폭로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자신은 아니라는 양 그냥 지나친 25척의 배가 아닌, 광명 87호처럼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세상에 존재하는 작은 그리스도인들을 내 안에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 업무량이 갑자기 폭주하였고 또 개인적으로 준비 중인 것이 있어서 묵상을 매일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또 앞으로 몇 주간도 그럴 것 같습니다. 너무나 죄송스럽습니다. 더 낫고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러나 주일 강론은 계속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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