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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제10강 있는 그대로의 나 - 영신수련 첫째 주간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6-22 조회수1,038 추천수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유시찬 신부님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10강 있는 그대로의 나 - 영신수련 첫째 주간

 

# 오늘 이야기 ...

예, 이제부터 저희들 영신수련 첫째 주간에 들어갈려고 그러거든요. 원리과 기초에서 본래

자기의 모습을 봤는데 이번 첫째 주간에서부터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는 거예요.

여러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점에 대해서 과거의 여러 가지 상처나 아픔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소화시켜 내면서 미래를 향해 걸어갈 것인가? 이런 점들을 함께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 시작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일상의 삶 안에 당신께서 함께 하시며 이끌어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비추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저희들 자신의 모습을 깊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저희들 자신이 저희들 자신을 바라보는 그런 눈길이 아니라 당신께서

저희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길을 익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당신 눈으로

저희들 자신을 바라보는 가운데 위로를 얻고, 힘을 얻고, 생기를 얻을 수 있도록 희망을 바라

보며 걸어갈 수 있도록 은총을 더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 우리 지금까지 원리와 기초부터 시작해 가지고 지난 3주에 걸쳐서 기도에 대해서 좀 봤죠?

원리와 기초를 보고나면은 그 다음에 넘어가는 것이 우리 영적 여정에 있어서는 영신수련의

첫째 주간 하는 거예요. 영신수련은 첫째 주간, 둘째 주간, 셋째 주간, 넷째 주간 이런 식으로

주간의 구분이 있는데 여기서 주간 하는 거는 달력상의 7일 그 이야기가 아니예요.

 

그거는 아니고 이 영신 수련의 큰 영적 여정 중에 큰 흐름이, 네 흐름이 있는데 그 흐름을 하나

씩 묶여서 주간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은 거예요. 그래서 첫 번째 일어나는 큰 흐름이다 이래

가지고 첫째 주간 이러는 거죠. 그래서 첫째 주간, 둘째 주간 이런 식으로 나가는데, 이 첫째

주간에서 우리가 할 작업이 뭔가 이러면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는 거예요.

 

# [23]ㅡ Ⅰ주간 ->Ⅱ주간 ->Ⅲ주간 ->Ⅳ주간 -> [230-1]

  영신 수련의 주간은 7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여정의 흐름에 따라 묶는 것

 

# 영신 수련 첫째 주간 :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지난번에 강의 했을 때 말씀을 드렸다고 생각을 하는데 여러분들이 기억을 하신다면은 원리와

기초에서는 본래의 내 모습을 보았죠. 본래의 내 모습, 타고난 내 모습. 어떤 면에서는 잠재적

으로 가능태의 형태로 머물고 있는 내 모습.

 

# 지난 5,6강 ...?[23] 원리와 기초 - 본래의 내 모습 : 잠재적인 가능태의 형태인 나

 

그게 음양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은 음과 양이 완전히 균형을 이루고 있는 본래의 타고 난

내 모습, 하느님께서 나를 빚어 만드신 그 모습. 우리 인간이 완성 되었을 때의 그 모습. 혹은

타고 났을 때의 모습.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뿐이지 같은 내용이죠.

그런데 첫째 주간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인 거예요. 어떤 가능성의 형태로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니고 현실적으로 드러나 있는 모습을 보는 거예요.

 

# [23] 원리와 기초: 본래의 내 모습 => 영신수련 첫째 주간 :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현실적으로 드러나 있는 나

 

  

 

그래서 응양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은 이 양의 부분인 거예요. 현실적인 나,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드러내는 나고 이 검정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 양 안에 있는 조그마한 음. 이 말은

징적인 의미인데 무슨 의미인가 하니까 나를 나 자신의 눈으로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닌 거예요.

또 내가 있으면서 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는 거예요.

 

#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는 나

 

  

 

내가 본래의 나를 바라보는 그 눈으로 보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는 것은 많이 다른

거예요. 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는 이 관점은 어떤 의미인가 하니까 늘 우리가 보통 나라고

이게 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반성하고, 성찰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그러니

까 그런 식으로 나를 이렇게 바라보는 것은 어릴 때부터 쭉 배워왔던 사회적인 습관, 관습, 문

화, 규범 그런 교육 받은 내용이 판단 기준이 되죠.

 

# 내가 바라보는 나 : 사회적 관습, 문화, 규범 등에 의한 평가(죄의식, 반성)

 

거기에 비추어 가지고 나를 바라보는 것. 이게 내 자신의 눈으로 나를 보는 것. 혹은 우리 인간

의 논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그런 식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그런 눈하고는 사뭇 다른 눈으로 바라보시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이런 점에 있어서 큰 차이

를 드러내는 거죠.

 

리를 정말 살려내기 위해서는 내가 나 자신을 보는 눈으로 볼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

서 나를 바라보는 그 눈길로 혹은 하느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는 그 눈길로 바라볼 때만이 비로

소 생명을 길어올릴 수 있다.

 

한 달 영신수련 피정을 한다 이러면은 대게 처음에 원리와 기초라든지 뭐 관점의 변화라든지

이런 거 포함해서 첫째 주간이 전반부에 한 10일 정도, 전체의 여정의 한 3분의 1 정도를 쓰는

거예요. 그 정도로 이렇게 비중이 있기는 한대. 그런데 이 첫째 주간을 가지고 우리가 기도해

나갈 때 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통상은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 왔느냐 이러면은

첫째 주간에서 기도한다 이러면은 죄에 대해서 묵상을 한다.

 

# 영신수련 첫째 주간 - 죄에 대한 묵상

 

내 죄를 깊이 바라보는, 죄 묵상을 한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릴 때부

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저질렀던 큰 죄가 뭐가 있는가? 그런 죄를 곧잘 유발시켜 내는

내 성격상의 어떤 불완전한 모습이나 미비점 같은 것이 뭐가 있는가? 그런 것들을 주제로 삼아

가지고 기도를 쭉 하는 것.

 

그러면서 내 죄의 뿌리는 뽑으려고 애를 쓰는 것. 여기에 일반적으로 촛점이 많이 맞추어져

있는데 사실은 이 부분을 좀 조심해서 알아듣지 않으면은 안 된다 하는 거예요. 죄의식을 유발

하는 것. 그것이 이 첫째 주간 기도의 촛점인 것은 아니다.

 

# 죄에 대한 묵상이 죄의식을 유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첫째 주간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는 것. 이것이 첫째 주간 기도의 핵심인 거예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본다 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밝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좋은 점 그런 것

뿐만이 아니고 어둡고, 나쁘고 그런 점들, 약한 점들 이런 부분까지도 함게 바라볼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 아닌가?

 

#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본다는 것은 내 안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함께 보는 것

 

내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어두운 요소들, 악한 요소들, 죄의 요소들 이런 것들을 함께 짝지어서

보지 않으면은 내 안에 있는 밝고, 아름답고, 건강하고, 좋은 점까지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

는 거예요. 내 모습을 건강하게 알아들음으로써 거기에 따른 좀 더 건강한 생명, 본래의 아름

다움을 키워내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는 첫째 주간에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내지는 죄의 묵상

을 하는 것이다 하는 거죠.

 

# 내 모습을 건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내 본래의 아름다움을 키워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죄의 묵상 같은 것들을 하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마음이 무거워지고 내

지은 죄, 잘못들 이런 데 대하여 죄의식을 깊게 느끼고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아야 되겠다.

그러면서 통회할려는 마음들을 막 불러일으키고 의지력을 부태워 내려고 이러는 움직임들이

많이 있죠.

 

솔직히 여러분들 한 40년, 50년 그리고 한 짧게 30년 적어도 30-40년 이상은 다 살아 왔죠.

그렇게 살아오면서 건강한 이성과 또 구교 집안 같으면은 어릴 때부터 신앙심에 의해서 교육

받으면서 늘 내자신을 올바르게 착하게 살아내려고 그렇게 애를 쓰면서 걸어왔죠.

 

그 결과 그렇게 살아온 여러분들 자신의 지금의 모습이 마음에 들고 괜찮은가? 그런 식으로

몇십 년을 애쓰면서 살아왔더니 내가 이제 정말 좀 다듬어졌고 사람꼴을 제대로 갖추었고

반듯하게 되었다. 이런 느낌이 드는가? 아니면은 이제는 그냥 죄를 꼴도 보기 싫고 고백성사

같은 것도 보기 싫고 아예 뭐 생각도 하기 싫을 정도고.

 

어제 고백성사 보고 집에 들어오자 마자 똑같은 죄를 또 범하고, 한 달 전에 피정 갔을 때 이

런 점들을 보면서 내가 다시는 이제 이런 똑같은 잘못은 안 범해야지 그리고 굳게 결심을 했

는데 한 달 지난 지금 이번 피정 때 가서 보니까 또 그 사이에 몇 번이나 그런 잘못을 번했고.

 

그런 내 자신이 너무나 싫고 이러면서 그냥 좀 좌절감이라고 그럴까? 허무감이라고 그럴까?

이런 데 떨어지는 성향이 오히려 더 많은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게 여러분들이 의지가 약해서

그렇거든요. 좀 더 결심을 하면은 그런 나쁜 행실들, 나쁜 버릇을 고칠 수 있거든요. 이런다

해 가지고 의지력을 계속 불태워 내면은 그게 과연 가능해질까?

 

이런 점에서 우리 근본적으로 좀 문제점을 느껴야 되지 않겠는가? 이런 식으로 앞으로 남은

인생을 20년, 30년 더 걸어간다 해 가지고 정말 내가 제대로 완성된 모습을 이루어 낼 것인지

혹은 뭐 구원의 문제로 생각을 한다면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 이래 질문을 던지고 들

어 온다면은 별로 자신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저 윤리 도덕적으로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 그리고 그 죄를 깊게

뉘우치느냐, 안 뉘우치느냐? 이런 점에 다가 촛점을 맞추어서 내 자신을 계속 다듬어 낼려고

할 것이 아니고 그저 눈 맑게 뜨고 내 자신을 똑바로 보자. 결심 같은 거 안 해도, 죄의식 같은

것 안 느껴도 내 모습을 똑바로 만 보면은 죄 같은 거는 저절로 떨어져 나갈 것 아닌가? 우리

는 모르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이지 알면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 하는 이 말을 깊게 명심

할 필요가 있다 싶어요.

 

#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

 

아니요. 다 알고 있는데요. 그러면서 나 죄 짓고 있는데요. 아니, 그거는 그런 계명이 있다

내지는 그런 어떤 규범이 있다는 것을 지식 차원에서, 머리 수준에서 알고 있을 뿐이지 그런

것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안다' 하는 개념하고는 좀 다른 거예요. 안다. 그리고 알게 되면은

죄라를 것 범할리가 없다 할 때 이 '안다'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훨씬 깊은 차원에서 아는 거

예요. 그래서 그렇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고 알게 되면은 사랑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고 죄를 지을래야 지을 수가 없게 된다 된다 하는 거예요.

 

# 나를 깊은 차원에서 제대로 알게 되면 죄는 자연스럽게 피해지는 것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좀 명확하게 잘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볼려고 할 때 그럼 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어땠는가 보려면은 기도를

하려고 할 때 그 기도 자료가 뭐냐 이러면은 지금까지 살아온 내 과거의 체험이 기도 자료가

되는 거예요.

 

#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기 위해서 내 과거의 체험을 주제로 기도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한 평생을 쭉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내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던졌다 싶은 사건들이 있지요? 그런 체험들. 뭐 초등학교 다닐 때 이사를 가서 전학을 하게

됐다든지, 그 전학을 가게 됨으로 말미암아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

들을 겪게 되었다면은 그런 체험들.

 

여러분들 결혼하셨다면은 결혼하신 체험들, 자녀를 가지고 있을테니까 자녀를 출산했을 때의

체험들, 그 다음에 누군가 크게 다쳤다면은 그런 체험들, 시험이라든지 어떤 입사 시험 같은데

실패한 체험이 있다면은 그런 체험들, 여러 가지 어느 누구의 삶이든지 그런 좀 중요한 마디를

이루고 있는 체험들이 있기 마련이죠.

 

그런 중요한 체험들 이것을 들여다 보면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과연 어땠는가 하는 것을

알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이런 체험이나 사건들이 기도의 자료가 되지마는 두 번째로

는 내 자신의 어떤 성격, 기질 이런 것도 중요한 기도 자료가 되죠.

 

#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기 위한 자료

   - 과거의 체험, 사건

   - 나의 성격, 기질

 

성격이 급하다든지, 뭔가 경쟁심이 너무 강하다든지, 시기, 질투심이 너무 세다든지, 뭔가 늘

하지 않으면은 안 된다는 그런 강박관념 비슷한 것이 있다든지 그런 어떤 성격, 기질들 이런

면들을 가지고 기도를 쭉 해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것을 가지고 기도하면은 한 차례  떡

기도한다 해 가지고 뭔가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닌 거예요. 기도가 이게 만만찮은

기도들인 거예요. 그래서 체험이 되었든, 성격이 되었든 저걸 가지고 기도하려면은 하나의

체험들, 하나의 성격을 가지고 몇 차례 반복하면서 기도를 해야 뭔가 새롭게 좀 알아듣는 것

이 있게 되는 거예요.

 

# 하나의 주제로 반복적인 기도를 해야 새로운 앎을 얻을 수 있다

 

중요한 사건들 같으면은 여러분들 나름대로도 이미 생각을 해도 많이 했죠. 그런데 이제 그런

문제를 다시 기도로 가지고 와서 기도를 해 보게 되는데 언제까지 그 기도를 가지고 기도를

하는가? 평소에 여러분들이 다른 새로운 생각이나 새로운 느낌이 올라올 때까지 계속 하는

거예요.

 

# 새로운 느낌과 새로운 생각이 올라올 때까지 같은 주제로 기도

 

그저 남편이 내한테 왜 도대체 이러는가? 왜 이렇게 잘못하고 있는가? 왜 이렇게 서운하게

하는가? 그것만 떡 생각을 했는데 어느 날은 기도한다고 떡 앉았는데 그냥 갑자기 남편이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이 불쑥 떠오르는 거예요. 남편이 직장에서 겪고 있는 그런 어려움들,

가정을 지켜내면서 겪어내야 하는 치뤄야 하는 어떤 희생들, 뭐 이런 생각들이 막 몰려들어

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 도대체 부부라는 것이 어떻게 하나를 이뤄서 걸어가는 것인지 그러면서 남편이

나를 향해서 뭘 어떻게 해 왔는지 이런 것들이 밝은 모습과 어두운 모습, 잘했던 모습과 잘못

했던 모습, 좋은 모습과 나쁜 모습 이런 것들이 전체적으로, 종합적으로 쭉 들어오기 시작하

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남편을 보는 눈이 좀 새롭게 바뀌고, 새로운 생각이 올라오는 거예요. 그걸

이렇게 보면서 뭔가 위로가 되고,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고, 적어도 그런 식의 새로운

느낌, 새로운 생각이 올라올 때까지 계속 그 주제를 가지고 기도하는 거예요.

 

이제 그런 모습들이 성령께서 이끄시면서 우리를 기도로 초대하시는 모습과 내 혼자 내가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즉 내 혼자 남편 생각을 하면서 작년 사건을 생각하면서 계속 속을 끓이면

서 있었던 그런 느낌 내지는 이미지랑은 사뭇 다른 것들이 찾아오는 거예요.

 

# 기도 안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은 나 혼자 생각을 거듭하는 것과는 다르다

 

무슨 그렇게 기도 중에 새로운 생각이 올라왔다 이래 가지고 무슨 부부에 대한 깊은 진리를

길어올렸고 이런 건 물론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신선한 바람 한 줄기 지나가는 것

그 자그마한 하나의 움직임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인간을 이해하는 지펴이 확 달라지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영적 여정을 통해서 기도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반복되어 가고 심화되어 가는 것. 이게 우리가 걸어가는 영적 여정인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 영적 여정은 기도를 통한 깊은 깨달음이 삶 전체를 통해 반복되고 심화되어 가는 것

 

영신 수련 하는 것도 그런 차원에서 하는 것이예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은 우리 누구든지

그런 체험들 곧잘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이래 볼려고 할 때 중요

한 것은 우리가 뭘 잘하고 있느냐, 잘못하고 있느냐? 어떤 점에서 죄를 짓고 있느냐? 이런 것

들을 판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통해서 성장을 일구어 내고자

하는 것. 여기에 큰 어떤 목표라고 할까? 비젼이 놓여 있는 거예요.

 

# 있는 그대로의 나를 통한 성장

 

제일 좋아하는 게 전도서에 보면은 새 것은 하나도 없다. 해 아래 새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죠.

여러분들이, 우리가 인간사회 에서 무슨 죄를 짓는다 하는 것. 놀랄만한 죄 사실 별로 본 적이

없죠. 가끔 이렇게 고백성사 주다가 속으로 뜨끔 하면서 놀라는 경우가 있기는 있어도 내색은

또 절대 안 하죠. 그러면은 성사보러 온 사람 마음 약한 사람들이 상처 입을까 싶어서.

 

그런데 예컨대 살인을 했다 치죠. 하느님께서 만약에 그러실 거 같은 거예요. "너, 이놈아, 사

람이 돼 가지고 살인을 하느냐? 더군다나 영신수련 강좌를 26회나 들으면서 그러면서도 어떻

게 살인이라는 죄를 범할 수 있느냐?" 이런 식으로 나무라실 것 같지는 않은 거예요.

 

여러 가지 죄를 범했다. 여기에 1차적인 촛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굳이 책임을

뭘 따져서 물어보고 싶으시다면은 "너, 이놈아, 왜 그때 그 좋은 재료를 가지고 멋있는 반찬을

만들어서 진수성찬으로 차려먹지 못했느냐? 왜 그 죄를 통해서 성장을 일궈내지 못했느냐?

살인이라는 그 죄가 그게 그렇게 쉬운 거냐!"

 

# 왜 죄를 통해서 성장하지 못했는가

 

엄청나게 좋은 체험을 해 놓고는 그걸 발판으로 해서 왜 너의 고유한 모습을, 생명을 더 깊게

일궈내지 못했느냐? 죄를 모르면은 사랑도 모르죠. 그래서 우리 부활  찬송, 그 부활 미사 때

신부님들이 부활 찬송을 길게 부르죠. 거기에 보면은 오, 복된 죄여. 복된 탓이여! 하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죠.

 

예, 아담과 하와가 원죄라는 그런 죄를 본래 짓지 않았다면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 우리가 왜 루카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아들 이야기를 보면은

그 둘째 아들이 죄를 그렇게 지음으로써 오히려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 들었죠.

 

큰 아들은 죄라는 죄자도 모르고 반듯하게 살았지마는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듣는데 실패해

버렸던 거죠. 이런 점에서 이 죄라는 어둠이 없으면은 사랑이라는 밝음, 본래의 생명을 알아

듣고 키워나가기가 힘들다.

 

# 죄라는 어둠이 없이 사랑이라는 밝음도 키워내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가 가다다 넘어지는 것. 엎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할 바가 아니다 하는 거예요.

거기에 우려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일어서서 다시 걸어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더

잘 걸어가는 것. 성장을 일궈내는 것. 이게 중요하다 하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내 안에 있는

어두운 점을 볼려고 할 때 그것과 함께 내 안에 있는 밝고, 건강하고, 좋은 모습 이것을 하나

로 어우러지게 만들어서 전체적으로 내 존재가 성장하고 깊어지도록 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관건이다.

 

# 내 안의 어둠과 밝음을 함께 봄으로써 내 존재 깊어지고 성장하도록

 

성장이 있기 위해서는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데 그 변화가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 다른 두

개가 함께 있어야 된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지 않으면은, 부부가 있지 않으면은, 부모가 있

지 않으면은 자녀가 탄생될 수가 없다. 우리 안에는 미움은 하나도 없이 사랑만  있으면은 사

랑이 점점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할지는 모르지마는 미움이 없으면은 사랑까지도 힘이 약

해지고 급기야는 죽어버린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죄를 아주 건강한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

는 거예요.

 

이 점에서 우리가 내 죄를 본다 이럴 때 그저 윤리, 도덕적으로 이것은 죄다, 아니다. 이것은

대죄다, 소죄다. 이런 식으로 탁 정해 놓은 것. 그것 보고 죄를 지었고, 안 지었고, 그래서 고

백성사를 봐야 되고, 안 되고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것은 참된 인간 이해와 성장을 위한

길하고는 거리가 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점을 깊게 좀 염두에 두었으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본다. 이럴 때 좀 두려움 없이 자신의 모습을 볼 필요

가 있다 싶어요.

 

#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두려움 없이 바라보도록

 

그저 어두운 가운데 죄의 성향만 찾아내려고 볼 것이 아니고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들

여다 보는 것. 그래서 첫째 주간의 기도를 할 때 우리의 어떤 여정의 모습이라 할까? 걸음걸

이가 경쾌한 몸짓일 필요가 있는 것이지 무겁고 둔탁하게 그렇게 걸어갈 것은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저런 식으로 본다 하는 것을 생각할 때 누구는 그럴지

도 모르겠어요. 이 세사에 진짜 어떻게 말하면은 막말로 발에 체이는 게 돌하고 사람인데 그

토록 많은 사람들 그 중에 한 명인 나, 지극히 보잘 것 없고 사소한 그런 존재. 그런 내가 무슨

내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기도를 하고, 내 아름다움을 다듬어 내고 그게 무슨 큰 의미

가 있을까? 그저 이제 살만큼 살았는데 빨리 이 세상을 떠나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도 여러분들이 좀 이래 가슴에 담았으면 싶은 것은 여러분들 한 명 한

명이 기도하면서 새롭게 알아듣는 내용, 여러분들 각자가 자기의 아름다움이나 생명을 좀 더

일궈내는, 다듬어 내는 모습 이것이 그대로 하느님 당신 자신의 창조 사업에 직결되고 있다

하는 거예요. 우리의, 우리 모두의 행동을 통해서, 활동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창조 사업이 이루어지고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 각자 자신의 아름다움을 다듬어 내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과 직결되는 일

  하느님의 창조 사업은 우리 각자의 활동과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들이 기도에 깊게 머물면서 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어떻게 새롭

게 읽어드리느냐 하는 것은 그만큼 새로운 창조를 이뤄내는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것

이다 하는 거예요. 하느님 당신 자신도 여러분들이 기도 중에 뭘 어떻게 풀어나갈지 사실은

잘 모르신다. 여러분들의 움직임과 함께 하시면서 여러분들의 생각이나 행동들을 통해서 어

떻게 다듬고 방향을 틀어가는가? 거기에 계속 함께 하시고 같이 움직이시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고 귀착점이 어디일지, 앞날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환히 알고 계시고 그에 쫓아서

신 일을 해 나가시는 것 아니다 하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창조사업을 계속해 나가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우리 각자가 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

대로의 내 모습을 그대로 알아듣는다 하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인 거예요.

 

아주 거칠게 이야기를 한다면은 원리와 기초에서 드러내 보여준 그 모습이, 인간 모습이 불교

식으로 이야기 했을 때 공(空)이었다면은 빌공자 空, 공이었다면은 첫째 주간에서 있는 그대로

의 내 모습을 바라보는 이것은 색(色)의 모습인 거예요.

 

# 본래의 나: 공(空)   # 있는 그대로의 나 : 색(色)

 

원리와 기초에 담겨 있던 그 인간의 하나의 모습이 ?어떻게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져 나오고

있는가? 그리고 첫째 주간에 일어나고 있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들, 각자가 너무 다르고

또 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이러면서 변화되어 가는 이 다양한 변화

와 다양성. 이 모습이 사실은 공으로 전부 수렴되는 것. 본래의 내 모습으로 전부 수렴되는 것.

넓은 본래의 모습이 있는데 바다처럼.

 

그 하나의 바다에 온갖 무늬와 강약의 파도들이 일면서 그 파도 하나 하나가 각자 모습들로

이렇게 드러나고 있는 것. 이런 점에서 우리가 스스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깊게

알아듣는다 하는 것이 바로 본래의 내 모습을 깊게 알아들어가는 것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다.

 

#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알아듣는 것은 본래의 내 모습을 알아듣는 것과 통한다

 

이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본다 하는 것은 또 다른 식으로 이

야기를 하면은 원리와 기초에 나타나 있는 그 모습의 배경 속에서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 모

습을 읽는다 하고도 통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봐라, 봐라 그러니가 또 어려움

들을 많이 느끼는데 다른 게 아니고 단적으로 이야기를 하면은 예수님이 나를 보시면은 어떤

식으로 보실까? 이런 거예요.

 

성경에 비추어서 보면은 예수님께서 죄 많은 여인을 바라보시는 그런 눈길, 바리사이들을

바라보시는 그런 눈길, 어린애들을 보시는 그 눈길, 다양하게 펼쳐져 있죠. 그런데 거기에

보면은 죄 많은 여인이 와서 눈물로 예수님 발을 적시고 막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그랬을

때 딴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은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은 지금 저짓을 하고 있는 저 여자가

누군지 알았을텐데 그런 식으로 탁 바라보는데 예수님은 아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고 다

그 여인이 하는 것을 받아들이시죠.

 

그런 모습하며 바라시이나 율법 학자들, 세상 속에서 대접 받고 지위와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

이죠. 그 사람들이 그 유대 사회 안에서는 대접을 막 받고 있고 그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

수님께서 보실 때는 오히려 그 사람들의 위선이나 허위를 대단히 공박하시고 그러시죠.

 

그런 것처럼 나는 내 스스로를 볼 때 뭐 욕심 많고, 시기 질투가 많고,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예, 나 남한테 지기 싫은 거 이것이 참..., 늘 그것 때문에 내 마음의 평화도 잃고 다른 사람들

과의 관계도 긴장이 막 생기고 그래서 참 힘든데 이 성격 좀 바꾸면 좋겠다. 내한테 경쟁하는

힘, 이기고자 하는 힘, 열망 이런 것들 좀 없애줬으면 좋겠다. 이러면서 기도에 머물고 있는데.

 

예수님은 내 생각하고는 다른 식으로 턱 대답을 하실지 모르는 거예요. 야, 이놈아! 내가 남편

잃고 홀로 돼 가지고 니 안에 그 지기 싫어하는 그 근성, 그 강한 기질이 없었다면은 다섯 남매

너 어떻게 키워냈겠냐? 그러면서 예수님에게 받아들여졌다.

 

나는 늘 이게 어둡고 나쁘다고만 생각했던 이 성격, 기질이 그렇지가 않고 나름대로 물론 어려

운 점도 있지마는 좋은 점도 담뿍 있구나 하는 것을 같이 보게 될 것 아닌가? 이런 일들이 우리

안에 진짜 필요한 것. 또 어떤 면은 너무 좋다고만 생각하는 면도 있겠죠. 그걸 가지고 기도 할

수도 있어요.

 

난 누가 뭐라고 그래도 남편은 말할 것도 없고 자녀들도 그러고 주위 사람들도 늘 봉사 정신에

투철하다고, 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아낌없이 자신을 내 준다고. 그래서 너무나 좋은 기질이

라고. 그래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러면서 계속 살아왔는데 이걸 가지고 한번 기도해 볼까?

해 가지고 떡 기도 했더니 또 역시 딴 이야기를 하실지 모르죠.

 

야, 이놈아, 니가 그렇게 봉사하면서 산 거는 좋은데 니는 어디 있는데? 아, 이게 그냥 갱년기

장애하고 떡 맞물려 가지고 그 기도가 턱 이루어지면은 나는 어디가 있는데? 나는 있나, 없나?

이게 가슴에 턱 걸릴 수도 있겠죠. 그런 것들을 통해서 밝음과 어두움을, 강함과 약함을, 선과

악을 같이 봐 가는 가운데 내 자신에 대한 좀 더 총체적인 이해, 깊은 이해가 올라오지 않겠느

냐 하는 거예요.

 

# 나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함께 바라보고 나 자신을 좀 더 깊이 이해

 

한쪽면만을 보고 막 고함을 질러대는 사람하고, 전체를 보면서 종합적으로 딱 정리해 주는

사람하고 아주 다를 것 아니냐? 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는 것은 그런 작업들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본다 혹은 죄를 묵상한다 이런다 해 가지고 여러분들이

나쁘고 잘못됐으니가 그것 기도해서 똑바로 고쳐라. 이 이야기 하자는 거 전혀 아닌 거예요.

 

다 아름답고 좋다. 다 완전하다. 지금 그대로 죽어도 천당에 갈 수 있다. 그런 것들을 염려할

것이 아니고 지금 내 모습을 더 아름답게 가꿔낼 수 있는지, 생명력을 거 키워낼 수 있겠는지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계속 더 동참할 수 있겠는지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계속 더 동참할 수 있겠는지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목적을 위해서 우리가 첫째 주간의 작업을 오랜 시간 동안 하는 거죠. 내 모습 중에도

여러 모습들이 있으니까 찬찬히 봐 나갈려면은 시간은 많이 걸리는 거예요.

 

# 첫째 주간의 기도

 

그런데 이런 기도들을 해 나갈 때 유념했으면 하는 것은 요한 복음 5장에 나오는 것. 베자타

못가의 그 환자. 예수님께서 38년이나 앓고 있던 그 환자를 만나시는 장면 나오죠. 거기에

예수님께서 그러시는 거예요. 너 낫기를 원하느냐?

 

# "낫기를 원하느냐?" : 요한복음 5장 5-6절

 

아니, 그럼 낫기를 원하지 안 낫기를 원하겠어요? 그런 식으로 무슨 단다평으로 물으면은 낫기

를 원한다 이럴지 모르겠지마는 38년이나 앓고 있던 환자에게 그 환자는 더군다나 예수님이

오셔서 말을 건네시지마는 예수님인지 조차도 모르는 거예요.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그런데 적어도 저 같으면은 그럴 것 같애요. 38년은 고사하고 38개월 아니면 38주만 그런 식

으로 아파 이래 드러누워 있는데 어느 중년 허술한 사람이 와서 "낫기를 원하느냐?" 이래 물으

면은 "아, 마 됐거든요. 마 냅두세요. 귀찮으니까." 자기가 기어서 저 벳자타 못에 물이 움직일

때 들어가면 병이 낫는 거 뻔히 아는데 기어서 움직이다 보니까 다른 발 빠른 사람들이 계속

먼저 가버리는 그 일이 38년이나 지속이 된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너, 낫기를 원하느냐?" 이래 물으시죠. 그러자 이 벳자타 못가의 이 사람은

한 열망을 드러내죠. 낫기를 원하는 그 열망. 여러분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제대로

고 여러분들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더 키워내고 싶으냐? 진짜 원하느냐? 이래 물으시면은

여러분들 답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기 위해

   ⅰ. 나의 아름다움과 생명을 키워내려는 열망이 필요

 

그럴 때 벳자타 못가의 이 사람이 지니고 있었던 이런 열정, 갈망, 이것이 없으면은 실현해

나가기가 힘들다. 그 다음에 그 갈망과 열정이 가득차 있으면은 그러면은 기도 한 두번 하면

은 탁 되느냐 하면은 그것도 아닌 거예요.

 

열왕기 상권 18장에 보면은 가믐이 들었을 때 비가 오도록 하는데 엘리야 예언자?가 비가 곧

올거니가 아합더러 빨리 준비해가 내려 가라고 그러죠. 그래서 이제 시종더러 가믐이 끝나고

비가 올테니까 가서 보고 오라고. 그러는데 일곱 번 보내자 일곱 번째에 떡 와서 하는 소리가

그 전까지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이러는 거예요. 일곱 번째 갔다 와

서 하는 소리가 손바닥만 한 구름 한 장 떠올랐습니다. 그러는데,

 

# '손바닥만 한 구름이 한 장 떠올랐다' : 열왕기 상권 18장 43-44절

 

엘리야 예언자는 이제 됐다. ?비 온다 이거죠. 과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하죠. 우리

기도할 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고 다듬어 나가는 이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이런 열정

들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

 

#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기 위해

  ⅱ. 반복적인 기도 필요

 

반복하지 않으면은 알아듣기가 힘들다. 그리고 그때 기도 중에 조그마한 싸인이 하나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은 그거를 포착해 가지고 점점 키워나가는 것. 그러면서 자신을 깊게 이해하고

훨씬 크게 다듬어 내는 것. 그 다음에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이사야서 43장에 나오는 이야기인

데 야훼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인 거에요.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겠다."

 

# '두려워하지 마라" : 이사야서 43장 1-2. 4-5절

 

의외로 피정을 주면서 이 기도를 시켜보면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는데 두려움을

갖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애요. 이 부분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마라.

 

#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기 위해

ⅲ.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너 뭐 죄지은 것? 그 죄 후벼 파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상주고, 벌주고 그럴려는 것 아니다.

뭘 어떻게 할려는 것이 아니고 너를 더 아름답게, 더 생명력을 키워낼려고 하는 것이니까

더군다나 그것도 우리가 왜 옷을 자꾸 입고 가면을 쓸려고 하는가?

 

세상 사람들은 알몸을 보여 주면은 그냥 이렇게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것이 아니고 '아유,

키는 작고, 배는 볼록하게 나왔고  뭐 척추는 뒤틀렸고, 비판하고 쳐들어오기 쉬우니까 그것

때문에 가면을 쓰고 옷으로 치장하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이 점에 있어서 두려워하지 마라

하는 이것 깊게 명심하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 뭘 보여주려고 하는 것 아니죠.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내를 더 아름답게 다듬으려고 하시는 거니까 아무 두려움 없이 니

어두운 모습, 약한 모습, 죄스러운 모습 함께 끄집어 내서 봐라. 보면서 다듬어 나가면은 훨씬

더 아름다워진다. 이 이야기이신 거예요. 그래서 이점에 대한 큰 신뢰, 믿음 같은 게 필요하고

또 이야기하시는 것이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말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두지 말라' '새 일을 시작하였다' :

   이사 43장 18-19

 

과거에 흘러간 일에 너무 묶여 있지 마라. 내가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이거 진짜 중요하다

싶은 거예요. 우리는 곧잘 과거의 아픈 체험들, 상처 받았던 기억들 이런 거 끄집어 내 가지고

막 기도하거든요. 그러면서 울고불고 난리죠. 그러면서 왜 내가 그때 그 일 때문에 그토록

상처를 받았는가? 그러면서 막 원인을 따져 올라가 보니까 고등학교 때 어떤 체험이 떡 떠오

르는 거예요. 그럼 그거는 또 왜 그런가 하고 쭉 올라가 보니까 중학교, 초등학교 이런 식으로

심리적인 원인과 결과에 대한 원인을 찾아가고,

 

또 그 원인에 대한 또 원인을 찾아가고 이런 식으로 쭉 들어가다 보니까 엄마 뱃속에 쏙 들어

가 버리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제가 요, 딸딸딸 여섯 번째 딸이거든요. 그래 가지고 아버지가

꼴도 보기 싫어서 방에 치워 놨던 거 죽었나 싶어서 열어 보니까 숨쉬는 소리가 나서 그때야

젖 먹여 가지고 키웠다고. 그때부터 내가 늘 남 앞에 나서면은 자신이 없고, 소극적이고...

 

도대체 누가 엄마 뱃속에서 나오면서 온 일가 친척이 다 모여 가지고 박수 갈채 속에서 가문의

영광이라는 식으로 그렇게 대접을 받으면서 나와서 당당하게 살아온 사람이 몇이나 있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렇게 너 어릴 때 너 상처 받은 거 내가 다 안다. 니가 그것 때문에 엄청나게

힘들었던 것 내가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 죄스러움, 악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그 발판

위에 내가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새 창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과거의 지나간 일에 거기에 사로잡혀서 그거 심리치료 할려고 애를

쓸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진일보하면서 새로운 창조 작업에 힘을  쏟을 일이다.

 

#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게 되면

   ⅳ. 과거에 매이지 말고 새로운 창조에 힘쓰도록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계속 보는 것은 과거로 회기하자. 그래서 과거의 상처들 치유하자.

여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더 아름답게 그려가자. 새로운 것을 더 만들어 내자.

생명과 아름다움을 더 심화시켜 나가자. 옛날의 그 아픔과 어려움들을 발판으로 해서 새로운

도약을 이뤄낸다. 그걸 하고 싶다. 그걸 이미 시작했다. 이것이 야훼 하느님께서 우리한테

들려주시는 메세지인 거예요.

 

우리는 여기에 동참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따라서 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바라보는

데 있어 마무리 하면서 여러분들한데 시 한 수를 읊어드렸으면 하는데,

 

하얀 길

          

                        미츠하라 유리

 

오랫동안 헤메이다

마침내 바른 길 찾아오면

길은 아무 말 하지 않아

 

칭찬도 나무람도

짐될까 저어

'돌아왔니' 한 마디조차

 

다만

지금부터 걸어갈 길이

오롯이 하얗게 가리킬 뿐

 

걸어온 길 보담

지금부터 걸어갈 길이

늘 중요하니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기도할 때 진짜 늘 배경 음악으로 틀어놓고 가슴 속 깊이

새겼으면 하는 게 하얀 길에 나타나는 이 내적 태도일 거예요. 오랫동안 방황하다가 이제 마침

내 제 길 찾아서 돌아오면은 길은 아무 말 안 한다는 거예요.

 

잘 왔다고 칭찬도 안 하고, 왜 그동안 그렇게 에미 속썩이면서 방황했느냐고 나무라지도 않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뛰어들어서 부담스러워 할까 그게 염려스러워 가지고 이제 너 돌아왔냐?

하는 그런 사실 판단 조차도 안 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첫째 주간의 기도를 할 때 명심해야 될 것은 시비선악의 판단으로부터 떠

나는 거죠. 뭐가 옳으니, 그르니, 선이니, 악이니. 그러니까 상을 줬다가, 벌을 줬다가 이런 일

은 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죠. 이것이 예수 그리스

도의 눈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성장을 일구어 내고자 하는 거다. 여기에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 첫째 주간의 기도: 시비선악의 판단을 떠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

 

그리고 이 첫째 주간 작업은 무슨 첫째 주간에 한에서 마무리 되는 그런 작업이 아니고 길게

가야될 작업, 평생을 가야 하면서 다듬어 내는 작업이죠. 그래서 지칠 것 없고, 기죽을 것 없

이 담담하게 계속 가는 거예요. 예,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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