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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죄인의 역할을 맡아라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6-29 조회수1,653 추천수1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성 베드로 바오로 사도 축일


<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복음: 마태오 16,13-19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카라바죠 작, (1610), 캔버스유화, 94x125, 뉴욕 쉬크만 미술관


     < 죄인의 역할을 맡아라 >

      

유투브로 고 김성수 목사의 강의를 듣다보니 그가 대학 다닐 때 심리치료를 위한 역할극 할 때의 이야기가 의미 있을 것 같아 여기에 소개해 드립니다.

역할극이란 심리치료를 위해 사용되는데 심리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역할을 함으로써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어 치유에 이르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역할극에는 대본이 없고, 보통은 환자 한 사람을 위해 다른 정상적인 엑스트라들이 주위 사람들 역할을 맡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를 이해 못하고 반항하는 아이에게 부모의 역할을 시켜 부모의 고충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또는 자녀에게 지나치게 집착하여 자녀가 부담을 느낄 때 부모에게 자녀의 역할을 하게 하여 자녀의 입장을 이해하게 합니다.

한번은 마약에 손을 댄 아들을 이해하지 못해 분노로 가득 찬 아버지를 역할극을 통해 치유해 보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아들의 역할을 하는 것을 끝끝내 거부하였습니다. 자신처럼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은 절대 마약 중독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 않아 결국 역할극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증오도 사라질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이유로 우리가 죄인의 역할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진정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그 사람에게 은총은 내릴 수 없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하게 내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하느님을 사랑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자부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겠다는 베드로에게는 하룻밤에 세 번씩이나 당신을 배신하는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는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고 물었던 인물입니다. , 누군가가 자신에게 하는 잘못 때문에 매우 화가 나 있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마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려는 계획이 베드로에게 발각되었었더라면 그는 베드로에게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하루에 세 번씩이나 배반하게 된 것입니다. 그로써 그는 깨닫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인간이었구나. 나 또한 유다와 다를 바가 없구나.’

그리고는 닭이 울 때마다 자신의 죄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준비시킨 마지막 교육이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가장 비판하는 인물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는 또 어떻습니까? 바오로는 자신이 가장 열정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동료인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것도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것도 모자라 멀리 다마스커스까지 가겠다고 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만이 장님이었음을 말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살인자였음을 말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곧 메시아를 박해하는 것임을 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하느님을 박해하는 사람이었음을 말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모두 살인자요 가장 큰 죄인임을 가슴깊이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머리로는 가슴까지 뜨겁게 느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유다가 아니고 바로 라면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 바로 라면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될까요? 바로 베드로와 바오로처럼 그리스도를 목숨을 다해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힘은 감사입니다. 삶이 힘든 것은 감사가 부족해서이고, 감사가 부족한 것은 그만큼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죄로써 매번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임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면 더욱 큰 감사가 솟아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힘으로 그분의 소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어떤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교육 맨 마지막에는 교육 받은 모든 이들이 각자 전례를 위해 준비한 것들로 꾸며지는 미사가 있었습니다. 저희 조는 화답송을 맡았습니다. 저만 사제이고 나머지 분들은 평신도였기 때문에 제가 어떤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해 줄 것을 기대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교육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교육을 준비한 사람들에 대해 이것저것 불만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팀이 되어 함께 준비해야 하는 것조차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프로그램을 내 노력을 보태 더 완전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충 시간만 때우려다가 결국 준비를 잘 못해서 교육을 준비한 분들이 직접 우리가 해야 하는 것들을 짜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조들이 하는 것들을 보니 너무들 준비를 잘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얼굴도 웃고 있었고 교육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참여하게 하는 에너지는 감사에서 나오는구나. 누군가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가 고마워하게 하면 되겠구나. 예수님께서도 당신 제자들에게 우선시 요구하신 것은 당신께 대한 고마움이었구나.’

하느님은 우리를 창녀요 세리의 상태까지 낮추시기를 바라시는 이유는, 그 처지임에도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더 큰 감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구원받기 합당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구원해 줘봐야 무슨 감사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모두 지옥에 갈 처지였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악한 역할은 절대 맡지 않으려고 합니다. ‘공동경비구역이란 영화에서는 이병헌이 북한 초소에 끌려갔다가 그들을 죽이고 탈출한 영웅이 되지만 그는 결국 진실을 알고는 죄책감에 견디지 못해 자살하고 맙니다. 자신은 그렇게 믿고 있지 않았지만 친구들을 죽인 것이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죄를 무마하고 잊고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살인자요 간음하는 자요 세리요 창녀임을 고백하고 그 역할을 맡을 때야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납니다.

 

버스란 중국 단편영화가 있습니다.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입니다. 중국 시골길에 버스가 달려옵니다. 한 허약해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다가 그 버스에 올라탑니다. 버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운전사는 여자입니다.

조금 더 가서 건장한 두 남자가 버스에 올라탑니다. 그들은 타자마자 갑자기 돌변합니다. 강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버스 안에는 장정만도 수십 명은 타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의 행패에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그들이 돈을 다 뜯고 내리려고 하는데 운전사 여자를 보더니 그녀를 강제로 끌고 내립니다. 그리고는 밖에서 못 된 짓을 합니다. 이것을 보다 못한 마지막으로 탄 허약해 보이는 남자는 밖으로 달려 나갑니다. 그러나 깡패들의 칼에 다리를 찔리고 맙니다. 이것을 본 버스의 사람들은 더 겁이 나서 아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옷이 다 찢어진 채 여자 운전사가 다시 버스에 탑니다. 핸들에 머리를 박고 웁니다. 그때 다리를 절뚝이며 그녀를 구하려고 했던 남자가 타려고 합니다. 여자는 남자가 내리기 전까지는 출발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남자는 구해주려 했는데 왜 그러느냐고 따지지만 사람들이 이 남자를 밀쳐내고 짐도 창문으로 내던집니다.

한참을 길에 남겨져 있던 남자는 누군가가 차를 태워줘서 목적지를 향해 갑니다. 가다보니 다리 밑에 많은 경찰들이 있고 자신이 탔던 버스가 다리 밑에 추락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경찰이 이렇게 무전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죄를 짓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 버스에 탔던 사람 중에 그 여자가 당하는 것에 유일하게 책임감을 느꼈던 그 사람만이 죄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죄가 없는 사람들을 밖으로 밀쳐냅니다. 자신들의 정의롭지 못함을 밝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두 번 살인을 저지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를 밀쳐내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음탕한 눈으로 간음하고, 화를 내며 살인하고, 내 안에서 그분을 수천 번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가난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우리의 이웃들의 책임을 우리가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세월호 사건을 볼 때도 우리 자신들도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 있으면서 어떻게 유병헌이나 선장, 혹은 정치인들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아무도 판단할 수 없는 처지가 될 때, 비로소 회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베드로와 바오로처럼, 그런 사람들을 당신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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