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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 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01 조회수1,152 추천수13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7월 1일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Lord, save us! We are perishing!"
"Why are you terrified, O you of little faith?"
(Mt.8,25)
 
 
제1독서 아모 3,1-8; 4,11-12
복음 마태 8,23-27
 

지난달에 신부님들 몇 명이서 홍천에 있는 물놀이를 할 수 있는 놀이동산을 다녀왔습니다. 솔직히 마흔 넘어서 무슨 놀이동산을 가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파도풀을 이용한 한 신부님께서 다녀온 뒤에 허리 아픈 것이 말씀하게 사라졌다면서 함께 가자는 것이었지요. 저는 20대 초반에 신학생으로 복사단 캠프 때 놀이동산 다녀온 뒤로 처음으로 이런 곳을 가봤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찾은 사람들을 보니 다들 젊더군요. 그에 비해 우리는 나이도 많고 또한 남자 4명이서 함께 다니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기에 충분했습니다.

함께 한 신부님 중에서 이곳까지 왔는데, 다른 사람들이 타는 것도 타봐야 한다고 해서 놀이기구를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탔다가 깜짝 놀랐네요. 속도도 속도지만 갑자기 위에서 툭 떨어지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눈을 꼭 감고 놀이기구를 탔습니다.

그렇다면 이 놀이기구가 위험할까요? 위험하다면 아무도 이 놀이기구를 타지도 않을 것이고, 또한 이 놀이기구를 운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두려워 할 필요도 없으며, 눈을 감고 긴장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처음 경험하다보니 괜히 두렵고 긴장되었습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경험하지 못한 체험인 것은 물론이고, 저의 힘으로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그냥 튜브에 몸을 맡겨야만 하는 상황이지요).

모르고 경험하지 않은 일을 접하게 되면 당연히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소위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말처럼 ‘멘붕(멘탈붕괴)’에 빠지게 되면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극심한 풍랑을 만나게 되지요. 실제로 갈릴래아 호수는 평소에는 잔잔하다가 간혹 극심한 풍랑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아라비아 사막의 뜨거운 열풍과 헤르몬 산에서부터 불어오는 찬바람이 호수에서 만나면 심한 기류의 이동으로 풍랑이 크게 이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순간을 제자들이 체험합니다. 제자들의 많은 수가 이곳 갈릴래아의 어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미 비슷한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께 애원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예수님께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주님께 의지하는 순간이 바로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만 이루어져야 할까요? 아닙니다. 평소에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다면, 이러한 극한 상황도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일이 찾아올 때, 그리고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경험하게 되더라도 겁을 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니까요.

모든 일에 실패했을 때, 조심스레 쌓아 올린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을 때, 당신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승리이다(키에르케고르).


 

세상의 일보다는 주님의 일에 더 집중합시다.

지난 토요일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원래는 약속이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취소가 되어 하루 온종일 아무런 일정이 없었지요. 그래서 책이나 읽고 또 글을 쓰면서 하루를 보내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는데 왜 이렇게 졸린지 모르겠습니다. 꾸벅꾸벅 졸다가 이렇게 조느니 차라리 편안하게 침대에서 푹 자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침대에 누웠습니다. 정말로 푹 잤습니다. 분명히 침대에 누울 때에는 밝았는데, 일어나니 날이 어두워져 있으니까요. 낮잠을 무려 3시간 이상을 잔 것입니다. 괜히 시간을 낭비한 것 같고, 할 일을 하지 않은 게으름 속에 빠진 것 같아 죄스러웠습니다.

저녁기도를 바치고 묵상을 하는데,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직전의 예수님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즉, 열두 살에서 서른 살 즈음의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이때는 사람들 앞에서 기적도 행하시지 않고 또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을 계속 던졌습니다. 3년의 공생활을 위해서 자그마치 30년이라는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능률적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사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시간을 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시간,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신 것이지요. 그 기다림의 시간이 무려 3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혀 불평불만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면서 생활하셨습니다.

문득 제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항상 시간 싸움을 하면서 서두르는 모습.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주님의 뜻과 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항상 ‘바쁘다 바빠’를 외치면서 사는 우리들입니다. 언제나 시간이 없다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는 이유가 과연 주님의 일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세상일에 바빠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세상일은 아무리해도 여유가 생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계속해서 여유로움을 주면서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인도해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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