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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02 조회수1,169 추천수17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7월 2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What have you to do with us, Son of God?
Have you come here to torment us
before the appointed time?
(Mt.8,29)
 
 
제1독서 아모 5,14-15.21-24
복음 마태 8,28-34
 

어떤 형제님께서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었습니다. 형제님은 도저히 하느님의 뜻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왜?”라는 질문만을 계속 던졌지요. 그리고 결국은 신앙을 버리게 됩니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가족을 지켜주지 않는 하느님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점점 더욱 더 불행하게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괜히 화를 내고, 세상의 것만을 집착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이 자신의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제야 이 형제님은 깨닫습니다. 아내를 잃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가장 큰 불행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내를 잃었다는 것, 큰 아픔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상태로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들이 예수님께 항변하지요.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사실 마귀가 어쩌면 인간보다도 하느님께 더 가까울 수도 있지요. 왜냐하면 마귀를 타락한 천사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에 반해서 인간은 어떻습니까? 나약하고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느님을 배반하고, 하느님의 뜻을 잘 따르지도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귀가 말하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 항변이 약간은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빚진 것이 있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그냥 거저 주는 무상의 사랑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마귀의 힘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아시기 때문에 그냥 놔둘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 힘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마귀들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자 어떻게 됩니까?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맙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물속에 빠져 죽게 할 수 있는 힘을 마귀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고을 주민들의 반응입니다. 사랑으로서 다가오시는 주님에 반해, 고을 주민들은 세속 재산의 손해만을 기억하면서 자기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려면 얼마든지 우리의 삶 안에서 체험할 수 있지요. 그러나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만을 내세운다면 주님의 사랑을 도저히 느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지 말라.’는 계명 때문에 죄책감만 얻는 것 같아 주님을 믿지 않으려는 것이지요. 즉, 내 곁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며, 스스로 떠나기도 합니다.

마귀의 힘이 얼마나 큰 지 모릅니다. 조그마한 틈만 있어도 우리를 절망의 나락으로 빠트립니다. 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만을 내세우면 그 틈으로 분명히 마귀는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따라서 마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님을 내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분명 주님의 사랑 안에서 참 행복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더 큰 불행과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한순간은 어쩔 수 없이 결정된 한때이다. 우리의 오늘이 일 년 중에서 가장 좋은 날이며, 지금 이 시간이 제일 좋은 시간이며,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좋은 순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현재만이 당신의 소유이므로(에디슨).


 

고통과 시련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우리

“사람은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비로소 다이아몬드와 인간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다.”(마리 에브너 에쉰바흐).

스테파노(사도 7,54-57)의 모습을 묵상하다가 ‘참으로 의연하게 대처하셨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나를 향해 돌을 집어 들고 있는 상황, 눈에 살기가 번뜩이는 상황, 과연 이런 상황에서 하늘을 우러러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의연함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영국의 토마스 모어 성인 역시 의연함을 보여주십니다. 성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재판장이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는 바오로가 스테파노의 순교 현장에 있었고 그를 돌로 친 사람들의 겉옷을 지켜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두 분은 하늘에 머무시면서 영원한 우정을 나누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제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저와 저를 단죄한 여러분이 하늘에서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는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당황하지 않고 품위를 지키는 모습. 이것으로 ‘끝’입니다. 즉, 이것으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신 것이지요.

사실 빛과 그림자는 함께 존재합니다. 빛만을 추구하며 살 수 없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림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혹시 눈을 감습니까? 아니면 스테파노 성인이나 토마스모어 성인처럼 받아들이고 기도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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