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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03 조회수1,231 추천수14 반대(1)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My Lord and my God!"
(Jn.20,28)
 
 
제1독서 에페 2,19-22
복음 요한 20,24=29
 

얼마 전에 아는 분들과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었지요.

“뭐 드실래요?”

그런데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아무 거나 맛있는 거요.”

이 말처럼 애매한 대답이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 다른데, 그 기준을 제가 어떻게 다 맞출 수 있겠습니까? 하긴 이렇게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무조건 따라가는 마음 때문인지, 술집 술안주로 ‘아무 거나’라는 것이 메뉴에 있기도 하더군요.

아무튼 애매모호한 대답을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 대한 우리의 대답 역시 이렇게 애매모호했던 것이 아닐까요? 단순히 믿는다는 이유만을 내세우면서 ‘알아서 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우리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성모님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의탁을 보여주는 말씀이지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과 비교를 해 봅니다. 우리 역시 이런 말씀을 종종 하지요. 즉,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당신의 말씀이 곧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식의 기도를 바칩니다. 문제는 이 기도가 참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혹시 귀찮아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갖게 됩니다.

“저는 몰라요. 그냥 알아서 해주세요. 그러나 내게 정말로 유익해야지만 해요.”

이런 식의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바치게 되면 어렵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곧바로 넘어지고 맙니다. 그 유익이란 것의 기준이 세상의 것들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너무나도 다릅니다. 따라서 이런 식의 입으로만 외치는 믿음은 부족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서는 주님께 희망을 둘 수 없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신앙의 대표 주자인 것처럼 나오지만, 그가 의심했던 조건들을 보면 매우 구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감격하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에 대해서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체적으로 내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느낄 수 있고,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쓸 만한 것은 이미 다 나왔다. 우리가 할 일은 그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는 것뿐이다(괴테).


 

100달러로 피아노를 산 선생님

예전에 어떤 책에서 보았던 글인데, 인터넷에서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네요. 혹시 새벽 묵상 글에서도 한 번 소개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튼 좋은 이야기는 다시 봐도 좋으니까 그냥 적어 봅니다.

미국의 한 시골학교 선생님이 당시 갑부였던 포드 자동차 회사의 포드 회장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회장님, 아이들의 음악교육을 위해 저희 학교에 피아노 한 대가 필요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얼마 후 답장이 왔지요. 그런데 열어보니 단 돈 100달러만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실망하지 않고 100달러로 땅콩을 사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사온 땅콩을 학교부지에 심은 뒤, 그 해 땅콩을 수확하여 팔았습니다. 이렇게 몇 년을 하니 드디어 피아노를 살 수 있는 돈이 모아진 것입니다. 선생님은 곧바로 포드 회장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습니다.

“회장님의 도움으로 피아노 살 돈이 모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포드회장으로부터 답장과 함께 만 달러가 송금되어 온 것입니다. 답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이 미국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했지만 기부금을 주면 금액이 적다고 투덜대거나 모르는 척 하더군요. 그런데 선생님은 작은 기부금에 대해서도 감사해하셨고, 이익까지 들려주시니 오히려 제가 감동받았습니다. 앞으로 도움을 청하시면 액수와 상관없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얼마 전에 교구청 앞마당에서 어떤 형제님의 하소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가난하고 어렵고 힘든데, 답동성당 사무실에 도움을 청했더니 1,500원만 주더라는 것입니다. 요즘에 1,500원 가지고 뭘 하냐면서 교회가 이렇게 해도 되냐고 막 화를 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당 사무실을 찾는 분들이 하루에도 몇 분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이 성당만을 찾아가지 않습니다. 소위 성당 순회를 도시지요. 그러면 1,500원씩이지만 꽤 많은 돈이 쌓입니다. 아무런 불평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큰 감사의 인사를 표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이 형제님은 마치 맡겨둔 것을 찾아가는 것처럼 말씀하시더군요.

우리도 종종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혹시 도움을 받았을 때 내 기준에 부족하다고 그 사람을 탓하거나 불평하지는 않았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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