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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제13강 두 개의 깃발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03 조회수3,807 추천수2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한국clc에서 [이냐시오 성인이 평신도에게] 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성바오로 출판사

 

평화방송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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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찬 신부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13강 두 개의 깃발


0. 영신수련의 흐름

 

0.1 천주강생에 대한 관상 : [101~109]
0.2 예수 탄생 : [110~117]

 

1. 두 개의 깃발 묵상

 

1.1 이 묵상의 성격
    - 첫째주간 반복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 예수님의 대사회관, 대인간관, 대세상관

 

1.2 기도하는 방법 : [136~147]
    - 삼중담화

 

2. 그리스도와 루치펠의 대립구도
    - 루치펠의 작전 : 부귀, 명예, 오만
    - 그리스도의 작전 : 가난, 모욕, 겸손

 

3. 선신과 악신의 상관관계
    - 영적 식별

 

오늘 이야기 ...

예, 우리 각자들 마음 안에 여러 가지 상반된 마음의 움직임들이 있으면서 어려움들을 많이

겪곤 하죠. 물론 이 사회 속에서도 서로 반대되는 움직임, 세력들이 있으면서 긴장과 갈등을

초래하죠. 이냐시오 성인은 이 양 움직임을 영의 차원에서 깊게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 그리스도의 영화 루치펠의 영

그리스도의 영화 루치펠의 대립 각도에서 바라보는 거죠. 우리도 이 시간은 이 점에 대해서

좀 깊게 알아봤으면 합니다.

 

■ 시작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두 개의 깃발에 대해서 깊게 알아듣고자 합니다. 저희들 각자의 내면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도 크게 상반된 두 영의 움직임이 있고 그 영들의 움직임

속에서 저희들 각자의 모습이나 세상의 모습이 이렇게 저렇게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쪼록 저희들 영의 분별에 대한 지혜를 허락하시어 올바른 영을 쫓아서 참되이 걸

어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이 세상을 좀 더 생명이 넘친 행복하고 인간다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저희에게 필요한 은총을 더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

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이번 시간 ...

  영신 수련 [136-147] '두 개의 깃발' 묵상

예, 오늘 시작기도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두 개의 깃발에 대해서 좀 볼려고 그러거든요.

영신 수련으로 치면은 [136-147]까지 인데 이 영신 수련 둘째 주간의 흐름을 좀 먼저 짚고

넘어 갔으면 하는 거예요.

 

■ 영신 수련 둘째 주간의 흐름

우리가 지난 강의때 봤던 것이 [91-98]까지 해 가지고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해서 봤었죠.

그리고 자세한 설명은 안 하겠지마는 그 다음에 있는 것들이 영신 수련 [101-109]번 이래

가지고 천주 강생의 신비를 관상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천주 강생의 신비를 보고 그

다음에 영신 수련 책으로 치면은 [110-117]까지 여기에 예수님 탄생을 보는 거예요.

여기까지 보고 나서 그 다음에 오늘의 주제인 [136-147]까지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을

하는 거예요.

 

■ <영신 수련 둘째 주간>

  [91-98] '그리스도의 나라'

  [101-109] '천주 강생'

  [110-111] '예수 탄생'

  [136-147] '두 개의 깃발'

 

그런데 이런 영신 수련의 흐름하고 관련지어서 여러분들이 좀 깊게 알아두었으면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첫째 주간과 둘째 주간을 연결하는 다리 혹은

이음매의 역활을 한다고 그랬죠.

 

# [91-98] 그리스도의 나라 - 영신 수련의 첫째 주간과 둘째 주간의 이음매

 

둘재 주간의 본격적인 관상이 천주 강생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 [101-109] 천주 강생 - 영신 수련 둘째 주간의 본격적인 시작

 

그리고 그 전에 첫째 주간이 있었고 그 사이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있는 거예요. 천주 강생의

신비 이거는 뭔고 하니까 성경 이야기로 한다면은 수태고지예요.

 

# [101-109] 천주 강생의 신비 :

  - 수태고지 :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회임(懷姙)을 알림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오셔서 예수님에 대한 수태고지를 하죠. 그게 이제 천주 강생에

대한 신비인데 즉 무슨 소리인고 하니까 그리스도의 나라 하는 이것은 예수님의 꿈이라고

그랬죠.

 

# 그리스도의 나라: 그리스도의 꿈, 비전(Vision)

 

예수님의 꿈 혹은 예수님의 비전이다. 예수님의 어떤 꿈, 비전이 이렇게 있으면은 거기에

따른 청사진을 그리는 거예요. 설계도를 만드는 거예요. 이게 천주 강생에 해당하는 거예요.

 

# 천주 강생: 꿈에 대한 청사진, 설계도

 

이 꿈이나 비전에 대한 어떤 청사진인 거예요. 설계도라고 그럴까. 즉 예수님이 가지고 계시

는 이 꿈, 그리스도의 이 비전을 자, 그럼 어떻게 실행을 할까? 이러니까 천주 성삼께서 성부

와 성자와 성령께서 지구 위를 내려다 보시는 거예요. 이 지구를 이렇게 보시면서 지구상에

온갖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시는 거예요.

 

여기에는 백인도 있고, 흑인도 있고, 황색인종도 있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는

사람이 있고, 평화롭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싸우는 사람들이 있고, 이 온갖 사람들,

피조물들을 보시면서 천주 성삼께서 어떻게 이 사람들을 몽땅 데리고 아버지의 영광 속에

들어갈 수 있을까? 어떻게 복음화를 완성시킬 수 있을까? 그 점에 대해서 세 분이 논의를

하시는 것. 대담을 하시는 것을 관상해 보라 그러는 거예요.

 

# 천주 강생(天主降生):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성부, 성자, 성령의 계획

 

거기서 논의 되는 것이 성자께서 그러죠. 내가 내려가서 저 사람들을 구원해 낼게요. 자, 그럼

네가 어떻게 갈래? 예, 저기 이쁘장한 아가씨 마리아가 있네요. 마리아 뱃속에 들어갔다 나올

게요. 자, 그럼 그런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알릴까? 우리 가브리엘 대천사 보내죠. 이런 천주

성삼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계획들을 세우고 계시는 거예요. 그 계획의 일환

으로 성모님께서 수태고지 하시는 그런 장면들이 탄생하는 거죠. 그래서 그것을 천주 강생의

신비 이러면서 바라보게끔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은 처음에 그 비전이 있고 거기에 따라서 청사진 내지는 설계도가 세워졌고 그다음에

실행이 남는 거죠. 실행이 남으니까 그다음에 예수님의 탄생인 거예요. 이제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그 탄생 장면을, 구유에서 태어나시는 장면을 역시 관상하는 거예요.

이 장면들을 이렇게 보는 것.

 

그다음에 여기서 이제 이어지면서 여러 장면들이 있기는 있어요. 탄생이고 그다음에 실행

랬는데 이 실행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이제 탄생하시고 그 다음에 성전에서 봉헌 되시고 그다

음에 이집트에 피난 가시고, 다시 나자렛으로 돌아오시고, 거기에서 살고 계시다가 예수님

어릴 때 장면으로는 12살 때 사건 하나만 탁 나타나 있죠.

 

그리고는 12살 사건을 마감하면서 몸과 지혜가 날로 튼튼하게 자랐다. 이렇게 마감을 해 놓고

는 훌쩍 뛰어서 예수님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으시면서 공생애에 들어가는 장면인 거예요. 즉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이 어디의 위치에 있느냐 하면은 여기 천주 강생부터 시작해서 예수

님의 탄생 그 다음에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면은,

 

성전 봉헌, 이집트 피난, 12살 사건 이런 예수님의 사생활, 사적인 생활이 쭉 있고, 그다음

두 개의 깃발 잉서 그다음에 나오는 거는 바로 예수님의 세례 사건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세례 사건을 시작으로 해서 예수님의 공적이 생활, 공생활에 들어가게 되죠. 사생활과 공생

활이 있는 그 가운에에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이 탁 놓여 있는 거예요.

 

# [136-147] 두 개의 깃발 : 예수님의 사생활과 공생활 사이

 

그러면서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을 하루에 네 번 연속해서 하게 끔

그렇게 지시를 해 놓으셨어요. 그만큼 비중이 높은 대단히 중요한 묵상인 거예요. 이냐시오

성인 어느 기도의 주제에 대해서도 네 번을 연속해서 그러니까 하루에 한 시간짜리 기도를

네 번 내지 다섯 번 한다. 이런 기준에 의해서 보면은 거의 하루 종일을 꼬박 이 묵상만 하라.

이 이야기이신 거예요.

 

 

 

추측컨대는 이 두 개의 깃발 묵상이 사생활과 공생활을 이렇게 이어 주면서 여기가 그러니까

예수님의 숨은 나자렛 생활 30년이 고대로 담겨 있는 시기죠. 12살 사건이 지나고 그다음에

세례 사건으로 넘어갔는데 고 사이에 우리가 통상 30세 때 세례 받으시고 공생애 시작하셨다

이렇게 이야기들을 하니까 그렇다면은 어릴 때부터 그냥 거의 기본적으로는 30년 동안의

예수님의 어떤 사적인 생활, 예수님 당신 나름대로 인격이 형성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형성되는 그 시기를 두 개의 깃발 묵상이라는 것으로 집약을 시켜 놓은 거예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30년 동안의 사생활을 묵상하기 위해서 네 차례나 연속해서 기도하도

록 길게 기도자료를 잡아 놓으신 것 아닌가 한다. 그런 생각이 들죠. 이런 점에서 두 개의 깃

발 하는 것이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리고 하나는 루치펠의 깃발, 사탄의 괴수라고 이야기

하는 루치펠의 깃발, 이 두 개의 깃발의 싸움, 양 진영의 싸움인 거예요.

 

이것도 역시 시대적 배경을 좀 염두에 두어야 되죠. 요즘은 그런 영화 없어져 가지고 보기가

힘들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제 어렸을 때 중.고등학교나 다닐 때 [흑기사] 하는 그런 영화가

있었어요. 가끔 이 중세 때 그런 영화를 보면은 넓은 평원에 양쪽에 양 진영이 딱 마주 보고

서 있으면서 나팔 불면서 막 말타고 달려와서 중앙에서 막 싸우고, 그래서 깃발을 빼앗는.

그래서 승패를 나누는 그런 어떤 전쟁. 옛날 전쟁 치루는 모습이 그랬던 거죠.

 

이냐시오 성인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한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깃발, 그리스도의 진영이 자리잡고 있고, 또 한쪽에는 거기에 대적하는

루치펠의 깃발, 루치펠의 진영이 자리잡고 있는 그러면서 이 양 진영 사이에 커다란 싸움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렇게 보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 있다가 이야기를 한다 손치더라도 두 개의 깃발에서 여러분

들이 염두에 좀 두었으면 하는 것은 지난 강의에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관상할 때도 이야기

를 좀 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이 둘째 주간에서는 계속 이야기 하는 것이 둘째 주간에서는

예수님을 좀 더 깊이 알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잘 따르는 것. 이것이 둘째 주간 전체를 관통

하면서 청해야 할 유일한 은총이다. 그래 이야기를 했죠.

 

# 둘째 주간에 청해야 할 은총: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많이 사랑하고, 잘 따르는 것

 

그랬을 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서의 예수님이라기 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님, 우리랑

똑같이 먹고, 자고, 마시고 하는 그런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깊게 알아들으려고 하는 것.

이게 둘째 주간의 목적이죠.

 

그랬을 때 이 두 개의 깃발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이 사생활 30년을 통해서도 우리가 학교

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사회 문화적인 규범들도 익히고 그러면서 쭉 지혜도 자라고 몸도 튼튼

해지고, 세상을 보는 눈도 형성이 되고 그러는 것처럼 예수님 또한 나자렛 30년의 삶을 통해

서 당신의 사회를 보는 관 대사회관, 세상을 바라보는 눈 대세계관, 인간을 이해하는 시각

대인간관, 이런 것들이 전부 형성된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은 예수님께서 인간을 바라보시고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거기의 어떤 근본 원리

근본 핵을 탁 간치(諫治)해 내신 것이 두 개의 깃발 싸움으로 이렇게 읽어드리는 것.

 

# 두 개의 깃발의 싸움: 예수님이 바라본 세상의 근본 원리

 

그렇게 때문에 이 두 부분을 잘 이해한다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시고 인간을

바라보셨던 것을 깊게 알아들음으로써 우리도 신앙인들로서 어떻게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

봐야 되는가? 어떻게 인간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되는가? 이런 점에 대해서 나름대로 조절

들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 예수님의 세상관과 인간관을 통해 우리 신앙인의 관점을 바로 잡도록

 

그래서 그 작업을 하는데 여기에서는 우리가 둘째 주간에서 계속 청하는 은총이 예수님을

더 잘 안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에 대한 약간의 변성이라고 그럴까? 좀 수정 보완하는

차원에서 두 개의 깃발을 통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악신의 꾐에 빠지지 않는다. 악신

의 속임수에 떨어지지 않는다. 루치펠의 전략에 빠져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쫓아서 간다고,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그 길로 간다고 계속 가고 있

면서 자칫 잘못하면은 예수님의 길이 아닌 루치펠의 길로 떡 빠져들 수 있는 이런 어떤 어

움을. 따라서 루치펠의 속임수를 잘 이해하고 거기에 빠져들지 않는 은총, 그러면서 내 자

을 지켜내는 은총. 이러는 과정들을 통해서 진정한, 참된  삶을 이루어내기 위한 은총 이것

을 계속 추구하는 것. 이게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에서 우리가 해야 될 목이다 하는 거예요.

 

# 두 개의 깃발 묵상을 통해 청할 도움:

   루치펠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고 참된 삶을 이루어내는 것

 

그래서 이 두 개의 깃발 묵상을 하는데 정작 이렇게 피정지도 같은 것을 하면서 이렇게 보면

은 이 그리스도의 깃발과 루치펠의 깃발 이러면은 전쟁을 치르는 거니까 전략이 아노는 거예

요. 작전이 나오는 거죠. 그랬을 때 이 루치펠에서는 부귀 그다음에 명예 그다음에 오만, 물직

적으로 부귀한 것을 탐하게 하고, 정신적으로 명예를 추구하게 범하고 그러면서 오만에 떨어

지게 만드는 것. 이런 것들을 핵으로 해서 그다음에 그 모든 악행들이 여기에서 뿌리를 두고

쭉 나오는 것. 이런 작전을 펼치는 거예요.

 

이제 거기에 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부귀 대신에 가난 그다음에 명예 대신에 모욕, 오만 대신

에 겸손. 이 전략으로 맞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작 부귀를 쫓고, 여러분들

요즘은 뭐 귀에 신물이 나도록 들리는 이야기가 무슨 재태그죠. 그래서 무슨 부동산 투자를

해 가지고 아파트 전매를 하고 이러면서 재산을 좀 증식시켜야 되겠다. 이런 데 대해서 조금

이라고 똘똘하다 싶으면은 그 일을 해 내야 되고, 해 내지 못하면은 뭔가 좀 바보 취급 당할

수도 있는 그런 세상이죠.

 

이게 뭐 신자든 아니든 별 대차없이 거의 대부분이 그렇게 움직인다고 보여지죠. 그런데 그런

어떤 부귀,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살고 있고 또 명예를 추구하기 위해서 난리를 피우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사 때라든지 이런 영성 특강이라든지 이런 이야기를 하면은 "아냐, 그런

것 세상이 붙쫓는 것들 너무 쫓아갈 게 아니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가난하게 살아야 돼.

슨 모욕을 달게 받아야 돼. 겸손하게 살아야 돼." 그런 이야기들을 하죠. 그렇게 생각을 하죠.

 

그러다보니까 피정 지도를 할 때 이렇게 면담을 하면서 보면은 이 피정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해 나가다다 첫째 주간 기도를 끝내고 둘째 주간에는 주로 자기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데 주로 죄스러운 장면, 어두움의 장면 이런 것들을 주로 봤었죠. 이러다가 둘째 주간 들

어와서 벽두에 처음에 뭐 그리스도의 나라나 천주 강생 잠깐 보고 바로 이어서 두 개의 깃발

이 떡 나오니까 자기 반성에 떨어지는 경향들이 곧잘 있는 거예요.

 

아,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게 살기를 원하는데 나는 그저 재산 증식에 혈안이 돼 가지고 주식

값이 떨어지고 이러면은 하루 종일 힘도 없고, 그러면서 나는 얼마나 나쁜 신자인가? 제대로

걸어가고 있지 못한 사람인가? 그러면서 자기 반성도 하고, 또 명예 대신에 모욕을 추구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이야기 하시는데 나는 내 자존심 누가 건드리면은 치를 떨고 못 견디고.

그런 내 모습을 또 반성하고. 그러면서 나는 또 얼마나 겸손하지 못한가. 이런 자기 자신의

모습의 어떤 부족한 점이라고 할까? 어두운 점, 나쁜 점 이런 것들을 떡 반성하고 있는. 이런

차원이 돼 가지고는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는 거예요.

 

# 영신 수련 둘째 주간: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반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나와 세상 속의 근본적인 영의 움직임을 이해

 

만약에 그런 게 필요하고 하다면은 첫째 주간에 이미 그 작업들을 하고 통과해 나왔죠.

두 번째 주간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근본적인 영들의

움직임, 우리 사회 안에 있는 근본적인 영의 움직임들이 깊은 차원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그것을 이렇게 보고 그 점에 대한 어떤 명확한 인식, 이해 이것을 얻으려고 애써야

하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양 진영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이나 보고 첫째 주간에 했던 것처럼 뭐 반성

이나 하고, 성찰하고 이런 차원이 아니고. 그래서 이 두 개의 깃발을 묵상한다 이럴 때 이

두 개의 깃발은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차원의 움직임인 거예요.

 

# 두 개의 깃발은 영적 차원의 움직임

 

인간 존재의 깊이에 있어서 우리 강의 처음 들을 때 들머리에 그런 이야기들 많이 했었죠.

맨 밑레 존재의 대사슬 이런 이야기. 물질이 있고, 몸이 있고, 정신이 있고, 영이 있고, 혼,

영 뭐 이런 식으로 할 때 그럴 때 우리 존재의 깊이에 대한 이해 문제들인 거예요. 인간과

사회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들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가?

 

# 두 개의 깃발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을 발견

 

어떤 힘들이 우리를 막 움직이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알아듣는 것.

그랬을 때 이 그리스도의 깃발 혹은 루치펠의 깃발 이런 두 깃발의 대립 이것은 이런 영의

차원에 대한 문제들인 거예요. 이런 정신 차원, 즉 지성이라듣지, 심리라든지, 감성이라든

지, 이 정도의 차원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머리로 좀 알아듣고 그 다음에 의지를 강하게 가지면은 그리스도의 깃발을 쫓아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은 너무나 피상적인 문제인 거예요. 여러분들쯤 되면은 그동안의 몇

십년의 삶을 통해서 몸으로 알아듣고 있을 거예요. 내가 뭐 언제 올바른 생각을 못해 가지

고 옆길로 자꾸 떨어지는가? 내가 무슨 의지를 한번 두  번 결심했는가?

 

새해 벽두만 되면은 새 결심도 하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곧잘 넘어지던데. 그래 이런 것

들이 머리로 옳게 판단하고 어금니 한번 질끈 깨문다 이래 가지고 내 삶이 바뀌고, 사회가

바뀌고 이러는 것 아니다. 그보다도 훨씬 깊고 강한 영의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는 힘들이

올라오고 있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한 이해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나라 [91-98]

번 그리스도의 나라 관상을 할 때도 그랬고 [98]번 기도에 보면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 놨죠.

 

# 영신 수련 [98]

온 누리의 영원하신 주님, 당신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참으로 선하신 당신과 영예로운

당신의 어머니와 천상의 모든 성인 성녀들 앞에서 저를 바치옵니다. 오직 당신께 더 큰

봉사와 찬미가 되도록 온갖 모욕과 비난을 감수하고 모든 정신적, 실제적 가난에 이르기

까지 당신을 본받기를 원하고 바라며 신중히 결정하였사오니, 부디 저를 그런 생활과

신분으로 선택하여 주시고 받아주시옵소서.

 

솔직히 탁 이야기를 해서 저희들 같이 신부고 더군다나 저는  수도자고 그렇죠. 수도생활

을 하고 있고, 사제 생활을 하고 있고 이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 건드리는 거, 내한테 모옥

을 가하는 것. 이런 것은 견딜 수가 없이 힘들어 하는 거예요. 거의 뭐 우리 아킬레스건 같

죠. 사는 의식주 생활은 좀 가난하게 그렇게 산다 그거는 예,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러는데 정신적으로 모멸감을 주는 것, 모욕과 수치를 안겨 주는 것, 인간으로서 제대로

대접을 안 해 주는 것. 이러면은 그냥 진짜 온 몸이 바르르 떠는 거예요.

 

그런가 하면은 가난 문제도 그래요. 요즘 교회가 엄청나게 부유해졌죠. 그런데 정말 실제

적인 가난은 고사하고 정신적 가난에 이르고 있는가? 정말 우리가 가난을 원하고 좋아하

는가? 이런 문제들에 가면은 참 자신이 없죠. 그런데 그런 것들을 예수님께서 뭘 원하시는

지 적어도 내 사는 모습은 전혀 딴판이라고 하더라도 머리로는, 입으로는 이것이 바람직

하고 좋습니다. 가난과 모욕이 더 우리가 취해야할 길입니다하고 생각을 하고 이야기들은

하죠.

 

그런데 그런 것들을 생각 좀 고치고 그다음에 의지를 좀 굳세게 갖고 그런다 해 가지고

모욕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올라오고, 가난을 견뎌낼 수 있는 내적 힘이 닦이느냐 하면은

전혀 아니다 하는 거예요.

 

# 생각과 의지만으로 가난과 모욕을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 저런 것들을 한 달 피정 중에 떡 기도를 하면서 저런 대목을 받으면은 한 달 피정 들

어온 사람들이 얼마나 거룩하고 좋은 생각을 많이 하겠어요. 한 달 피정은 우리 일반 수도

자들도 그렇고 평신도들은 뭐 말할 것도 없고 평생에 한번 할까 말까 그정도의 어떤 기회

들이죠. 그러니까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가지고 제대로 살아내려고  애를 쓰는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저런 [98]번 기도를 떡 하고 있으면은 기도를 의지력으로 밀어부치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많이 올라오는 거예요. 예, 머리로 생각할 때 올바른 생각, 예수님이 이야기하시

는 그 생각 전부 머리로 알아들으면서 예, 맞습니다. 좋습니다. 옳습니다. 그러고 있거든요.

 

그러고는 뱃속을 따뜻하게 하면서 의지력으로 좋아, 내 피정 마치고 나가면 앞으로 정말

이렇게 수도자답게 가난하게, 모욕을 즐겨 받으면서 그렇게 살리라. 그렇게 마음을 뜨겁게

달구고 한 달 피정을 끝내죠. 그런데 그래 가지고 바뀔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면은 착각도

유만부득인 거예요.

 

인간 존재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피상적인 차원에서 약간 좀 건드린다 해 가지고 그렇게 쉽게

싹싹 바뀌는 게 아니다. 훨씬 더 크고 깊은 존재가 인간이다. 영의 차원에서 이 영역에 들어가

면 여기는 말로 거의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깊은 영역이다. 여기에서 올라오는 힘들이

우리의 정신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이고 그러고 있기 때문에 밑에 있는

 

 

 

밑에 있는 이 차원의 힘하고 영의 차원의 힘 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그래서 이것을 함부로

알아들을 것은 아니다. 이 말은 [91-98]번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관상도 그렇고 그다음에

다음에 가면은 여러분들한테 복음 관상에 대한, 복음관상 기도 방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좀

설명을 할 거예요. 예수님의 공생애 장면을 가지고 기도할 때는 묵상을 하지 말고 관상을

해라. 이걸 복음 관상이라고 하거든요. 관상으로 전부 이끄는 거예요.

 

지금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관상도 그렇고 그다음에 복음 관상도 그렇고, 그다음에 오늘

보고 있는 두 개의 깃발도 그렇고 이 모든 것들 이 은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

은총의 차원 하는 것은 내 지성과 의지에 의해서 통제가 되는 영역들이 아니다. 영의 차원

에서 훨씬 깊은 차원에서 성령의 기운에 의해서 일어나는 활동이고 변화들이다.

 

# 지성과 의지를 넘는 영적 차원의 은총

 

우리는 참으로 겸손되이 그 성령의 활동을, 성령께서 움직여 주시시를 계속 청하고 기다리고

간절히 원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갈 몫이지 그냥 생각 내지 판단을 예수님 하고 ?비슷하게 좀

했다고, 그리고 앞으로는 좀 잘살아 보겠다고 결심 좀 했다고 그래 가지고 변화 일어나는 것

아니다 하는 거예요.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두 개의 깃발과, 루치펠의 깃발 할 때 이 대목을

이해하는 것도 그냥 머리로 그냥 예, 가난하고 부귀, 모욕과 명예, 예 그래서 당연히 이 쪽이

옳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데, 이게 그리스도의 진영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그대로 따

라 가야죠. 따라 가야죠 하면서 당위적으로 그렇게 해야 된다라고 딱 생각해 버리는 것은 어

떤 면에서는 아주 쉽죠.

 

명색이 신자들이라면은 그리고 또 명색이 수도자라면은 어느 한 명 예외 없이 그렇게 다 생

각을 할거다 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 하고 현실적으로 그렇게 살아내는 것 하고

는 이거는 진짜 하늘과 땅이 먼 것처럼 멀죠. 이런 점에서 두 개의 깃발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점에 대한 감각을 살려 내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영적 차원에서 일어나고 성령의 도우심

이 없이는 안 된다. 이 점을 미리 염두에 두어야 되는 거예요.

 

# 두 개의 깃발에 대한 이해는 영적 차원에서, 성령의 도움심으로 가능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보셨을 때 아까 그랬죠. 나자렛 30년의 삶을 결산하는 것. 이냐

시오 성인 나름대로의 해석인 거예요. 예수님께서 나자렛 30년 동안 사시면서 인간 관계를

맺으시고 사회를 보시고 이러면서 생활하셨던 것. 그 예수님 나름대로 얻어낸 결론이 두 개의

깃발의 대립으로 파악을 하셨을 것이라고 해석하시는 거예요.

 

즉 이거는 이런 이야기인 거예요. 예수님 단 한번도 야, 유대인들이 지금 이렇게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니까 세금 거두는 것을 이런 식으로 제도를 고쳐야 된다. 혹은 로마인들로

부터 핍박을 받고 있으니까 저항군을 형성해 가지고 독릭 투쟁을 해야 된다. 이런 식의 뭐

제도를 바꿔야 된다. 법률을 고쳐야 된다. 이러자, 저러자. 이런 이야기 일절 안 하셨죠.

 

그런데 그렇다 해 가지고 요즘 와서 신부님들이나 수녀님들이, 수도자들이 나라의 정치가 돌

아가는 모습이라든지 이런 데 대해서 뭔가 발언을 하면은 곧잘 언론에서 하는 이야기가 "너희

들은 왜 종교인들이 정치, 경제 이런 것에 간섭하느냐? 너희들은 너희들 일이나 잘 해라." 그러

면서 어디서 뭘 줏어 들었는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 것은 하느님에게" 이런

황당한 소리 하죠. 뭘 잘못 알아 들어도 한참 잘못 알아듣고 있어요.

 

예, 만약에 신부님이나 수녀님들, 수도자들이 사회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를 할 때는

사회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권력을 쥐고 싶은 욕망이, 경제력을 확보하고

싶은 그런 욕심이 때문에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고 그러는 게 아닌 거예요. 교계의 지도

자들은 모든 신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생명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은 생명

을 더욱 더 크게 키워낼 수 있는가?

 

# 삶과 분리된 신앙이 아닌 삶 안에서 더 큰 생명을 누리기 위한 신앙

 

생명을 누리되 어떻게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할 수 있는가? 에수님 당신의 목적도 그것이

었죠. 여러분들이 지금 그냥 세상에 적당히 한발 담그고 적당히 한발 교회 문턱에 걸쳐 놓고

그렇게 사는 모습도 ?나름대로 괜찮고 생명을 누리면서 걸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좀 아쉽지 않느냐? 더 큰 생명을 누릴 수 있지 않느냐? 그걸 누리게

하고 싶다 하면서 뭔가 가르침을 베풀고 계시는 것이고, 요즘 교회에서 누가 그런 발언을 한

다면은 생명과 관련된 그 물줄기가 정치판으로 흘러가다 보니까 정치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것이고, 경제 영역으로 스며들고 있다 보니까 경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확실하게 알아 들었으면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한다 하는 것은 그저 성당에 모여서, 교회에

모여서 "주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만 하고 있고 삶 속에 다시 돌아가면은, 자기

직장으로 돌아가면은 세상 사람들 빰치는 논리로 재산 증식하고, 명예를 들어 모으고, 권력을

쥘려고 그렇게 애쓴다면은 이런 것은 우리 신앙의 영적 여정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거예요.  삶하고 신앙 여정하고 완전히 일치를 해야 되요.

 

그런 면에서도 우리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영적으로 읽어드려야 되고

그런 것들을 우리는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은 복음화를 시켜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를 했죠.

 

# 삶과 신앙의 일치를 위해 삶 속의 모습들을 영적으로 읽어내야 한다(복음화)

 

우리가 두 개의 깃발을 보고 들어갈 때는 참된 움직임들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영적 움직임

이 어디에 있는지 이런 것들을 깊게 식별을 하면서 움직여야 될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랬을

때 우리 이 가난과 부유, 이제 작전들을 구체적으로 살펴 봤으면 하는데 가난과 부귀, 모욕과

명예, 겸손과 오만, 이 가난과 부귀 이 부분을 진짜 이해를 좀 잘 해야 되겠다 싶은 거예요.

 

가난과 부귀 이런다 해 가지고 요즘 모든 사람들이 부유해지려고 나리를 피우죠. 학생들도 스

펙 잘 쌓아 가지고 좋은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 이것이 최대의 관심사로 돼 있는 것 같은 거예

요. 부모들도 재산을 증식하고, 사위감이나 며느리를 찾아도 수익이 많은 사람을 선호하고 모

든 것이 경제적인 풍요로움, 부귀를 향해서 치달리고 있는 이런 세상에 가난을 택해야 된다.

 

이래 이야기를 하면은 신자들인 여러분들, 여러분들쯤 되면은 적어도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

생활 하려고 애를 쓰는 분들이예요. 그런 여러분들 조차도 가난을 택해야 된다 이러면은 와

닿는가? 가난을 택하겠다고 마음이 생기는가? 그럴 턱이 없죠. 이 점에서 우리 좀 깊게 알아

들어야 되겠다 싶은 거예요.

 

여기에서 루치펠의 작전하는 여기의 부귀하는 것은 진짜 우리가 보통 이야기 하는 가난한 것

과 부유한 것 그렇게 갈라 놓은 그 측면의 부귀인 거예요. 재물을 많이 확보하는 것. 재산을

많이 가지는 것. 그 부귀.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작전 속에서 가난 하는 것은, 그

런 부귀와 대립되는 가난한 것. 그 의미하고는 다르다 하는 거예요.

 

# 그리스도의 가난은, 물질적 부귀와 대립되는 궁핍이 아니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까 만약에 그렇게 가난한 것이 진짜 늘 떨어진 옷 입고 먹는 것이라고는

그저 불어터진 라면이나 먹고 추운데서 벌벌 떨고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우리가 취해야 할

모습이고 걸어가야 할 길이다. 그런다면은 이것 좀 이상한 것 아니냐 하는 거예요. 하느님께

서 도대체 이렇게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어 놓으신 것 그렇게 배를 쫄쫄 굶고 헐벗음에 떨고

그렇게 하실 바에야 뭐할려고 이렇게 풍요롭게 만들어 놓으셨는가? 그게 아니다 하는 거예요.

?본래 우리 가난 하는 것은 가진 게 없는 게 가난한 거죠. 집도 절도 없고 가진 것이 없는 것이

가난하다. 즉 내 소유다. 이거는 내 거다 하는 그게 없는 것.

 

# 그리스도의 가난: 소유의 집착이 없는 것

 

이 말은 현실적으로는 어쩌면은 아주 부유한 집에서 아주 호화로운 의식주 생활을 하고 있으

면서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내 것이 아니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하는 자세로 만약에 살아내고 있다면은 이것은 철저한 그런 측

면의 가난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깃발 속에서의 가난이다 하는 거예요. 이것을

이냐시오 성인은 두 개의 깃발 이야기를 하면서 정신적인 가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죠.

 

# 그리스도의 가난은 정신적 가난

 

정신적인 가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실제적인 가난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의식주 생활이

궁핍한 것 이 현실적 가난으로 들어가기를 그것까지도 청할 수 있으면은 청한다 이러지마는

우선적으로 우리한테 요구하는 것은 전부 정신적인 가난인 거예요. 이런 정신적인 가난을

요구한다. 즉 모든 것을 내가 옷도 가지고 있고, 차도 가지고 있고, 집도 가지고 있고 다 뭘

누리고 있는 것 같은데 내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누가 달라고 그러

그대로 다 줘 버린다. 이런 의미에서의 가난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어떤 재물이나 재산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느냐? 하는 이 집착으로

부터 완전히 놓여 놔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쩌면은 우리는 아파트 20평 밖에 안 되는

아파트에서 5식구가 박닥박닥 거리면서 그렇게 살고 있으면서도 엄청나게 부유한 정신, 부

한 생각을 지니고 있을 수가 있어요. 이건 내 거야 하면서 그걸 놓는데 대해서 부들부들

떨고 있다면은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기가 힘든 거예요.

 

그런데 50평이 넘는 아파트에서 그저 노부부 둘만 덜렁 살고 있으면서도 그러면서 불편한

것 없이 살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가난의 정신 속에서 살 수도 있는 거예요. 이 점에 대한

구분들이 명확하게 필요하다. 또 이렇게 되면은 나 자신에 대한 이해들, 인간에 대한 이해

들 이런 문제들하고도 ?전부 연결되어 들어가는 거예요.

 

여기에 또 모욕과 명예 하는 이런 것도 세상 사람들이 부귀를 취하고 명예를 얻으려고 애를

쓴다 이럴 때 명예를 찾는다 하는 건 뭐예요? 누가 명예를 존중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지, 나

를 명예스럽게 해 주는 사람이 있고, 나는 명예를 누리고. 그래서 너랑 나랑은 다르다 하는

이야기가 확실하게 있어야 되요.

 

그리고 너랑 나랑 구별지어지고 차별이 되고 그래서 명예를 누렸든 사람이 있고 명예를 주

는 사람이 있고, 여기에는 나하는 것이 대단히 뚜렸하게 부각되고 자기 중심, 자아 중심으로

인간 관계가 딱 형성되는 거죠.

 

# 명예: 너와 나의 차별, 나 중심의 인간 관계

 

그런데 여기서 모욕 하는 것은 그저 명예와 상대적인 지평선에 놓여 있는 그런 모욕이 아니

고 모욕 하는 것은 사람들을 너랑 나랑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함께 읽어 드려 버리는 거예요.

 

# 그리스도의 모욕: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는 것

 

그래서 상황에 따라서 그때 그때 모욕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고 이런 관계 속에서 읽어 드

리는 것. 인간 관계를 그렇게 보다 보면은 나라는 것을 주장할 것이 전부 없어지다 보니까

겸손하게 되는 것. 그거에 반해서 오만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나가 있고 나라는 것을

아주 강조하면서 두드러지게 부각시킬려고 애를 쓰죠. 이런 차원에서 부귀나 명예나 오만

하는 것은 철저하게 내 중심, 그리고 나랑 너랑은 다르다 이런 생각 속에서 계속 움직이는 것.

 

# 부귀, 명예, 오만 : 나 중심, 너와 나의 차별

 

그게 세상의 논리고 세상 관점이죠. 거기에 비해서 이 가난이나 모욕이나 겸손은 여기와

상대적인 지평 속에서의 가난, 모욕, 겸손 이것이 아니고 이런 것들을 아우르면서 완전히

뛰어넘고 있는 그 점에 있어서의 진정한 의미의 가난, 진정한 의미의 모욕, 진정한 의미의

겸손, 이것은 나를 나로서만 독립시켜 개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모두 다 함께 하

나로 연결 돼 있는 가운데서 알아보고 움직이는 것.

 

# 가난, 모욕, 겸손: 나와 너를 아울러 구분을 뛰어넘는 것

 

이게 이런 영들의 움직임이 우리 안에 한켠에 있고, 한켠에는 또 이런 영들의 움직임(부귀,

명예, 오만)이 있다 하는 거예요. 예, 시간이 많이 돼 가지고 지금 충분히 설명을 못 했는데

나중에 이어서 다시 좀 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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