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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제는 믿음의 중재자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05 조회수1,196 추천수10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


<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


복음: 마태오 10,17-22







     < 사제는 믿음의 중재자 >

          

운명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운명을 믿는 한 아이 때문에 미국의 극과 극에 살던 전혀 모르던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된다는 어쩌면 좀 황당하지만 또한 있을법한 이야기, ‘시애틀의 잠옷이루는 밤의 줄거리입니다.

시애틀에 사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던 샘은 아내가 암으로 죽는 비극을 맞습니다. 실의에 빠진 아버지를 보다 못한 아들 조나는 새로운 엄마를 구해야 한다고 라디오 방송에 전화를 하게 됩니다. 라디오에서는 조나의 사연을 듣고 그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싶다며 조나에게 아버지 샘을 바꾸어 달라고 합니다. 샘이 전화를 받았을 때, 앵커는 아내의 무엇을 잊지 못하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샘은 아내를 만났을 때 마치 마법(magic)’에 걸린 것과 같았다고 말을 합니다.

이 방송을 차를 운전하다 우연히 듣게 된 한 여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애니입니다. 애니는 신문기자이고 약혼한 남자가 있는 여자지만 여전히 운명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약혼자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운명적인 면은 없었습니다. 이 방송을 들으며 혹시 샘이 자신이 찾는 운명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에게 편지를 쓰기로 하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214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 만나고 싶어요.”

운명적으로 그렇게 만나고 싶었지만, 그에게 날아오는 수천통의 편지 속에서 애니의 편지가 읽히기는 불가능한 일. 미국 전역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편지 중에, 아들 조나는 애니의 편지를 가장 좋아합니다. 짧고 단순하고 운명을 믿는 그런 내용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가까운 곳에서 새로운 애인을 사귀게 된 아빠 샘은 그런 편지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특히 시애틀 반대편에 있는 뉴욕까지 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아들 조나보고 정신 차리라고 하며 무시해버립니다.

애니는 직접 운명을 찾아보기 위해 출장 핑계로 약혼자 몰래 시애틀로 날아와서 샘을 찾아냅니다. 샘도 생판 모르는 애니를 멀리서 보고는 첫 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러나 애니는 샘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운명이 아니라고 믿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약혼자에게 충실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끝날 수 있었지만, 운명을 믿는 아들 조나는 214일 발렌타인데이에 혼자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망대로 올라가, 보이는 여자들마다 혹시 자신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낸 애니가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아니라고 합니다. 애니는 그때 빌딩 건너편에서 약혼자와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사라져 어찌할 바를 모르던 아빠 샘은 결국 빌딩 전망대로 조나를 찾으러 올라옵니다. 그리고 아이를 발견하고는 아들에 대한 사랑을 확인시켜주고 둘은 내려갑니다.

그때 애니는 엠파이어 빌딩에 발렌타인데이 하트가 그려지는 것을 보고는 무엇에 끌린 듯이 약혼자를 그대로 두고 빌딩 전망대로 올라오지만 너무 늦은 밤이라 거기엔 아무도 없습니다.

운명은 없구나!’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구석에 아이의 가방이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나의 것이었는데, 샘과 조나가 그때 그 가방을 찾으러 다시 올라옵니다. 그렇게 둘은 다시 운명처럼 만나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너무나 멀리 살아서 절대로 만날 수 없는 두 사람이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중간에 이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는 가능합니다. 저희 아버지도 북한에서 태어나신 분이고 어머니는 부산 분이시지만 누군가의 중매로 만나게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운명이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그 운명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둘을 이어주는 중재자가 있다면 불가능한 운명도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아빠 샘도 여자 친구가 있었고 편지 한 장이 전부인 애니란 여자도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조나란 아이의 믿음이 이 둘을 맺어주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의 믿음은 그것이 표징, 혹은 사인(sign)이 되어 그 사람을 통해 서로 불가능하게만 여겨지던 둘이 새로운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마술처럼 자신들을 맺어주었다는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이는 이렇게 또 다른 믿음을 위한 표징이 되게 됩니다.

 

카나의 혼인잔치가 첫 번째 표징(sign)’인데 바로 성모님의 믿음을 통해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낳는 믿음, 그것이 표징이 되고 중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가 하느님과 믿음이 없는 이를 연결시켜 주는 행위를 사제직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자칫 사제직이란 사제가 미사를 드리고 고해성사나 사목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이 그런 성무를 수행하기 위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제는 그러한 성무를 수행할 능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천 명을 먹이라고 하셨을 때처럼 실제로 사제들은 그들의 능력으로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거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힘은 위에서 주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했다고 해서 하느님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사제로서 미사와 고해성사를 열심히 하며 살았어도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한국 사제들의 수호자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대축일입니다. 16세 때부터 고생하며 공부해서 24세에 서품을 받고 25세에 순교를 당한 김대건 신부님은 그 노력한 것에 비해 사목활동은 거의 하지 못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진정 사제직을 수행하지 못한 것일까요? 순교하지 말고 계속 사제직을 수행했어야 할까요?

따라서 참다운 사제직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성무와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사제직은 믿음으로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 때문에 순교를 당한다면 평생 사제로서 살며 미사를 하는 것보다 더 잘 사제직을 수행한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믿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운명적으로 하느님을 믿고 만나게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온전한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해 외적인 것들보다는 김대건 신부님처럼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합니다. 그분은 당대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박학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학식을 당신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셨기에 그것을 버리는 것에 아무런 미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배움이 사목생활을 하면서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했다면 나중엔 그것이 아까워 목숨을 바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제직을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은 믿음을 증가시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이 세상이 믿을 수 있게 되는 표징(Sign)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당신 믿음으로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당신 태중에서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만한 사제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여성 인권옹호자들은 여자가 사제직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종교가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교회를 반박합니다. 그러나 성모님만큼 완전한 사제직을 수행한 사람이 없기에 하늘나라에서는 어떠한 사제들보다도 높은 사제로서 성모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 믿음으로 하느님과 세상을 하나로 만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카나의 혼인잔치 때 그 직무를 완전히 수행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으로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합니다. 포도주가 있어야 혼인잔치가 지속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믿음이 없어서 포도주, 즉 성령님을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하시며, 그리스도의 기적을 강요하십니다. 그 믿음에 강요받아 예수님은 첫 번째 기적을 하시며 혼인잔치를 이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사제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수행할 따름이지, 하느님이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가 빵이 되게 하는 믿음은 성모님의 사제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오천 명도 먹일 수 없는 믿음을 지닌 것이 사도단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모님의 사제직이고, 우리 모두가 세례 받을 때 받는 그 공통 사제직이 성모님의 이 사제직을 본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처럼 믿음만 충만하다면 직무적으로 하는 사제직을 훨씬 뛰어넘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유명한 천문학자 키르히네르에게는 천주님에 대해서 불신을 표명한 과학자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키르히네르를 방문한 친구는 책상 위에 세워둔 태양계의 운동 모형을 몹시 칭찬하였습니다. 그것은 손잡이를 돌림에 따라 유성이 태양 주위로 각각의 궤도를 회전하도록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친구가 물었습니다.

아주 정교한데? 도대체 이건 누구의 작품이지?”

아니, 구태여 누구라고 말할 것도 아냐.”

그러지 말고, 알고 싶으니 누가 만들었는지 말해 주렴.”

아무도 그것을 만들지 않았어. 그것은 저절로 만들어져 있는 걸세.”

이 친구는 이야기의 요점을 몰라서 어리둥절하기 시작했으며, 오히려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래, 당신은 농담을 하려고 하는군.”

나의 진지한 이야기를 농담으로 돌리려 하니, 이상한 것은 오히려 당신이 아니오? 당신은 이 조그마한 모형을 그것이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데도, 실제의 태양, , , 그리고 광막한 전 우주를 창조주 없이 저절로 생긴 것으로 믿고 있으니 말이야.”

그의 친구는 더욱 생각에 잠겨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키르히네르의 견해에 동의하였다 합니다.

[오기선(요셉) 신부, 교리실화 ]

 

하느님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를 다시 하느님께로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믿음이 강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그에게도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이 중재요 사제직인 것입니다. 사제직은 행동보다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행동을 따르게 하는 것이지, 행동이 우선이 되면 위선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랜 사제로서의 삶을 살지는 않으셨지만 참된 사제들의 수호성인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앞으로의 우리 사제들에게, 또 공통 사제직을 수행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신지 더 깊이 다가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사제직무의 힘은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목에 칼이 들어와도 기쁘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그런 확고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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