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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제15강 영적 차원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07 조회수936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유시찬 신부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15강 영적 차원

 

0. 영적 식별과 관련하여
0.1 영적식별의 목적
0.2 선신과 악신 그리고 내 영
0.3 하느님의 뜻에 대한 식별과 선택의 문제와 관련지어

 

1. 영적 차원의 단계
    - 비유하여, 영적 초등학교 단계, 영적 중학교 단계, 영적 고등학교 단계,

      영적 대학교 단계 등으로
    - 각 단계별로 이론측면과 실천측면 그리고 양 측면을 이어주는 기도측면으로 살펴봄

 

2. 영적 차원의 특성
2.1 깊음
2.2 통합
2.3 ego를 떠남
2.4 의도 내지 동기의 중요성
2.5 믿음의 차원

 

3. 이미 영적 차원에 진입해 있음에 대한 자각

4. 예수님의 삶의 방식 : 삶의 영성화

 

■ 오늘 이야기 ...

우리 신자들 같으면은 영성이라든지, 영적이라든지 이런 이야기 곧잘 하죠. 도대체 영의

차원이라는 것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지성이나 감성의 차원과 어떻게 다른지 그 특성

과 그 영적인 차원에서 여러 가지 역동적인 움직임들을 우리가 깊게 알아봤으면 합니다.

 

■ 시작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당신 안에서 한걸음 한걸음 정진할 수

있도록 함께 하여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저희들이 더욱 더 깊게 존재으 깊은 곳에

가 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인간 존재의 더욱 더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영들의 움직

임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시어 더욱 더 당신의 생각과 당신의 뜻 잘 알아듣고

살아낼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들을 더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가 지난주까지 두 개의 깃발이라든지, 세 부류의 사람들 여기에 대해서 묵상을 하고

그랬죠. 그런데 영신 수련 피정을 한다 할까? 이런 영적 여정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 둘째

주간에 들어와 있죠.

 

# [23] 원리와 기초 ->Ⅰ주간 -> Ⅱ주간 -> Ⅲ.Ⅳ주간-> [230-7]

 

둘째 주간 이렇게 보면은 맨 처음에 [91-98]까지 해 가지고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묵상

혹은 뭐 관상부터 시작 했죠. 거기에서 예수님의 꿈, 비전을 봤죠. 그리고는 그다음에 천주

강생에 대한 신비 이런 것 하면서 예수님의 어떤 청사진, 계획서를 읽어드렸죠. 그러고 나

서 예수님의 탄생 이래가지고 실행에 들어간 것을 쭉 봤죠.

 

# 영신 수련 둘째 주간

 * 그리스도의 나라 ㅡ 그리스도의 꿈

 * 천주 강생 ㅡ 꿈에 대한 청사진

 * 예수님 탄생 ㅡ 꿈의 실행

 

그 다음에 이제 예수님의 나자렛 삶. 탄생하셔가지고 나자렛 30년 동안에 일어나신 일.

이거는 보는데 구체적인 복음 사건은 12살 사건 빼고는 없죠. 여기에서 우리는 이 나자렛

삶을 총 결산하는 의미에서 두 개의 깃발에 대한 묵상을 했고, 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것을 봤죠.

 

# 두 개의 깃발 : '그리스도의 깃발'과 '루치펠의 깃발'

 

그러면서 거기에 대한 자동적인 우리의 존재의 층이라고 그럴까 아니면은 성적표라고 할

수 있는 겸손의 3단계 하는 것을 짚어 봤죠.

 

# 겸손의 3단계

 1. 죄가 되지 않는 한,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는 단계

    2. 불편심(不偏心)에 입각한 사랑의 단계

        3.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은 사랑의 단계

 

이러면서 이제 이 영적 여정이랄까 피정의 흐름상으로는 다음부터 공생애에 들어가는 거

예요. 예수님의 공생애. 즉 세례 사건부터 이렇게 들어가는데 이때 우리의 편의상 두 개의

깃발이라든지 세 부류의 사람들 여기까지 하고 나면은 공생애에 들어가면서 병행할 수 있

는 작업이 물론 그때 그때 사람에 따라서 그런 걸 안 해도 되겠지마는 하느님의 뜻을 선택

하는 이 작업에 들어가는 거예요.

 

#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영의 움직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런 차원에서 이 세례를 관상하기 위해서 복음 관상기도에 대한 설명들이 또 주

어져야 하겠지마는 우선에 편의상 복음 관상에 대한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앞으로 3주에

걸쳐 가지고 영의 식별에 대해서 좀 볼려고 하는 거예요.

 

■ 영의 식별

 

이 영의 식별 이러면은 우리 존재의 층위를 봤었죠. 존재의 대사슬 이야기를 하면서 맨

밑에 물질이 있고, 그다음에 인간의 몸(bady)가 있고, 그다음에 정신(midnd)이 있고, 그

다음에 혼(soul)이 있고, 영(spirit)이 있고 이런 이야기들 쭉 했었죠. 몸, 정신, 혼, 영.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영의 움직임이라든지, 혼의 움직임이라든지 이런 점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거나 모르는 사람들이 어쩌면은 훨씬 많다고 이야기할 수 있죠. 대부분은

그냥 이 정신의 차원, 마인드 차원에서 지성을 써서 판단하는 거예요. 지성이라든지 이성

을 써서. 그래서 뭔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렇게 움직이는 것. 세상 살아가는 데는 이런

것들이 본질적으로 요청되고 필요하죠.

 

그래서 이 차원에서만 쭉 움직일 수 있는데 우리는 존재의 깊이 차원에 있어서 한 단계

더 뛰어오른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성이라든지, 심리 차원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무시

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들을 다 끌어 안으면서 한 단계 더 뛰어 넘어서 식별하는 것.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은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별 관심 없는

사람들은 마인드 이 차원에서 지금까지 배우고, 공부했고, 익혔고 그런 지식, 경험, 이런

것에만 기반을 해 가지고 이성적으로, 지성적으로 판단하면서 움직여 나가는 거예요.

 

이것도 나름대로 좋기는 하지마는 정말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보려고 한다면은

하느님의 뜻 하는 것은 전에도 얼핏 이야기를 했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내 자신의 고유함

을 펼쳐낼 수 있는 것. 이것을 하느님의 뜻이라 한다 그랬죠.

 

# 하느님의 뜻: 우리 가자가 고유의 아름다움을 펼치는 것

 

그래서 진짜배기 내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 나만이 갖는 존재의 가치, 생명력, 이것을

확실하게 읽어내 데는 이 차원(정신의 차원)에서만 가지고는 부족한 거예요. 영의 차원의

이해가 있어야 더욱 더 확실한 하느님의 뜻을 선택해 낼 수가 있다. 그말은 진짜배기 내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생명을 꽃피워 낼 수 있다.

 

# 고유의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서는 영의 차원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영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좀 알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영들의 움직임을 분별한다는 것은 부마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 거예요. 귀

신들렸다는 이야기 가끔 혹은 종종 하기도 하죠. 그런데 성경에서도 예수님이 귀신 쫓는

이야기들 많이 나오죠. 그런데 그런 어떤 부마 현상을 이야기 하는 것은 여기서 다루는 그

런 어떤 부마 현상을 이야기 하는 것은 여기서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귀신들렸다는 현상이 없다고 이야기 하지는 않지마는 이게 지금 귀신들린 현상이다라고

판정을 내리기까지에는 대단히 엄밀한 검증절차를 거쳐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보통 주위에서 보면은 누가 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이상한 말을 막 뱉고 이런다 해 가지

고 "아우, 저 사람 귀신들렸어." 이렇게 쉽게 이야기 하는 그런 경우는 부마 현상이 아니고

심리적인 균형이 깨어진 것으로 봐야지 귀신들린 현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쨌거나 지금 이 사람이 도대체 지금 귀신이 들렸느냐, 안 들렸느냐? 심리적인

균형이 깨져버렸느냐, 안 깨졌느냐? 그것을 도 깨졌다면은 어떻게 치유해 나갈거냐?

이런 문제를 여기서 다루자는 것은 아닌 거예요. 그런가 하면은 또 무슨 진짜 귀신이라는

실체가 딱 있어 가지고 "아, 내 귀신 봤다고." 이런 어떤 귀신의 존재 여부라 할까? 귀신

의 실페 이런 것들을 여기서 확이하자는 그 작업도 아닌 거예요.

 

그게 아니고 지극히 보편적일고 일상적으로 우리 마음 안에서 여러 가지 마음의 움직임들

이 일어나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어떤 때는 아주 평온하고, 따뜻한 마음이 찾아드는가

하면은 어떤 때는 아주 막 불안하고 여러 가지 잡다한 것으로 휘둘리고, 두렵고,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는 그런 때도 있고.

 

그런데 이런 마음의 출렁거림을 보면서 거기에서 뭔가 우리는 상황에 따라서 선택을 하고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으면은 안 되는 이런 경우들이 많이 있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지극히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우리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움직임들을 보면

서 성장을 향해서 나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그 마음의 움직임들을 해독해 내고 거기에 따

라서 행동을 취해 나갈 것인가? 이런 문제들 깊이 있게 따지고 분별하는 것. 이게 영의

식별인 거예요.

 

# 영의 식별: 성장을 위해 마음의 움직임을 살피고, 그에 따른 행동을 결정하는 것

 

그래서 우리가 영의 식별 하는데 이번 시간에는 특별히 좀 알았으면 하는 것은 도대체

우리가 영적 차원 하는 이 영적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 영적 차원이란?

 

우리 곧잘 특히 신앙인 같으면은 영성을 살아내야 된다라든지, 영적인 것이 중요하고

육적인 것은 필요없다라든지, 이런 영적, 영성적, 영성 이런 이야기들을 곧잘 하는데 이런

것들이 도대체 구체적으로 뭔가? 그냥 좀 알듯 모를 듯 하면서 뜬구름 잡는 것 같은 그런

애매모호성이 있죠. 그런데 이점은 명확하게 우리가 좀 분별하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어려운 점은 이런 심리 차원, 이 정신하는 여기가 심리 차원이죠. 여기서도

우리는 어떤 생각이나 느낌들이 올라올 수 있죠. 올라올 수 있죠가 아니고 늘 올라오고

있죠. 늘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느끼고 있고, 여러분들이 지금 이렇게 앉아 있으면서도

안에는 막 오만가지 생각과 느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죠.

 

이 생각이나 느낌하고 영의 차원에서도 생각이나 느낌이 올라오는 거예요. 마인드 차원,

심리 차원에서도 어떤 생각이나 느낌들이 올라오고 이 영의 차원에서도, 영이나 혼의 차

원에서도 역시 생각이나 느낌들이 올라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둘 다 몸뚱아리는 외면적으로 우리가 감각적으로 포착이 되죠. 그런데 그렇

지 않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인 거예요. 둘다. 전부 내 속에서 올라오는 생각들이고

느낌들인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겉으로 이렇게 보면은 그냥 똑같은 생각을 내가 하고 있

고, 똑같은 느낌을 갖고 있고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근원을 쫓아가서 보면은 그 생각이나 느낌이 마인드 차원에 뿌리를 두고 올라

올 수 있고 영(spirit)의 차원에 뿌리를 두고 올라오는 것일 수도 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잘 분별할 필요가 있다.

 

# 정신에서 비롯된 생각이나 느낌과 영적 차원의 생각이나 느낌을 분별할 필요

 

왜 그런가 하니까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데는 이런 영의 차원에서 오는 이거는 다음 시

간에 좀 깊게 이야기를 하겠다 싶은데 영적 위안 하는 게 있어요. 그 영적 위안을 보면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이 차원에서 올라오는 것은 영적 위안이

다 그러는데 이 정신 차원, 심리 차원에서 올라오는 이것은 비영적 위안이다 그러는 거예

요. 심리적 위안이다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이 영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위안하고 심리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위안하고 하느님

의 뜻을 가리킬 때 오차들이 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좀 구분해서 알아두지 않으면은

안 되겠다 하는 거죠. 그런데 이 영의 차원의 구조를 보면은,

 

■ 영의 차원의 구조

 

  

 

먼저 선한 영, 악한 영 하는 이런 개념. 선신, 악신. 선한 영 이 말이예요. 영의 차원이죠.

그 다음에 여기는 내 영인 거예요. 선신과 악신, 내 영이 영의 존재 구조를 이루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내 영 하는 것은 선신이라든지, 악신이라든지 이러는 것은 우리가

의인화 시켜 가지고 알아듣기 쉽게끔 선신의 움직임이 있다. 악신의 움직임이 있다 이러

지마는 내 마음판 안에, 내 존재 안에 선신이라고 이름 붙여 놓은 움직임이 하나 있는가

하면은 악신이라고 이름 붙여 놓은 움직임이 하나 있다 하는 거예요. 우리 모두 안에는.

 

# 우리 안에는 선신과 악신이 공존

 

예수님 당신 자신 안에도 선신과 악신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거예요. 그랬을 때 어떤 면에

서는 선신의 움직임이라든지, 악신의 움직임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예요.

 

# 선신과 악신의 움직임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다

 

그렇게 볼 때 선신의 움직임은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면은 상승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거

예요. 상승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운동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정지하려고 안 하는 거예요.

계속 성장을 위해서 운동하려고 하는. 그리고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려고 하는. 그리고 또

통합을 향해서 나아가려고 하는. 이런 움직임이 선신의 주된 특징인 거예요.

 

# 선신의 움직임: 상승, 운동, 생명(창조), 통합 지향

 

거기에 비해서 우리가 악신이다 이래 이야기 하는 것은 상승하려는 움직임 대신에 하강

하려는 움직임인 거예요. 그리고 운동, 움직임에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정지

하려고 하는, 멈춰버리려고 하는 움직임인 거예요. 그런가 하면은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

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려고 하는.

 

# 악신의 움직임: 하강, 정지, 죽음(파괴), 분열 지향

 

선신이 계속 창조하려고 하는 움직임이라면은 악신은 계속 파괴해 버리려고 하는 움직임.

또 선신은 아까 통합을 이루려고 하는 움직임이다 그랬는데 여기에 대해서 악신은 분열을

향해서 나아가려고 하는 움직임. 이런 반대되는 움직임들이 우리 안에 쭉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움직임들을 그런 선신과 악신의 움직임을 내가 어떻게 통합시켜 내고 있는가?

어떻게 조화를 이뤄내고 있는가?

 

# 선신과 악신의 움직임을 내 영이 어떻게 통합시키고 있는가?

 

우리가 계속 지금까지 영적 여정을 걸어오면서 관점의 변화라든지 이런 것들을 통해 강조

해 왔던 것은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 다른 두 개가 결합해야 된다. 그리고

그 변화가 있어야만 이 비로소 창조라든지, 생명이라든지, 성장에로 나아갈 수가 있다 이

런 이야기들을 계속 해 왔죠. 그래서 하느님 당신 자신 안에 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 안에

도 선신이라든지, 악신과 같은 서로 반대되는 두 기운이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반대되는 두 기운을 어느 한쪽을 없애버리고, 악신을 없애버리고 양쪽을 결합

하면서, 통합시켜 내는 가운데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을 이뤄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랬

을 때 이 내 영이라는 이 존재가 선신과 악신을 통합시켜 내고 있는 그런 역활을 하는 거

예요. 그런데 그 모습은 사람들에 따라서 많이 다를 거라고 보여지죠.

 

어떤 사람은 이 통합과 조화를 멋들어지게 좀 이뤄내고 있는가 하면은 어떤 사람들은 좀

떨어지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층위들이 좀 나뉜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내 영은

궁극적으로는 보면은 성령과 닮은 것이죠. 성령의 조금 미숙한 모습이라 할까? 불완전한

모습, 이런 것들이 내 영의 형태로 들어와 있는 거죠.

 

성령께서는 선신과 악신을 함께 가지고 계시면서도 온전히 통합과 일치를 이뤄내시는 것.

글자 그대로 완벽하게 100 퍼센트 이뤄내신다면은 우리 각자의 영들은 그점에 있어서 아

직 미숙함이나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은 낮과 밤을 교대로 교치시키면서 하루를 통해서 완전히 생명과 존재를 일궈

내시는 것처럼 그렇게 반대되는 두 영의 움직임들을 완벽하게 통합하고 계신다. 거기에 비

해서 우리 인간은 다르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이렇게 보면은 영들 안에 이런 선신과 악신

이런 두 움직임이 있는 것. 영의 차원에서 두 움직임이 있죠.

 

  

 

그다음에 이 몸뚱아리. 어떻게 보면은 이 몸, 영, 그다음에 우리 여기가 정신 혹은 마음 이

렇게 이름을 붙인다면은 영은 성령과 연결되고 있는 하늘(天)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천(天)인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몸뚱아리, 물질에 아주 가깝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이

몸은 지(地)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천(天)과 지(地)를 우리의 이 정신과 마음이 통합시

켜 내고 있는, 하나로 묶어 내고 있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우리의 정신이나 마음 하는 것

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하늘에 영들의 세계를 보니까 선신과 악신 이렇게 쭉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마음도

우리 두 마음 곧잘 생각할 수 있죠.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 성실한 마음과 게으른

마음 이런 상반된 두 마음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긴장과 갈등 속에서 헤메죠.

 

그런데 둘로 되어 있는가 하며은 몸뚱아리도 이렇게 보면은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 들

숨, 날숨, 먹고, 배설하고, 이런 여러 가지들이. 세포들이 하루에 400만 개씩 죽고 새로 생

성되고 그런다 그러죠. 그런  삶과 죽음 이런 것들로 나뉘어져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의

어떤 구성 기본 원리나 마음의 구성 기본 원리나 몸뚱아리의 그것이나 전부 하나의 원리

속에서 쭉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안에 선신과 악신, 이런 식의 대립 되는 두 영이 있고, 이 영을 내 영이 통합한

다 이러는데 이것에 대한 어떤 특징드, 영적 차원에서 드러나고 있는 특징적인 모습들이

뭔가? 이것을 좀 깊게 알아들을 필요가 있죠. 그런데 그 모습을 봐 들어가기 전에 영적 차원

에 있어서도 단계가 있다 하는 것을 좀 염두에 뒀으면 하는 거예요.

 

■ 영적 차원의 단계

 

우리가 영성 교육이라든지, 무슨 피정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많이 받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

하고 영적 진보가 왜 그렇게 좀 더딘가? 이런 걸 보면은 영적 단계별로 맞춘 그런 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비유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면은 영성적인 차원에서도 영적인 초등학교, 영적인 중학교, 영

적인 고등학교, 영적인 대학교 이런 식으로 구분지워서 이야기 할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랬을 때 초등학교를 마쳐야 중학교를 가고, 중학교를 마쳐야 고등학교를 가고, 그렇게

하는 것처럼 영적인 과정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단계들을 밟아나가야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영적 차원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지식적으로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학문적으로 높은 업적을 쌓아 놓고 있을지 모르지마는 영적 차원에서는 아주

저학년일 수가 있죠. 아니면은 아예 영적 차원에 들어가 있지도 못할 수가 있죠.

 

이런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해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 "아, 예비자 교리

를 받아야지." 이래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습. 이것은 이미 영적 차원에서 첫발을 내

디딘 거예요. 물론 이 뭐라고 그러나 유아 세례. 우리 같으면은 유아 세례처럼 애가 나자마

자 엄마 아빠의 뜻에 의해서 세례를 주는 그 경우는 아니겠죠.

 

그러나 자기가 철이 들고나서 의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할려고 덥빌 때, 그래서 우리가 가톨

릭 같으면은 첫영성체 교육을 시키죠. 그럴 때는 이미 나름대로 대단히 희미하고 뿌옇게 보

일지 모르지마는 우리가 보고 살고 있는 이 세상, 세계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하는 데 대

한 막연한 어떤 느낌, 생각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쫓아서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성년이 돼 가지고, 다 큰 어른이 돼 가지고 세례를 받는다 이럴 때는 이런

현상이 더욱 더 두드러지죠. 그동안의 삶의 체험들을 통해서 내가 알고 있는 세상 하는 것

이 이것만이 아니고 뭔가 다른 것이 더 있는 것 아닌가? 도대체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이런

점들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물음이 시작되었고, 그점을 향해서 나아가고자 하는 그 근원

자리를 찾아서 움직이려고 하는 그런 어떤 내적 동기가 형성된 것. 이것 자체가 이미 영적

차원의 첫발을 내디뎠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 영적 차원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이라 해 가지고 전반적으로

존재의 수위가 다른 사람보다, 그러니까 지적 차원에 있어서 아주 많이 성장한 사람, 이

사람보다 일반적인 존재의 차원에 있어서는 존재의 수준이 낮을지는 모르죠. 그러니까

비록 영적 차원에 들어가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정신의 차원에서, 마인드 차원에서 크게

진보해 있는 사람보다 좀 전반적인, 일반적인, 전체적인 존재의 수위를 떨어질지 모르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영적 수준에, 영적 차원에 발을 디디고 들어서고 있다. 이렇

게 볼 수 있죠. 그래서 처음에 이렇게 일으키는 것들은 일반적인 교리적인 지식이죠. 일반

적인, 교리적인 지식이고 그에 따라서 기도도 묵주기도라든지, 염경기도라든지 이런 기도

들을 중심으로 해서 기도 생활이 이루어져 나가죠.

 

그다음에 기본적인 교회 활동이라든지, 사회 활동을 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이 점점점점

깊어지면은 단순한 처음에 예비자 단계일 때는 단순한 교리적인 지식에 머물고 그것들을

배우고 이러는지 모르지마는 거기에서 이제 조금 더 나아가면은 마치 여러분들이 이 강좌를

통해서 계속 들어오면서 추진하고 있는 것처럼 관점의 변화라든지, 하느님에 대한 관이나

인간에 대한 관을 더 심화시키고 성장시켜 나가는 이런 작업들이 막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서 기도도 이제 단순히 염경기도나 묵주기도 이런 차원을 지나서 묵상기도나 혹은

관상기도 같은 대로 진입하기 시작하죠. 이런 식으로 계속 영적 차원들을 단계를 밟으면서

성장해 나가기 마련이다.

 

이제 그러다 보면은 더 깊어지면은 종교간의 대화도 이제 일어나겠죠. 내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인 신앙, 이것을 기본으로 해 가지고 거기에 따라서 다른 종교와의 관계, 유사점은

뭔지, 차이점은 뭔지, 이런 것도 알면서 종교간에도 이제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불교

라든지, 힌두교라든지, 이슬람이라든지, 우리의 무속신앙이라든지 이런 것들 하고도 함께

교류하는 가운데 거기에서 훨씬 더 깊은 그런 어떤 진리를 찾아 나서는 이런 움직임들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역기 기도의 형태는 더욱 더 깊어지면서 복음 관상기도 혹은 더 나아가서 무슨

좌선이라든지, 명상기도라든지 이런 것들도 들어오게 되는 것. 이런 식으로 우리의 영적

과정이 점점점 깊어져 가는 것. 발달되어 가는 것.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영적인 감각들을

많이 키울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영의 식별이라는 것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 아닌

가? 이제 그렇게 봤을 때 우리 이 영적 차원의 특징들을, 영적 차원의 특징이 뭔가?

 

■ 영적 차원의 특징

 

# 영적 차원의 특징 : 1. 깊음

 

이런 것들을 이래 보면은 먼저 무엇보다도 깊이의 문제인 거예요. 인간 존재의 깊이 문제.

그런데 이런 인간 존재의 깊이 문제 하는 것은 뭐라고 딱 꼬집어 가지고 이야기 하기가 힘

들죠. 그냥 비근한 예로는 우리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갑자기 떼부자가  돼 가지고 배운

것이라든지, 내면적으로 닦아오는 이런 작업은 한번도 없었는데 물질적으로만 갑자기 풍요

해져 가지고, 그래서 집에 가서 보니까 번드르르 하게 좋은 것들을 많이 치장을 해 놨는데

거기에 걸맞는 내면의 모습이 풍겨져 나오지 않을 때는 우리 속으로 무시하죠. 천박하다

그러죠. 그런 것들이 인간 존재의 깊이 문제인 거예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돈이 확 생겨 가지고 물질적인 차원에서, 이 몸 차원에서 아주 풍요롭

게 뭘 많이 가꿔놓고 있다. 그런 모습 보다는 깊이의 문제만이 아니고 깊어짐과 동시에 통합

인 거예요. 당연히 우리가 여기에서 이래 보면은 전에 존재의 대사슬에서도 이야기를 했지

마는 끊임없이 하위 존재는 위로 상승하려고 한다고 그랬죠. 상위 존재는 위로 상승하려고

한다고 그랬죠.

 

# 영적 차원의 특징 : 2. 통합

 

  

 

그런데 밑으로 내려오면 올수록 점점 더 나뉘죠. 다를 이(異)자인 거예요. 맨 위에 정점인

하느님을 중심으로 해서, 하느님께서 창조 사업을 하시면서 영으로 나누시고, 혼으로 나누

시고, 정신으로 더더 나누시고, 몸뚱아리 차원에서 더더욱 더 나누시고, 이렇게 창조가 점

점 확산 되어가는, 다름을 향해서 쭉 나타나는 이 현상과 동시에 위로 올라가면은 같음(同)

몸뚱아리가, 생긴 모습이 너무나 많이 다르다 하더라도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추구하고 있

는 가치, 이념들이 비슷한 거예요.

 

또 생각이나 가치가 막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이 좋아하고 추구하는 바는 또 더더욱 더

비슷한 거예요. 그러면서 하느님까지 올라가면은 완전히 하나로 딱 일치해 버리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영적 차원에 진입한다 하는 것은 얼마만큼 잘 하나로 묶어 내는가? 통합시켜

내는가?

 

단적인 예로 예수님이 의인과 죄인을 다르다고 보지 아니하시고 하나로 묶어 내시는 것.

그런 모습이죠. 이런 점에서 통합이 영적 차원의 중요한 특성이 되고 그다음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영적 차원에서는 에고(ego)를 떠나는 거예요. '자아' 하는 것. '나' 하는 것.

 

# 영적 차원의 특성: 3. 나(자아, ego)를 떠남

 

나로부터 떠나는 것. 이것이 영적 차원에 있어서 무엇보다고 중요한 특성이 되는 거예요.

이거는 역시 조금 전에 이(異)와 동(同)을 가지고 이야기 했던 것처럼 상위 존재로 올라갈

수록 점점 하나로 묶어내고 같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그점을 이야기 했던 것처럼 영적 차

원에 있어서는 ego를 주장하지 않는 것. 나로부터 떠난다.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영신 수련 책에서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리 떠나면 떠날 수

록 영적 진보에 있어서는 빠른 것이다. 이러는 거예요. '나'를 고집하고, 나를 내세우게 되

면은 영적 진보에서 더디다 하는 거예요. 나는 계속 강조하는 것의 두드러진 특징이 이 정

신 차원, 마인드 차원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그랬죠. 그런 나를 뛰어 넘는 것. 이것이

영적 차원인 거.

 

그래서 이런 ego에서 떠난다 하는 것은 이름하여 모든 우리의 삶의 형태를 하나의 드라마

로 보는 거예요. 사건으로 보는 것. 여기에서 우리 김연아 피겨스케이팅 이야기 한적 없죠.

김연아, 피겨스케이팅 해 가지고 금메달 따고 이래서 김연아 전부 좋아하죠. 여러분들 다

좋아하죠. 그런데 김연아 언제 봤다고 김연아 좋아하느냐 하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는 곧잘 "아, 김연아, 김연아가 너무 좋다." 이렇게 이야기 할지 모르지마는

김연아라는 ego, 김연아라는 실체, 그 사람을 좋아한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마는 사실

은 엄밀하게 들어가서 보면은 우리는 김연아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김연아가 보여줬던

그 피겨스케이팅의 한 모습이랄까? 하나의 작품, 그 하나의 드라마, 사건 그것을 좋아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런데 김연아의 그 피겨스케이팅이라는 하나의 사건, 드라마 그 속에는 자기 자신의 몸을

가지고 보면은 여러 가지 그때 몸 컨디션들, 근욕의 움직임이나 혈액의 움직임들, 호흡들,

이런 것들이 아주 잘 어우러졌던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보면은 김연아 몸의 움직임 뿐만이

아니고 무슨 안무라든지, 코치라든지, 트레이너라든지, 나아가서 어머니의 관심사, 어머니

의 여러 가지 관여된 활동들 이런 것들이 그때 다 어우러져 있죠.

 

그런가 하면은 더 나아가서 그 경기가 펼쳐지고 있던 경기장의 분위기, 링크 상태, 심지어

더 나아가서는 김연아에게 패배했던 아사다마오의 그 분함과 눈물, 이런 것까지도 전부 하

나로 통합된 가운데 김연아를 핵으로 해서 빚어냈던 피겨스케이팅의 아름다움, 그 하나의

사건, 그것이 등장하고 거기에 그런 아름다움에 우리는 깊게 매료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럼 거기에는 김연아가 물론 없어서는 안 되지마는 김연아 말고 다른 트레이너가 없어서

도 안 되고, 안무가가 없어서도 안 되고, 어느 누구 하나 빠져서는 안 되죠. 그 당시 경기장

분위기가 빠져서도 안 되고, 어머니의 열정과 사랑이 빠져버려도 안 되고. 그랬을 때 굳이

내가 이것을 이뤘다. 내가 다한 것이다라고 에고를 주장할 근거가 그렇게 뚜렷하고 나오겠

느냐 하는 거예요. 아니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세상은 그런데 정신 차원에서, 마인드 차원에서만 끊임없이 조명하고 움직이다 보니까 오

직 김연아만 두드러지게 부각시키고 거기에 모든 것을 돌리고, 김연아가 다 만들어낸 그런

어떤 실체 중심이라고 할까? 사람 중심으로 떨어지고 있지마는 사실은 우리 눈에는 성령의

움직임 속에서 그런 사건, 혹은 누가  공부를 통해서, 음악을 통해서, 예술을 통해서 이렇게

벌어지고 있으면은 거기에 우리 모든 존재자들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빚어내고 있는 하나의

사건, 한 드라마, 그것의 아름다움 내지는 작품성들이 있는 것 아닌가?

 

그랬을 때 우리가 영적 차원에까지 집입한다 하는 것은 그런 나를 떠나서 작품 자체에 몰두

하는 것. 사건 자체에 몰두하는 것. 그러면서 그 사건이나 작품 속에서 움직이고 계시는, 활

동하고 계시는 한분이신 하느님, 성령의 활동에 깊게 잠기고, 감사드리고, 찬미하는 것. 이

것이 ㅈㄴ재가 훨씬 더 깊어진 사람들의 모습이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이런 영적

차원에서는 동기가 아주 중요해 지는 거예요. 결과 보다도.

 

# 영적 차원의 특성: 4. 의도와 동기의 중요성

 

이런 마인드 차원에서는, 정신 차원에서는 결과가 훨씬 중요하죠. 예를 들면은 우리가 형사

재판을 할 때 내가 어떤 사람을 살해를 할려고 아무리 궁리를 하고 범행 계획을 다 세웠어도

그 사람한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면은, 생각을 하고 계획 세운 것 가지고 형사적인 책임을,

살인죄를 뒤집어 씌울 수는 없는 겅요. 결과가 안 나타났으니까.

 

그런데 영의 차원에 오면은 오히려 거꾸로인 거예요. 그런 결과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

고 이미 생각을 하면은, 내가 마음을 먹으면은 거기에  쫓아서 상황들이 막 바뀌어 나가는

거예요. "너희들이 음란한 생각을 품었느냐? 이미 간음한 것이다." 예수님 말씀하시는 차원

이 이미 영의 차원에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고 셰시는 것.

 

이런 점에서 마인드 차원에서는 오히려 동기라든지, 지향 이런 것은 참고 자료로 들어오지마

는, 그리고 결과가 더 중요하지마는 영의 차원에서는 거꾸로 동기가, 지향이 훨씬 더 중요해

지고, 결과는 오히려 부수적으로 참고하는 것이 되는. 이런 점에서 차이들을 나타내고 있죠.

어쨌거나 우리가 이런 영적 차원에 대해서 깊게 알아듣는데 이 영적 차원의 주된 특징들을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신을 깊게 들여다 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죠.

 

# 영적 차원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잘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이 어떤 가르침을 베풀고 계시는지, 예수님의 생각이 어떠신지, 예수님의 행동 양식

이 어떤 것인지, 이런 것들이 전부 영적 차원을 판가름하는 잣대들이 되는 거예요. 이런 에

고를 떠나는 면에 있어서 대표적으로 예수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 만나러 오셨을 때

예수님 그러시죠. "누가 내 형제고 내 어머니인가?" 이러는 거는 이미 에고를 다 떠나는 이

야기죠. 통합을 이뤄내는 이런 차원에서는 의인과 죄인들을 함께 비를 내리고 빛을 비추시

는 그런 모습으로 얘기하시는 것이라든지,

 

또 통합을 이뤄내는 데는 무엇보다고 음의 가치를 크게 긍정하고 수용하는 것. 음의 가치

이러면은 부정적이고 안 좋은 것. 죽음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질병이라든지, 이런 것도

영의 차원에 진입해 있는 사람들이 들으면은 두드러진 특징인 거예요.

 

우리는 그저 양의 가치, 우리 본성상 잘 맞고 좋은 것들만 추구하고 따라갈 그런 가능성이

훨씬 큼에 비해서 영적으로 깊에 들어가 있는, 존재의 깊이를 더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수난이라든지, 죽음을, 부정적인 가치, 음의 가치를 아주 적극적으로 수용하시

고 양의 가치 못지 않게 음의 가치에도 비중을 두고 계시는 것. 이런 모습들이 역시 영적

차원에서 드러나고 있는 표징들이죠.

 

그래서 모쪼록 우리는 이런 영적 차원 하는 것이 일상의 삶 하고는 구분되는 별도 영적 차

원이 있고, 거기에 가서 무슨 특별한 예식을 치루고 종교 행위를 하고 이런 얘기가 아니고

우리 일상의 모든 삶의 면면을 전부 영성화 시켜내는 것. 깊이 있게 더 깊게 깊게 들어가는

것. 이것이 우리의 영적 여정의 목표이고 영적 차원에 들어간다 이럴 때는 바로 그런 차원

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 영적 차원은 삶과 분리된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영성적으로 더

  깊이 살아 내는 것에 있다

 

그래서 모쪼록 우리는 이런 점에 대해서 깨어있고 심화시킬 수 있도록 계속 애쓰고 노력

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오늘은 여기까지 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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