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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09 조회수1,198 추천수18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Jesus summoned his Twelve disciples and gave them authority
over unclean spirits to drive them out and to cure every disease and every illness.
(Mt.10,1)
 

제1독서 호세 10,1-3.7-8.12
복음 마태 10,1-7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이 모바일 게임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게임의 수준이 낮은 것에서부터 점점 높은 수준까지 올라가는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게임의 첫 시작이 너무나 어려워서 5초도 되지 않아서 끝나고 만다면, 사람들은 아마 쉽게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아주 쉽다가 자기 게임 능력에 따라서 조금씩 난이도가 올라가기 때문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지요.

이는 게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어려운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아주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공부에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처음 배울 때도 그렇지요. 수영을 하나도 하지 못하는데, 상급반을 보내서 쉬지 말고 25미터 레인을 20바퀴씩 돌고 오라고 하면 흥미를 느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을 믿겠다는 신앙생활을 시작하지만, 그 시작부터 주님이 확실히 느껴지던가요? 교리공부부터 착실히 시작하면서 주님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교리공부, 성경공부, 그밖에 각종 교육을 통해 주님을 잘 아는 신앙인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잘 아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줄 수 있는 힘을 주시지요. 그런데 이상한 내용이 나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다른 민족들에게 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또한 당신도 가셨던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런데 이 말씀은 다른 민족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파견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무지한 이민족들의 행실과 생활방식들로부터 아직은 미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세상에 파견되는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선은 전교하기 쉬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주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에 다른 민족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들어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뒤에야 제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이제는 어떠한 고통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으로 확실하게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아직 미숙하고 부족한 신앙으로 쉽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굳은 믿음을 통해 지금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내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요? 주님의 큰 사랑에 비해 아직도 부족하기만 한 내 자신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어려운 상황은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조엘 오스틴).


 

‘당신에게 오늘 기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에게 오늘 기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화장실 벽에 붙어 있는 문구입니다. 그런데 이 문구가 계속 생각납니다. 눈에 띄는 곳에 적혀 있는 글이 아닌, 냄새 나는 화장실에 붙어 있는 문구인데도 제 머릿속에서는 이 문구를 계속해서 떠올리게 합니다.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느 장소에 쓰여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느 장소, 어느 때에 상관없이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느냐에 따라 살아 있는 글이 되기도 하고, 또 죽어 있는 글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주님의 거룩한 말씀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 말씀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화장실에 쓰여 있는 글보다도 더 가볍게 또 아무것도 아닌 말씀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거룩한 말씀이야 말로 살아 있는 말씀이며, 힘 있는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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