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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 수련/ 제16강 영적 위안과 고독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09 조회수1,614 추천수4 반대(0)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유시찬 신부님의 성 이냐시오 영신 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16강 영적 위안과 고독

 

■ 오늘 이야기 ...

우리 심리적으로 위로를 받는다든지 고독을 느낀다든지 이런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영적

차원에서도 그런 위로라든지 고독이 있거든요. 이것이 심리 차원과는 어떻게 다르면서 우

리가 살아가는데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 점을 우리 함께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 시작 기도

†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에게 지혜를 주시어 영들의 움직임을 잘 분별할 수 있는, 그리하여

당신의 뜻과 생각대로 쫓아갈 수 있는 은총을 더해 주십시오. 저희들 존재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들 특별히 영적인 위안과 영적인 고독의 움직임들을 잘 알아듣고 어

떻게 조화와 통일을 이뤄내면서 걸어가야 할지 ?길을 보여 주시고 용기와 힘을 더해 주십

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지난 시간 ...  / 영적 차원의 특징

우리 지난 시간에 영적 차원의 어떤 특징들에 대해서 주로 봤었죠. ?그리고 영적인 움직임

이다 그러면은 우리 안에 선신이라고 이름 붙인 영과 악신이라고 이름 붙인 영이 함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곧잘 악신은 우리를 유혹해서 파멸로 이끈다. 죄를 짓게 만든다. 곧잘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마치 악신을 없애버려야 할 대상처럼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이거 좀 조

심해야 될 문제다 하는 거예요. 선신이든 악신이든 우리의 존재와 성장을 위해서 필수불가

결하게 필요한 존재들이다. 유익한 존재들이다 하는 것을 깊게 알아들어야 되는 거예요.

 

# 우리 존재를 위해서는 선신과 악신이 모두 필요하다

 

만약에 악신이 우리를 파멸로만 이끌고 우리에게 완전히 독이 되고 해만 되는 것이라면은

어떻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악신의 기운이 있게끔, 함께 걸어가게끔 만드셨겠느냐

하는 거예요. 또 예수님, 잘 아시다시피 40일 동안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죠. 그때 유혹자

가 와서 예수님을 계속 유혹했죠. 그 유혹자가 하는 것. 악신, 마귀 이렇게 이름 붙여도 내내

똑같은 거죠.

 

만약에 그것이 우리 인류를 위해서 진짜 원수 같은 존재고, 없애버리는 것이 더욱 더 유익한

것이라면은 예수님,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그때 유혹자의 존재를 아예 싸워서 없애버릴

려고 하셨을 것 아니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없애시는 것이 아니고 꼬박꼬박 말대꾸

하시죠. 응대하시면서 그 유혹자가 함께 들어올 수 있도록. 그래서 유혹자와 함께 더 큰 생

명에로, 아버지의 영광에로 나아가도록 그렇게 초대하시는 것 아닌가 싶은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 악신의 움직임이 나를 파멸로 이끄는, 그래서

내가 싸워서 없애버려야 할 적으로 알아듣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늘 그 선신의 움직임과

악신의 움직임을 어떻게 조화를 잘 이뤄내면서 균형을 잡아내는 가운데 더 큰 성장으로 나

갈 수 있는가? 이거를 염두에 둬야 되죠.

 

# 선신과 악신의 움직임이 조화와 균형을 이뤄 더 큰 성장으로 나아가도록

 

그러면서 우리 안에 영들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하고 관련지어서 영적 식별을 할 때 큰

두 가지 특성이 영적인 위안, 영적인 고독 이런 이야기들을 하죠. 우리 안에 선신의 움직임

과 악신의 움직임이 함께 일어나고 그것이 내 영이 취합을 하고, 이런 과정 속에서 영적 위

안과 영적 고독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볼 때 이 영적 위안이나 영

적 고독이 뭐냐 하면은 선신과 악신은 어떤 면에서는 가치중립적이라고 그랬죠.

 

# 선신과 악신은 가치중립적이다

 

우리는 곧잘 내가 뭘 이래 죄를 짓게 되거나 유혹에 떨어지거나 이러면은 나는 하느님을 향

해서 올바르게 똑바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데 악신이, 마귀가 나와서 약한 나를 끄집어 당

겨서, 아주 강하게 유혹을 하면서  끌어당겨서, 심약한 내가 어쩔 수 없이 악신으로 떨어져

서 죄를 범하게 되었다. 유혹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할지 모르지마는 그러면

은 진짜 어쩌면은 듣는 악신은 섭섭할지 모른다 하는 거예요. ^^*~~~

 

그냥 본래 악신의 자기 움직임이 우리 몸에 입과 항문의 역활이 전혀 다르죠. 항문은 그런

역활들을 통해서 내 존재를 말살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내 존재를 말살이라기 보다는 너무

거창하니까, 더러운 것 하고 관련지어서 그저 내를 막 더럽게 만들려고 이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본래의 기능이 그건 거예요.

 

그런데 그 기능을 통해서 내 존재 전체의 건강과 생명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거죠. 그래

우리 안에 있는 악신이라는 기운은 마찬가지로 그런 기운이다 하는 거예요. 한쪽에서 아주

성실한 기운이 있다면은 한쪽에는 게으르고 나태해질려고 하는 기운이 같이 있는 거예요.

 

어쩌면은 어머니들처럼 우리 어머니들이 그대로 그 책임감이라든지 성실한 기질 그런 움직

임만 계속 있다면은 어쩌면은 어머니들 다 돌아가셔버렸을지도 모르죠. 그런 점에 있어서

오히려 게으름이라든지, 불성실함이라든지, 도망가고 싶은 것이라든지 이런 기운들이 어느

정도 브레이크 역활을 하면서 균형을 잡아주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적절히

균형을 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없앨 것 아닌 거죠.

 

 

 

그래서 여기에서는 일반적으로 내려갈려고 하는 움직임, 일반적으로 올라갈려고 하는 움

임 이 두 힘을 적절히 잘 통합해서 더욱 더 통합을 이뤄나가고, 성장하고, 존재가 깊어

지는 거예요. 그렇게 성장해 나갈 때 여기에 기쁨과 위로가 찾아오는 거예요. 이것을 두고

우리는 영적인 위안이다 그런다.

 

# 영적 위안: 존재가 성장할 때 찾아오는 기쁨과 위로

 

거기에 반해서 이 선신과 악신의 취합을 내 영이 제대로 잘못하면서 퇴보할 수가 있죠.

이렇게 퇴보할 때 일어나는 영적인 느낌들을 영적 고독이다 이러는 거예요.

 

# 영적 고독: 존재가 퇴보할 때의 영적 느낌

 

그런데 우리가 영적인 위안이라든지 영적인 고독 하는 것은 이 위안이나 고독은 당연히

영적 위안 이러다 보니까 비영적 위안도 있겠죠. 심리 차원의 위안 그것을 이야기 하는

예요. 이거는 우리가 보통 사람에서 느끼는 것. 내가 시험 공부를 열심히 해 가지고

대학 시험에 붙었다. 그래서 아주 기뻐하는 것. 어디 가서 상을 탔다. 이래서 기뻐하는 것.

 

뭐가 내가 바라던 것이 내 손에 들어와서 가지게 되어서 그렇게 기뻐한다든지, 내가 좋아

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기뻐하고 좋아한다든지, 편안한 주거 환경에서 쉬면서 평온함

느낀다든지 이런 것들이 전부 심리 차원에서 느끼고 있는 위안들인 거예요. 그런 것을

비영적 위안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죠. 심리 차원에서 위안이 있는가 하면은 그런 위

안이 영적 차원에서도 있다 하는 거예요.

 

이 영적 차원에서의 위안 하는 것은 좀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겠지마는 위안이 있다

하는 것은 비영적인 차원에서의 위안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차원에서도 위안이라는 느낌이

먼저 있어야 되는 거예요. 느낌. 기쁨이라든지, 평화라든지, 따뜻함이라든지, 안정감이라

든지 이런 그냥 우리가 쉽게 생각해서 우리의 본성과 잘 맞고, 좋고, 아름다운 그런 느낌들

그런 느낌이 먼저 있어야 된다.

 

# 영적 위안에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

  * 위안의 느낌: 기쁨, 평화, 따뜻함, 안정감, ...

 

그래야 우리는 영적으로 식별을 할거다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은 어떤 수도자가 하느님에

대한 신앙심도 아주 깊고 그러면서 공동체를 향한 봉사도 아주 열심히 잘 하는 거예요. 그

래서 딴 사람들이 밖에서 이래 보면은 정말 너무나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수도자의 모습인

거예요. 아니면 뭐 우리 일반 신앙인이 아주 멋들어지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해

도 좋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마음 안에 별다른 기쁨이라든지, 평화라든지 이런 거는 없는 거

예요. 그저 그냥 묵묵히 느낌 없는 가운데 그렇게 움직일 수가 있죠. 그러면은 그런 경우에

는 그분이 영적 위안을 맛보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느낌이 있어야

된다 하는 거예요.

 

그랬을 때 그 영적 위안의 느낌의 표징은 그런 식으로 아까 이야기 했던 기쁨이라든지, 평

화, 안정감 따뜻함, 부드러움, 힘이 생기는 것. 이것도 대단히 중요한 영적 위안의 표징죠.

의욕이 샘솟는 것. 이것 성령께서 움직이시는 큰 특징 중에 하나니까 역시 영적 위안에 대

해서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이런 영의 식별에 대해서 영신 수련 책에 아주 자세하게 많은

설명들을 하고 계세요.

 

그런데 이 안에는 크게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1, 규범2 나눠

놓고는 있는데 어쨌든 여기에 보면은 영의 식별에 대한 여러 가지 지침들을 주고 계시죠.

그 중에서 특별히 [316]번에 보면은 영적 위로에 대해서 영적 위안, 정체천 신부님은 영적

위로라고 번역을 해 놓으셨는데, 전에 윤양석 신부님 같은 분은 영적 위안 이래 놓으시죠.

뭐 어떻게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는데 그냥 통상처럼 영적 위안 이 단어를 쓰죠.

 

이 영적 위안에도 마치 그 [316]번에 보면은 등급이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

요. 그 등급이라는 것. 그러니까 영적 위안에도 어떤 깊이의 차등이 있다. 이런 의미인데

첫 번째에 이렇게 보면은 어떤 피조물을 사랑하되 피조물 그 자체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

오직 불타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오직 그 하느님 안에서만 피조물을 사랑할 때

맛보는 위안. 이것이 최상급의 위안이다. 이래 놓으시는 거예요.

 

# 「영신 수련」[316] '영적 위안'

  1. 모든 피조물을 창조주 안에서 사랑하게 될 때

 

그리고 두 번째로는 자기 죄에 대한 아픔이라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느낌들을

통해서 맛보는 위안. 그래서 그런 수난이나 이런 것들을 보면서 깊은 눈물을 흘린다든지,

자기 죄를 깊게 들여다 보면서 통회의 눈물을 흘린다든지 이런 눈물 같은 것, 아픔 같은 것.

이런 것들을 두 번째 영적 위안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 「영신 수련」[316] '영적 위안'

  2. 자기 죄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아픔을 통해

 

그리고 세 번째는 그외 신(信),망(望),애(愛)가 자라는 모든 것들. 신,망,애가 자라는 것을

통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자라는 가운데서 맛보는 영적 위안. 이런 것들이고,

 

# 「영신 수련」[316] '영적 위안'

  3. 믿음, 희망, 사랑을 키우는 모든 것

 

거기에서 더 외연을 확대시키면은 천상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든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여러 가지 행동들을 하는 가운데 거기에서 맛보는 위안. 이것이 네 번째 영적 위안이다.

 

# 「영신 수련」[316] '영적 위안'

  4. 천상 것을 추구하고, 영혼의 구원으로 이끄는 기쁨

 

이런 식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는데 좀 조심할 필요는 있겠다 싶어요. 이 첫 번째에,

살아계신 하느님에 대한 불타는 사랑 때문에 피조물을 그 자체만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 속에서, 하느님 안에서 사랑하게 되는 경우,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데

어느 정도 그 뉘앙스라할까? 언저리는 느껴지죠. 그런데 예를 들면 이런 경우를 이렇게

생각해 보면은,

 

어머니가 자녀를 키우면서 이 자녀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자녀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로서 하느님 안에서 그렇게 열심히 잘 키우

시는 거예요. 그냥 내가 신앙심이 이렇게 깊어 가지고 자녀라든지, 남편이라든지 이런 존재

들을 하느님로부터 받은 은총의 선물이다.

 

그거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면서 그렇게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가고 그러는 가운데 가

가끔 하느님 생각도 하고, 그런 선물에 대한 감사도 드리고 이런다면은 불타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아니고, 하느님 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되 그런 하느님에 대한 사랑까지는 안

가더라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 속에서 그렇게 피조물들을 사랑하고 걸어가면서 받는 위안.

이게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지 같은 맥락 속에서 움직일 수가 있다는 것이죠.

 

즉 무슨 말인고 하니까,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과, 창조 내지는 통합의 길. 우리가 위안을

맛보는 데 있어서 이런 세 가지 길이 있는 것 아닌가? 하나는 그러니까 음양을 가지고  이

야기를 한다면은 긍정 같은 거는, 이거는 양의 가치인 거예요. 밝고, 아름답고, 좋은 것.

하느님에 대한 사랑, 하느님으로 받는 은총. 이런 것들 속에서 위안을 많이 맛보는 것.

 

# 긍정의 영적 위안(陽) :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사랑, 은총 속에서 얻는 위안

 

이게 첫 번째에 대한 것.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 피조물들을 사랑하고

걸어가는 것. 그것은 긍정의 길을 통한 영적 위안이고, 내 죄의 아픔이라든지, 예수님의

수난, 고통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부정의 길을 통한, 즉 죽음의 측면인 거예요. 음의 측면을

통해서 이렇게 맛보는 위안들. 그러니까 얼핏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아픔이고, 눈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 깊은데서는 평화와 위로를 맛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영적 위안

에 들어가는 거예요.

 

# 부정의 영적 위안(陰) : 내 죄, 그리스도의 수난 속에서 얻는 위안

 

우리도 그렇죠. 제대로 우리의 부족함이나 결점들에 대해서 깊게 통회를 하게 되면은 이게

무슨 율법적으로 "너 죄지었지" 그러니까 죄의 목록을 찾아보니까 이게 대죄야. 그래서 죄

에 대해서 통회를 하고 그럴 때는 오히려 큰 어떤 울림이 없죠.

 

그런 게 아니고 그냥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알아들었고, 그 사랑 때문에 거기에 비춰봤

때 내가 이게 어마만큼 잘못돼 있는가? 이렇게 알아들으면서 크게 스스로에 ?대해서 뉘우치

거나 통회할 때는 그때는 아픔이 한편으로 아주 크기는 하지마는 동시에 그 밑바탕에는 큰

기쁨이라든지, 안정감, 위로 이것을 맛보는 것 아닌가? 그게 부정의 길을 통한 영적 위안인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런 것들을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랑이라든지, 죄에 대한 깊은 통회, 예수님

수난에 대한 깊은 맛들임 이런 거는 어쩌면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맛보기 힘들지 모르죠.

여러분들 같이 그저 신앙생활을 대충 대충 하고 계시는 분들 같으면은 더더욱 더 이런 거

맛보기 힘들 수가 있죠.

 

그런데 이제 그러다 보면은 그러면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어쩌면은 영적 위안이라는 것

은 맛보는 것이 거의 없고, 이렇게만 된다면은 좀 곤란한 것 아닌가? 비범한 사람, 특별한

사람들만 영적 체험을 하고, 영적 위안을 맛보고, 거기에 따른 영적 식별을 하고, 그 영적

식별에 바탕을 두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고 영적 식별을 얻는 것은 아니다.

 

# 특별한 사람만이 영적 체험, 영적 위안, 영적  식별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런 어떤 예외적인, 한정적인 일만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하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외연을 더욱 더 넓히는 거예요. 그 범위를 넓히다 보니까 신망애가 자라게 하는 것.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자라는 것. 이거 믿음이라는 것이 좀 믿음, 우리 그럴 수 있죠. 기도를 한 차

례 하고 나서도 기도를 했다는 그런 뿌듯한 느낌, 그러면서 그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좀 더 자랄 수 있죠. 그러면서 이제 그게 기쁨이 될 수가 있죠.

 

#  창조, 통합의 영적 위안: 믿음, 희망, 사랑을 키우는 모든 것

 

그런 것들이 다 영적 위안이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믿는다 하는 것이 좀 자란다든

지, 아니면은 사랑이, 사랑이라 해 가지고 무슨 내 목숨을 내놓을만한 그런 큰 사랑이 아니

라 하더라도 좀 자녀들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고, 좀 더 인내해야지, 부모로서 더 견뎌 내

야지, 좀 더 잘해 줘야지. 이런 마음들이 들면서 내 마음이 좀 편안해지고 거기에서 뭔가 의

욕이 솟고 이런다면은 그런 것들도 영적 위안이다 하는 거예요.

 

거기에서 더 넓혀가지고 천상 것을 추구한다든지 혹은 내 영혼 구원을 위해 애쓰는 가운데

맛보는 위안. 천상 것을 추구한다 이러니까 뭐 엄청난 거를 생각하시면은 곤란하다 싶어요.

천상 것이라든지, 내 구원을 위해서 애쓰는 것이라든지 이것이야 말로 전부 우리 존재의 대

사들에서 계속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존재가 점점점점 상승할려고 하는 모든 움직임 그것

으로 확장되는 거예요.

 

# 창조, 통합의 영적 위안: 천상 것을 추구하고, 영혼의 구원으로 이끄는 기쁨

 

이렇게 보면은 굳이 이렇게 믿음이 더 자라지는 않는다손 치더라도 더 쉽게는 기도할려고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도를 정작 한차례 하고 나서 기도를 통해서 위로를 맛보지 못했다

손 치더라도 그거는 이제 신망애 정도는 되는 거겠죠. 거기까지는 못 갔다 손 치더라도 기도

를 한차례 할려고 하는 그걸 통해서 내가 위안을 맛볼 수가 있는 거죠.

 

아, 내가 참 진짜 철들었네. 더위 먹은 것도 아닌데. 더위도 이제 다 지났는데 ^^*~~ 더위

먹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기도할 생각을 다할까? 그러면서 거기에서 자금마한 위로지마는

위로를 맛본다면은 그런 것도 역시 영적 위안의 범위에 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하는 거

예요. 이런 식으로 범위들을 전부 확장시켜 버리면은 우리는 누구든지 그때 그때 따라서

영적 위안을 체험을 할려고 덤비기만 하면은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제 이랬을 때 지금 뭐 기도라든지 이런 예를 들고 있기는 하지마는 기도를 하면은

영적 위안의 체험이고 그다음에 다른 무슨 내 좋아하는 작품을, 그림을 그리는 거를 좋아해

가지고 그림을 막 그리고 있으면서 기쁨을 맛보면은 이거는 비영적인 위안이고. 이런 식으

로 함부로 이야기 할 수는 없다 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인

탠션(intention), 동기, 의도, 지향 이런 것들이 아주 중요해지는 거예요.

 

# 위안을 느끼는 동기, 의도, 지향이 중요

 

내가 어떤 동기에서, 지향 속에서, 어떤 의도 밑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가? 단적인 예를 들면

은 사람을 이렇게 따뜻하게 안아줘도 이것이 영적 차원의 안음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 하면

은 비영적인 차원에서의 안음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예요.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 안에 의식

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중요한 식별 기준이죠.

 

이런 것 하고 관련지어서 특별히 우리가 이 첫 번째에 '불타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

런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하느님 안에서 맛보는 이런 것. 이 하느님의 사랑 하는 것

을 알아듣는데 조금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싶은 거예요.

 

하느님에 대한 사랑 이런다 해 가지고 그냥 우리가 쉽게 말해서 교리적인 그런 어떤 신앙에

툭 떨어져 가지고는 하느님을 곧잘 우리가 그런 위험에 떨어질 수 있는, 배타적인 어떤 인

격신, 배타적인 하느님. 뭐 하느님을 믿으면 천당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든지 이런 식으

로 우리랑은 별개의 독립된 존재로서의 하느님을 탁 상정해 놓고 그 하느님에 대한 열열한

사랑, 마치 청춘 남녀가, 두 연인이 깊게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을 정해 놓고 그 하

느님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면은 좀 모자란다 싶은 거예요.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존재라는 것이 인간이라든지 여러 피조물들이 각각 이렇게 다 떨어져

독립돼 있는 존재가 ?아니고 전부 같이 묶어져 있는 한 존재다. 마치 나무가 지상에는 큰 둥

치로 해 가지고 줄기가 뻗어 나가고 가지가 뻗어나가고, 잎이 달리고 그래서 그 줄기 하나,

가지 하나, 잎 하나는 보면은 전부 다르지마는 그게 하나의 나무로서 한 뿌리 위에 탁 서 있

는 것처럼 우리 모든 존재자들이 사람 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그렇게 한 존재를 이

루고 있다.

 

그 한 존재 즉 존재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의 전체 그걸 다 끌어 안으면서 추월하고 계시는

하느님 한 분. 모든 것이 하나로서 끌어 안겨져 있는. 그렇게 모든 것을 하나로 품어 안고

는 그 한 분, 그분이 하느님이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불타는 사랑 속에

서 하는 것은 따로 독립된 그 하느님, 그 사람 열심히 사랑하는 그것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사랑하다 보면은 배타적인 사랑에 떨어지고 다른 피조물들에 해악을 끼칠 위험조차도 있는

거예요. 그것이 아니고 모든 존재가 하나를 이루고 있다. 그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이다. 그 맥락 속에서 존재자들을 사랑하는 것.

 

# 하느님에 대한 사랑 속에서 피조물들을 사랑하며 위안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로 품고 계신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 안에서 가능

 

그래서 너랑 나랑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안에서 혹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해서

한 존재다 하는 자각 의식 속에서 사랑을 하게 되고, 거거에서 큰 위로를 받을 때 그것을

우리는 영적 위안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영적 위안은 다음 시

간에 우리가 좀 더 자세히 보겠는데 영적 위안을 두 개로 나눌 수가 있어요. 사전 원인이

있는 영적 위안 하고, 사전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

 

# 사전 원인이 있는 영적 위안

 

이거는 무슨 소리인고 하니까 좀 말이 까다롭기는 한대. 우리가 기도에 한 차례 깊게 몰입

을 하고 그 기도 중에 깊은 영적 위로를 받는 것. 이런 거 원인이 있죠. 기도라는 것이 원인

이 되어서 영적 위안이라는 체험, 그 결과가 일어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사전의 원인이

있는 영적 위안인 거예요. 혹은 뭐 미사에 참석하고 위로를 맛본다든지, 자연을 감상하는

가운데 깊은 내적 평화를 맛본다든지, 이런 것들이 원인이 있는 것이고.

 

#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은 그런 어떤 원인이라고 포착할만한 것이 따로 없는데 그냥 갑자기

찾아온 영적 위안이라고 할까? 의외로 뜬금없이 다가온 영적 위안들. 그런 것들을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저 할 일 다 하고는 ?쉬는 시간이라서 차 한잔 마시면서 물끄러마 바깥은 내다보고 있는데

갑자가 어떤 하느님에 대한 생각 내지는 믿음에 대한 생각들이 올라오면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크게 몰려들고 거기에서 깊은 위로를 맛본다든지, 이런 거 뭐 전혀 생각지도 안 했

던 것들이 갑자가 탁 일어나는 것. 그런데 원인이 있는 영적 위안, 이것은 좀 위험성이 있

는데 비해서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은 위험성이 없다. 이 말은 성령께 더욱 더 가까이 있다.

 

#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이 성령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 하기는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은 성령께서만 주신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원인이 있는 영적 위안은 성령께서도 주시지마는, 선신도 주고, 심지

어 악신까지도 준다. 이러다 보니까 자칫 잘못하면은, 깨어 있지 않으면은 참된 위안일 줄

알고 따라갔다가 오히려 거꾸로 퇴보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이야기죠.

 

이건 좀 다음 시간에 보기로 하고, 이 영적 위안에서는 위로를 그냥 맛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즉 내 안에서 기쁨이라든지, 무슨 편안함이라든지, 이런 어떤 주관적인 내

느낌만 있으면은 그저 '영적 위로를 받았다.' 이렇게 얘기하기는 곤란하고 거기에 상응한

어떤 열매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 영적 위안에는 내적 느낌과 함께 열매도 있어야 한다

 

즉 어떤 위로를 받으면서 피조물을 더 사랑하게 된다든지,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든

지, 신망애가 자란다든지, 천산 것이나 영혼 구원을 향해서 더 나아가게 된다든지 이런

이야기들 즉, 천상 것을 추구한다든지, 영혼을 구원한다 이런 것들은 전부 내 존재를 더욱

더 통합을 향해서 나아가는 그런 움직임들이죠. 그래서 그런 것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서

함께 어루러질 때 우리는 영적 위로를 받고 있다 영적 위안 상태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제 거기에 반해서 영적 고독인데, 영적 고독도 역시 위안과 반대되는 고독의 느낌 같은

것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고독의 느낌이라고 그러면은 위안과 달리 슬픔이라든지, 무슨

불안이라든지, 두려움, 불안정, 무기력 이런 느낌들에 쭉 떨어지는 것. 이것을 우리는 고

독의 느낌이다 그러고 그것이 영적인 차원에서 일어날 때 영적 고독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 영적 고독의 느낌: 슬픔, 불안, 두려움, 불안정, 무기력 ...

 

그런데 영적 고독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 쫓아서 우리는 처방을 하기 마련이다. 이렇

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아까 이 영적 위안에 있어서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 그리

고 창조 내지는 통합의 길이 있다. 이렇게 봤었죠. 거기에 비추어서 고독도 역시 상응하게

긍정의 길에서 나타나는 고독이 있고, 부정의 길에서 나타나는 고독이 있고, 창조 내지는

통합의 길에서 나타나는 고독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 긍정의 영적 위안: 하느님에 대한 사랑 속에서 피조물을 사랑하면서 맛보는 위안

 

여기 긍정에서는 위안을 보면은 하느님에 대한 사람 속에서 피조물을 사랑하면서 맛보는

그런 위안이다 그랬죠. 사랑하고 거기에서 오는 기쁨, 평화 이런 거를 맛보니까 우리 본성

에도 잘 맞는 긍정적인 방법인 거예요. 이거는 하느님을 막 사랑할려는, 피조물을 사랑해

서 막 나아가는 이런 적극적인 움직임들이 있는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그런 움직임이 없는 것. 게으름을 부리는 거예요. 게으름을 부리고 나태해

지는 것. 이렇게 되면은 여기에 고독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게으름의 문제에서는 그러면 어떤 식으로 처방을 하는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하

는 것은 라틴어이기는 한대 그냥 영신 수련 할 때 우리가 상투적으로 쓰는 용어니까.

아제레 꼰뚜라(agere contra) 이래 얘기하는 거예요. ~에 거슬러서, 대항해서 행한다.

이런 말인 거예요. 아제레 꼰뚜라.

 

# 긍정의 영적 고독에 대한 대처

            agere contra: ~에 대항하여 행하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게으르로 냉담한 상태에 떨어지면은 거기에 거슬러서 적극적으로

행하게끔 그렇게 요청 받는 거예요. 기도를 잘 안 하고, 미사 참석을 잘 안 하고, 의식 성찰

들을 잘 안 하고 이러면서 내가 점점 냉담해지고, 무기력해지고, 이런 식으로 떨어지고 있

다면은 거기에 대항해서 더 많이 기도할려고 하고, 미사 참석하고, 의식 성찰을 안 빼먹고

할려고 그렇게 애쓰는 것. 그럴 때 이 고독이 균형을 잡으면서 선신과 악신의 움직임이 균

형 잡에 되는 거죠.

 

그다음에 부정의 길에 있어서 여기에서는 내 죄에 대해서 아파한다든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영적 위안을 맛본다 그랬죠. 즉 부정적인 가치를 잘 받아들이는 가운데

위로를 맛 봤는데 그런 부정적인 가치를 잘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아직 어려 가지고 본성에 잘 맞는, 어머니가 사탕을 주고, 과자를 주면서 이쁘다. 이쁘다

이래 주면은 애가 신이나서 뭘 막 하는데 뭘 잘못했을 때 따끔하게 나무라든지, 회초리를

든다든지 이러면은 이걸 소화를 잘 못시키고, 엄마가 우리 엄마가 아닌 모양이다. 엄마는

날 사랑 안 하는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빠져 버리는 거예요. 이거 아직 미성숙해서 그런

거죠. 애가 성숙하면은 그거 지날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보면은 영적

고독이 찾아오는 것은 성령께서 어떤 면에서는 단련시키실려고 그러는 거예요.

 

# 단련을 위한 영적 고독

 

영적 고독에 잠겨 있어도 예, 그런 어떤 스산한 마음, 슬픔이라든지, 무기력이라든지, 아

픔이라든지 그런데 불안 같은데 떨어져 있어도 그런 마음을 부둥켜 안고 또박또박 걸어

갈 수 있도록. 그래서 성령께서 그렇게 이끄시는 것이니까, 단련시키기 위해서 이끄시는

것이니까 고독 상태를 극복해 나가는 거죠.

 

# 부정적인 느낌도 묵묵히 받아들이며 영적 고독을 극복하도록

 

그런가 하면은 창조 통합의 길, 여기서는 내가 창조를 해내고, 창조한다는 것은 내 모습을

계속 바꿔 나간다는 이야기죠.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서 창조성이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성 중에 하나죠.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를 창조해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창조하는 가

데 즉, 그 창조해 나간다 하는 것이 천상 것이 그냥 무슨 우리 일상의 삶하고는 다른 무

하늘에 있는 뭐를 추구하고, 종교적인 의식 행위를 열심히 하고  이런 것이라기 보다는

리 스스로의 모습을, 고유한 아름다움을 계속 찾아가는 것. 그런 것. 그것이 또 역시 구원

이기도 하죠.

 

# 창조, 통합의 영적 위안: 고유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려는 움직임

 

우리가 아직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미숙한 이런 모습들을 점점 다듬어 가는 것. 통합이

덜 돼 있는 모습을 점점 통합된 형태로 데리고 가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은 사실은 성령께

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두고 내가 마치 내가 하는 것인 양 그렇게 하면은, 그러면서 또 자기가

뭔가 나름대로 통합을 좀 더 이뤄내고 좀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게 됐다. 존재의 차원에

있어서 그러면은 마치 그것이 자기의 어떤 좋은 뜻, 자기 능력에 쫓아서 그렇게 된 것인 양

이러면서 교만에 떨어지면은 이것 역시 고독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하는 거예요.

 

 

 

# <창조, 통합의 영적 고독에 대한 대처> 결정을 함부로 바꾸지 않도록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이 교만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에는 우리는 조심해야 될 것은 대처

방안의 하나로서는 결정을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하는 원칙이 있어요. 결정 번복

금지 하는. 이 무슨 소리인고 하니까 내가 성령의 기운을 쫓아서 이렇게 가는 가운데 좋은

상황 속에서 좋은 생각을 했고, 좋은 계획을 세웠고, 좋은 결단을 내렸고 이런 상태에서

쭉 움직이고 있었다면은 고독에 떨어져 있을 때 그런 결정한 것을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게 너무나 쉽게 범할 수 있는 게 예를 들면은 피정에 참석하는 거예요.

그래서 1박 2일이라든지 그때 피정에 참석을 하면서 여러 가지 많은 위로들을 받죠. 그

러면서 내가 더욱 더 크게 성장할려고 하는 선신과 악신의 움직임을 피정을 통해서 내

영이 잘 통합해 내면서 내 존재 전체가 더 크게 성장할려고 하는 이런 움직임 가운데서

영적 위안을 잔뜩 맛보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아 듣죠?

 

그렇게 영적 위안을 맛보는 가운데 야, 앞으로 내가 이런 식으로 생활하고, 이런 일들을

해 나가면서 더 큰 성장을 이루어내야 되겠다. 이런 식으로 어떤 계획이랄까? 마음 가짐을

가질 수가 있죠. 이러는데 그 피정을 떡 마치고 한 며칠 잘 그렇게 생활을 하는 거예요.

 

러다가 다시 삶 속에서 여러 가지 갈등들이, 어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집안 문제가 툭툭

거져 터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남편과 말다툼하고, 자녀들한테 화내고, 본당에 가서 레지

단원들하고 막 다투고 이러는 사이에 그냥 요 앞에서 했던 좋은 생각들, 계획들 이런 것

을 "에이, 뭐 그런다 해 가지고 뭐 내가 무슨 성장하는 것 아니지. 지금까지도 그런 것 없

어도 뭐 잘 살아왔는데." 이러면서 이 결정들을 바꾸어 버릴려고 하는 것. 포기해 버릴려고

하는 것.

 

그런 식으로 떨어지면은 바꾸어 버리거나 하면은 그다음에 찾아오는 것은 이런 영적인 위

로라기 보다는 오히려 내가 선신과 악신을 통합해서 내 영이 성장에도 나아가는 것이 아니

고 퇴보로 미끄러지는 가운데 여러 가지 고독을 맛보게 된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경

우에는 그렇게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좀 전에 그 부정의 길 할 때 제가 설명이 조금 미흡했다 싶은데 좀 더 명확하게 하면은 이

는 오히려 내가 부정적인 가치들을 잘 흡수하면서 본성에 잘 맞는 좋은 것 뿐만이 아니고

오히려 좀 부정적인, 어렵고 힘든 것까지도, 단단한 음식까지도 내가 먹고 잘 소화시킬 수

있는, 그렇게 키워낼려고 고독 상태에 떨어지는 거니까 이때 중요한 것은 믿고 행하는 원칙

하는 거예요. 믿음과 행동의 원칙 하는 거예요.

 

# <부정의 영적 고독에 대한 대처> 믿음과 행동

 

믿고 행한다. 이거는 무슨 소리인고 하니까 마치 내가 살아가면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다 해 주시는 것인 양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것. 그다음에 그 결과는 마치 하느

님은 어떤 선택권이나 결정권이 없으시고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인양. 이것이야말로

얼마만큼 큰 믿음인가 하는 거예요.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어려움들을 이 믿음의

차원에까지 우리가 끄집어 올릴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이야기하면은 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고 너무 어렵다 싶죠. 어떤

면에서는 그걸 좀 바꿔서 쉽게 하면은 일을 할 때는 하느님은 안 계시는 것처럼 내가 열심

히 하고, 그다음에 그 일이 내 원대로 성취가 되느냐, 안 되느냐 그 결과에 대해서는 또 나

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알아서 다 정하실 일이다. 그렇게 믿고 행동하는 원칙.

이거는 어떤 면에서는 아, 인간이니까 우리 당연히 그래야지. 이렇게 보여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근원적인 어떤 믿음과 행동의 원칙은 전자인 것 아닌가. 즉

내가 일을 할 때는 마치 나는 없고 하느님께서 일들을 다 애를 써서 땀흘리면서 해 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알아들으면서 일을 해 나가고, 또 그 결과는 마치 하느님 안 계시고 내 마음

대로 그 결과를 죄지우지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믿고 행동하는 것.

 

그런데 여러분들이 여기서 좀 조심할 것은 위안이나 고독, 영적 고독에 대해서 여러 가지

대처 방안을 내 놨는데 이것은 고독을 없애 버리고 위안으로 넘어가자. 이 이야기가 아닌

거예요.

 

# 영적 고독에 대한 대처는 영적 고독을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고독 상태에 있어서는 곤란하다. 그러니까 하루 빨리 그 상태에서 탈피해 가지고 위안 상태

로 넘어가자. 그 상태에서 탈피해 가지고 위안 상태로 넘어가자. 이 이야기가 아니고, 위안

과 고독을 우리는 함께 가지고 전체적으로 성장해 갈 것인가, 아닐 것인가? 이걸 결정하는

거예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 영적 고독에 대한 대처는 위안과 고독의 균형을 잡아 성장하기 위한 것

 

그래서 고독에 대해서 대처한다는 것은 위안과 고독의 균형을 잡는 방법으로서 그런 것들이

나오는 것이고 균형을 잡는 방법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 그걸 위해서 고독에

대한 대처 방안이 필요하다 하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영적 고독을 느낀다 하는 것은

사실은 그냥 뭐 단순하게 이렇게 막말로 이야기 해 버리면은, 영혼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신앙생활 물론 안 하고, 그저 그냥 닥치는 대로 막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이 영적 고독을 느

낄 수는 없는 거예요. 심리적인 고독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죠.

 

자기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고, 화가 나고, 그래서 슬픔이나 분노 같은 걸 막 느낄 수는

있지마는 영적 고독을 느끼기 위해서는 적어도 영적 차원에 들어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영

적 차원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 그러니까 영적인 존재에 대한 인식이라든지, 감각이 어느 정

도 형성이 되서 있고, 그런 영적 차원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거듭 성장하고

싶은 데도 불구하고 그런 성장이 안 일어나는 즉, 균형이 깨지면서 퇴보 쪽으로 자꾸 미끄

러질려고 하는. 그 틈바구니에서 느끼는 갈등, 아픔 이게 영적인 고독인 거예요.

 

이런 점에서 이 위안과 고독 이런 것들을 좀 봤는데 사실은 이런 문제들이 지금 말로는 좀

몇 마디로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마는 현실적인 사건 속에서 구체적

으로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별하고 거기에서 균형 잡고 행동을 취해 나가기에는 아

주 어렵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일단 우리 안에 하나의 어떤 가이드라인 정도로서

설명을 하는 거예요. 예, 오늘 여기까지 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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