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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제17강 영적 헷갈림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12 조회수1,168 추천수3 반대(0)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유시찬 신부님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17강 영적 헷갈림

 

■ 오늘 이야기 ...

여러분들 사랑해 본 체험들 다 있죠? 어떤 사랑은 진짜 사랑인가 하면은 어떤 사랑은 얼핏

보기에는 진짜 같은데 가짜인 사랑도 있고, 또 사랑에는 깊은 사랑이 있는가 하면 얕은

랑도 있죠. 이런 여러 가지 참된 사랑이 뭔가를 분별해 나가는 것. 이게 어떤 의미에서는

영적 식별이라고 생각이 들고, 그런 영적 식별을 둘러싸고 참된 것이 뭔가를 놓고 어떤

기만이라든지, 헷갈림도 있는 것 같아요. 이것을 우리 한번 알아보도록 하죠.

 

■ 시작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지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고 당신과 함께 걸어가는 이 여정을 통

서 당신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저희들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의 움직임들을 더 잘 분별할 수 있도록 지혜를 더해 주시고, 그 분별

을 통해서 악신의 유혹이나 위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시오.

 

좋은 영들의 움직임을 더 잘 알아듣는 가운에 선신과 악신의 통합을 잘 이뤄내는 가운

저희들 안에서 올바른 성장이 일어날 수 있도록 그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

될  수 있도록 함께 하여 주시고 필요한 은총을 더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위안과 사전의 원인이 있는 영적위안([330,331])
    -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위안은 영적 식별의 시금석 (예:예수님의 세례 체험)
    - 사전의 원인이 있는 영적위안의 성격 (예:예수님이 제자들의 보고를 받고 기뻐함)
    - 악신이 불러 일으키는 영적위안은 가짜인가?

2. 원인 있는 영적위안 속에 깃든 악신의 기만
    - 빛의 천사로 가장

3. 악신의 속임수를 알아내는 법 
    -  식별원칙으로서의 [333] : 구체적이고 전체적인 체험의 시작과 중간과 끝이 모두

       좋아야 선신으로부터 온 것

4. 원인 없는 영적위안 속에 깃든 악신의 기만
    - [336] : 원인 없는 영적위안과 그 위안에 이어져 오는 둘째시기를 구분해야

5. 내적 움직임들을 비판적으로 점검하기 위한 일련의 물음들
    - 성숙하고 있는 영혼 / 퇴보하고 있는 영혼
    - 전체 모습 중 어떤 측면이 문제되고 있는가?
    - 영적 차원의 위안인가? 살아 있는 신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 영적위안이라고 한다면 그 위안의 근거는 어디인가? 성령 / 선신 / 악신
    - 고독이 있다면 영적고독인가?

6. 영적식별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다
    - 구체적인 현실 속에 일어나고 있는 내면의 움직임들에 대한 판단들.

       즉 영적식별은 대단히 복잡하고 어렵다

 

예, 우리 영의 식별에 대해서는 마지막 강의가 되겠다 싶은데 이 영의 식별 하면서 우리가

계속 지금 봤던 것은 무슨 영적 위안이니, 영적 고독이니 이런 이야기들을 했던 거죠. 그래

서 영적 위안 그러면은 영적 위안이 아닌 비영적 위안, 심리 차원의 위안도 있다. 이런 이야

기를 했죠. 왜 이런 구분이 필요한가? 왜 이런 게 중요한가? 이 말은 우리가 한 달쯤 뒤에

그 작업에 들어갈텐데 둘째 주간에서의 큰 목표는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식별하는 것,

그것이 큰 목표다 그랬죠.

 

# 영신 수련 둘째 주간: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이 하느님의 뜻을 선택한다고 그럴 때 하느님의 뜻 선택을 위해서는 영적 위안을 구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거예요. 무슨 소리인고 하니까 하느님의 뜻은 이 영적 위안을 모태로

해 가지고, 영적 위안을 자궁으로 해서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뜻이 배태(싹틈)되어 나온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예요. 이 말은 영적 위안을 통해서 여러 가지 내적인 움직임,

강한 이끌림, 충동 이런 것들을 불러 일으키면서 하느님 당신 자신의 뜻이 어디 있는지 알

아듣게끔 보여 주시고 이끄시는 거예요.

 

# 영적 위안을 통해 강한 이끌림을 일으켜 하느님의 뜻을 보여 주신다

 

그런데 이런 영적 차원에서의 위안을 통해서도 여러 가지 충동이나 이끌림이 일어나지 마

는 비영적인 위안, 어떤 심리 차원을 통해서도 이런 움직임이 일어날 수 있죠. 그런데 심리

차원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충동이라든지 마음의 내적 이끌림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이다.

이렇게 분별하면은 오류에 떨어져 버린다 하는 거예요.

 

# 비영적인 심리차원의 위안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다

 

이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그런데 내적 충동이라든지, 이끌림이라든지, 위안이라든지 이런

거는 영적인 차원에 있는 거나 비영적인 차원에 있는 거나 우리가 느끼기에는, 감지하기에

는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게 어느 깊이에서 올라오고 있는가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 위안이 일어나는 깊이를 분별하는 것이 중요

 

이것 때문에 우리는 영적 식별에 좀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영적 식별에 대한 감각을 키워나

가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을 통해서 드러내 보여주시는 예수

님의 모습이, 예수님의 일상의 모든 삶이 영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예수님의 모든 일상은 영적 차원의 삶

 

사람들을 가르치고, 치유하시고, 여러 가지 기적을 베추시는 것. 그런 것 뿐만이 아니고 먹

고, 자고,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이런 일상의 삶들까지도 전부 영적 차원에서 버러지고

있는 것인 만큼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닮기 위해서는 그런 데에 대한 인식 내지는 감각을

우리 안에 키워내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낼 때 비로소 예수님을 닯아가고 예수님을 믿습니

다 하는 그 신앙이 우리 안에서 정말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냐 하는 거죠.

 

이런 점에서 우리 지난 시간을 통해서 영적 차원의 특성들이 뭔지, 어떤 모습을 보면은 이

게 영적 차원이다 아니면은 비영적 차원이다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지 그리고 또 영적 차

에서의 현상들로서는 영적 위안이나 영적 고독들이 있고, 거기에 따라서 특히 영적 고독일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하면서 조절 내지는 통합을 이뤄내 가야 되는지 이런 이야기들을 쭉

흝어 봤죠.

 

■ 이번 시간 ... 영적 헷갈림

 

오늘은 그 영적 식별 중에서도 특히 그냥 영적 헷갈림이라고 그럴까? 아니면은 영적 기만,

영적 속임수 이런 이야기들을 곧잘 하는데 이 영적 기만에 대해서, 영적 속임수에 대해서

좀 잘 알았으면 하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얼핏은 말씀드렸다 싶은데 우리가 영적 위안 중에는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

다. 그렇게 말씀드렸죠.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과 사전의 원인이 있는 영적 위안.

이렇게 두 개도 나눈 거예요. 어떻게 보면은 좀 더 까다로워지기도 하는데 이 사전의,어떤

이미 앞선 어떤 일의, 그러니까 사전(事前), 영적 위안이라는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이 말인 거예요.

 

# 사전(事前)?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

 

영신 수련 책에는 이냐시오 성인께서 미리 있을 원인이 없이 그렇게 영적 위안이 일어난다.

그러면서 사전에 원인이 없는데 우리 영혼의 지력이라든지, 무슨 이성이라든지, 의지력이

라든지 이런 것들을 사용해서 가만히 따져 보면은 아, 이런 일이 생기면은 이런 일이 일어

남직 하다. 이런 것들을 전혀 추측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영적 위안을 사전의 원

인이 없는 영적 위안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가 그러니까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사전에 원인이 없는 가운데 아무런 원인이

없는 가운데 저절로 영적 위안이 일어나는 그런 영적 위안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 사전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은 성령이 이끄시는 것

 

그래서 아무런 사전의 원인이 없는데도 영적 위안을 체험하게 하는 것은 선신도 할 수 없

다. 악신은 말할 것도 없고 오직 성령께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영혼 속에 성령

께서만 자유롭게 넘나드시면서 우리에게 필요하다면은 영적 위안을 불러일으키실 수가 있

고 그 영적 위안을 통해서 하느님 당신의 뜻을 밝혀 보여주시고 이끌어 가지고 이런 일들

이 가능하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많은 영적 위안들은 거의 대부분은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고 사전에

원인이 있는 거예요. 어떤 원인이 있어서 그 원인을 매개로 해 가지고 영적 위안을 맛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영의 차원을 보면은 이런 식으로 볼 수가 있겠죠. 선신, 악신, 내 영. 우리 안에.

영의 차원에서 그조도를 보면 이렇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내 영의 움직임들

이 있는데 여기에서 의식적인 매개물이 있는 거예요. 의식 차원에서 위안을 일으킬 만한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있는거예요.

 

이거는 무슨 기도가 될 수도 있고, 독서가 될 수도 있고, 자연 현상이 될 수도 있고, 태풍이

지나가고 나서 아주 푸른 하늘 그걸 보면서 깊게 영적 위안에 빠져든다든지, 기도를 통해서

깊게 영적 위안에 잠긴다든지, 이런 것들이 전부 의식적인 매개물이 되는 거예요. 이런 것

들을 통해서 그다음에 영적 위안을 맛보게 되는데 이 영적 위안에는 이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과 원인이 있는 영적 위안으로 나누는 거예요.

 

여기서 이렇게 보면은 사전에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은 성령께서만 주실 수 있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선신이라든지, 악신이라든지, 이 차원에서는 줄 수가 없는 거예요. 내 영, 이 내

영이라는 것을 조금은 좀 이런 식으로 비유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싶은 거예요. 이 점선

으로 쳐놓은 이 더 큰 원. 이게 성령인 거예요. 우리는 그러죠. 내 안에, 우리 안에 하느님

께서 함께 하고 계시낟. 성령께서 내 안에 머물러 계신다. 그렇다면은 내 영은 성령을 그대

로 닮은 영이다.

 

# 성령을 그대로 닮은 영

 

이 성령의 어떤 닮은 꼴이라고 그럴까 성령의 모습을 고대로 좀 축소시킨 그 모습이 우리

각자의 영이다. 이렇게 알아듣는 것이 온전하겠다 싶은 거예요. 따라서 물론 우리의 영

하는 거는 어떤 면에서는 불완전하고 미숙하고 그런 모습들을 띠기도 하죠.

 

그런데 여기에서 내 영 하는 그런 차원보다는 좀 더 깊은 존재 차원, 내 존재의 본디 자리

라고 그럴까 거기에서 구성하고 있는 그 영은 성령과 연결되어 있고 성령의 움직임 속에

서 그대로 호응하면서 움직이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싶은 거예요.

 

어쨌거나 그렇게 봤을 때 이런 내 영 내지는 성령 닮은 꼴이라고 보고, 축소판이라고 보고,

그런데 이거는 사실은 우리 신앙생활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어떤 시사점을 주는 거

예요. 내 자신을 우리가 이렇게 바라볼 때 늘 나는 죄많은 인간이다. ?그리고 타락한 존재

이고 망가진 존재다.

 

그래서 기도라든지, 신앙생활을 통해서 끊임없이 나를 고쳐나가야 된다. 이런 식으로 생각

하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는 표면적으로 이렇게 드러나는 모습은 막 깨어져 있고, 망가

져 있고, 흠집 투성이고 그럴지 모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자리의, 우리의 각자의 모

습은 성령께서 머무시는 궁전들이다.

 

# 우리의 근본 자리에 머무시는 성령

 

성령께서 머무시는 그 자리가 어떻게 깨어질 수가 있고, 어떻게 망가질 수가 있고, 어떻게

더러울 수가 있겠는가? 그 깊은 내 존재의 자리, 거기가 아니고 점점점점 의식 표면으로

올라올 때, 심리 차원으로 올라와서 드러나는 모습들이 여러 가지 불완전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장면들이 있다 보니까 그게 내 본래의 모습인양 자꾸 착각을 하는 바람에 스스로에

대해서 오판에 떨어지는 것 아닌가?

 

그것이 아니고 좀 더 깊은 차원에서는 성령과 연결 돼 있는 그 한자리에서는, 성령께서 머

무시는 그 내 자리에서는 내 영은 대단히 아름답고, 온전하고,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내

모습을 깊게 관조하면서 거기에 뿌리를 박고 신앙생활도 하고 일상 생활도 하고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서 영적 차원으로 전부 옮아 갈 수 있는 것 아닌가?

 

# 성령과 연결된 내 본래의 모습을 바탕으로

                            우리의 삶도 영적 차원까지 깊어질 수 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한 깊은 자각은 너무나 중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이해된 내 영 하는 것은 성령의 축소판이고 성령과 지극히 닮은 것이고 이(사진) 차원에서

영적 위안을 불러 일으킬 때 이게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이다 하는 거예요.

 

# 사전(事前)의 원인이 있는 영적 위안

 

그 다음에 원인이 있는 영적 위안은 성령께서는 그렇게 주실 수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신도 줄 수 있고, 심지어 악신도 줄 수 있고 이래서 좀 까다로와 진다 하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과 관련지어서 선신의 움직임과 악신의 움직임을 우

리는 좀 더 주위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은 안 되죠.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마는 그저 악신이라는 것은 나를 파멸로 이끄는 그런 어떤 우리

가 없애 버려야만 할 그런 존재다라고  생각하면은 좀 곤란하다고 그랬죠. 선신이나 악신

이나 움직이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하는 거예요.

 

# 선신과 악신은 좋고 나쁨이 아닌, 움직이는 방향의 차이로 이해

 

 

 

그래서 음양의 모습을 가지고 이해를 하는 게 좋겠다 이랬죠. 이 양의 모습을 선신이라고

그러면은 음의 모습을 악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이 선신과 악신이 어우러지

서 내 영, 내지는 성령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기능은 마치 우리 안에 입이 고, 항문이 있는 것처럼, 숨을 들이쉬고 있고,

내쉬는 것이 있는 것처럼, 세포가 계속 우리 안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게 있는가 하면은,

계속 죽어나가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반대되는.

 

선신의 움직임은 계속 상승할려고 하고, 좀 더 영적으로 움직일려고 하고, 우리가 영육으

로 나눈다고 그러면은 영적 움직임을 일으키는 선신에 비해서 악신은 육적인 움직임을 일

으키는 거예요. 선신이 계속 존재의 상승을 구할려고 하는 그런 움직임이라고 하면은 악

신은 존재의 하강을 일으킬려고 하는.

 

그러다 보니까 선신은 계속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가 하면은, 악신은 죽음을 향해서 나아

가는. 삶과 죽음의 대립. 선신은 계속 올라가면서 하나로 통합시켜 낼려고 하는 일(一)을

향한 움직임인가 하면은 악신은 점점 분열되어서 나뉘어질려고 하는 다(多)를 향한 움직

임이다 하는 거예요. 이 양 움직임이 계속 같이 움직이고 있다 하는 거죠.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이 선신이 주는 위안과 악신이 주는 위안, 이거 구분을 해야 된다.

이러는데 악신의 움직임도 기본적으로는 우리를 살리게 하고, 성장시켜 낼려고 하는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 악신의 움직임도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것

 

하느님 당신께서 우리 인간을 만들어 놓으시고는 혹은 자연 현상을 다 만들어 놓으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다 그러셨어요. 보시기에 좋앗다 하는 것은 하다못해 동물 세계만 봐도 에미

가  새끼들을 챙기고, 따뜻하게 아름다운 사랑이 막 움직이는 이런 모습이 있는가 하면은

여차없이 싸우고 죽이고 하는 그런 모습들이 이렇게 벌어지고 있죠.

 

인간 안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선신의 움직임이 있는가 하면은 악신의 움직임이 있고, 이게

같이 있는 가운데 생명과 성장을 도모하는 것을 보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다 그러시는 거예

요. 이 두 움직임을 놓고 보는데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좋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악신의 그 움직임을 정확하게 통합시켜 내는 차원에서도 알아듣지 못하고 피상적인 차원

에서, 존재의 저 깊은 차원에서 이 성령과 일치를 이루고 있는 내 영의 차원에서 선신과

악신의 움직임을 알아듣고 그래서 거기에 적절히 따라가면은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되지 못하고 자기 존재에 대한 이해가 아직도 앝은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그

저 지성 차원, 심리 차원 이쯤에서 이해하고 따라 움직이다 보니까 그럴 때 악신의 움직임

을 그대로 쫓아가 버리면은 오히려 성장하는 것이 아니고 퇴보를 일으키게 된다.

 

# 지성이나 심리 차원에서 약신의 움직임을 따르다 보면 오히려 퇴보할 수 있다

 

이 점 때문에 악신이 주는 영적 위안 하는 것은 조심해야 된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런 것들을 어떤 차원에서 좀 보느냐 하면은 이냐시오 성인께서 영신 수련 책에도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에도 그런 얘기 하고 하시지마는 악신은 빛의 천사를 가장해 가지고

처음에는 아주 좋은 모습으로 다가 왔다가 나중에는 아주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서 우리를

파멸로 이끈다.

 

# '악신은 빛의 천사로 가장해 다가 왔다가 결국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도 좀 우리가 주위 깊게 알아들었으면 좋겠다 싶은 거예요.

악신 스스로가 제가 볼 때는 그런 거예요. 나를,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악신이 막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악신이 본래 자기 기능이라고 그럴까, 역활, 성질이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악신의 움직임이 일(一)이 아니고 다(多)를 향한 움직임이다 그랬어요. 이 다(多)를 향한

움직임, 이거는 창조를 향한 움직임하고 바로 연결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하나만 이렇게

있어 가지고는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건지 모른다고 그랬죠. 그 하나가 점점점점 확대

되어 가면서 나뉘어져 가는 가운데 창조가 거듭 거듭 이루어져 가는 가운데 내 자신이,

이 본래의 하나가 얼마만큼 아름답고 좋은 것인가 하는 것을 깊게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창조를 향해서 막 나뉘어져 나가다 보니까 온갖 아름다운 것들이 그냥 눈이

현란할 정도로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등장하는 거예요. 여성들의 아름다움 하는 것. 단적인

예로 들 수 있겠죠. 온갖 아름답고 본성에 맞고, 좋고 이런 것들이 훨씬 더 번잡하고 현란

해지다 보니까 사람들이 깊은 차원에서 이런 움직임들을 제대로 인식을 못하고 그 현란함

에 그냥 휘말려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그런 것을 두고 우리는 악신의 꾐에 빠졌다. 그러고는 마치 나는 저 깊은 데서 선신과 악신

의 조화를 이루면서 똑바로 걸어갈려고 하는데 악신이라는 놈이 내를 와서 공략을 해 가지

고 어쩔 수 없이 말려들었다. 이래 이야기를 하면은 좀  곤란한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것보다는 내가 존재에 대한 인식이라든지, 거기에 대한 판단, 거기에 따른 행동 이런 것

들이 아직은 깊어져 있지 못하다 보니까 피상적으로 관찰하다 보니까 마치 이것이 눈에 보

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냄새 맡아지는 그 아름다움과 현란함에 넋을 잃어버린 거예요. 넋

을 잃어버리고 허둥댈 때 그 떨어지는 모습을 가리켜서 악신의 꾐에 빠졌다. 이렇게 우리는

보통 이야기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 악신의 움직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움직임을 피상적으로만 보는 것이 문제

 

그래서 악신도 영적 위안을 줄 수 있다. 원인이 있을 때는. 그런데 그것을 조심해야 된다

하는 것은 이제 이런 차원이죠. 그런데 이것도 우리가 이런 차원에서 이렇게 보면은 처음

에 무슨 빛의 천사로 가장해 가지고 와서 예를 들다면은 기도 같은 거 하는 것은 일반적

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좋은 거죠.    

 

그러면은 기도하고자 하는 좋은 열망들을 불러일으키는 거예요. 그래 놓고는 점점점 그

다음에 얘가 이제 그래서 기도를 며칠 동안 열심히 이렇게 하죠. 그러면서 점점 그 다음

부터는 오직 기도만 하도록. 집안일을 등한시하고 오직 기도만 하도록. 집안 일을 등한시

하고, 사회 속에서 뭔가 맡은 일들을 등한시 하도록 그렇게 쭉 몰고 가면서 결국은 떨어져

버리는 거.

 

이런 것들을 가지고 처음에는 빛의 천사로 가장해서 들어온다.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이런 것을 알아듣게 한다. 그래서 그 맛을 좀 보여주고 나서는 그 다음에는 엉뚱한 길로,

타락시켜 버린다. 이래 이야기를 하는데 이때 우리가 좀 더 이런 선신과 악신의 영적 기운

들의 움직임들을 보면서 그걸 분별하면서 좀 본다면은 여기에 보면은 선신과 악신의 이 두

기운을 합치면은 100 이죠.

 

 

 

선신의 기운이 이렇게 최고조로 얘가 조그마한 데서 점점점 자라기 시작하겠죠. 선신의

기운이. 그래 가지고 최고조로 자라게 되면은 이제는 선신의 기운은 잦아들기 시작하고

악신의 기운이 조그마한 데서부터 점점점점 커져 나가는 것. 그래서 또 악신의 기운이

아주 커졌다. 쵀대점을 찍었다 싶으면은 다시 이세 악신의 기운은 잦아들고 선신의 기운

조금씩 조금씩 자라기 시작해서 또 커지요.

 

밤과 낮이 교대로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그렇게 움직이는 거예요. 빛의 천사로 가장하면

서 우리를 어려움과 타락에도 이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양 움직임의 변화를 고려

를 해서 보면은

 

 

 

이 차원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인 것 아닌가? 그러니까 영적, 이 선신의 기운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그러면서 딱 꺾어지기 시작하는 이때 맛보는 영적 위안

 

 

 

이 자리다 할 수도 있고, 악신을 기준으로 해서 음의 기운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은 이

게 좀 생길려고 하는 이 자리, 음의 기운이 이제 형성될려고 하는 이때 위안을 맛보게 되면

은 이 위안이 여기(선신)에서 오는 것인 양 생각하면은 오산이다 하는 거예요.

 

여기에서는 잠시 위안이 있을지 모르지마는 그다음부터는 점점 음의 기운이 커져가 버리

는, 악신의 기운이 커져가는 이 시점에서 맛보는 위안이죠. 그러다 보니까  ?처음에는 위안

이 어느 정도 왔을지 모르지마는 그다음부터는 점점 음의 기운이 커져가 버리는. 악신의

기운이 커져가는. 이 시작점에서 맛보는 위안이죠.

 

그러다 보니까 처음에는 위안이 어느 정도 왔을지 모르지마는 점점점점 더 그 위안은 음

의 기운 속에, 어려움 속에 쭉 떨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마치 괜찮고 좋은 것

인 양 따라가 버리다 보면은 엉뚱한 길로 빠지는 것 아닌가, 성장해 가기 보다는 오히려

퇴보에 떨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보더라도 우리가 영의 식별을 한다 이러면은 그저 내 마음 속에 지금

무슨 느낌이 있고, 그래서 이게 지금 영적인 위안이냐, 비영적인 위안이냐? 거기서 더 나

아가서 사전에 원인이 있는 위안이냐, 원인이 없는 위안이냐? 그렇게 막 따지고 앉았는

그것만 가지고 영적 식별을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는 거예요.

 

내면의 움직임도 중요한 잣대가 되지마는 전체적인 내 상황이 지금 음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아니면은 양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전체적인 문맥, 상황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거예요.

 

# 영의 식별을 위해서는 내 상황의 전체적인 조화 상태를 아는 것이 중요

 

그렇게 보면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영적 움직임 그런 체험뿐만이 아니고 ?요즘

내 주변 생활이 어떻는지, 가족들과의 관계는 어떻는지, 내 몸 상태는 어떻는지 영적 지도

를 받으려고 하면은 이런 모든 상황에 대해서 짚고 이야기를 해야 된다 하는 것처럼, 영적

식별 할 때도 그저 내면의 움직임만 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놓여 있는 구체적인 상황들, 내가 일을 하고 있다면은 일하고 있는 측면, 가족들

이나 본당 같은 공동체의 측면, 내 요즘 영성 생활의 여러 가지 모습들, 이 모든 것이 고려

된 가운데 판세가 낮이 점점점점 밝아지는 판세인지, 밤이 점점점점 깊어지는 판세인지,

이것을 보고 움직여야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사전에 원인이 없는 위안 이런 것은 예를 들면은 우리 예수님을 가지고 보면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으셨던 사건, 이것 대표적으로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이다 하는 거예요.

 

# 예수님의 세례 체험 -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

 

완전히 뭐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오셔서 한 말씀하셨다. 이런 표현도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런 체험을 내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면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고 전혀 고려를 못하셨던 거죠. 당신 스스로가 진짜 글자 그대로 지축을

뒤흔들만한 강한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거예요.

 

엄청나게 큰 체험이었고 이거는 사전에 원인이 없는, 그러니까 세례라는 사건을 통해서,

세례라는 그 사건이 원인이 되어서 위안을 받았지 않겠느냐?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마는 아닌 거예요. 설사 원인이 됨직한 사건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원인을 통해서

보통 체험하는 그 정도를 훌쩍 뛰어넘어 버리면은 이거는 사전에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

인 거예요.

 

#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은 예상을 뛰어넘는 강도로 다가오곤 한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통해서 위안을 맛본다 이럴 때 이 기도, 기도를 하면은 성경 말씀을 알

아듣고 이러면서 어느 정도 위안을 맛볼 수 있죠. 그런데 보통 그렇게 기도를 통해서 맛보

는 위안보다는 훨씬 강한 강도 높은 위안을 맛보게 되면은 그런 것은 역시 사전에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으로 분류가 되고 그런 위안은 오류가 있을 수가 없죠. 그래서 그 위안은

100% 믿어도 되는 거예요. 100% 믿고 그대로 따라가면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예요.

 

#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은 성령이 주시는 완전한 위안

 

그런데 아까 봤던 것처럼 악신이 주는 위안이나, 선신이 주는 위안이나 이런 것들은 잘

분별하면서 따라가지 않으면은 오류에 떨어질 위험들이 있죠. 그래서 조심해야 되는 거

예요. 우리가 영신 수련 피정 같은 것을 한다든지 이러면은 피정 중에 여러 가지 영적 위

안들을 맛볼 수 있죠.

 

그런데 그럴 때 위안 맛보는 것이 우리가 정말 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그때 ?위안을

좀 맛봤다 이래 가지고 내 삶이 변화되는 것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아직도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쳐야 되고 어려움이 있죠. 그 말은 쉽게 영적 위안을 맛볼 수가 있는데 뜬금없이 위안을

탁 맛보는, 강도는 비교적 약할지 모르지마는 성령께서 주시는 이런 위안의 체험들이 우리

안에서도 곧잘 일어날 수 있다. 사전에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 이런 것들이 일어날 수가 있

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뭔가 납득할 만한 원인 없이 위안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은 보통의 인과 관계를

생각하면은 요정도 수준인데 그것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서 일어난다든지 아니면은 보통

생각하는 이 상태에서는 영적인 고독으로 떨어져야 되는데 오히려 위안을 더 깊게 맛본다

든지, 반대 현상이 벌어진다든지 이런 것들은 성령껫 건드리시고,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100%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영적 위안이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은 여기에서 악신이 그럼

불러일으키는 그런 영적 위안은 가짜인가? 이렇게 생각을 해 볼 수가 있는데 그거는 아니

예요. 가짜는 아니죠.

 

# 악신이 불러일으키는 영적 위안도 참된 위안이다

                         그러나 곧 소멸될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악신이 불러일으키는 영적 위안으로서는 아무런 하자가 없이 진짜배기다 하는 거예요.

다만 이 전개되는 상황이 그다음에 계속 음으로 확장되는 그 들머리에 있는 영적 위안인

데 그래서 이것은 곧 소멸될 것이다 하는 것을 염두에 둬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그것이

마치 진짜배기고 계속 카나갈 것인양 그렇게 생각하는데 오류를 불러 일으켰을 뿐이지

위안 그 자체로는 진짜배기다 하는 거예요.

 

야바위꾼 이야기를 예를 들 수 있죠. 우리 어릴 때는 이래 학교 앞에 보면, 초등학교 앞에

특히 야바위꾼들이 이렇게 움직이죠. 뭐 주사위를 컵에 이래 덮어 가지고 막 컵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고것 맞추면은 뭐 돈 두 배로 주고 이러는 것. 그런데 꼬마 애가 가면서 야바위

꾼한데 걸려 가지고 야바위를 하게 됐죠.

 

그런데 하는데, 야바위꾼들은 반드시 처음에 한 두세 번은 져주죠. 져주면은 꼬마 애들이

아, 요것 쉽네. 이래 가지고 돈 더 따 먹어야지. 이래 가지고 끝까지 하면은 자기 가진 것

다 털려버리죠. 그런데 아주 요놈은 영악해 가지고 한 두세판 야바위꾼이 잃어줄 때까지

만 돈 따먹고는 "아저씨, 난 됐어요. 난 갈래요." ^^*~~ 이러고 그냥 가버리면은 그 딴 돈

이 가짜인가? 그것도 엄연히 돈이죠. 그리고 이긱으로서 챙기는 거예요.

 

영적 위안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악신이 주는 영적 위안이다 하더라도 그것을 명확하게

내 상황 분별을 하면서 아, 이 위안은 이 정도의 차원에서 오는 위안이다 하면서  거기에

목매달지 않고 그때 주는 고 정도의 위안만, 그 힘만 싹 받으들이고 써 먹고 지나가면은

아주 아름답고 좋은 위안이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좀 봐야 되고. 그다음에

이런 식으로 이 악신도 줄 수 있고, 선신도 줄 수 있다 이러면은 도대체 이런 위안 같은

것이 악신으로부터 온 것인지, 선신으로부터 온 것인지 어떻게 분별을 할 수 있느냐?

 

■ 영적 위안의 분별 방법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죠. 그랬을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의 시작과 중간과 끝이 모두

좋을 때, 이럴 때만 성령 내지는 선신으로부터 온 것이고, 이 중에 하나라도 좋지 않으면

은 악신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봐야 되는 거예요. 시작부터 하는 것.

 

# 선신과 성령으로부터 온 위안은 그 시작, 중간, 끝이 모두 좋다.

 

예를 들면은 어머니가 집에서 오후 5시쯤 되면은 이제 저녁밥 해야 될 시간인 거예요.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도 됐고, 남편이 돌아올 시간도 됐고, 그런데 5시쯤 됐는데

유달리 오늘따라 기도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에이, 내가 뭐 이 집에 밥해 주는 식

모도 아니고 알아서들 해 먹으라고 그러지." 그러고는 기도하죠.

 

그래서 남편이 와서 밥 달라고 그러니까 "아이, 그 냉장고에 있으니까 꺼내 먹고, 내 지금

기도하니까 방해하지 마라고." 그래, 남편이 보니까 참 기특하죠. 결혼 생활 몇십 년을 해

도 기도한다고 밥 안 해주는 건 지금 처음 보죠. 신개해서, 좋아서 바줬는데, 그다음날도

그러고, 그다음날도 그러고 ^^*~~ 멀쩡하게 가만히 있다가 오후 5시만 딱 되면은, 밥할

시간만 되면은 막 기도하고 싶은 열정들이 올라오는 거예요. 이거 잘못된 거죠.

 

그런 움직임을 보면서 성령이나 선신으로부터 오는 움직임이다 판단하면은 오류다 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악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어떻게 우리 식으로 얘기를 한다면, 아주

끝물에 약간 그런 기도를 통해서 위로를 맛보고, 그건 곧 사라질 건데 마치 그것을 "야,

내가, 나도 기도하고 싶은 열정들이 올라오는구나." 그래서 기도를 해 보니까 정작 맛도

괜찮고. 그래서 오늘로 내일도 계속 할려고 덤비는 것. 이런 것 아니다고 보는 거죠.

 

그다음에 뭐 중간이 잘못되는 것. 이런 거는 첫 예는 우리 많이 볼 수 있죠. 처음에 어떤

공동체라든지, 어떤 회합이라든지, 레지오 단체라든지, 좋은 의미로 쭉 시작을 하다가

중간쯤 가서 몇 달씩 이렇게 지속되는 가운데, 그다음에 막 인신공격이 나온다든지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면서 와해된다면은 이것 역시 악신의 움직임,

음의 기운이 점점점점 커져가는 그런 상황에서 비롯된 위안인데, 잘못 분별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거죠.

 

그런가 하면은 이 끝 하는 것은, 그 열매를 보면은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그러는 것처럼

열매가 좋아야 되는데 그 열매도 처음부터 이좋은 열매냐, 나쁜 열매냐? 그걸 가지고 분

별하면은 그건 쉽겠죠. 나쁜 열매는 이거는 아니다. 좋은 열매는 좋다. 이럴 수가 있는데

그게 아니고 열매가 좋은 거예요. 열매만 좋으면은 무조건 이거는 성령이나 선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그거는 아니다 하는 거예요.

 

본래 있었어야 하는 열매보다도 열매의 질이 떨어지면은, 열매가 맺기는 맺었는데 보잘 것

없는 열매가 밎었다면은 이것 역시 악신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두드러진 예로

이전에 실제적으로 우리 교회 안에서도 있었던 사건이죠. 좀 오래된 사건이기는 한대.

 

교회가 지금 얼마만큼 부패해 있는가?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얼마만큼 부패해 있는가?

성직자자 수도자들이 얼마만큼 이렇게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가?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모여서 함께 기도하자. 그러면서 따로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본당 신부님도 모르고, 수녀님들도 달 모르고, 이러는 가운데 일부 신자

그룹이 형성돼 가지고 이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면서 자기들만의 회합을 계속 갖는

거예요.

 

그런데 바깥에서 이렇게 얼핏 보니까 신자들이 이전보다도 더욱 더 미사에 잘 참석하고,

고백성사도 이전보다도 더욱 더 열심히 볼려고 하고, 얼핏 봐서 좋은 것처럼 보이는 거예

요. 아, 저런 열매를 맺고 있다면은 저런 기도 모임은 바람직하고 좋은 것 아닌가라고 판

단할 수 있는데 이것 좀 어설픈 판단이죠. 본래 있어야할 열매보다도 열매의 질이 떨어지

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가 뭔가 어려운 점이 있고, 부패한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 안에

서 쇄신시키고, 정화시키고 그러면서 걸어가는 것이 정도지. 떨어져 나간 것은 아주 경계

해야 된다. 썩었다는 거 모르는 거 아니다. 썩었으니까 우리는 나가서 딴 살림 차려서 해

보겠다. 이것은 성령의 움직임이 아닐 가능성이 아주 높은 거예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여러 가지 영들의 분별을 잘 해야 되는 거죠. 그런데 이럴 때 이런 분

별을 하는 것은 생각이 전개되는 것. 이것이 중점인 거예요. 어떤 느낌에서 오는 위안이나

고독, 그것의 어떤 일관성을 요구하는 것. 이게 식별의 기준인 거예요.

 

# 생각의 일관성 - 영적 위안의 식별 기준

 

예를 들면은 오늘 내가 기도를 했는데 기도 중에 아, 우리 본당에서, 우리 레지오 회합에서

이런 것을 앞으로 해 보면 좋겠다 이러면서 너무나 좋은 생각이 떠올랐고, 위로를 아주 많

이 받은 거예요. 영적 위안을 깊게 체험을 했죠. 그래 가지고는 성당에 떡 갔는데 왠 걸 회

합하다가 몇몇 자매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막 꼴도 보기 싫어지는 거예요. 어떻게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저런 자매들을 위해서 뭔가 내가 할려고 생각을 하다니 ...

참 잘못됐지. 이러고는 깊이 실망 내지는 좌절에 떨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러고는 이제 며칠 지났어요. 며칠 지났는데 다시 이 기도 때 떠올랐던 그 생각을 이어서

좀 더 나은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레지오 회합에 가서 이야기를 하고

실행에 옮겼고, 좋은 열매를 맺고 이랬다면은 그거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일관되게 좋은

그래서 성령이나 선신을부터 온 것이라고 판단을 내릴 수가 있다. 그 사이에 무슨 고독 비

슷한 이런 것들을 체험을 했지마는 그런 위안이나 고독이 일관성 있게 진행이 되느냐?

이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한 생각이 어떻게 논리 정연하게 펼쳐지느냐 그걸 보는 거죠.

 

그리고 우리는 이런 영적 식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많이 있는데 사전에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이나 이런 것들은 일반적으로 얘기할 때는 이 위안의 강도가 아주 높은 체

험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다음에 이어져서, 그러니까 원인이 없

영적 위안 상태에 너무 오랫동안 가면은 우리는 돌아버릴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정상적인 일상의 삶의 차원에까지 내려 와야 되는 거예요.

 

 

                                     (7번 사진)

 

이 시기에도 여러 가지 생각이나 느낌들이 올라올 수 있죠.

 

 

 

여기에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일 때는 성령께서만 주시니까 불순물 제로이지만

이 시기(7번 사진)에는 여기에는 선신도 들어올 수 있고, 악신도 들어올 수 있고, 여러

신들의 움직임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의 식별 이 문제에 들어

갈 때는 아주 상황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해야 된다.

 

그리고 지금 이런 이야기들을 그저 말로만 이렇게 툭툭툭 했을지 모르지마는 구체적인

실제 상황에서 영적 분별을 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하죠. 그리고 이런 영의 식별

문제는 단순한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다 하는 거예요. 식별에 대한 무슨 기술을 몇 가지

익혀 놓으면은 된다 이게 아니고 사랑의 문제인 거예요.

 

# 영적 식별은 기술이 아닌 사랑의 문제

 

사랑을 깊게 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잘 읽어드리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 때 비로소 이런 영의 식별에 대한 감각이 이제 예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인지, 아닌지 본능적으로, 감각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그런 힘이 닦이는 것

아닌가? 영의 식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이라고 느껴지죠. 예, 오늘은 여기까지

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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