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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원한 생명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13 조회수847 추천수1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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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7.13 연중 제15주일 이사55,10-11 로마8,18-23 마태13,1-23


영원한 생명


말씀 묵상 중 떠오른 루가복음 다음 율법교사의 물음입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10,25ㄴ).

 

율법교사의 물음의 동기는 불순했지만 질문은 옳았습니다.

옛 구도자들이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것 역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왜소해진 사람들입니다.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많은 사람을 왜소한 속물로 만들었습니다.

 

하여 청년이든 장년이든 많은 이들이 하느님 비전을, 희망을, 꿈을 잃고 방황합니다.

참으로 평생 추구할 비전이자 영원한 화두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런 비전의 뚜렷한 목적의식과 함께가는 정신력이요 삶에 대한 간절함입니다.

바로 고맙게도 오늘 복음 말씀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답을 줍니다.

 

복음을 요약한 저녁 성무일도 시 다음 '성모의 노래 후렴'에서 오늘 강론의 틀을 찾았습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요, 씨뿌리는 사람은 그리스도이시니,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


 

첫째, 열린 눈, 열린 귀를 지니십시오.

 

모든 수행의 목표가 깨어있음입니다.

깨어있을 때 눈도 마음도 열립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깨어 눈도, 귀도 열려 있었기에 주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보는 눈도, 들을 수 있는 귀도 순전히 은총입니다.

진정 청해야 할 은총은 볼 수 있는 눈이요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릴 때 주님 말씀의 진리를 깨닫고 빛나는 비전도 계시됩니다.

바로 바오로가 그 모범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활짝 열린 눈에 계시되는 이런 '영광의 자유'의 비전 있어,

언제 어디서나 낙관적 긍정적 삶입니다.

현세의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초연한 자유를 누립니다.


 

째,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는 것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빵만으로 사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다음 주님의 말씀 중, 비와 눈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새삼 물은 생명임을 깨닫습니다.

최고의 덕을 상징하는 물이요, 세상에 물의 덕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화장실에서, 세탁할 때, 샤워할 때, 청소할 때, 음식을 만들 때, 시원한 물을 마실 때 등,

물의 고마움은 끝이 없습니다.

 

물같이 사는 이가 정말 최고의 덕인입니다.

 

다양한 쓰임이지만 물의 본질은 변치 않습니다.

바로 영혼에 이런 물 같은 역할을 하는 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영혼의 양식이자 생명수가, 영혼을 깨끗이 정화해 주는 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이요, 말씀의 은총으로 영혼을 샤워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본받으십시오.

 

비유의 전반부의 주인공, 씨뿌리는 사람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시는 농부 하느님이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다."(요한15,1)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지요.

하느님은 농부의 원조이십니다.

 

농부를 천대함은 하느님을 천대하는 것입니다.

농사를 천대하는 나라치고 잘 된 나라는 없습니다.

 

누구보다 하느님 가까이 있는 이들이 농부입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농부의 자세가 삶의 모범입니다.

 

땅을, 밭을 탓하지 않고 씨뿌리는 삶에 항구합니다.

예수님의 낙관적 삶의 비밀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깊은 신뢰와 희망, 사랑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다음 말씀이 이런저런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씨뿌리는 삶에 충실했던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씨뿌리는 삶에 항구한 결과,

우리 눈이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전체를 봤을 때는 성공의 풍작 인생입니다.


 

넷째,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 비유의 해설에서 주인공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은총이 좋고, 주님이 말씀의 씨를 뿌려도 땅이 척박하면 말씀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느님도 우리의 응답이 없으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십니다.

 

과연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 땅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길바닥 같은 마음입니까?

돌 밭같은 마음입니까?

가시덤불 같은 마음입니까?

혹은 좋은 땅같은 마음입니까?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 데, 어떤 사람은 백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누구나 원하는바 이런 좋은 땅의 마음일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내 마음 땅에 좌절하지 않고 수행에 항구할 때

주님의 은총은 우리 마음 땅을 좋은 땅으로 변모시켜 결국은 풍부한 수확을 주십니다.

 

얼마 전 읽은 말씀이 은혜로웠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1베드4,14).

 

우리가 주님 때문에 겪게 되는 온갖 모욕적인 상황도 지극한 인내의 겸손으로 잘 견뎌낼 때,

우리 위에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땅을 좋게 변모시켜 주심을 믿습니다.

 

요즘 깨닫는 바가 '먹기-읽기-걷기-살기'의 밀접한 관계입니다.

건성으로 먹는 이는 건성으로 읽고 건성으로 걷고, 결국은 건성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반면 진지하게 먹는 이는 진지하게 읽고 진지하게 걸으니 그 삶 또한 진지합니다.

'깨어 바르게' 먹고, 읽고, 걷고, 살기의 수행에 항구할 때 더불어 마음 땅도 비옥해 질 것입니다.

깨어있음은 깨달음과 직결되며 깨달음과 더불어 좋은 땅으로 변모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 땅을 '좋은 마음 땅'으로 변모시켜 주시고, 당신 말씀의 씨앗을 뿌려주십니다.

우리를 치유하고 정화하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의 말씀이요 성체입니다.

 

"주님, 저희가 성체를 자주 모시어 나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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