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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제18강 복음 관상기도 1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15 조회수1,580 추천수8 반대(0)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18강 복음 관상기도 1

 

■ 오늘 이야기 ...

우리 오늘은 다함께 시공간을 여행을 좀 했으면 합니다. 이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스라엘 지방을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거예요. 그러면서 바로 예수님 곁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을 알아듣고 거기에 따른 우리 신앙의 생명수를 길어올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기도 방법 이것이 뭔지 우리 함께 배워나갔으면 합니다.

 

■ 시작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는 당신과 함께 따라다니는 가운데 당신의

모습을 바로 곁에서 보고, 듣고, 느끼면서 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복음 묵상기도

를 통해서 현장에서 살아계신 당신의 모습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그 만남을 통해

서 저희들 안에 신앙의 변화가 일어나고 저희들 자신의 존재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은총을 더해 주십시오. 더욱 더 깊게 당신 곁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당신을 더 많

알고, 더 잘 사랑할 수 있도록,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영신수련 둘째주간의 기도 형태

2. 묵상기도와 복음관상기도의 차이

3. 구체적인 복음관상기도의 방법
    3.1 장면설정의 의미
    3.2 觀(보다)하며 想(생각하다)하는 기도
    3.3 복음서의 행간을 메움
    3.4 구경하는 기도

4. 복음관상기도의 열매
    4.1 존재의 변화
    4.2 마니피캇의 원리

 

만약에 영신 수련 피정을 쭉 같이 하고 있는 중이라면은 또 실제적으로는 여러분들이 지금

이 강의를 쫓아오면서 피정을 하고 있다고 봐야 되죠. [19]번에 의한 피정 하는데 그런데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면은 우리가 이제 둘째 주간에 들어와 있는데 이 둘째 주간 중에서

도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 쭉 살펴나가는 거예요. 그전에는 그리스도의 나라라든지, 천주

강생의 신비라든지, 예수님 탄생이라든지, 두 개의 깃발, 세 부류의 사람들 이런 기도들을

쭉 했죠.

 

# 영신수련 둘째 주간의 기도 자료:  그리스도의 나라, 천주 강생, 예수 탄생,

  두 개의 깃발, 세 부류의 사람들, 겸손의 3단계, 공생애

 

그 기도들을 하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복음의 순서에 쫓아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도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애 즉, 세례 사건부터 보겠죠. 세례 받으신 사건부터

해 가지고 이 공생애로 보는 것이 예루살렘 입성까지.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이래 가지고 이 복음서에 나타나는 중요한 사건들을 가지고 쭉

기도해 나가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이제 이 공생애에 대한 기도와 더불어서 필요하면은 사람에 따라서는 하느님

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이 작업까지도 병행을 하게 되죠. 여기서 그런데 주요한 것은

둘째 주간에 들어와서 공생애에 들어가면은 기도의 형태가 바뀌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우

리 기도의 대부분이 묵상기도라는 것을 했는데 이제부터는 복음 관상기도를 하는 거예요.

 

■ 복음 관상기도

 

그냥 관상기도라고 하지 않고 관상기도 앞에 수식어를 하나 그냥 더 넣어서 복음 관상기도

복음을 가지고 관상한다 이래서 복음 관상기도다 그러죠. 그러다 보니까 이 관상기도는 이

뭐라고 그러나, 깔멜에서 이야기하는 그 관상기도하고는 다른 거예요. 깔멜에서 이야기하

는, 그런 봉쇄에서 이야기하는 관상기도 같으면은 의지적인 노력이라든지, 지성적인 판단

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전부 떠나죠.

 

그러면서 오직 성령의 이끄심에 맡겨드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으시고 당신

께 끌어당기시는 가운데 뭔가를 보여주시고, 알게 해 주시고, 감동에로 이끄시고 그러는

것인데, 이냐시오 성인이 이야기하는, 영신수련에서 이야기하는 관상기도 하는 것은 우리

의 의지력이라든지, 지성이라든지, 감성 이런 것들을 전부 사용하는 기도인 거예요.

 

# 영신 수련의 관상기도: 의지, 지성, 감성을 모두 사용하는 기도

 

이런 점에서 그런 봉쇄에서 이야기하는 관상기도하고 구분하느라고 복음 관상기도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이 복음 관상기도. 왜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복음 관상

기도를 하게 하시는가? 복음 관상기도에 보면은 길잡이가 세 개가 있어요. 길잡이 세 개가

있는데 이 길잡이 세 개에 보면은 첫 번째가 역사를 생각하라. 이거죠. 그 다음에 두 번째

가 장면을 설정해 둬라 그러는 거예요. 세 번째는 청할 은총을 정해라. 그런데 여기서 보면

은 역사를 생각하라. 이러는 것은 복음서의 사건인 거예요.

 

# 복음 관상기도의 길잡이 중 역사는 복음서의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 가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 그다음에 성모님께서 수태고지를 받으

시는 장면을 가지고 기도를 한다면은, 가브리엘 천사가 오셔가지고 성모님께 수태고지를

하시고 그러고 나서 성모님께서 엘리사벳 성녀를 찾아보러 가시고 하는 그런 어떤 사건,

그 사건의 내용 그것이 역사에 해당하는 거죠.

 

우리 첫째 주간에 기도했던 것을 보면은 내 자신의 과거의 체험을 가지고 기도하곤 했었죠.

내 어릴적 체험, 아버지와 있었던 그런 사건 그런 걸 가지고 기도한다면은 그것이 역사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은총, 우리 묵상기도를 할 때도 전부 필요한 은총들을 청해라 그랬죠.

이 기도를 통해서 내가 바라는 것이 뭐냐? 이렇게 물으면은 거기에 따른 은총을 청하는 것.

이러다 보니까 묵상기도하고, 복음 관상기도하고 갈라지는 점이 두 번째 부분인 거예요.

역사라든지, 청할 은총은 묵상기도에서도 이런 것들은 있었죠.

 

 

 

그런데 복음 관상기도에서 처음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구체적인 장면을 그려봐라. 이러

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낳으시는 장면을 본다고

그러면은 그 마굿간, 마굿간의 크기가 어떻는지, 마굿간에 뭐 다른 구조물 같은 건 없는지,

성모님은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지, 여기 분위기를 어떻는지 이런 것들을, 주변의 어떤 장면,

상황과 그 속에서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 이런 것들을 전부 마치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봐라.

이러거든요.

 

이게 묵상기도와 복음 관상 기도의 차이점인 거예요. 그런데 그러면은 이냐시오 성인께서

는 왜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 기도를 하기 시작하면은 묵상을 하지 말고 관상을 하라고

그러시는가?

 

# 예수님의 공생애에 관한 기도는 왜 '복음 관상기도'인가?

 

이거는 우리의 어떤 내적인 움직임들을 염두에 두면은 쉽게 이해가 갈 수가 있죠. 예컨대

현대 백화점에서 지금 불이 나가지고 난리다. 그런데 이제 불이 막 났는데, 차량들이 막

뒤엉켜  가지고 소방차가 제대로 집입을 봇하고 그래서 막 사람들이 위에서 뛰어내려서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이런 이야기가 다음날 아침 신문에 이렇게 기사화돼 있으면

그것을 이렇게 읽어보고 대충 뭐 그렇구나 하고 새길 수가 있죠.

 

그렇게 알아듣는 것 하고, 마치 내가 고시간에 현대 백화점 앞을 우연히 자지게 된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비명소리들이 나고, 막 불길이 창문으로 터져나오고, 연기들이 막 올라가고

싸이렌 소리가 들리고, 아수라장인 광경을 내가 앞에서 직접 목격을 했다면은 그 다음날

신문 읽을 것 하고 어느 것이 더 내 마음 속에 깊게 들어와 박히겠는가? 두 말 할 것도 없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당신을 쫓아가고 싶다고 그런다면은, 그렇다면은 머리

속으로 대충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러면서 정리하고, 예수님 사랑한다고 쫓아간다

고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고, 마치 내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내 앞에 있는 양, 그러면서 그 사

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말하는 모습을 전부 보고, 그대로 내 마음 속에 담을려고 하는 것처

럼 진짜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예수님의 그 모습을, 그 사건의 의미나 내용들을 통

째로 내가 흡수해 가지고 내 것으로 하리라. 이런 마음 자세로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

하고 필요하지 않겠는가?

 

# 예수님의 모든 것을 마음에 담기 위한 관상기도

 

이런 점에서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예수님이 나오시는 이런 복음 사건을 가지고 기도할 때

는 묵상을 하지 말고 복음 관상을 해라.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저 단순히 복음관상 기도에 대한 하나의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제가 볼 때

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를 담고 있다 싶은 거예요.

 

제가 곧잘 쓰는 표현으로는 묵상적인 삶에서 관상적인 삶에로 옮아갈 필요가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우리의 평소의 신앙생활이라든지,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대단히 묵상

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 일반적인, 묵상적인 삶의 형태를 관상적인 삶

의 형태로 좀 변화시키자. 혹은 적어도 보완을 이루어내자. 이런 이야기인 거예요.

 

# 묵상적인 삶을 관상적인 삶으로 봉완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까 단적인 예가 미사 때 모습이라든지, 강의 때 모습 이런 거죠.

미사 때도 여러분들 어떤 식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지 잘은 모르지마는 일반적으로 뭘

이렇게 독서가 봉독되고, 복음이 봉독되고, 심지어 이제 신부님이 강론을 하고 그러셔도

대개는 그냥 고개 숙이고, 주보 뒤적거리면서 있거나 아니면 눈 딱 감고 팔짱끼고 이렇게

있는 거. 이게 적잖은 사람들의 모습이죠.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까 귀만 열어 놓고 있는 거예요. 미사를 드려도, 누가 와서 강의를

해도, 누가 와서 강의를 하는가? 누가 지금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가? 이런 거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거예요. 늘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거

예요. 좋은 이야기를 하는가? 나쁜 이야기를 하는가? 내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하는가? 내

마음에 안 드는 이야기를 하는가? 그러면서 늘 귀만 열어 놓고, 모든 이야기나 주위에서 벌

어지는 사건들이 정보 차원에서 내한테 전부 접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온갖 데이터를 접수하는 거예요. 책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의 강의 하는 거를

들으면서, 신부님 강론을 들으면서 데이터를 접수를 해 가지고 이 데이터 분석하죠. 이것은

취할 것, 이것은 버릴 것, 이것은 옳은 것, 이것은 그른 것, 이것은 좋은 것, 이것은 나쁜 것.

 

그래 가지고는 데이타 수집과 분석 정리가 끝나면은 거기에 쫓아서 이제 의지력으로 결심

하면서 자, 이게 옳으니까 이런 식으로 살자,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모습들이 거의 대부분

인 것 아닌가? 그러다 보니까 누가 이야기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해져 버리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굳이 더군다나 마음에 들지도 않는 신부가 떠들고 있는데 눈 떠서

사람 바라볼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저 눈 딱 감고 귀만 열어 놓으면 되는 거예요. 무슨 소리

하는지 고거만 듣고, 내 안에서 전부 판단하고 비판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삶을

살아가다 보니까 우리 삶이 너무도 팍팍해지는 것 아닌가? 너무 힘들어지는 것 아닌가?

 

너무 힘들어지는 것 아닌가? 늘 옳고 그른 것  따지고, 정답이냐, 아니냐? 그것 따지고 거기

에 쫓아서 내 강한 의지로 살아낼려고. 이러다 보니까 작심 3일이 되는 예가 허다하게 일어

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삶이라는 것이 늘 좀 긴장되고, 팍팍하고, 무겁고 그런 것 아닌가?

삶에서 윤기가 좀 빠져버리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한테 온갖 정보들을 "이놈아, 네가 수집할 수

있는 데까지 수집해라. 그래서 그거 제대로 분석해라. 그래서 거기에 쫓아서 강한 의지력

으로 살아내라." 그러면서 전부 의지의 한국인으로 만들어 놓으시고 그걸 보시면서 참 보

시기에 좋았다. 그러고 계실 건가? 하는 거죠.

 

그것보다는 오히려 우리 삶이라는 것이 훨씬 더 좀 가볍고, 부드럽고, 수월하고, 좀 경쾌하

고 이러는 것 아닌가? 꼭 내가 정보 분석해가 거기에서 나오는 의지력을 가지고 이렇게 살

아내는 것이 아니고, 주위에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감동의 물결들 그것을 통해서 살아가는

것 아닌가?

 

# 지식과 의지만이 아닌 감동이 함께 있는 삶

 

아침에 그냥 남편 출근시키고, 애들 학교 보내고 그러면서 뭔가 시쿤둥했었는데 성당에 레

지로 회합이 있어서 나오는데 성당 입구에서 한 자매를 만났는데 평소에 그렇게 친한 자매

도 아니죠. 그런데 그 자매가 그냥 환하게 웃으면서 "아,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한 마디 그

냥 툭 던졌는데. 우리는 그런 거 들으면 알죠. 저 사람이 외교관적인 차원에서 그저 의례적

으로 인사를 하고 있는지, 진짜 마음에서 올라오는 정말 따뜻한 인사를 건네는지 본능적으

로 알아버리죠.

 

그런데 마침 그 자매가 그렇게 따뜻한 말 한마디 던져 주는 것, 표정 한번 지어 준 것. 그게

내 안에 적잖이 힘이 돼 가지고 그날 하루 그냥 편안하게, 힘 있게 그렇게 살아낼 수 있는

어떤 밑바탕이 되는 것 아닌가? 그런가 하면은 그런 식의 어떤 자연환경도 얼마든지 그렇게

다가올 수가 있죠.

 

때로는 그냥 이름 모를 꽃 한송이, 새 지저귀는 울음 소리 하나, 바람 한 줄기 이런 것들이

그때 그때 내한테 다가오면서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이런 일들이 많이 있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존재를 통해서 거기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받아서, 그 감동을 통해서, 그 힘으로 우리는 살아내게 끔 본래 만들어져 있는 것

아닌가? 늘 무슨 싸이보그처럼 분석하고, 거기에 따라서 착착 기계처럼 살아내고 이러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이제 이것을 묵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늘 머리 속으로 추론을 하고, 이치를 따

지고, 깊게 생각하고 거기에만 몰두해 있는 사람들은 눈 딱 감고 귀만 열어놓다 보니까 주

위에서부터 다가오는 온갖 자료들을, 전부 에너지의 원천들을 흘려보내 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에너지 낭비죠.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는 이 복음 관상기도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한테 가끔 물으면은 그래요. 묵상기도가 더 쉽고 수월하겠느냐? 아니

면은 복음관상 기도가 쉽고 수월하겠느냐? 이래 물으면은 대게 이 답이 반반쯤으로 나오는

데 오히려 좀 더 무게가 실리는 사람은 "묵상기도가 더 쉬운데요."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이거는 오해다 싶은 거예요. 묵상 기도는 생각을 깊게 해서 기도를 진행시켜 나가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기도 때 뿐만이 아니고 잠자기 전에는, 눈 떠 있는 시간, 하루 종일 이것 저

것 생각하면서 있죠. 그렇게 계속 생각을 하면서 일상을 살고 있다가 기도한다고 떡 탁 들

어가 앉으면 여기서도 또 생각을 하니까 "아이, 뭐 생각하는 거 힘드나? 생각하지 뭐." 그래

서 얼핏 쉽다고 생각을 하는데, 묵상기도가 과연 그렇게 쉽고 수월하다면은 거기에서 비롯

되는 기도의 열매라든지, 기도에 있어서의 성장 같은 것도 그렇게 두드러지게 일어나야 될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묵상기도를 해 보면은 기도를 통해서 영적 위안을 받고, 영적 성장을 이뤄내는

것이 만만잖죠. 그게 왜 그런가 하니까, 묵상기도를 이렇게 하다 보면은 여러분 들쯤만 해도

렇죠. 그동안에 뭐 좋은 강의라든지, 좋은 책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온갖 것들을 이미 보고,

듣고 이래 가지고 알고 있는 거예요. 내 것이 완전히 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 어떤 지식 차원

에서는 여러 가지들을 흡수해가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수난의 신비라고 그럴까, 아니면 뭐 예수님의 사랑이

라고 그럴까? 이런 걸 가지고 기도를 한다 치자. 여기에 대해서 이미 이것 저것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런데 묵상기도 한다고 떡 머물러 있으면은 지금까지 들

어서 알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이 생각 저생각 하면서 기도가 진행되기 십상이죠.

 

이 말은 뭔가 좀 더 새로운 것을 발굴해 내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복습하

는 차원에서 그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저런 좋은 생각, 올바른 생각들을 하면서 기도에

머물렀는데, 1시간 기도는 하고 났는데 허기지는 거예요. 영적 만족감이 잘 안 일어나는 거

예요. 여기서 우리가 영적인 만족을 얻으려고 하면은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한

걸음 더 들어가야 되는 것. 그래서 새로운 것을 일궈내야 비로소 영적 만족을 얻을 수 있을

텐데 그 일이 과연 쉽겠느냐 하는 거예요.

 

이 묵상 기도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좀 더 지적인 힘이 탄탄하게 뒷받침이 되고, 집중하는

힘도 강해야 하나의 이치를 놓고 깊게 파고들면서 일궈내고 영적인 위로를 얻고 그럴 것

아니냐 하는 거죠. 이런 점에서 이거 결코 쉬운 기도 형태가 아니다 하는 거예요.

 

# 묵상기도는 관상 기도에 비해 지적인 힘과 집중하는 힘이 많이 필요한 기도

 

그런데 이제 여기에 비해서 복음 관상기도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오히려 좀 더 쉬운 것 아

닌가?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아까 봤던 것처럼 장면을 설정하라 하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항간에 오해들이 아주 많다 싶은 거예요.

 

■ 장면 설정의 의미

 

장면을 설정을 해 봐라. 이러다 보니까 예컨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 성녀를 찾아가시는,

그래서 엘리사벳 성녀 댁에서 이래 3개월 동안 머물다가 그렇게 돌아가신 그 장면을 가지고

기도를 한다 이러면은 성모님 수태고지 받으신 다음에 산길을 달려서 엘리사벳 성녀 집에

갔다. 이렇게 돼 있죠. 그러다 보니까 이냐시오 성인은 장면을 설정해 봐라 할 때 그러시는

거예요.

 

성모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산길이 폭은 넓은지, 좁은지, 경사는 어느 정도인지 그런 것들을

그려 봐라. 그러고 또 이제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면은 그

분들 모습이 어떻는지, 나누는 대화는 어떻는지 이런 것들을 또 그려봐라. 이러다 보니까 사

람들이 이것을 전부 다 상상 속에 이것을 만들어 내야 되는 것인 양.

 

그래서 우선에 장면부터 탁 구성을 하는데 길도 넓혀 봤다가, 좁혀 봤다가, 경사를 가파르게

했다가, 뭐 낮추어 봤다가. 그래서 길도 만들고 거기다가 태풍 불어서 뽑혀간 나무들도 갖다

가 나무도 이렇게 심고, 그러고 개울물도 흐르게 하고. 그러면서 이렇게 장소가 쎄팅이 끝나

면은 자, 이제 성모님 모셔오고, 엘리사벳 성녀 데리고 오고.

 

이분들 모습이 어떻는가 이래 보다 보니까, 성모님을 무슨 원피스를 입혀 봤다가, 투피스를

입혀 봤다가, 저렇게도 해 봤다가. 또 그래 가지고 어쨌든 분장이 끝나죠. 다 끝나고 나면은

하는 대화도 들어봐라 이랬더니, 성경에 나오는 대화는 또 너무 간략하게 적죠. 그래서 이제

또 대화도 이재 만들어 내죠. "성모님은 어떻게 피부가 그렇게 고우시냐고?" ^^*~~~

 

뭐 이러면서 이야기들을 막 지어내는 거. 즉 이 장소를 쎄팅하는 것부터 시작해 가지고, 등

장 인물들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만들어 내는 이 모든 것들을 전부 내가 상상 속에서 만들

내야 된다. 그러면서 전부 사이비 피디들이 돼 버리는 거예요. 온갖 연출을 다 하는 거예요.

 

# 복음서의 장면 설정은 내 상상력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어이, 나무 심어 놓은 거 그쪽 말고 뽑아 가지고 저기다 심고, 그 나무 키가 너무 크니까 좀

낮추고, 성모님은 자세가 너무 이렇게 앞으로 쭉 나온 거 같으니까 엘리사벳 성녀가 배를 ?앞

으로 쪽 내밀고, 성모님은 약간 앞으로 숙이고. 이런 일들을 막 기도 중에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나는 상상력이 너무나 좋아가지고 성모님 얼굴을 그리면은 성모님 눈가의

잔주름까지 난 다 그려진다고. 이러면서 복음 관상기도가 진짜 내 체질에 딱 맞는 기도라고.

그러면서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으면은, 기가 안 죽어서 나름대로 보기는 괜찮다 싶기는 한

대. 아니다 싶죠. 그런 거 아닌 거예요.

 

그런데 상황이 더 험악한 거는 나는 도대체가 상상력이 없어서 복음 관상기도를 할래야 할

수가 없다. 성모님께서 산길을 달려서 이렇게 가셨다 이러면은 그저 왕복 4차선 도로만 하

나 뻥 뚫린 게 보이고 ^^*~~ 더 이상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난다. 이래서 도저히 기도할 수

가 없다. 그러면서 이제 기가 팍 죽어가지고 땅만 쳐다보면서 밥도 안 먹고 돌아다니고 있

으면은 간에 천불이 나죠.

 

이 양쪽 모습 다 잘못된 것이라고 보여지는 거예요. 묵상 기도도 마찬가지고, 복음 관상기

도도 기본적으로 기도다 할 때는 성령께서 이끄시고, 성령께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것. 그것을 맑게 깨어 있다가 포착하는 것이지, 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통해서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기도는 아니다 하는 거예요.

 

# 복음 관상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보여 주시는 것을 포착

 

여러 가지 장소를 쎄팅을 하고, 등장 인물들을 등장을 시키고, 대사를 만들어 내고, 이것

부 내 머리 속에서 내가 상상하면서 막 쉽게 말해서 그냥 지어낸다. 만들어 낸다 하는 거죠.

그러면서 1시간 내내 기도를 하고 있으면은 재미는 있을지 모르겠어요. 시간도 금방 가고.

 

그런데 그랬다 해 가지고 그게 기도가 될까?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그저 내 심리적인 면이

엄청 많이 투사되면서 내가 만들어 냐고 있는. 그것도 나름대로 기도고, 괜찮기는 하지마는

존재의 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좀 얕은 차원에서, 마인드 차원에서 일어나는 기도가 되고

말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이 기도를 통해서 지금은 위안을 얻고, 힘을 얻고 그럴지 모르지마는 그게

당장 기도가 끝나고 나서 한 시간만 지나면은 다른 사람들하고 부딪치는 가운데 이 기도의

힘이 그 사건 속으로 연결되어 들어가지 못하는. 기도는 기도대로 따로 놀아버리고, 삶은

삶 대로 또 따로 노는. 이런 어려움드이 생기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상상력에만 의존해 가지고, 상상력이 풍부해야 복음 관상기도를 제

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하는 거예요. 그런 것이 아니고 기본

적으로 복음 관상 기도에 있어서도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 보여 주시는 것을 보고, 기다

렸다가 알아들어야 된다. 자, 그렇다면은 구체적으로 복음 관상기도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 복음 관상기도의 방법

 

이 복음 관상기도는 글자 그대로 관상하는 이 글자 자체에 기도의 방법이 그대로 담겼다고

보는 거예요. 이 볼관(觀)자죠. 볼관자고, 생각할 상(想)자. 이 관(觀) 하는 것. '보다'하는

뜻이죠. 상(想) 하는 것은 생각하는. 이 관(觀)자. 한자는 우리 상형문자라고 그러죠. 이 관

(觀)자는 올빼미가 동굴 속에서 눈을 딱 뜨고 사물을 직시하고 있는 그 모습을 형산한 거라

고 그래요.

 

 

 

이게 올빼미인 거예요. 올빼미가 두 눈을 뜨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사물을 딱 바라보고 있

는 것. 올빼미가 관(觀), 이 볼견(見)자, 보고 있는 거예요. 보고 있는 것. 그다음에 상(想),

생각하다. 보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보고.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 복음 관상기도: 보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보는 기도

 

 

 

그런데 그래 가지고는 뭔가 감이 잘 안 올테고 구체적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해 보면은 우리

성경이라는 거는 그렇죠. 이게 거의 이런 식인 거 아닌가?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 건

물로 치면은 그냥 골조만 딱 세워져 있는. 성경은 너무나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많은 부분들이 생략되어 있는, 뼈대만 딱 세우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이 행간을 메꾸는, 성경의 구절과 구절 사이에 있는 행간을 메꾸어 가면서 기도한다.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 세례 사건인데 마르코 복음 같은 경우 1장 9절에서 11절까지 단 3개

절 밖에 없죠. 거기에 보면은 갈릴래야 지방 나자렛을 떠나서 요르단 강에 가서 세례를 받

으셨다. 그리고 세례 받고 올라오시니까 비둘기 모양의 형상이 내려오시면서 이런 이야기

가 들렸다 하는 고 이야기 밖에 없는 거예요.

 

아무리 단편 소설을 쓴다 하더라도, 요즘 소설가한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고 장면,

고거를 가지고 좀 묘사를 해 보라고 이러면은 적어도 한두 페이지 내지는 몇 단락 정도는

묘사를 하겠죠. 예수님이 성모님과 헤어지는 장면이라든지, 예수님이 떠나시는 옷차림이

라든지, 날씨라든지, 동네 풍경이라든지. 그런데 이런 거는 몽땅 생략되고 없는 거예요.

 

그러면은 우리는 복음 관상기도를 할 때 예수님의 세례 사건을 가지고 기도를 하면은 적절

한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이 질문을 던지는 내용은 사람에 따라서 전부 다를 거예요. 그래

서 어쨌든 자기가 관심가는 부분을 질문을 던지는데 성모님하고 예수님하고 헤어질 때 어

떤 작별 인사를 나눴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조금 있으면은 그냥 이런 저런 생각이 나는

거예요.

 

저희들 수도자들 같으면은 대게 1년에 한 번쯤은 본가 방문 이래 가죠. 본가 방문해 가서

며칠 집에서 쉬다가 이제 다지 수도회로 돌아올 때가 되면은 어머니랑 아버지랑 헤어질 때

되겠죠. 그럼 그때 아파트 입구에서 작별하던 그 모습이 생각나면서 아, 예수님도 그런 식

으로 작별했을 거야. 어머니는 아파트 입구에서 계속 애가 사라질 때까지 막 눈물 찍어 내

시고, 수도자인 지는 뭐가 잘났다는 듯이 뒤도 안 돌아보고 휑하게 바람을 날리면서 가고.

 

예수님도 사사롭게 어머니에 대한 정을 품고 있었던 거는 아니었을 거야. 내처럼 이렇게

쌩하게 가셨을 거야. 그냥 그런 생각이 이렇게 올라오면은 예, 그러고 지나가면 되는 거예

요. 예수님께서 그때 작별하실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별하셨는지 비디오로 찍어 놓은

것도 없고, 문헌에 남아 있는 기록도 없죠. 정답이라는 게 따로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은 자기가 그냥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따라서 적당히 생각이 떠오르면은 그 생각

을 이렇게 보면서 지나가면 되는 거예요. 그럼 그다음에 또 자기가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예수님 떠나실 때 옷차림은 어떠셨는지? 무슨 백 같은 거는 들고 가셨을까? 나자렛에서

요르단까지 여행을 하실려면은 적어도 하루, 이틀 이렇게 걸리실텐데, 여행하시는 옷차림

이 어떻는가? 혹은 또 예수님 저녁 때는 해가 떨어지면은 어디서 주무셨는지?

 

먹는 데  관심이 많은 녀석 같으면은 대번에 예수님 끼니때가 되면은 식사는 어떻게 하셨

는지? 어머니가 무슨 주먹밥이라도 싸주셧는가? 뭐 이런 질문들을 계속 던지면서 그렇게

쭉 진행시켜 나가는 거예요. 이게 복음 관상기도하는 방법이예요.

 

그런데 이렇게 하다 보면은 뭐 거의 십중팔구 자기가 소설을 쓰고 있겠죠. 뭐 성모님하

헤어지는 장면하며 그냥 뭐 "이게 마지막이다." 이래 가지고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더 꽉

끌어 안으시고 그러자 성모님이 그냥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그걸 보니까 예수님도 더 또

눈물이 나고, 그래서 한참 있다가 헤어져서 뒤도 안 돌아보고 이래 가는데,

 

뒤에서 뭐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까 성모님이 땅에 엎어져 가지고는 막

울고 계시고,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가지고는 "어머니, 이러지 마시라고" ^^*~~~

뭐 1시간 내내 그렇게 소설을 쓰면서 쭉 갈 수도 있죠.

 

그런데 복음 관상기도하는 방법은 그런 식으로 하면 되긴 돼요. 그런데 기도의 핵심은 그

런 식으로 내 소설 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적절한 질문들을 던지면서 행간을 메꾸면

서 쭉 사건을 진행시켜 나가다 보면은 어느 부분에 가서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한 생각이

탁 떠오르는 거예요. 그런가 하면은 생각지도 않았던 어떤 느낌이 떠오르고, 아니면은 또

생각지도 않았던 이미지 같은 것들이 툭 떠오르기도 하는 거예요.

 

평소에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체험했던 것. 그게 거의 그대로 투사가 되다시피 진행되는

거예요. 그런데 촛점은 그게 아니고 그렇게 진행되는 가운데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 이렇

게 불쑥 불쑥 올라오는 게, 그렇게 올라온 생각이나, 느낌이나, 이미지들이 마치 거울처럼

나를 비추는 거예요. 이런 생각이나 이미지가 불쑥 떠오르면은 탁 보는 순간 그냥 내 모습

이 거기에 탁 보이게 되는 거예요.

 

# 복음 관상기도: 평소에 생각지 못했던 느낌과 이미지가 갑자기 떠올라 거울처럼

                      나를 비추고, 나를 변화시키는 기도

 

그러면서 내 자신에 대한 어떤 존재의 변화가 저절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는 것. 이게

복음 관상 기도의 핵심이고, 이게 복음 관상 기도의 묘미라고 보이는 거예요. 이 어떤 분,

기도를 하다가 그랬죠. 어느 수녀님이 한달 피정 중에 기도를 하는데 이 예수님의 전형적인

하루 일과 하는 것.

 

회당에서 처음에 가르치시고, 그다음에 베드로 집에 가셔가지고 장모를 낫게 하시고, 그

음에 또 저녁 때는 가파르나움에서 몰려온 모든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새벽녁에 기도하

가시죠. 그 장면을 가지고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 베드로 장모를 예수님께서 일으켜 세우시

죠. 병을 낫게 해 주시자 장모가 일어나서 그 다음에 시중을 들었다. 이런 부분이 나오죠.

그래서 그 부분을 가지고 이렇게 기도를 하고 있는데 때가 언제쯤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냥 그럼 점심을 드셨을 거 같고, 그냥 오후 한 서너시쯤 됐겠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예요. 자, 그럼 오후 서너시쯤 됐는데 그럼 베드로 장모가 일어나서 예수님 일행에게

중을 들었다 이랬는데 무슨 시중을 들었지? 하고 생각을 하니까? 한 서너시 하는 요 시간

개념하고 수도자들한테 잘 물려 들어오는 게 간식 시간,이게 떡 이렇게 물려 들어온 거죠.

 

그래서 그냥 간식 생각이 떠오르고 뭔가 이렇게 좀 요기나 하실 수 있도록 간식을 챙겨 드

린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간식을 챙겨 드리는데 무슨 간

식을 챙겨드렸지? 하니까 또 자기가 살아오면서 익어 있던 어던 관습, 문화 즉, 감자 삶아

먹고, 옥수수, 강냉이 삶아 먹은 거. 그래서 베드로 장모도 옥수수하고 감자를 삶아가지고

예수님한테 떡 갖다 드리는 생각이 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래 보니까 아니나 다르까? 장모가 가져와 가지고는 "아, 예수님, 이것 좀 드시고

하시라고. 그러자 예수님이 환하게 웃으시면서 사람들한테 "야, 우리 배도 고픈데 이것 좀

먹고 다시 치료를 하든가 하자." 그러지죠.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이 옥수수를 이렇게 잡고

드시는데 그때도 이 수녀님이 가만히 보고 있는데 마치 예수님이 자기 쪽으로 얼굴을 돌려

서 이렇게 보는 것처럼 예수님이 얼굴을 돌려서 보는 것처럼 이렇게 예수님 얼굴이 크로즈

업 돼서 확 돌아나왔다고 그러죠.

 

그런데 이제 그때 예수님이 자기를 보고 이렇게 환하게 웃으신다는 것. 환하게 웃으시는데

거기에 흰 이빨이 크로즈업 돼가 들어오는데 이빨 사이에 우리 옥수수 먹으면은 옥수수 그

끼는 거 ^^*~~~ 강냉이가 막 그렇게 끼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수녀님이 꼴보기 싫어가

지고 예수님 얼굴을 확 밀어버렸다고 ^^*~~~

 

그런데도 마치 용수철이 도로 튕기듯이 다시 확 돌아서면서 환하게 웃고 이빨이 크로즈업

되고 역시 강냉이가 팍 끼어있는. 그걸 이렇게 다시 탁 밀쳤는데 또 그 이미지가 탁 떠오르

는 것을 보고는. 이게 도대체 뭐지? 하고 생각을 하신 거예요. 그러면서 탁 보고 있는데 수

녀님 가슴을 탁 치고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고 그러죠.

 

그러니까 이 수녀님은 그냥 자기들 동기 중에서 군기 반장이라는 별명이 있는 거예요. 너무

나 빈틈 없이 아주 반듯하게 수도생활을 하는데 오히려 그런 사람들한테는 예수님으로부터

뭔가 좀 이렇게 나사가 빠진 듯한, 뭔가 모자란는 듯한 이런 이미지들을 탁 보여줘야 그것

에 의해서 보완이 되어야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잘 살아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예수님의 그 이미지가 수녀님한테 충격적으로 들어오고, 자기 삶에서 어느 정도

균형을 잡아야 되겠다 하는 생각들이 저절도 들어오면서 변화가 일어나는.

 

어떤 수녀님은 또 그러죠. 이건 제가 직접 면담을 안 해 놓으니까 그냥 들은 이야기인데

성모님께서 수태고지를 받으셨는데, 면담 들어와서 그러셨다고 그러죠. 수태고지 받으셨

을 때 뭐하고 계셨는지 아세요? 이러면서 신부한테 물었다고 그러죠. 그래서 신부가 알

턱이 있나? "모르겠는데요." 그러자 이 수녀님 이야기가 "아, 성모님 그때 묵주기도 하고

계셨어요." 그런다 하는 거예요.

 

이게 뭐 이론상이라고 그럴까? 신학까지 들먹일 것도 없지마는 말이 안 되죠. 성모님 계셨

을 때 무슨 묵주기도가 있었겠어요. 그런데 또 이분은 이렇게 기도가 진행된 거예요. 가브

리엘 천사가 왔을 때 성모님은 어디 계셨는지 하니까. 그냥 자기 방에 계셨겠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이제 또 지나가죠. 자, 그럼 성모님 방은 크기가 얼마만 하지? 이러니까 자기가 만날

수녀원에서 생활하는 자기방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저 침대 하나, 옷장 하나, 책상 조그마

한 것 하나. 고걸로 꽉 찬 조그마한 방. 그래서 성모님 방도 그랬겠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뭘하고 계셨지? 이러니까 그냥 침대에 걸터 앉아 계신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러죠. 그래서 그럼 침대에 앉아 계시는데 침대에서 뭐하시나? 하는데 성모님

손이 탁 크로즈업 되면서 보인 겁니다. 그런데 그 손에 묵주가 탁 지어져 있는 거. 그냥 그

걸 딱 보는 순간, 이 수녀님은 한 대 맞은 것 같은 그런 충격.

 

그게 뭔 소리인고 하니까? 내가 지금 수도생활을 20년도 넘게 하고 있는데 얼마나 내가 기

도를 한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성모님의 그 이미지를 보는 순간 그냥 가슴을 툭치고 들어

왔다고 그러는 거예요. 늘 일에 쫓겨서 일, 일, 일 하면서 기도를 안 하고 있는 자기 모습을

탁 그 모습을 통해서 보게 된 것. 그 거울을 통해서 자기의 현재 모습을 보고 아, 기도와 일

을 균형을 잡아야 되겠다 하는 이 변화가 탁 일어난 것.

 

그런데 이게 복음 관상기도하고 묵상기도 하고 참 다른 게. 좀 전에 그 수녀님이 기도와 일

을 균형을 잡아야 된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죠. 여러분들도 어떤 면에서는 일에, 그게 가

사 일이 됐든, 다른 무슨 본당 일이나 직장 일이 됐든 일에 너무 몰두해 있고 기도를 상대적

으로 약하게, 작게 하고 있다는 이런 것들을 묵상기도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죠.

 

요즘 내가 왜 그냥 삶에 별로 활력이 없는가? 왜 축 가라앉아 있는가? 이런 것들을 가지고

기도하다 보니까 아, 기도와 일이 균형이 안 잡혀 있구나. 기도를  너무 안 하고 있구나. 아,

이래서는 안 되는데. 신앙인으로서 영적으로 제대로 성숙할려면은 기도를 더 해야 되는데.

좋아! 이번 피정 끝나고 가면은 기도를 좀 더 열심히 하자.

 

그런 식으로 결심을 떡 하고 끝내면은 피정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마치 그렇게 자기 삶이 변화되어 나갈 것처럼 생각할 수가 있죠. 그런데 막상 삶으로 돌

와서 보면은 이런 일이 안 일어나는 거예요. 한 며칠 하다가 다시 원상복귀 해 버리고,

뒤집어지고 이러는 거죠.

 

그런데 복음 관상기도에서 이런 것들을 탁 보고 마음의 감동을 탁 받아버리면은 저절로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의지력을 통해서 내가 바꿔야지, 이래 가지고 결심을 통해서

뭔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감동을 받는 가운데 저절도 기도를 할 수 있는 힘,

기도와 삶을 통합시켜 낼 수 있는 힘. 이런 것들이 형성되어 나오는 거죠. 그게 복음 관상

기도의 묘미라고 보는 거예요.

 

# 복음 관상기도에서 얻는 변화와 힘은 의지력이 아닌 '감동'에 의한 것

 

그러면서 여기서 '본다',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생각하면서 보고, 보면서 생각

하고. 다음 주에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겠는데 우리는 여기서 본다. 본다 이러니까 본

것이라고는 지금까지 비디오하고 영화 밖에 본 것이 없어.

 

이러니까 그냥 기도한다다고 눈 감고 딱 앉으면은 마치 비디오 영상이 펼쳐지는 것처럼,

영화가 펼쳐지는 것처럼 막 예수님하고 성모님 하고 헤어지는 장면하며, 바람 부는 것

하며, 하늘에서 구름 떠가는 것 하며, 길 따라서 마을을 빠져나가시는 장면하며 그게 그냥

쭉 동영상이 펼쳐지는 것처럼. 그래서 그것을 볼려고 덤비면은 평생 가도 기도 못 한다

하는 거예요.

 

# 복음 관상기도에서 '본다'는 것은 시각적인 영상을 보려는 것이 아니다

 

로또 복권이나 당첨될 정도의 운이 좋으면은 그런 영상이 보일지는 모르지마는 그런 식으

로 보이는 것이 아니고, 행간을 메꾸면서 생각들을 하는 거예요. 적절한 질문들을 던지고

그 질문에 따라서 이런 저런 이미지들이 떠오르면은 그것을 우리는 본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꼭 시각을 통해서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 복음 관상기도에서 '본다'는 것은 복음서의 행간을 메우며 생각하는 것

 

꿈속에서는 우리는 시각을 전혀 사용하지 않죠. 그런데 꿈에서도 이미 뭘 다 보죠. 마치

그러는 것처럼 내 존재가, 내 의식이 그냥 보면서 알아듣는 거예요. 그런 보는 것을 이야

기를 하는 것이지 이런 식으로 두 눈 뜨고 쭉 보는 것처럼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생각하다' 하는 것은 묵상할 때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물의 이치를

따져가면서 깊게 깊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적절한 질문들을 떠올리면서 거기에 따른

연상되는 이미지나 느낌들을 쫓아가는 것처럼 뭐 가볍게 생각한다고 그럴까? 떠올리는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그럴까?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 복음 관상기도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적절한 질문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나

       느낌을 따라 가는 것

 

예, 오늘 시간이 됐으니까 복음 관상기도에 대해서는 이 정도하고 다음 주에는 좀 더

복음 관상기도 이어서 한번 더 봤으면 합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항상 이제와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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