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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제19강 복음묵상기도 2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16 조회수1,158 추천수4 반대(0)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 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19강 복음 관상기도 2

 

■ 오늘 이야기 ... 존재 전체로 만나는 사랑

여러분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해요? 그저 머리로만 적당히 생각을 하고 있나

요? 아니면은 직접 만나서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고 그러는 가운데 즉, 여러분들의 존재

전체로서 그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면서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 복음 관상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과의 관계도 그런 식으로 깊혀 나가는 것이라고  보여지죠. 이 점 우

알아들었으면 합니다.

 

■ 시작 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지난 주에 이어서 복음 관상기도에 대해서 더욱 더 깊게 알아가고자

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열두 사도들께서 당신 주위를 맴돌고 함께 걸어가는 가운데 당신

을 알고 당신으로부터 생명을 얻어 갔던 것처럼 저희들도 이 기도를 통해서 당신을 더 깊이

알고 당신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몸에 익혀서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모쪼록 저희

들의 이성 뿐만이 아니고 감성까지, 의지까지 동원해서 모든 존재 전체로서 당신을 기도 중

에 만나볼 수 있는 그 방법을, 길을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통해서 저희들이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되찾아 가는데 도움이 되고, 힘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

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12사도단들의 예수님 체험
    - 신앙의 핵은 교리적 지식이 아니다
    -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은 적이 많았다

2. '보고'(觀) '생각한다'(想)는 의미
    - 잊어 버린 혹은 잠재되어 있는 기억들을 회상해 냄
    - 인간 존재 특히 영적 차원의 존재에 대한 더 깊은 인식을 구함 :

                 우리는 영적차원에서 훨씬 더 깊고 넓고 높은 것들을 함유하고 있다

3. 복음관상은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
    - 예수님을 보고 듣고 느끼는 가운데 닮게 되고, 예수님의 감각 특히 식별력을

                      몸에 붙이게 됨

4. 복음관상에서 구체적으로 주의해야 할 점들
    - 심리차원의 역할극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된다
    - 예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 강 건너 불구경 아니다
    - 기도에 강약과 리듬이 있어야 한다 : 저자 구경을 상기하라
    - 생각지도 않은 한 생각이나 느낌 혹은 이미지들의 의미가 즉각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때는 깊게 머물며 그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 : 내면 움직임들에 대한 옥석 구별 능력

       이 필요하다

5. 복음관상기도는 감동을 통한 존재의 변화들이 일어나는 기도다
    - 마니피캇의 원리

 

예, 우리 지난 주에 복음 관상기도에 대해서 좀 쭉 봐 왔죠. 오늘도 역시 이어 가지고 복음

관상기도에 대해서 좀 더 봤으면 하는데 좀 전에 시작 기도에서도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이 열두 사도들께서 예수님과 함께 이 삶을 같이 하면서, 같이 먹고, 자고 함께 움직이면서

예수님을 알아갔었죠. 우리 한테 지금 전수되어 있는 기독교 신앙, 하느님 내지는 예수 그

리스도에 대한 신앙 하는 것도 그저 단순한 교리적인 지식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내려오는

것은 아니죠.

 

# 신앙의 핵심은 교리적인 지식이 아니다

 

핵심은 특히 열두 사도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 가지고 사도단이 형성이 됐었는데 이 열두

사도들이 늘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보고, 느끼고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으로부터 무언가 우리 인간 존재하고는 다르구나 하는 것을 온 몸으로 알아

들었던 거예요. 그러면서 그 존재의 신비, 예수님 당신 자신을 통해서 드러내 보여주시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신비, 나아가서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신비 이것을 몸으로 체득

했던 거예요.

 

그 맛이라고 그럴까? 그 깊이라고 그럴까? 그 존재의 무거움, 신비 이런 것들이 제자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고 너무나 놀라운 체험들이었던 거죠. 그러면서 그 신앙을 내가 예수님을

만나서 이런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런 식으로 내가 바뀌었고, 내 삶이 변화되었다. 이런 체험

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하는 것.

 

#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서 삶으로 체득한 것들이 신앙으로 전파

 

이게 우리 신앙이죠. 그러며서 이제 초대교회의 그 제자들을 거쳐서, 교부시대를 거쳐서,

중세를 거치고, 근세를 거치고, 지금까지 그 제자들이 체험했던 신앙의 정수, 핵 하는 것이

쭈욱 전승되어 내려 오는 것. 그렇게 이제 내려오는 가운데 여러 가지 엉뚱한 주장들이 나

오고, 이설들이 나오고, 본래 예수님의 가르침 하고는 동떨어진 것 아닌가? 이런 지적들이

나오면서 그런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한 신학적인 논쟁들도 일어나고 이랬지마는 근본적으

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그 체험의 내용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이게 생명으로 살아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학교를 다니면서 수업

시간에 이런 저런 공부들을 하죠. 그래서 머리로 그렇게 지식 차원에서 알아들은 그런 것

하고 내가 무슨 봉사활동을 갔다든지, 아니면은 어떤 영적 체험하는 곳으로 가 봤다든지,

거기에서 내 몸으로 직접 부대끼면서 알아들었던 그런 앎하고는 이게 참 차이가 있죠.

 

# 머리만이 아닌 몸으로 알아드는 앎

 

그래서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체험했던 그 체험을 오늘날 이 자리에서 ?우리도 되

새겨낼 필요가 있겠다. 되살려낼 필요가 있겠다. 제자들이 체험했던 그 생명의 기운을 우리

도 살아낼 필요가 있겠다. 그 기도의 방법으로서, 복음 관상기도하는 것이 나오는 거예요.

 

# 제자들의 체험을 되살리기 위한 복음 관상기도

 

지난 주에 잠시 말씀드렸지마는 복음 관상기도에서 기도하는 방법은, 관상이라는 그 글자

자체에 들어가 있다 그랬죠. 보고, 생각한다. 생각하고 본다. 보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보는 것. 이게 복음 관상기도다. 이거는 말 바꿔하면은 열두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제자

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알아갔던 그 체험하고 똑같은 거예요.

 

#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알아간 체험과 같은 기도

 

예수님의 제자들, 열두 사도들도 그랬죠. 때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게 저게 무슨 소리인

지? 특별히 우리 복음서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 보면은 수난에 대한 예고 같은 거를 하시면

은 저게 뭔 소리인가 해서 못 알아듣기도 하죠. 또 어떤 때는 어떤 말씀을 하시거나 사람들

에게 이런 저런 행동을 취하시는 거를 보면서 아주 감동을 받고 놀라기도 하고 그러죠.

 

제자들이 예수님 쫓아다니면서 알아듣지 못했던 것은 몇날 며칠이고 곰곰히 성찰하고, 머

무르고 그랬던 것 아닌가?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 당신의 그 깊은 말씀의 의미, 행동의 의미

들을 알아듣게 되고 거기에서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고 이랬던 것 아닌가? 우리가 복음

관상기도 하고 있는 것도 꼭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거예요.

 

복음 관상기도를 하고 있는데 어떤 때는 예수님의 그 말씀의 의미라든지, 그 장면의 분위기

라든지, 예수님에 대항해서 이야기하는 어떤 바리사이파나 이런 사람들의 기분이라든지, 이

런 게 쉽게 이해가 되고 그런 것들이 뭔가 내 마음을 건드리면서 다가오는 경우가 있는가 하

면은, 어떤 때는 장면을 봐도 그냥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고, 그 장면이 던져주는 의미 같은

게 다가오지도 않고 그럴 경우도 왕왕 있죠. 그러면은 잘못 알아듣고, 다가오지 않고 하는

그런 복음 장면 같으면은 몇날 며칠이고 반복 기도해 가는 가운데 그러면서 조금씩 알아듣

되고, 그러면서 예수님께 좀 더 다가가데 되고 그러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이 복음 관상기도를 마치 제자들이, 생각을 해 보세요. 제자단들이 그 당시에

예수님 주위를 다니면서 그저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 하시는지 여러분들처럼 노트 펴놓고 하,

열심히 적을려고 하고, 그다음에 예수님이 뭐 뭐라고 하시는지, 무슨 행동을 하시는지, 예수

님 표정이 어떻는지 이런 것은 그냥 도외시하고 그 어떤 가르침의 내용이나 열심히 익힐려고

하고 그랬던 것 아니죠. 그런 거는 훨씬 후대에 부차적인 문제로 있었던 거예요.

 

그때는 예수님 당신과 함께 삶을 같이 하는 것, 살아가는 것. 그거 자체가 문제였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뭔 이야기를 하시면은 그냥 그대로 막 보는 거예요. 표정이 어떻는지, 음색

이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가난한 여인을 만나면은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하시는지, 손을 어떻게 잡아주는지, 그냥 계속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고, 분위

기를 파악하고. 우리가 보통 살아가는 것도 그렇죠.

 

여러분들이 집에서도 애들이 학교 갔다 오거나, 남편이 퇴근해 가지고 집에 오거나 이러면

은 그저 정보 차원에서 뭘 막 들을려고 하는 것 아니죠. 학교 어땠느냐고 그냥 말만 던져

고 자기는 자기 일 실컷 하면서 애가 말을 하면은 그런 거 정보나 듣고 이러는 것이 아니고

애 얼굴을 보면서 표정이 어떻는지, 기운이 어떻는지 그런 것 보면서 이야기하고, 풀어나가

고, 함께 살아가는 것. 꽆보기 싫은 사람일 때는 눈 딱 감아버리죠. 그리고 귀만 탁 열어 놓지.

 

연애할 때 그러잖아요. 데이트 한다고 커피숍에 떡 앉았는데 눈 딱 감고 앉아 가지고 그 사

람이 하는 이야기만 듣고 있는 그런 사람, 그런 데이트가 어디 있어요. 눈이 뚫어지게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다 보고, 미세한 표정의 변화까지 다 잡아내고, 이러는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성장해 나가는 것 아닌가? 예수님과의 관계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예수님과 기도할 때는 복음 관상기도를 한다. 복음 관상기도를 하면서 주변의 상황이

어떻는지 이런 것들을 좀 살펴봐라. 등장 인물들은 어떻는지, 예수님 표정은 어떻는지 이런

식으로 쭉 보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제 이렇게 이야기를 할 때 우리가 지난 주에 이 복음 관

상하면서 '보면서 생각한다' 보다와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했는데

 

예를 들면은 구경아는 이야기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죠.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면은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지 모르겠어요. 집에서 이사를 갈려고, 아파트를 새로 하나 구입을 해서 갈려

고 마음을 먹었죠. 그래서 모델 하우스를 떡 보러 갔던 거예요. 그래서 현대 아파트 모델 하

우스 35평짜리 가서 모델 하우스를 딱 구경을 하고는 집에 돌아온 거예요. 집에 와 가지고

오후에 집안 일 대충 좀 하고 나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가만 있어라. 그 아파트 구조가 어

땠더라? 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배란다는 어떻게 돼 있었지? 큰 방 안에 욕실은 있었나? 싱크대는 무슨 붙박이장이 어떻게

있었나? 작은 방 위치는 어땠지? 이런 것들을 생각을 하죠. 큰 방은 어땠고, 배란다는 어떻

고, 욕실은 어떻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모델 하우스에 가서 실컷 다 보고 온 거예

요. 그 보고 온 것을 이거는 어땠지? 저거는 어땠지? 이러고 생각한다 하는 것은 봤던 것을

떠올리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따라서  여기에서 야, 베란다가 어땠지? 씽크대가 어땠지? 하고 생각하느 것은 무슨 그것을

깊게 따져가면서 베란다의 구조가 어떻는가? 베란다가 일상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뭔가?

베란다라는 공간이 집 구조 전체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뭔가? 그런 거 깊게 따지고 앉았는

거 아니죠. 베란다가 집에 있어야 하는가? 그 의미는 뭔가? 이런 것들을 막 따지고 있다면

은 그것은 묵상이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지금 여기서는 그게 아니고 어땠지? 어땠지?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머리 속에서 자기가 보고 왔던 그 아파트의 모습이 쭉- 그려지고

나타나는 거예요.

 

# 복음 관상기도: 보았던 것을 떠올리는 것

 

보고 있는 가운데 아, 그게 다른 집하고는 뭔가 달리 독특한 구조로 돼 있는. 아, 생활하는

데 아주 편리하고 좋겠다. 그러면서 그게 마음에 들어서 거기에 대해서 좀 이렇게 생각이

머물 수 있죠. 아, 붙박이장 거기에다 우리 집에 특히 필요한 요거 있는데 요걸 거기에다

집어 넣으면 좋겠다라든지, 늘 이런 공간이 아쉬웠는데 그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겠구나

라든지, 그렇게 앞에 그려진 그 그림을 보면서 또 생각을 하는 거죠.

 

# 복음 관상기도: 보고 느끼는 것

 

그런데 그 생각도 물론 어느 정도 생각은 하는 것이지마는 깊이 있는 무슨 구조를 따지고

의미 분석을 하고, 가치를 메기고 이런 생각들 하는 건 아니죠. 그저 보고 좀 느낀다 그럴까

그런 식의 생각들. 이렇게 하는 것이 복음 묵상기도 그러니까 마치 저작거리에서 구경하는

기도하고 비슷하다 하는 거예요.

 

# 복음 관상 기도는 시장 구경과 비슷

 

저작 거리에서 구경할 때 이 재래시장 같은 데에 가보면은 특히 잘 볼 수가 있겠죠. 그저 뭐

철물점도 있고, 어물전도 있고, 옷가게도 있고 뭐 온갖 점포들이 쭈욱 늘어져 있죠. 그냥 할

일 없이 여유롭게 시장 구경을 좀 해야지. 특히 뭐 시골장 같은데 뭐 5일장이 선다 이러면은

더더욱 더 이런 어떤 이미지에 부합할지 모르죠. 그래서 이렇게 다니면서 구경하는 거예요.

 

그저 어물전에서 고기들 이렇게 뭐 수족관에 허우적 거리고 있는 그런 것도 한참 보고, 그러

다 보다가 재미없고 심심하다 싶으면은 그다음 옆집으로 넘어가죠. 옆집에 옷 가게, 옷들

쉐터랑 뭐 잔뜩 걸려 있는 거 이렇게 보면서. 그런데 그렇게 보고 있는데 마침 인디안 핑크

쉐터가 하나 딱 있는데 아, 돌아가신 엄마가 아주 좋아하던 색깔이죠. 그래서 엄마 생각하면

서 그 옷 가게 실컷 좀 보다가 뭐 됐다 싶으면 이제 옆으로 가고.

 

옆으로 갔는데 철물점이죠. 철물점에 또 온갖 것들이 또 많이 있는데 아, 뭐 무 채 써는 기계

인데 희안하게 생긴 게 있죠. 그래서 이게 뭔가 해 가지고 한참 있다가 주인한테 물어보기도

하겠죠. 이게 뭐냐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하, 이렇게 저렇게 하는 거고. 이거 진짜 좋은 거라

고. 뭐  그래 얘기를 하면 그거 이렇게 들으면서 좀 보다가 또 됐다 싶으면 옆으로 가고.

 

저작 거리에서 구경하는데 어물전에서 5분 머문다. 그다음에 옷 가게에서 또 5분 머문다.

그 옆에 철물점에서 5분 머문다. 그리고 나서 5분간의 휴식을 취한다. 그다음에 또 이런

식으로 구경하는 사람 없죠. 그저 발길 닿는대로 지나면서 보고 뭔가 신기한 거나 마음에

다가오는 게 있으면은 머물러서 한참 느끼기도 하고, 생각도 하고 그리고 또 옆에 옮기고

별 재미없다 싶으면은 휘리릭 지나가고. 거기다가 또 머물 때면 깊게 머물고 이런 식으로

구경하지 않느냐? 복음 관상기도도 역시 마찬가지인 거예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을 떠나서 요르단 강에 가서 세례를 받으셨다. 세례 받고

올라오시니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오시면서 이런 이야기가 들렸다. 이런 이야

기도 그 장소의 전개 과정들이 있죠. 처음에  나자렛 지방 떠나는 것. 성모님과 헤어지고

본 고향, 본가를 떠나시는 거예요. 그 장소. 그다음에 쭉 이어지면서 여행을 하시죠. 요르단

강까지. 그 여행하는 장소, 그다음에 이제 요르단 강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고 세례를

받으시고. 이런 장소의 전개 순서에 따라 처음에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성모님과 헤어지고 이러는데 별 흥미를 못  끌고 그냥 휙 지나갈 수 있죠. 그러

고 나서 여행하는 길에 어떤 사람은 깊게 머물 수가 있겠죠. 뭐 이렇게 끼니 때가 되서 식사

하시는 장면이라든지, 해가 떨어지자 잠자리를 찾아서 막 가시는 모습이라든지, 집 없어 가

지고 맨날 셋방살이에 전전하는 그런 사람이라면은 잠은 어디서 주무시지? 이런 데 관심이

비등하게 갈 수가 있겠죠.

 

얼마 전에 앙드레 김 돌아가셨죠. 그죠? 앙드레 김, 좋아하는 분 중에 한 분인데. 어쨌거나

뭐 앙드레 김이 만약에 예수님의 이 장면, 요르단 강에 가 세례 받으셨다는 이 장면을 가지

고 복음 관상을 한다고 치자. 어떤 질문을 던질까? 의상에 아주 관심이 많을 것 아닌가? 그

러면은 몸하고 떠난 의상 생각하기 힘들겠죠.

 

예수님이 키가 크셨나?  체격이 크셨나? 작으셨나? 마른 편이었나? 뚱뚱한 편이었나? 그런

거 막 떠올리겠죠. 그리고 또 예수님 입고 계시는 옷이 뭐지? 어떤 디자인으로 만들었지?

옷감 재질은 뭐지 제가 기도를 하면 저는 그런데는 거의 관심이 없겠죠. 그냥 뭐 벌거벗은

몸이 아니고 그냥 옷 입고 계신다. 그냥 옷 입고 계시면 됐지 그걸 뭐 감이 어떻고, 디자인이

어떻고. 이거는 난 관심 밖이죠. 여러분들 각자도 그런 행간을 메꾸면서 기도한다 이랬죠.

 

# 복음서의 행간을 메우는 질문을 떠올리는 기도

 

생각한다 하는 것이, 이 생략되어 있는 부분, 성경에 묘사되지 않은 이 행간을 메꾸는 이

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들을, 질문들을 던지면서 보는데 이것이 각 사람에 따라 다른

이다 하는 거예요.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 거기에 따라서 다른 질문들을 던지면서 진행이 될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이제 이런 식으로 복음 관상기도를 이렇게 하다 보면은, 이 피정

지도를 하면서 기도한 내용들을 들어 볼  때, 복음 관상을 빙자한 묵상기도를 하는 경우를

왕왕 보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묵상기도 하는 것 하고, 복음 관상

기도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 복음 관상기도와 묵상기도의 차이

 

기도하는 방법은 어떻게 다르고, 맛은 어떻게 다른지. 이것은 몸으로 익힐 필요가 있다 싶어

요. 그래서 이거는 뭔 글로 이렇게 몇 줄 적어 놓으면은 참고는 되겠지마는 그래 가지고 익히

기에는 좀 힘들겠고 여러분들이 직접 기도한 내용을 가지고 그다음에 분별해 줄 수 있는 사

람한테 이야기를 하고 내가 이런 식으로 기도했거든요. 이러면은 들으면서 아, 이런 부분은

묵상이라고, 이런 부분이 관상이라고 이런 식으로 좀 정리를 해 주면은 그거를 들으면서 자

기 기도 내용을 점검하고 그러는 가운데 기도에 대한 감각들을 익혀 나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싶거든요.

 

그래서 이 기도에 대해서 뭔가 예를 한번 들어 볼까 싶은데 여러분 중에 자기가 기도한 내용

이것을, 체험을 이렇게 적어서 보내 주신 분이 있어요. 그래서 몇 분 계시는데 그 중에 두 분

만 제가 좀 택해 가지고 여러분들한테 좀 나누어 주면은 도움이 되겠다 싶거든요.

 

■ 복음 관상기도 체험 나눔

 

그런데 이상하게 묘하게 두 분 다 루카복음 2장 1절부터 7절까지 가지고 기도하신 거예요.

예수님 탄생하시는 장면. 어떻게 담합을 하신건지.^^*~~ 하여튼. 그런데 오히려 잘 됐죠.

똑같은 걸 가지고 각자 어떻게 다르게 기도했는가? 이런 걸 볼 수가 있으니까. 한 분 기도

한 내용은 이래요.

 

예수님 탄생을 관상해 보았습니다. 이래 놓고. 나자렛에서 베들레헴으로 떠날 채비를 하시

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흔들림 없는 차분함, 조용함에 마음이 머물게 됩니다. 정말 조용한

움직임이었습니다. 마굿간의 출산. 인간적 도움이나 인위적 작용이 개입되지 않는 극히 자연

적 원리에서 육화되시는 로고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포대기로 감싸 안으신 성모님. 형언할

수 없는 영적 발광채이신 하느님을 포대기로 감싸 안으심으로 모든 것이 충만히 채어지신

성모님과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충실히 봉사하시는 요셉 성인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앞뒤는 생략하고. 기도 내용에 대한 핵심은 이거예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기도를 딱 하고

어보면은 어떤 느낌이 들지 모르겠지마는 제가 볼 때는 이거는 크게 업어줄 만한 기도는

니다 싶은 거예요. 기도가 다소 묵상적으로 많이 흐르고 있는, 복음 관상을 했다기 보다는

상적으로 많이 흐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은 의미나 표현들은 많이 하고 있는데 신선미,

동을 주는 마음 이런 것들이 약하다.

 

어떤 데서 그런 게 느껴지느냐 하면은 이런 것. 형언할 수 없는 영적 발광체이신 하느님을

포대기로 감싸 안는다. 이런 표현이라든지. 그다음에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충실히 봉사하

는 요셉 성인의 아름다움. 이런 게 좀 뭐라고 그러나 천편일률적인 기도, 그저 이렇게 뭐라

그러나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교리적 지식 차원에서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그

내용들.

 

예, 그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충실히 봉사하시는 요셉 성인 이런다 해 가지고 내한테 이게

감동적으로 다가올까? 그러면서 내 존재의 변화가 일어날까? 그래서 이런 거는 물론 기도

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은 틀렸다든지, 잘못되었다든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성질은 전혀 아니죠. 다르고, 옳고, 좋은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혼을 건드리

고 존재를 변화시키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점에 있어서는 힘이 너무 많이 떨어지는

거예요.

 

# 교리 지식 차원의 묵상은 존재를 변화시키고 감동을 일으키는 힘이 부족

 

그래서 이런 것들은 그저 지나가는 생각으로 흘러보내 버려야 되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적어도 저한테 이렇게 적어보냈다는 거는 여러분들 식으로 하면은 기도 성찰 노트에 기도

하고 나서 이렇게 정리를 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기도 성찰을 할 때 벌써 이런

내용들은 성찰 노트에 전부 빠져버려야 된다 하는 거예요. 이런 내용을 떡 적어 놓고 나중

에 기도 성찰 노트를 턱 보고 있으면은 마치 내가 기도가 깊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 양 이

런 식으로 착각할 위험들이 있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어떤 분별력, 영적 감각, 기도가 지금 도대체 이 기도가 내 존재의 어느 차원

서 일어나고 있는가? 영적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지성적, 이성적 차원에서 일어나

있는가? 이런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이 대단히 중요한대, 이런 기도는 영적 차원에서 지

금 기도가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보기 힘들죠.

 

그리고 요 앞에 이거는 좀 만약에 피정 중에 들어와서 면담을 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은 좀 더 몇 다디를 꼬치꼬치 물어봐야 되겠다 싶어요. 앞에 이야기 하던 것. 베들레헴으로

떠날 채비를 하시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흔들림 없는 차분함, 조용함. 정말 조용한 움직

임이었습니다 하는 거거든요. 이것도 이래 좀 의심스럽기는 해요.

 

그저 요셉 성인은, 성모님은 상황이 어떤 어려움이 생기고 난장판이 있어도 흔들림이 없이

차분하고, 고요하고,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찾고. 무슨 소리인지 알겠죠? 뭔가 이렇게 미

적으로 너무 이렇게 극대화시키고 자칫 잘못하면은 우상화시켜 버릴 이런 위험들이 있죠.

 

그런데 그런 위험 요소도 보이지마는 진짜 내 마음을 건드리면서 그 조용한 움직임이 정말

내 마음에 이렇게 깊게 울림으로 들어왔는지 이거는 짚어야 되죠. 그래 그거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요 글만 가지고는 잘 모르고 이제 면담 들어와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손 치더라

도 들으면서 몇 마디 더 물어봐야 되죠. 그래서 주변 상황들을 알아듣는 가운데 아, 지금

이런 앎이 어느 깊이에서 일어났는가? 짚게 되는 것. 그리고 만약에 또 이게 깊은 울림으로

왔다 이러면은 늘 그저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곤란한 거예요.

 

# 복음 관상기도를 할 때 보는 것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복음 관상기도를 한다 해 가지고 그저 예수님 모습을 보고 즐기는 것. 아, 예수님 이러시네.

저러시네. 아, 좋네. 이러면 뭔가 2% 부족하다 싶은 거예요. 거기에 덧붙여서 그게 내 존재

를 건드리는 데까지 연결되는 것. 요셉 성인이나 성모님의  이 정말 조용한 움직임을 봤다

면은 이것이 내한테 어떤 식으로 다가왔고, 내 존재의 어떤 울림이 있었는가?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 복음 관상기도에서 본 것이 내 존재의 울림과 삶의 변화로 이어지도록

 

아주 부산스러운 내 요즘의 움직임이라든지 아니면 내 평소의 성격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짚으면서 이런 조용한 움직임이 감동으로 들어오고, 나를 건드리게 되는 이런 작업까지

일어나져야 기도가 더 깊이 열매가 있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죠.

 

그다음에 한 술 더 뜨는 거는 중간쯤에 보면은, 인간적 도움이나 인위적 작용이 개입되지

않은 극히 자연적 원리에서 육화되시는 로고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거는, 이거는 진짜

머리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죠. 무슨 이런 장면들을 보고 하는데 너무 좀 추상적이고, 신

학적이고, 개념적인 이런 식으로 정리하는 것보다는 그냥 우리가 사람을 알아가는데 있

어서도 어떤 한 사람을 떡 만나가지고 당신 인생관이 뭔데요?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데

요? 자연에 대해서는 어떻게 봐요? 하느님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데요?

 

이런 것들을 일일이 물어 가지고 아,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알아들을 수도 있

죠. 그런데 어떤 때는, 어떤 때라기 보다는 그냥 이렇게 첫 대면에 탁 보면은 그냥 그 사

람 전체에서 오는 분위기, 헤어스타일, 장신구 하나 탁 꼽고 있는 그 모습, 옷차림, 앉아

있을 때 앉음새, 뭐 말을 건넬 때 말 한마디 툭 나오는 모습. 그 사람의 극히 일부분이기

도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부분이 그 사람 전체의 핵을 탁 찌르는, 그 사람의 사

람됨하고 바로 연결되는 이런 모습을 우리는 곧잘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복음 관상기도 할 때는 그런 거라고  보는 거예요. 무슨 그래서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

로 내려오시면서 이런 말씀이 들렸다 하는 이런 것도 그 말마디가 뭔가? 이는 내 사랑하

는 아들이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뭔가? 아들은 뭔가? 이런 걸 막 생각하고 있는 것 보

다는, 물 속에 잠기셨다가 쑥 올라오실 때, 그때 예수님의 표정, 제스쳐 이런 걸 탁 보면

서 뭔가 포착이 되고, 감동이 되고, 우리를 건드리는 이런 것들이 훨씬 중요하다. 복음

관상기도는 그런 쪽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하는 거죠. 그다음에 또 다른 한 분.

 

■ 복음 관상기도 체험 나눔

 

내나 같은 복음을 가지고 기도를 하셨는데 ?조금 긴대 이래 돼 있어요.

저는 기도 속에서 외양간의 외부와 내부를 그려봤습니다. 호적 등록을 하러 베들레헴으

로 모인 사람들이 분주하게 머물 곳을 찾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미 머물 곳을 찾은 사람

들은 이곳 저곳을 오가며 시끄럽게 떠들다가 여관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머물 방이 없다는 여관 주인에게 마굿간이라도 빌려달라고 청하는 요셉 성인의 간절함

과 함께 여관 주인 또한 만삭의 여인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성이다가 결국 마구

간으로 안내를 하고 만삭의 여인을 조금이라도 편한 곳으로 안내하려고 분주합니다.

그러던 중 마리아는 태기를 느끼며 산통을 겪게 됩니다.

 

마구간에는 암소 한 마리와  숫소 한 마리, 송아지 세 마리가 있었으며, 마리아의 태기를

알기라도 한 듯 되새김질까지 멈추고 긴장한 눈빛으로 분주한 상황들을 숨죽이고 바라보

고 있습니다. 산통을 느끼는 산모를 도우어 여관 주인은 필요한 물건들을 열심히 나르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산모가 조금이라도 힘들지 않게 하려는 마음으로 이 모든 것들을

돕고 있으나 마음으로는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마구간의 소뿐만 아니라 기둥과 벽마저도 긴장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별들은 마구간을

향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이 모든 상황들을 긴장하고 바라보다 열대여섯 밖

에 안 되는 마리아는 어떤 모습으로 산통을 느끼고 있을까 생각하며 마리아를 보면서

바로 이것이야!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려운 공부를 하고 있는 아들과 진로에 대한 중요한 시기에 있는 딸의 문제를 제가 부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 하면서도 집안에 어지러운 일들을 모두

하느님께 맡기지 않고 전전긍긍하는 제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마리아가 있었기에 우리에게 구세주가 오실 수 있었던 것을? 깨달으며 지금 이 순

간부터라도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를 연습을 하려 합니다.

 

좀 길죠. 긴대. 참 소설 쓴 이야기 많죠. 그런데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런 식으로 소설을

써 나가는 거죠. 노트에 적을 때는 이런 소설 쓴 이야기들은 쭉 빼고, 깊게 와 닿았던 것,

새로운 생각,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느낌 그리고 그것이 내게 감동을 주었을 때. 고것만

딱 따서 적으면 되겠죠.

 

그러니까 앞에 뭐 외양간의 내부, 외부, 뭐 사람들 왔다 갔다 떠들고 이런 부분 이거 전

부 소설 쓴 이야기죠. 그래 제가 커디션이 안 좋으면은 면담 들어와서 이러고 있으면은

찬물을 한 바가지 확 끼얹죠. ^^*~~ 그런데 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그 다음 부분인

거예요. 이것도 조금은 이렇게 더 자세하게 어떤 것을 느꼈느냐? 그때 느낌이 어땠느냐?

뭐 몇 가지 더 물어봐야 좀 더 정확한 진단은 나오겠다  싶은데, 대단히 의심스러운 눈

초리로 보게 되죠.

 

저 같으면은 여기 이런 거. 이 뭐 암소, 숫소, 송아지 이렇게 세 마리가. 그러고 보니까 엄마

아빠, 새끼 세 마리 다정하게 있는 거는 좋은데, 무슨 마리아의 태기를 알기라도 하듯 되새

김질까지 멈추고 긴장한 큰 눈으로 분주한 상황을 본다. 이런 부분들. 이게. 예, 그냥 자기

자신의 어떤 심리 상태나 영적 상태 이런 게 많이 투사되어 있거나 아니면은 좀 아까도 얼

핏 저쪽에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뭔가 좀 미화시키고 극대화시키려고 하는.

 

그러니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탄생하시는 이 순간인데 모든 천사가 그냥 동작 그만

이래 가지고 정지 상태에 들어가고. 그 고요와 침묵과 신비 속에서 아주 놀라운 모습으로

탄생되어 나오고, 뭐 혹시 이런 끼로 흐르고 있는 것 아닌가? 이게 좀 의심스럽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짚으면서 물어야 된다 싶은 거죠.

 

거기다가 한 술 더 뜨는 거는 마구간의 소뿐만 아니라 기둥과 벽까지도 긴장하고 하늘의

별들은 또 마구간을 향해 빛을 발하고 있고. 이거 좀 그렇죠. 그런데 이제 이것도 역시 그

분에 따라서는 진짜 이런 것들이 마음 깊은 데서 어떤 긴장감 같은 것이 느껴졌을 수가 있

죠. 그렇다면은 그런 긴장들이 어디서 오는 건지 그걸 통해서 자기 자신의 모습과는 어떻

게 연결이 되었는지. 이런 거는 정밀 검사를 하면서 좀 따져봐야 되죠.

 

그런데 좋은 거는 끝에서 한 장면 오죠. 성모님이 이래 애를 낳는데 도대체 이 젊은 아가씨

가 애를 낳는데 산통은 어떻게 겪고 있는가? 유경험자로서 나도 한번 보자. 이래가 탁 봤죠.

봤는데 자기 체험은 우리 보통 드라마에서 보듯이 산모들 애기 낳을 때는 막 고함지르고

난리죠. 대충 그런 인식 속에서 턱 봤을 건대 영 엉뚱하게 드러나는 모습이 너무도 편안한

얼굴로 하느님께 맡기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그런데 이것도 과장해 가지고, 성모님은 산통도 안 겪고 그냥 아주 수월하게 아기를 싹 낳

았을 거야. 그런 식으로 신비화시켜버리고 있다면은 이거는 문제죠. 산통을 안 겪으실리가

없죠. 그런데 그래서 그런 식의 신비화인지, 아닌지 그것도 좀 따져볼 필요가 있겠는데,

 

런데 고 뒤에 이어져 오는 거. 자기가 지금 집안 문제로 어떻게 막 갈등을 겪고 있는가?

그걸 쥐고 앉아가지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성모님은 그런 어떤 내용은 다를지 모르지마

는 고통과 어려움속에 계시지마는 아주 맡겨 드리고 편안하게 있는 그 모습을 탁 보는 순

간 자기가 지금 삶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이 모습이 그대로 눈에 확 들어온 것.

 

복음 관상기도에서 일어나는 묘미랄까? 기도의 맛들이 이런 차원에서들 좀 일어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지금 이런 게 적잖은 사람들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의 기도들이

진행될 가능성들이 아주 많은 거예요.

 

# 복음 관상기도가 지식이나 심리 차원이 아닌, 영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도록

 

그래서 우리가 여러분들도 스스로 이렇게 기도를 해 가면서 어디에다가 포인트를 두면서

식별을 해야 되는지 이런 것들을 좀 익혀가는 작업이 필요한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막

그냥 난도질을 하듯이 막 분석을 해댔는데 어느 두 분인지는 이야기는 안 하겠지마는 진짜

삼가 조의와 애도를 표함과 동시에 ^^*~~ 대단히 깊은 감사를 드리는 거죠. 아주 이렇게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신 거예요.

 

그래서 어쨌든 복음 관상기도를 이렇게 하는데 아까 그 열두 사도들 내지는 무슨 아파트

모델 하우스 이런 거 보고 왔다 하는 이런 이야기 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은 예수님과

함께 그러니까 복음 관상기도 한다는 게 마치 예수님이 막 3년 동안 이스라엘 지방을 다니

시면서 계셨던 그곳을 바로 곁에서 게속 우리도 따라다니면서 전부 보고, 느끼고 다 했던

겅요. 이 땅에 이런 모습으로 태어나기 전에.

 

다 알고 있었는데 한 이천 년 지나면서 다 잊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마치 그때 그

기억 아, 그때 예수님 요르단 강으로 가실 때 날씨가 어땠더라? 아, 그때 예수님 막 울고

계셨을 때 표정이 어땠더라? 이러면서 기억을 떠올려 내는 이 작업들이 복음 관상기도에

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 복음 관상기도를 통해 잊고 있던 잠재되어 있던 기억을 회상

 

그래서 우리 존재는, 우리의 영혼은 영적 차원에까지 깊이 내려가면은 여기에는 의식 차원

이  미처 알아듣고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엄청난 보화가, 체험들이 가득 담겨 있는 것 아

닌가? 여기에서 우리는 적절히 그때 그때 끄집어 내면서 살아가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

음 관상기도는 그런 점에서 대단히 유익하고 중요한 기도 형태다.

 

그리고 가끔은 이 사람들에 따라서는 니가 복음 사건의 등장 인물이 되어서 들어가 봐라.

이런 이야기를 곧잘 하는데 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가 풍랑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로 다가가는 그런 사건 있죠. 그걸 가지고 이렇게 기도

할 때 자기가 바로 베드로 사도가 돼 가지고 기도 중에 들어가 보는 거예요.

 

그래서 뭐 막 두려움도 느껴보고, 에수님 앞에 예수님, 예수님이십니까? 그러면 저더러 오

라고 그러십시오. 아, 보나벤뚜라 그래 와라! 그러자 내가 막 씩씩하게 가다가 또 막 빠져들

고. 이거 어떤 면에서는 도움이 되는데 십중팔구 심리차원에서 조작해 낼 가능성이 너무나

많은 거예요.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 심리 차원에서 이런 저런 체험들을 하고 위로도 맛보고

그러겠지마는 그것이 우리 존재의 깊은 데서 올라오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를 변화

시키는 힘이 너무 약하다.

 

# 복음 관상기도가 심리 차원의 역활극이 되지 않도록

 

그러면서 심리 차원에서 들어가서 움직이면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또 예수님한테 마치

리모콘으로 조절하듯이 말씀하시게 해 가지고 내가 듣고, 이런 일들이 막 일어날 위험들이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떡 들어가서 베드로가 돼 가지고는 막 예수님

하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뭔가 예수님이 한 말씀을 하시는데 그 말씀이 나한테 아주 깊게 다가와 가지고 큰

은총을 얻었어요. 그래 가지고 너무 좋아서 딱 이러는데 아, 이놈의 유신부가 막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리죠. "안에 들어가지 마라 그랬잖아!" 하는 그 소리를 듣고 "아,  들어가서는 안 된

다고 했지!" 하고는 탁 빠져 나와 버리면은, 그러고는 그 안에 들어가 있을 때 예수님을 통해

서 혹은 그 사건 중에 내가 큰 위로나 은총을 받았다면은 이거는 100% 신뢰해도 좋은, 성령

께서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그런 은총이니까 좋은 거죠.

 

그런데 내가 일부러 들어가 가지고 베드로 사도가 돼 보고, 뭐 요한 사도가 돼 보고, 죄 많은

여인이 돼 보고 그러면서 대화들을 주거니 받거니 이러면은 조작해 낼 가능성이 너무 많은

거예요. 이런 점에서 기도의 깊이 이런 면에서도 우리는 좀 잘 분별을 해야 된다. 그리고 이

런 복음 관상기도를 통해서 무엇보다 우리가 얻게 되는 좋은 열매는 마니피캇의 원리라도도

이야기 할 수 있겠는데, 성모님께서 마니피캇을 노래하는데 보면은 그러죠.

 

# 복음 관상기도의 열매 - 마니피캇의 원리

 

권세 있는 자는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하면은 끌어올리시고. 부유한 자는 빈손으로 돌려

보내시고, 가난한 이는  배불리 먹이시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살리시는 방법이 그것

같은 거예요. 높으면는 낮추고, 너무 낮으면은 높이고, 너무 남는다 싶으면은 덜어내고, 너

무 모자란다 싶으면 채워 넣고.

 

# 남는 것은 덜고, 모자란 것은 채워주시는 은총

 

복음 관상기도를 할 때 성령께서 뻔덕뻔덕 하면서 생각지도 않은 생각이나 느낌, 이미지들

로 우리를 충족시키고 이끄실 때 보면은 내 모습과 다른 모습을 곧잘 비추시는 거예요.

 

# 내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시는 성령

 

그래서 우리가 너무 빈틈없이 자로 재듯이 탁탁 살아가고 있는 그런 사람이라면은 복음 관

상기도 중에 드러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뭔가 나사가 좀 빠진듯한 이런 모습이 깊게 다가오

는 것. 그러면서 나를 보완하게 되는 것.

 

또 내가 너무 풀려있는 느슨한 생활을 한다 싶으면은 관상 기도 중에 보는 예수님은 좀 더

주도면밀하고 용의주도하신 빈틈 없는 분으로 탁 나타나시고 그걸 보면서 내가 감동을 받

아서 변화가 일어나고, 어쨌거나 우리는 복음 관상기도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전제되지 않으면은 복음 관상기도의 충분한 열매를 얻을 수

가 없다.

 

# 복음 관상기도에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복음 관상기도를 통해서 예수님 움직이시는 모습을 보면은 그저 주

말 연속극 보는 기분 밖에 안 드는 거예요. "와! 멋있네!", "와! 좋네!" 그러고 말아버리죠.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하는 상대방을 고대로 보고 닮고자 하는 열망들이 올라오죠. 그래

야 다른 사람들은 막 놓치고 지나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대로 탁 바라보고, 포착해

내고, 그것과 동화될려고 하는, 하나가 될려고 하는 움직임.

 

이래서 사랑이 깊게 자리 잡고 있을 때 복음 관상기도는 심화되고 기도가 심화되면은 사랑

이 더 자라고. 이런 선순환이 일어나야  되는 것 아닌가? 예, 오늘은 여기까지 했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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