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하느님 체험 신학적 이론에 머물 것인가?
작성자이유희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17 조회수1,672 추천수1 반대(0) 신고

 
하느님체험 신학적 이론에 머물 것인가?


1.제자들의 영적체험

  성경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당황하고 실망하는 제자들의 모습들을 전해준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체험을 통하여 새롭게 거듭난 제자들이 “우리는 예수님을 보았소!” 하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한다.


부활의 증언은 12사도중 하나인 토마스에게 전해진다. 동료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증언을 듣게 된 토마스는 냉소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그러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아야 믿겠다던 토마스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을 고백한다. 

 

2.부활신앙.

  사도들의 공통점은 부활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로부터 전해저오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부활신앙이다. 우리역시 어떠한 상태이든 부활을 체험하는 부활신앙이 되어야 한다.

영적체험을 두려워하거나 외면시하는 교우들의 마음을 토마스 사도와 비교해본다.

아직 주님과의 영적친교가 마음속에 자리 잡지 못하여 머리로만 하는 신앙의 메마름은 안타깝기만 하다.


다시 한 번 토마스 사도의 불신을 안타까워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묵상해 본다.

토마스와 주님의 부활을 함께 기뻐하고 싶지만 부활은 스스로 체험할 수 없는 것, 제자들은 토마스 형제의 부활체험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했으리라 생각된다. 

 

3.영적체험과 변화

  예수님과 함께하며 하늘나라를 공부하고 최후만찬(미사)을 지내며 충분한 지식을 소유한 제자들도 결국 영적인 부활체험을 통하여 담대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의 사람들이 되었다. 제자들은 여러 가지 신앙의 과정들을 거치고 이제는 매순간 체험 없이도 순수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보지 않고 믿는 이는 행복하다!” 하신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지만 제자들 역시 부활체험을 통하여 주님을 알아 보았고 행복하게 되었다. 누구나 그러한 과정을 거친다면 보지 않고 믿는 이는 행복하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4.성장하는 믿음, 신앙은 삶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반복된 체험의 결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신앙의 초보자들에게 주입함이다. 물론 옳은 가르침이지만 신앙도 단계를 거치는 과정이 있음을 폭넓게 체험하고 이해하고 설명되어야한다.


믿음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복적이며 체험적이길 원한다. 그러나 본당 공동체는 영적체험의 중요성을 가르치기보다 위험성을 더 강조한 부분이 있다. 물론 주님께서 베푸시는 영적체험으로 위장한 악마의 간교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성령께 의탁함으로서 하느님의 자비에 더욱 신뢰해야한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구는 꼴이 돼서는 안 된다.


신앙의 초보자들이 기복적인 믿음으로 시작하여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제자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모든 기도의 정점은 주님과의 일치라고 가르치며 주님체험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신앙은 학문이 아니며 현실, 즉 삶인 것이다. 신학은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한 체험적 삶을 객관화한 학문이다.


5.성령에 관한 새로운 각성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톨릭교회는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에 관해서 새롭게 각성하기 시작하였다. 1897년 교황레오13세는 성령에 대한 첫 회칙인 하느님의 직무를 발표하셨는데 성령에 대한 인식과 사랑, 충성과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성령강림 대축일전에 9일 기도를 받치도록 결정하고 선포하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선포하고 개최한 요한 23세 교황은 공의회의 성공을 위해서 “새로운 성령강림으로 우리의 일상을 당신의 경이로움으로 새롭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움을 특별히 간청하였다. 공의회는 성령에 관해 새롭게 각성하면서 그분께 의지해서 교회를 쇄신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공의회를 통해서 성령에 대한 관심이 일깨워지고 증대되는 가운데 성령쇄신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신자들은 기도 중에 성령의 오심을 청하였고 실제로 성령의 은사(카리스마)를 체험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그들은 초대교회에 빈번하였던 예언 ,이상한언어, 치유의 은사까지도 체험하게 되었다. (올바른 성령의 이해 44-45p 발취)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추기경시절에 한 인터뷰에서 성령쇄신 운동이 신자들의 신앙쇄신에 도움이 되는 하느님의 현존체험의 기회를 준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개인적 체험 없는 교의적 믿음 은 공허하다”는 말로써 신앙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바로 성령쇄신운동이 이러한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고 확신한다.

저 자신은(교황님) 개인적으로 이 운동의 효험을 확인하였습니다. (올바른 성령의 이해 52p발취)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증언

1953년 9월21일 성 마태오 축일이었다. “나는 17살이었던 9월 21일 고해성사를 보러 산호세 대플로레스 성당에 들렸던 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처음으로 하느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2013년 제 26회 세계청소년대회 자원봉사자들에게 한 연설 중)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선출이 결정되고 자신이 이것을 수락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시간에 이러한 체험을 했다고 한다. “나의 마음은 완전히 백지상태였고 엄청난 근심이 나를 감쌌습니다. 그러자 엄청난 빛이 나에게 물밀 듯이 밀려왔습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교황 방한 준비위원회 발행 소책자 발취)


저는(프란치스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에 있든 바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예수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 분과 만나려는 마음. 날마다 끊임없이 그 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합니다.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12p발취)


대부분 우리나라 본당 사목은 교황님들의 원의와는 달리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폭넓은 은사(카리스마)와 체험에 열려있지 않고 아직도 성사에만 치중되어있다는 느낌이다. 우리가 숨을 쉬며 숨의 중요성을 망각하거나, 몰속의 물고기들이 물의 중요성을 잊고 있는 듯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본다.


6.영적체험을 추구하는 운동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신 말씀을 체험이 불필요하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필요는 없다. 영적체험을 통하여 자기 쇄신과 사랑이 싹튼다면 그것을 추구해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것은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 즉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 일, 성령운동은 성령을 쇄신하는 운동이 아니라 주님 체험을 통하여 믿는 이들, 곧 나를 쇄신하는 운동이다.


7.개인적 은사체험

  신부님께서 성령의 예언은사를 통하여 “너희에게 오늘 성령을 내려주겠다.”하시며 예언의 말씀을 발설하셨다. 예언의 말씀은 즉시 권능을 나타내었고 나와 많은 이들이 주님을 체험하였다.


말씀의 은사로서 가르침을 할 때는 거룩하고 심오한 진리들을 이해의 은총을 주심으로서 머릿속이 시원할 정도로 쉽게 깨달게 되었다. 내 영혼은 기쁘고 감사함이 넘쳐낫다.


찬양을 부르는 시간 성가를 부르는 자매의 음성을 통하여 주님의 권능이 함께함을 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이 시간 이 장소에 내가 초대되었음을 감사드렸다.


치유의 은사를 통한 소아마비 환자의 치유를 목격하였다. 그는 목발 없이 똑바로 걸었다. 기쁨 가운데 우리 모두 주님을 찬미하였다. 육의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없지만 영안은 주님의 치유하심을 보고 있다. 치유에 대한 간접 체험을 하였다.


구마은사를 사용할 때 부마자에게 예수이름으로 명령하니 악령이 떠나 같다. 소리 지르며 사납던 자매는 평온해 졌다. 예수님의 이름 그 권능을 체험을 하였다.


성령운동에 참여함으로서 영육간의 건강이 날로 좋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영은 맑고 정신은 바르며 몸은 새로운 힘을 얻었다.


모든 은총은 성체성사를 통하여 흘러나오지만,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내리실 때에는 체험적이며 그 은총은 엄청나다. 은사를 통한 여러 체험들은 내게 큰 기쁨이었다. 특히 현존체험은 즉석에서 사람을 바꾸어 놓으셨다.


8.예수님과 치유

  성경은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누군가 침을 뱉고 그것을 진흙으로 개어 눈에 바르며 눈을 뜨게 해준다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나타낼지 궁금하다.


열왕기 하권에는 엘리사가 나아만의 병을 고쳐주는 내용이 나온다. 엘리사는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자 아람군의 장군인 그는 화를 냈다. 그러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는 부하의 말을 듣고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나아만장군은 불평을 하였지만 그렇게 해서 문둥병이 나았다. “일곱 번”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일까? 되 새겨본다.


병원응급실 치료현장이 거룩하고 멋질 수 없듯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모습은 우리들의 생각과 매우 다르다. 성령운동의 겉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이상하지만 죄인들의 뒤 틀린 영적모습이 바로 그 모양이다. 믿는 이가 신앙의 기쁨 없이 메마름과 의혹과 갈등을 겪고 있다면 그가 누구이던 주님의 부활체험을 통하여 새롭게 거듭나기를 빈다.


9.짝사랑

  사랑하는 사람이 또 떠나갔다. 오랜 신앙을 하였지만 주님을 보지 못하고 늘 사람들만 쳐다 보다 지치고 실망한 모습으로 떠나갔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면 흔들리지 않았으련만!

 주님이 그러시듯, 나 또한 혼자한 짝사랑이 되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