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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제20강 하느님의 뜻이란?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18 조회수1,619 추천수3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 한국clc에서 [이냐시오 성인이 평신도에게] 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성바오로 출판사

 

평화방송 다시보기

http://web.pbc.co.kr/CMS/tv/program/pro_sub.php?src=%2FCMS%2Ftv%2Fprogram%2Fview_list.php%3Fprogram_fid%3D5653%26menu_fid%3D5657&program_fid=5653&menu_fid=5657&cid=&yyyymm=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20강 하느님의 뜻이란?

 

■ 오늘 이야기 ...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과 생명을 꽃피우길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 찾기

우리 크리스찬들은 곧잘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그 하느님의 뜻이

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 그리고 자기 자신의 타고난 생명력 이것을

최고도로 발휘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인 거예요. 그런데 그 하느님의 뜻을 자기가

처해 있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찾아가는 게 그렇게 만만한 작업만은 아니죠. 우리 이 점을

함께 탐구해 봤으면 합니다.

 

■ 시작 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복음 관상기도를 통해서 당신의 발자취를 쫓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

운데 이제 저희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식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그 방법을 배워나가

고자 합니다. 모쪼록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더해 주시고 식별한 것을 선택하

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와 힘들을 더해 주십시오. 저희들 내면 속에서 일어나는 깊은

영적인 움직임들을 더 잘 알아들을 수 있게 하시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힘들을 더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식별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의 뜻
    - 영신수련의 일러두기 [1] : 사욕편정을 없앰, 구령을 위함, 자신의 생활개선
    - 과정적이고 관계적인 하느님의 뜻 : 인간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느님의 뜻
    -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함 : 마지스의 원리, 창조성
    - 하느님의 지극히 구체적인 뜻 / 여러 대안들 중에서 선택
    - ① 자신의 문제 ②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는 문제 ③ 결정과 선택의 순간의 문제

2. 식별을 위한 전제조건
    - 식별과 선택은 사랑의 관계
    - 성령에 대한 의존관계 : 겸손의 둘째단계, 영적식별능력, 선입견으로부터의 자유
    - 성령께 대한 협력관계

3. 식별에 있어서의 영적식별
    -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위안'이 하느님 뜻의 식별에 있어 제1원리라는 주장
    - '사전의 원인이 있는 영적위안'으로부터 원인이 없는 영적위안에로 신비적 체험이

       심화되고, 그런 움직임 속에서 식별한다는 주장(특히 피정 중 일어나는 과정을

       중심으로)
    -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위안' 문제는, 영적식별의 경우와 하느님뜻 식별 및 선택의

       경우를 구별해서 다뤄야 한다

 

예, 우리 이제부터 또 조금 길게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이 작업에 들어갈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둘째 주간에 이렇게 들어오면서 맨 처음에 그리스도의 나라

부터 시작했죠. 영신수련 [91-98]부터 시작해서 쭉- 두 개의 깃발, 세 부류의 사람 거기까

지 보고 나서 우리는 복음 관상기도를 하기 시작했죠. 예수님의 공생애인 거예요.

 

이 공생애, 복음 관상기도에 들어오기 전에 이냐시오 성인께서 예수님의 나자렛 30년을

이냐시오 성인 나름대로 총 결산한 것이 두 개의 깃발의 대립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여기서 영적 식별하는 문제를 3주에 걸쳐서 쭉 봤죠. 그래서 우리 안에 일어나는, 내면

깊은 데서 일어나는 영적 움직임들이 어떤 건가? 이런 것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공생애,

세례 사건부터 시작해 가지고 예루살렘 입성까지 기도를 쭉 해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한 달 피정으로 치면은 적어도 이 공생애만 세례사건부터 예루살렘 입성까지 기도

하는 데만 적어도 7-8일 걸리는 거예요. 그리고 이 앞에 그리스도의 나라부터 세 부류의

사람 여기까지가 한 4-5일 걸릴 것이고, 그래서 한 12-13일 이 정도 걸리죠. 둘째 주간하는

이게. 그래서 영신 수련 전체에서 이 둘째 주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큰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 둘째 주간에 공생애에 이렇게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여러분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쭉 걸어왔다면은 둘째 주간 이쯤 이래 오면은 더욱 더 내면에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더 민감하게 포착하고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영의 식별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이해를 구할려고 했던 거죠.

 

이런 바탕 위에서 이 예수님의 공생애를 복음 관상하죠. 이 복음 관상하는 가운데 우리는

필요하다면은 이 하느님의 뜻을 식별한다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가는 이 작업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그때 그때 피정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은

굳이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할 필요가 없을지 모르지마는 필요한 사람들은 이 둘째

주간에 들어와서 시작을 하는 거죠.

 

예를 들면은 무슨 성소 식별이라든지, 사제 서품을 앞두고 내가 진짜 성직자로서 걸어갈

것인가? 혹은 수도회에 첫 서원을 앞두고 혹은 종신서원을 앞두고 내가 수도 생활을 해

갈 것인가, 말 것인가? 혹은 결혼을 앞둔 사람이 결혼 적령기에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내 신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거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죠. 이런 것들을

식별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식별한다 하는 것은 그런 결혼을 할 것인가,

아니면 독신으로 살 것인가? 성직자나 수도자의 길을 걸을 것인가? 이런 대단히 중요한

문제, 우리가 보통 뭐 성소 이런. 거룩한 부르심. 결혼도 당연히 거룩한 부르심의 하나로서

성소죠. 그런 중요한 문제만을 찾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그 외에 좀 자잘한 문제들,

 

하다못해 이사를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자녀들을 유학을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대학교

를 보낼려고 하는데 전공을 뭘 시킬려고 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도 역시 하느님

의 뜻을 찾고, 선택하는 이 작업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하는 거예요. 그랬을 때 하느님의 뜻

을 식별하고 선택한다는 것은 영신수련 책 [1]번 '일러두기' 하는 건대 이 일러두기 1번에

보면은 우리는 사욕편정을 없앤다 하는 거예요.

 

# 영신수련 [1] '일러두기': 우리는 각자의 사욕편정을 없앤다.

* 사욕편정(邪慾偏精): 사사로운 욕심과 기울어져 있는 마음

* 영신수련 [1] '일러두기': 우리는 각자의 사욕편정을 없애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활을 개선한다

 

사된 욕심, 사사로운 욕심과 기울어져 있는 마음, 사욕편정을 없애고 영혼을 구원한다.

사욕편정을 없애고 영혼을 영혼을 구령하기 위해서 자기 생활을 개선하는데 날카로운  

양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된다. 그렇게 나서기 위한 것이 영신수련을 하는

목적이다. 이래 놓는 거예요.

 

# 영신수련의 목적: 날카로운 양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것처럼 사욕편정을 없애고  영혼구령을 위해서 자기 생활을 개선하

는데 날카로운 양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선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한 그 움직

임이 영신수련의 목적이다. 이래 놧죠.

 

그래서  이제 이런 것들을 이래 보면은 뭐 사욕편정이라든지, 영혼구령, 자기 생활 개선 이

모든 것이 우리 존재의 저 깊은 차원에서 이렇게 보면은 저 깊은 차원에서 이렇게 보면은

저 위에가 물질이고, 그다음에 body, 더 깊게 들어 가면은 mind, 그 다음에 soul, 더 깊게 하

면 spirit. 이런 존재가 점점 깊어지는 것. 혹은 뭐 높아지는 것. 이래 표현해도 상관 없겠죠.

 

 

 

존재가 이렇게 점점 깊어지면은 영적인 차원에 올곧게 들어가면은 사욕편정 같은 것들은

정리가 돼 버린다는 거죠. 그 영혼구령, 영혼을 구령하는 것도 문제가 없게 되죠.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자기 생활을 아주 많이 개선이 되겠죠. 몸과 마음과 영혼이 질서와 조화를

이루면서 참된 생명을 불러일으키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 깊은 영적 차원에 이르면 몸. 마음. 영혼이 조화를 이루어 참된 삶으로

   내 고유한 아름다움과 생명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것

 

전에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mind 차원에서 뭐가 이렇게 올라오는 것 하고 영의 차원에서

올라오는 것 하고 차원이 다르다 그랬죠. 내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 자기 생활을 개선

한다. 이런 것들이 하나의 수단이 되겠지마는 결국 사욕편정이라든지, 영혼 구령이라든지

이런 것이 바로 내 자신의 아름다움, 내 자신의 타고난 생명, 이것을 극대화시키는 작업인

거 아니냐 하는 거예요.

 

사욕편정에 막 휘둘리고 있으면은 내 본래의 타고난 고유한 아름다움, 진짜 나 다움을 실현

시켜내기가 어려워지는 거죠. 그리고 진짜 내 아름다움을 실현시켜 내기가 어려워지는 거

죠. 그리고 진짜 생명력이 올라오기가 힘든 것. 우리가 그냥 이렇게 사욕편정에 휘둘리면서

생활이 좀 무질서한 가운데 그렇게 살고 있어도 그래도 죽은 것 아니고 나름대로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나름대로 자기 아름다움을 뽑내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죠.

 

# 지금보다 더 풍성한 생명력을 누리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이 땅에 내가

온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정도의 아름다움, 이정도의 생

명 여기에 만족할 것이 아니고 더 세차게 차고 나가야 되는 것. 그것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

을 찾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 이러면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다. 이런 이야기들을 곧잘 하죠.

 

#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저 하느님

의 영광 하는 것도 그랬죠. 그냥 피조물인 인간을 비롯한 온갖 피조물인 우리랑은 별개의

독립된 존재로서 하늘에 계신 그 하느님의 영광을 우리는 노예처럼 굽신거리면서 영광을

위해서 땀흘리고 노력해야 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내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 고유한

생명, 고유한 가치, 고유한 의미 이런 것들을 온전히 실현시켜 내는 것

 

#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은 우리 각자의 아름다움과 생명을

                     온전히 실현시켜 내는 것

 

그게 나뿐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 이럴 때 이것을 그냥 좀 멀리 있는

것으로, 아득한 것으로,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그렇게 알아들을 것이 아니다 하는 거예

요.  바로 내하고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 하느님의 뜻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내가 더 아름다워지고, 더 생명에 찰 수 있는

그 길이 도대체 뭔가? 그게 하느님의 뜻이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목적, 과정 이런 것

은 바로 그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하는 거죠.

 

#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목적은 내가 행복해지는 길을 찾는 것

 

그랬을 때 이 하느님의 뜻 하는 것은 우리 각자 개인, 개인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이런 것이 되겠죠.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개인에게서 실행이 되고, 개인의 실행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런 움직임들이 일어나죠.

 

이런 모든 작동은 하느님은 전체라고 한다면은 우리는 부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전체

가 우리 부분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고, 전체께서는, 한 분께서는 각자에게 다 나뉘어지면서

들어가시려고, 온전한 하느님 한 분이 여기도 들어가시고, 저기도 들어가시고 들어가실려고

계속 움직이시고, 많은 우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행해서 또 계속 들어갈려고 움직이고.

 

# 전체이신 하느님이 부분인 우리 안으로, 많은 우리가 한 분이신 하느님 안으로

 

이 모든 원리의 기본 핵심은 magis 정신이다 하는 거예요. 이 마지스 정신이야말로 사랑의

정신이죠. 그리고 창조의 정신인 거예요. 끊임없이 창조하고, 사랑이 원동력이 되어서 사랑

때문에 끊임없이 전체는 부분으로 들어올려고 하고, 부분은 전체 속에 포함될려고 하는 이

런 움직임은 사랑의 원리고 끊임없이 좀 더, 좀 더 하는 마지스 원리다 하는 거예요.

 

# magis: 좀 더, 더욱 더. 사랑과 창조의 정신

 

이런 것들이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서는 과정인데, 그리고 우리는 "야, 이게 하느님의 뜻이

야." 이러면서 하느님의 뜻은 무슨 십계명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윤리도덕적인 규범이

라든지 이런 데서도 이게 하느님의 뜻이다 하면서 밝혀 드러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죠.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설려고 하는 이 작업에 있어서는 그런 일반적

이고 보편적인 윤리도덕적 규범이라든지 가치 기준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구

체적인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처해있는 상황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하느님의 뜻 그걸 찾

아나서는 거예요.

 

#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가치기준이 아닌 지금 내 삶에서 당면하는 하느님의 뜻

 

아주 막 비근한 예를 든다면은 오늘 여러분들이 이제 마치고 집에 돌아가셔서 저녁 밥을 해

먹는다 이런다면은 저녁 반찬을 뭘 해 먹을 건가? 그런데까지. 무슨 찌게를 만들어 먹기를

원하는가? 국을 끓이기를 원하는가? 이런데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뜻이 펼쳐지는 거예요.

 

너무나 많은 경우에는 별로 의식도 없이 그저 자동으로 뭐 먹고, 자고 의식주 생활 같으면

특히 그렇겠죠. 대부분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한 가운데 자동으로 펼쳐지고 있기는 하지마

는 따져서 분석해가 들어갈려고 하면은 그런 모든 움직임들. 그러니까 내 삶의 모든 것이.

오늘 내가 집에 갈 때 교통편을 어떻게 이용할 건가? 잠은 몇 시간을 잘 건가? 영화를 볼

건가? 말 건가? 이런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 있다.

 

# 내 삶의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를 수 있도록

 

그러면서 우리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찾아내서 살아가는 것을 완전히 몸에 익히는 것.

이런 작업ㄷ르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문제다 하는 거예요.

그랬을 때 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 할 때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면은,

 

■ 식별의 대상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 이러면서 엉뚱하게 찾아서는 안 될 것을 막 찾고 있는. 그런데 그냥

"하느님의 뜻이야, 하느님의 뜻이야!" 이러면서 갖다 붙여서 움직이는 경우를 적잖게 보죠.

그래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보면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면은 자기 문제에 한

해서만 하느님의 뜻을 찾는 거예요. 내 문제, 내 문제가 아니면은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 식별의 대상 : 1) 자기 문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수 없다

 

예를 들면은 여러분들이 지금 사위를 보고 싶은 거예요. 사위를 보고 싶은데 후보자가 둘

이가 있는 거예요. 맨날 내 딸내미한테 전화 걸고 왔다 갔다 하는 녀석이 A도 있고 B도 있

는데 내 사위감으로 A가 좋은가 B가 좋은가? 내 딸을 누구한테 줄 것인가? 이것을 여러분

들이 하느님의 뜻은 누구를 사위로 맞아들이는 게 좋은가 하고 식별에 들어가면은 번지 수

잘못 짚었다는 거예요. 그런 거는 여러분들이 식별할 수 없다 하는 거예요.

 

옛날에는, 조선시대 같으면은 그랬을 수가 있겠죠. 부모님이 그냥 찍어주면은 그렇게 결혼

을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당연히 자녀들의 결혼은 자기 문제죠. 가지가 결정하는 거죠.

그래서 그런 식으로 내 문제에 대해서

 

우리 본당에 신부님이, 지금 신부님이 참 마음에 안 드는데 곧 있으면은 인사 이동이 있을

건대, 어느 신부님을 우리 본당에 모시고 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그걸 가지고 막 기도

를 해 가지고는 아, A라는 신부님을 우리 본당 주임 신부님으로 모시는 게 좋겠다. 그래 가

지고 추기경님한테 편지를 써 가지고, 내가 기도했더니 하느님의 뜻이 이랬다. 이 신부님

을 우리 본당 신부님으로 보내라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면은 곤란하다 하는 거예요.

 

내 문제여야 한다. 내가 지금 현대 백화점에서 세일을 하는데, 원피스를 하나 살까, 말까?

그거 여러분 문제죠. 그거는 하느님의 뜻이 사는 게 좋은가? 안 사는 게 좋은가? 묻고 싶으

면은 그건 괜찮다 하는 거죠. 내 문제니까. 그런데 이 내 문제를 푼다 하는 데 있어서는 예

외가 두 가지가 있는 게, 자문적 식별하고, 위탁적 식별하는 두 개가 있는 거예요.

 

자문은 글자 그대로 자문인 거에요. 딸내미가 내가 봐도 참 착하죠. 그런데 이 딸내미가

시집을 갈려는데 남자 둘이가 계속 옆에서 치근덕거리는 거예요. "엄마, 엄마는 평화방송

에 하는 그 영성 강의도 막 가서 듣고, 피정도 하고 이러니까 하느님의 뜻을 잘 식별 할 수

있을 것 아니냐? 엄마가 한번 식별을 해 봐라. 그러면은 엄마 이야기를 내가 참작해 가지고

결정을 할께."

 

그러면은 그 말을 듣고 여러분들이 아, 재 사위감으로 누가 좋을까? 식별에 들어가는 것.

자문을 해 주기 위한 식별. 이거는 내 문제가 아니고 내 딸 문제지마는 가능한 거예요. 그

때는 하느님의 뜻이 어떻는가 볼 수 있죠. 그런데 이 딸내미가 한 술 더 떠 가지고 진짜

엄마 말 잘 듣는 애죠. 그래 가지고는 "엄마, 나 지금 이 둘 다 마음에 들고 괜찮은데 누가

나는 누가 뭐라고 그래도 엄마의 식별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결정을 해 주면은 나 그게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난 알아듣겠다. 그러니까 엄마

가 기도 좀 해 보고 식별을 해 달라. 이거는 완전히 위탁하는 거예요. 완전히 맡겨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의 식별을 자기의 식별로 삼아버리는. 이런 경우에는 딴 사람 문제

라도 식별을 할 수가 있죠.

 

# 자문적 식별과 위탁적 식별: 다른 이의 요청이 있을 때는 그것에 대한 식별 가능

 

이냐시오 성인의 경우에도 이런 예는 많이 있는 거예요. 수도회마다 수도자들은 3대 서원

을 발하죠. 청빈, 정결, 순명. 그런데 청빈이라는 내용은 수도회들마다 조금씩은 달라요.

그런데 우리 예수회 같으면은 이거는 절대 청빈이죠. 탁발 수도회다 이래 가지고 개인이

재산을 소유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수도회 자체도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게

끔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냥을 받아가지고 그

동냥 받은 돈으로 먹고 자고 하면서 일을 하게 끔. 그래서 딴 사람들이 아무도 안 도와 주

면은 먹고 자는 거는 고사하고 일 자체를 못하게 되는 이런 상황이 되는 것. 그런데 이게

과연 하느님의 뜻인가? 이런 상황이 되는 것. 예수회가 탁발 수도회로서 절대 청빈을 살

아내기를 원하시는가?

 

샬트르 바오로회라든지 이런 바오로 영성을 사는 수도회 하고 이런 점에서 확실히 다르죠.

사도 바오로께서는 천막 장수였죠. 내가 여러분들한테 페끼치기 싫어 가지고 내가 일일이

노동해 가지고 그 수고로 나는 이 사도직을 위한 비용을 댔다. 이러시죠. 그래서 그 사도

바오로의 영성을 따라서 사는 수도회 같으면은 개인은 물론 재산을 가질 수 없지마는 수

도회 자체는 재산이 많아야 되는 거예요. 돈이 많아야 그만큼 일도 더 많이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우리는 그 사도직에 드는 비용까지도 후원금을 받아라. 동냥을 해라. 그래서 그 받

은 것 가지고 써라. 이래 되는 거죠. 그것을 식별을 할 때 이냐시오 성인은 예수회 초창기

예수회 회원들이 있죠. 그분들이 이냐시오 성인한테 이래 맡겨드리죠. "니가 식별을 한 번

해 봐라. 그러면서 니 식별을 우리가 좀 참고해 가지고 그렇게 하면 좋겠다." 이래 가지고

동료 예수회 회원들의 부탁을 받아서 청빈에 대한 식별을 들어갔던 것. 이게 자문적인 식

별에 해당하죠.

 

그런가 하면은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위탁적 식별의 예도 참 많죠. 이분이 회심하고 나서

예루살렘 성지에 가서 예수님이 직접 땅을 딛고 다니셨던 곳을 다녀보고 싶은 너무나 강

한 열망에 사로잡히죠. 그런데 그때만 해도 스페인에서 이스라엘 성지까지 가려면 뱃길로

해 가지고 한참 여행을 해야 되죠.

 

그런데 이때 처음 회심하셨을 당시만 해도 진짜 글자 그대로 그 모든 것을 하느님 손바닥

위에 나를 올려 놓고 하느님께서, 예수님께서 배려해 주시는 대로 먹고, 자고, 살고, 죽고,

일하는 것을 다 그대로 맡기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죠. 그래 놓으니까 내가 돈을 벌

어 가지고 내가 뱃삯을 지불하면서 성지 순례를 한다하는 이거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해 버

린 거예요. 그래 가지고 그 배 선장한테 가서 부탁을 하죠.

 

내가 이렇게 예루살렘 성지를 가고 싶은데 나를 좀 태워서 데리고 가 달라고. 그래서 그

선장이 들어보니까 그 열정에 감복을 하죠. 그래서 좋아 태워주겠다. 그런데 단 뱃길 여행

이 보름, 한 달 이래 막 걸리니까 니가 먹고 살아야 될 빵은 니가 가지고 와야 된다. 밥까

지 주지는 못하겠다. 이래 된 거예요.

 

여기서 이냐시오 성인께서 그냥 고민에 빠지죠. 내가 먹을 빵을 준비해 가지고 승선을 하

면은 이거는 호구지책을 내가 마련하는 거 아니냐? 그런데 이것도 하느님께서 다 해결해

주시기를. 그런데 그럴려니까 이거느 무슨 엘리야 예언자처럼 앉아 있는데 누가 날라와서

먹을 것을 갖다주고 이럴 수도 없는 거고. 어, 이게 진퇴양난에 빠져버렸죠.

 

그러자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고해 사제를 찾아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고해사제한테 내가

이 자초지종을 이야기를 하겠다. 그래서 고해사제의 결정을 하느님의 뜻으로 알아듣겠다.

그리고는 가서 말씀드렸더니 고해 사제가 듣고는 아이고, 이 사람 정신차리게. 빵 가지고

가라고. 그래 가지고는 빵 다 받아가지고는 이렇게 가시죠.

 

총장이 될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죠. 계속 동료들이 전부 니가 총장이 되어야 된다. 예수

회 가장 최고 장상이 되어야 된다. 이런 식으로 권하는데 그냥 확신이 안 서는 거예요. 내

보다 훌륭한 동료 예수회 회원이 많은데 내가 총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그러고. 이래야 될지, 저래야 될지 모르겠다. 이때도 역시 고해 사제한테 가서 이야

기를 하죠. 그래서 고해 사제의 결정에 따라서 총장에 취임하시죠.

 

그런데 이거는 제 경험을 여기서 사적으로 나누기가 그렇기는 좀 한대. 제가 볼 때도 합법

적인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큰 은총이 주어진다. 이거는 분명한 거

같은 거예요. 합법적인 교회의 권위에 순종한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들도 뭔가 내 나름

대로 중요한 결정을 해야 되겠는데 이래야 될지, 저래야 될지 계속 감이 안 잡히고, 망설여

지고 이럴 때는,

 

여러분들이 신뢰할 수 있는 어떤 신부님도 좋고, 수녀님도 좋고 그분한테 내가 이야기를

하고 그분이 이런 저런 결정을 내려 주면은 그걸 하느님의 뜻으로 그대로 내가 받아들이고

실행을 하겠다. 이 생각만 딱 갖추어 지면은 그대로 할 때, 그리고 그 식별에 따라서 거기

쫓아가서 움직여 나갈 때 그런 영혼에게 아주 많은 은총을 내리시는 것 아닌가? 이거는 좀

참고해야 될 필요가 있겠다 싶어요.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자기 문제에 대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

문제에 대해서 함부로 찾을 수 없다 하는 것.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자기 문제임과 동시에 이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처리할 수 있는 권한 내지는 권리가 있는 문제여야 한다는 거예요.

 

# 식별의 대상: 2)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는 문제여야 한다

 

내 문제라 하더라도 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으면은 안 된다 하는 거죠. 스스로

할 수 있는 권한 내지는 권리가 있어야 되는 것. 이런 예를 이 일상의 삶 속에서 어떻게 찾아

내야 될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우리 수도자들 같은 경우에 보면은 뭐 본당 신부님들이 이동

하는 것도 그렇죠.

 

이런 조직 안에서 이렇게 볼 때 내가 도대체 수도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하고 사는 게 제일

은가? 이렇게 막 고민을 해 보니까, 나는 서강대학교에서 이렇게 대학 사도직을 할 게 아니

고 피정 지도를 하면서 영성 사도직을 하는 게 더 좋다. 그래 가지고 다 이래 식별을 했더니

하느님의 뜻이, 점쾌가 순천에 내려가서, 순천에 있는 영성센터에 가서 피정 사도직을 해라

이렇게 점쾌가 나온 거예요.

 

그런데 좀 있다가 떡 소임 이동 발표가 탁 나는데 그냥 대학 사도직으로 탁 발령을 내버린

거예요. 그러면은 이제 제 딴에는 내가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

고 식별을 했는데 관구장이라는 사람은, 우리 수도회 제일 어른이라는 사람은 평소에 기도

도 안 하고,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줄도 모르고, 이래 가지고 엉뚱하게 발령을 낸다고. 그런

식으로 고함지를 수 있는가? 아니다 하는 거예요.

 

내가 영성 사도직을 하면서 살아갈 건지, 교육 사도직을 하면서 살아갈 건지. 내 문제죠.

문제이기는 하지마는 이것을 내가 가고 싶다고 해 가지고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그럴 수

있는 권한이 내한테 없죠. 나를 어디로 파견을 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위에 장상의 권한인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내가 하느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 식별할 수 없는 거예요.

 

이제 이럴 경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난 진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내 자신의

진짜 고유한 탈렌트를 살려내기 위해서 학교에 있는 것이 좋은가? 피정 집에 있는 것이

은가? 고민을 했더니 어느 쪽이라고 이렇게 결론이 난 거예요. 하느님의 뜻이 이런 거 같다.

 

그러면은 이 이야기를 파견을 시킬 사람, 윗 사람에게 내가 식별을 해 보니까 이렇는데요.

나를 이 자리에 보내주십시오.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아니면은 그

안 하고 기다라고 있으면서 인사이동, 발령이 나면은 그냥 그대로 쫓아가는 것이 하느님

뜻인가 그 점에 대해서 식별하고 행동할 수는 있는 거죠. 그런 것이지 내 권한에 속하는 문

제가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는 거예요.

 

그런가 하면은 세 번째로 이거는 또 지금 내가 무슨 행동을 취할 수 있는가? 이것을 묻는

것이지 어떤 예언자적인 지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

 

# 식별의 대상: 3) 먼 미래가 아닌, 지금 결정하고 식별할 수 있는 것

 

예를 들면은 제가 수도회에 들어올려고 할 때 내가 결혼을 안 하고 수도회에 들어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이래 가지고 그때 식별을 해가 아, 하느님께서 지금 수도회에 들어가라

하신다. 이래가 식별해서 들어오죠. 이제 그런 식으로 식별을 해가 움직일 때, 예언자적인

지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무슨 행동을 취하기를 원하시는가? 이

점에 대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 말은 하느님께서 내가 죽을 때까지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그렇게 살다가 죽기를 원하시

는가? 아닌가? 여기에 촛점이 가 있는 게 아니고, 그냥 지금 그러니까 내가 지금 수도회에

들어갈까? 결혼을 할까? 뭔가 결정을 해야 되는데 지금 현재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기를

원하는가? 이걸 원하시는 거예요. 그 점에 대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거다 하는 거예요.

 

그 말은 그래 가지고 수도회에 들어왔죠. 그래서 신부까지 됐어요. 그래 가지고 몇 년 더

살다가 하느님의 뜻이 그때 가서 다른 걸로 바꾸게 되거나, 아니다 싶으면은 다른 길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그때 다른 길로 간다 이래 가지고 처음에 들어

올 때 수도자가 될려고 할 때 하느님의 뜻이 아닌데 내가 괜히 고집을 부려 가지고 하느님

의 뜻을 잘못 읽어서 들어와서 결국은 나가는구나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아니면은 처음부터 들어올 때는 제대로 들어왔고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수도자로 살아가길

원하시는데 그냥 헛바람이 들어가지고 잘못 판단해 가지고 지가 옷 벗고 뛰쳐나가 버리는.

그래서 지금 잘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가능성도 있지마는 들어올 때도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읽어가지고 들어왔고 나가는 지금도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읽고 나가는 수도 있다

하는 거예요.

 

# 변화되는 상황마다 하느님의 뜻을 찾도록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은 늘 변화되어 가는 가운데 관계적인 상황 속에서

렇게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지 그저 고정 불변의 하느님의 뜻이 탁탁 있는 것인 양,

래서 그것을 찾아내고 그대로 살아내지 않으면은 안 되는 것인 양 이렇게 생각하면은 곤란

하다 하는 거예요. 살아계신 하느님 아버지, 당연히 우리의 이 상황들은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고, 살아서 막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5년 전에는 수도생활 하는 것이 마땅하고 좋았는데 5년 후에는 수도생활 안 하는

것이 오히려 마땅하고 좋을 수도 있다 하는 거죠. 그래서 그때 그때 변화되어 가는 것.

그것을 보고 움직이는 것이지, 고정 불변 된 그래서 수도회에 한 번 딱 들어오면은 죽으나

사나 너 이게 하느님의 뜻이다. 그래 가지고 그대로 그냥 가는 것. 이런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그것하고 비슷하게 관련지어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 이럴 때는 하느님 당신 자신

이 내한테 뭘 원하는가? 내가 도대체 무슨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하는가? 신부로 살아가길

원하는가? 아니면은 결혼을 해서 살아가길 원하는가? 이것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내

가 무슨 행동을 하기를 원하는가? 이것을 찾는 거예요.

 

#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찾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하면은 하느님께서는 내가 신부가 돼서 살든, 수도자가 돼서

살든,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했다가 그렇게 막 살든 그거는 오히려 별 관심이 없으실지 몰

라요. 어떤 모습으로 너는 있어야 된다. 이런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고 지금 구체적인

상황을 내가 읽어드리고 이 변화 속에서 어떻게 걸어가야 되는지 식별을 하고 거기에 쫓아

서 움직이고 있느냐, 아니냐? 그게 중요한 것이지. 뭔가 이래 탁 고정 돼 있는 이런 이야기

하자는 것 아니다 하는 거예요.

 

# 하느님의 뜻을 식별한다는 것은 예언자적 지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내 운명이 앞으로 어떤 것인지, 내 인생의 앞길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찾아내는 그거는 저

미아리에 가면은 동양 철학관에 계시는 어르신네들, 그분들한테 이러헤 복채 두둑히 내면

은 잘 알려주겠죠.^^*~~ 우리는 그게 아니고 내가 처해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무슨 행동

하기를 원하시는가? 그점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지 구체적인 사람들을 놓고 이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있기를 원하고, 저 사람은 어떤 모습이기를 원하는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께서 보르하 성인, 저희들 예수회 총원장까지 하셨고, 성인품에 오르

셨던 보르하 성인이라고 유명한 분이 계시죠. 이분을 당시 카를로스 5세 황제가, 당시는 이

래 황제, 속권, 세상의 권력하고 교회으 권력하고 상당히 이렇게 융합되어 가지고 막 움직

이는 이런 게 있었죠.

 

당시의 교황님 율리우스 3세, 이 보르하 성인 집안이 아주 명문 귀족 집안이죠. 그러면서

보르하 성인을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율리우스 3세 교황님한테 청을

드렸더니 교황님도 좋아하시죠. 아, 그러겠다고. 그런데 이 문제를 놓고 이냐시오 성인께서

고민에 빠지는 거예요. 보르하 성인은 절대 추기경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랬을 때 자기가 고민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보르하를 추기경으로 만들기를 원하시는가,

안 만들기를 원하시는가? 이것 나는 모른다. 그야말로 진짜 속된 말로 하면은 엿쟁이 마음

대로. 그것은 하느님 당신 자신의 뜻에 온전히 맡겨져 있는 것이지 우리가 그것을 감 놔라,

배 놔라, 대추 놔라 이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그런 움직임, 추기경으로 할려고 하는 움직임에 대해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교황

님께 상소문을 올리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가, 원하시지 않는가? 이점에 대해서 나는 하

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움직인다. 그래서 한 분이신 성령께서 교황님을 통해서는 추기경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막 움직이시고, 또 이냐시오 성인 자신을 통해서는 추기경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막 움직이시고.

 

한 분이신 성령께서 그렇게 각 사람의 마음에 움직이시는 것이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우리 각자가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분별하고 거기에 쫓아서 자유롭게 하느님

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다면은 그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짐이 되고 부담이 될 것이다.

추기경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느님의 뜻이 뭐냐? 이런  것들을 식별하는 것이 아니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죠.

 

그래서 우리가 걸핏하면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 막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구체적으로 내가 지금 식별할려고 하는 것이 뭔지, 이게 진짜 식별할 수

있는 문제인지 이런 것들을 사전에 잘 점검을 하고 하느님의 뜻을 식별 작업에 들어가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 내가 지금 식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잘 점검하도록

 

이제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식별한다고 할 때 그 식별의 대상을 명확하게 했으면은 그다음

에 식별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두 가지가 있죠.

 

■  식별의 조건

 

이 전제 조건을 갖추어야 되는 거예요. 이 첫 번째가 성령께 대한 개방된 자세 혹은 성령께

대한 의존의 자세. 즉 성령께 완전히 맡겨드리고 식별 작업을 한다 하는 이 의식. 이것을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이야기를 하면은 불편심에 해당하는 거예요.

 

# 식별의 조건: 1) 성령께 완전히 맡겨드리는 자세

 

전에 우리가 겸손의 3단계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이야기 했었죠.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

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겸손의 3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은 안 된다. 적어도 둘째 단계하는

것이 가난도, 부귀도, 질병도, 건강도, 모욕도, 명예도, 단명도, 장수도 어느 쪽을 원하지 않

을 것이요. 하느님께 더 영광이 되는 쪽만을 찾아간다. 어느 한쪽에 집착하지 않고, 나를 완

전히 열어 놓는 것.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요. 그 여자를 자기 뒷주머니에 히든 카드로 딱 숨겨 넣어

놓고, 하느님 당신 뜻이 뭔데요? 내가 결혼을 하기를 원해요? 수도 생활을 하기를 원해요?

그래 가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카드보다 더 좋은 카드를 탁 제시를 해 주면은 그거는 내

가 마 따라가지. 그런데 아니면은 나는 내 카드 꺼내서 쓸 거야. 이런 식으로 되면은 하느님

의 뜻  식별 못한다 하는 거예요.

 

성령께서 나를 가장 잘 아시고, 그래서 내가 걸어가야 할 아름다운 모습과 생명을 향한 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여주고 이끄실 것이다 하는 점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 그리고 맡겨드림

이게 형성이 안 되면은 곤란하다. 우리가 왜 복음 관상을 그토록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

하고 선택하려고 하는가? 복음 관상을 통해서 계속 예수님을 보고, 듣고, 느끼고 이러면서

예수님을 아주 가깝게 알게 되고,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물이 들어버리는 거예요.

 

예수님 보다 아버지의 뜻을 잘 식별하고 선택했던 사람은 전례가 없죠. 그래서 예수님을

잘 닮는다 하는 것은 그만큼 가장 식별을 잘 할 수 있다 하는 말하고 같은 거죠.

 

# 예수님을 잘 닮는 것이 식별을 잘 할 수 있는 길 ...

                          복음 관상기도와 하느님의 뜻 식별을 병행

 

그래서 우리는 복음 관상을 계속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작업을 병

행해 나가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랬을 때 이 첫 번째 조건이 성령께 대한 완전한 개방과

의존, 이게 첫 번째 조건이죠. 그 다음에 두 번째 조건은 성령께 대한 협력인 거예요.

 

# 식별의 조건: 2) 성령께 협력하는 자세

 

하느님께서 당신께 오, 당신의 길을 보여주십시오. 그리고는 눈만 뜨고 허공만 이렇게 바라

보고 있으면은 환각 증세, 환시 상태나 떨어질까 하느님의 뜻이 이메일로 떡 날아온다든지,

핸드폰으로 문자로 날아온다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턱이 없죠.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기 위

해서 인간 차원에서 거듭거듭 애쓰면서 노력해야 되는 거예요.

 

#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

 

성령의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하는 이 차원이 중요하다. 성령께 협력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 주, 그다음 주에 이렇게 뭐 선택의 구체적인 작업들 기도하고, 식별하고, 영적

분별을 하고 이런 작업들을 계속해야 되죠. 그래서 이 두 조건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식별하

고 선택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별과 선택 작업에 들어갈 때  우리는 영적 식별과 하느님의 뜻의 식별 선택

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거 지난 주에도 얼핏 이야기를 했죠. 이 영적 위안을 모태로 해

가지고 하느님의 뜻이 배태(싹틈)되어 나온다. 그런데 이 영적 위안 하는 거는 또 쪼개서

보면은 사전의 원인이 있는 영적 위안과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으로 나눌 수 있다 이랬죠.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 가운데 어떤 이끄림이 올라오면은, 충동이 올라오면은 이거는 하느

님의 뜻임이 틀림 없다. 믿어도 된다 하는 거예요.

 

#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을 통한 하느님의 이끌림은 틀림없는 하느님의 뜻

 

그런데 원인이 있는 영적 위안을 맛보는 가운에 어떤 충동이나 이끌림이 올라오면은 하느

님의 뜻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거는 식별을 좀 엄격하게 해 봐야 되는 거예요.

또 사람에 따라서는 "와, 내가 이런 체험을 했는데요." 막 장황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들어

보면서 진짜 이 사람이 했다하는 그 영적 체험이 원인이 없는,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체험인지, 원인이 있는 영적 체험인지, 심지어 비영적 체험인지 이것 분별해야 되죠.

 

그리고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온, 성령으로부터 온

지극히 순수한, 불순물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영적 식별에 있어서의 시금석이 되죠.

이것이 순수한 바로미트, 잣대가 되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이 체험이 있어야 이 부분을

알고 있어야 다른 영적 위안들을 보면서 옥석을 구분해 낼 수가 있죠.

 

#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은 영적 식별의 잣대가 된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는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데도 반드시 이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이 있어야먄 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이거는 좀 다르다

싶은 거예요.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데는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이 아

닌 다른 루트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이거는 선택의 구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설명할 때 또 좀 나올 것 같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했으면 합니다. 영광송으로 마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다음 시간 ...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구체적은 작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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