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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제21강 선택의 세 시기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20 조회수1,162 추천수4 반대(1)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 한국clc에서 [이냐시오 성인이 평신도에게] 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성바오로 출판사

 

평화방송 다시보기

http://web.pbc.co.kr/CMS/tv/program/pro_sub.php?src=%2FCMS%2Ftv%2Fprogram%2Fview_list.php%3Fprogram_fid%3D5653%26menu_fid%3D5657&program_fid=5653&menu_fid=5657&cid=&yyyymm=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21강 선택의 세 시기

 

■ 오늘 이야기 ...

* 선택을 해야 할 때

*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기 위한 작업

 

예, 우리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결정들 내리고 때에 따라서는 아주 중요한 선택을 해야 될

때가 있죠. 그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결정하고 선택해 가세요? 여러 가지 생각들도 하고,

마음에 여러 가지 이끌림이라든지 그런 움직임들을 보고 이렇게 행동을 하게 되죠. 이런 점

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과 관련지어서 어떤 식으로

선택 작업을 해 나가는지 한 번 살펴봤으면 합니다.

 

■ 시작 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당신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아버지의 뜻을 찾아 나서고자 하고 있습

니다. 당신 공생애 동안 한결 같이 아버지의 뜻만을 찾고 실행하셨던 것처럼 저희들도 당신

을 닮아서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하오니 당신께서 아버지의 뜻을 식별하셨던 그 지혜를 저희

들에게도 나눠 주십시오. 또한 알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에 옮기셨던 그 용기와 힘들도

저희에게 나눠 주십시오. 모쪼록 당신을 향한 그 사랑의 마음이 당신을 닮게 하시고 당신께

서 걸어가셨던 것처럼 아버지의 뜻을 찾으며 걸어갈 수 있도록 그것이 저희들에게 더할 나

없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도록 은총을 더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0. 선택의 세 시기
    - [175] : 좋은 선택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는 세 가지가 있다

1. 첫째 시기
    - 열심한 영혼이라면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시고 끌어당기시는 때
    - 이냐시오 성인의 예; 고기의 환시, 까르도넬 강가의 신비체험, 라 스토르따 체험
    - 상상적 비전과의 관계 문제
    - 첫째 시기 선택에 있어서 영적위안 특히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위안'은 필수적

      요소인가?
    - 첫째 시시 선택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필요한가?

2. 둘째 시기
    -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
    - 위안 상태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 어디로 이끄시는지 보라
    - 하나의 선택을 향한 내적 움직임 내지 충동이 있을 때 그것이 선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악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언=의지적 움직임+사실적 판단>

3. 셋째 시기
    - 영혼이 평온한 때
    - '더 큰 하느님의 영광의 원칙'
    - 셋째 시기의 둘째 방법

 

■ 지난 시간 ... 하느님의 뜻이란?

 

예, 지난 주에 하느님의 뜻에 대한 식별과 선택 이런 타이틀을 가지고 앞으로 3주 동안 할

거다 말씀을 드렸었죠.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명확하게 봤고 선택 작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이 점을 봤었죠. 그래서 오늘은 거기에 쫓아

서 그다음 이제 이어 가는데 영신수련 책에 의하면은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기에 좋은 시기가 세 시기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기에 적절한 세 시기

 

그래서 첫째 시기, 둘째 시기, 셋째 시기.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데 아주 바람직하고 적절

한 좋은 시기가 이렇게 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집중적으로 이 세 시기에 대해서 살펴

보는 거예요. 그런데 첫째 시기 이러면은 뭐라고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하느님의 뜻이 이

것이다 하는 것이 너무나 명명백백해서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하게 하느님

의 뜻이 드러날 때 그때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선택하면 된다.

 

#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첫째 시기: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게 하느님의 뜻이 드러날 때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나설려고 하는 그 좋은 영혼이 맑게 깨어있을 때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 체험들을 보면서 하느님의 뜻이 너무나 분명해서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하게 드러날 때 그때 그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선택하고 쫓아가면 된다. 이 이야기인

거예요. 그러면서 예를 들고 계시는 것이 바오로 사도의 개종 체험 그리고 마태오 사도가

불림 받은 체험. 이런 것들을 예를 드시는 거예요.

 

# 첫째 시기의 예: 바오로 사도의 개종, 마태오 사도가 부르심을 받은 체험

 

그렇죠. 잘 아시다시피 바오로 사도 같으면은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

죠. 그때까지만 해도 이 크리스찬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

해서 체포 영장을 발부 받아 가지고 막 달리다가 빛을 맞고 이러면서 앞이 안 보이고, 그러

다가 다시 눈을 뜨고 이러는 가운데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고, 하느님의 뜻이, 하느님이 혹

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어디로 부르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이 너무나 명명백백 했던

거죠. 그래서 그때부터 개종하시면서 교회의 완전히 한 축이 되어버리는 그런 놀라운 체험.

 

혹은 마태오 사도께서 세관에 이렇게 앉아 계시는데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면서 "마태오야,

날 따라라." 이러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따라나섰다. 딱 한 줄 밖에 없죠. 이런 체험

들. 이런 것들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하는 것이 너무나 명명

백백하다. 이래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랬을 때 이제 여기에 보면은 이제 조건이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첫째 하느님의 뜻이 이거다 하는 것이 분명해야 되는 거예요.

 

# 첫째 시기의 조건: 하느님의 뜻이 분명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하느님의 뜻 하는 것은 지난 주에도 우리가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하느님 당신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계시는가? 이 이야기가 아니고 뭔가 지금 선택을 하고 행동을 취하려

고 하는 우리에게 "니가 지금 뭘 하기를 원한다' 하는 이 점에 대한 하느님의 뜻. 그것을 찾

는다고 그랬죠.

 

# 하느님의 뜻이란 : 내가 지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예언자적인, 미래에 내가 뭐가 될 것이다, 안 될 것이다. 이런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행동을

취해야 하는 지금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이 점에 대한 하느님의 뜻. 그 하느님의

뜻이 분명해야 되고, 그다음에 두 번째로는 그 점에 대해서 내 마음이 이끌려야 되는 거예요.

 

# 첫째 시기의 조건: 하느님의 뜻이 분명해야 하고 그것에 내 마음이 이끌려야 한다

 

아, 그러고 싶다 하는. "마태오야, 날 따라라." 이러자 그 하느님의 뜻이 이거구나 하는 게

분명하게 드러났을 때 따르고자 하는 의지적인 충동, 마음의 이끄림이 있어여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끝으로 이러한 사실들이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가 없을 정도로 분명해야 한다.

 

이랬을 때 그거를 우리는 첫째 시기의 체험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첫째 시기의 이 체험을 이렇게 보면은 이냐시오 성인의 경우를 예를 많이 들 수가 있어요.

첫 번째 예를 좀 들 수 있는 게 고기의 환시. 이런 체험인데,

 

# 첫째 시기의 예: 이냐시오 성인이 체험한 고기의 환시

 

고기의 환시가 뭔고 하니까, 이냐시오 성인께서 일정 기간 동안 쭉 금육을 하고 계셨죠.

금육을 하고 계셨는데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탁 떴는데 갑자기 눈 앞에 아주 먹음직

스러운 고기가, 스테이크가 이렇게 쟁반에 탁 담겨 있는 게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고

기를 먹어야 되겠다라든지 뭐 먹고 싶다라든지 이런 욕구가 전혀 일어나고 있지 않았음에

도 불구하고 눈 앞에 드러나는 그 고기를 보는 순간 고기를 먹어야 되겠다는 이런 의지적인

이끌림, 마음의 충동이 강하게 일어난 거예요.

 

그러고 이 고기를 먹어야 되겠다는 데서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냐

시오 성인께서도 원체 그때 그쯤만 하셔도 이렇게 식별에 있어서는 거의 대가의 경지에 닿

아 계셨고, 그러면서 아주 이렇게 꼼꼼하고 세밀하게 짚어 가시는 분이죠. 그래서 혹시 자기

가 판단을 잘못했나 싶어서 고해 사제한테까지 가서 이야기도 해 보죠.

 

그러자 고해 사제도 혹시 그게 유혹이지 않겠느냐? 좀 금육을 하면서 훨씬 더 날카롭게 하

느님의 길을 따라 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런 식욕을 통해서 유혹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한 번 더 살펴봐라. 이런 식의 권고 말씀을 들었지마는 아무리 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고기 먹죠.

 

이 체험을 놓고는 여러 가지 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들이 많이 나뉘고 있기는 있어요. 이게

우리 전에 영의 식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체험이다. 서전에 원

인이 없는 영적  위안의 체험이다. 이런 식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데 있어서의 이 첫째 시기의 체험이다. 이런 이야기들도 하고 여러 학설들이 있기

는 한대, 보면은 첫째 시기의 체험에 아주 가까운 그런 내용인 것 아닌가?

 

# 분명한 하느님의 뜻에 의심 없이 끌려간 의지

 

거기 보면은 적어도 이냐시오 성인께서 이 영적 위로를 맛봤다든지, 이런 언급은 일절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의 뜻이 먼저 드러났고 자기의 의지는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거예요.

아, 먹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올라왔고, 그점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었고. 이런 점에

서 그 고기의 환시 체험 같은 것이 하느님의 뜻을 선택한 첫째 시기의 구체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또 하나의 예는 까르도넬 강가의 체험 하는 것인데,

 

# 첫째 시기의 예: 이냐시오 성인의 까르도넬 강가의 신비 체험

 

이것도 좀 논란이 있죠. 이거는 뭔가 하니까 이냐시오 성인께서 까르도넬 강가에서 산책을

하고 계시다가 그냥 앉아서 좀 쉬게 됐죠. 그래서 강물 흘러가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계시

는데 그때 진짜 이거는 우리한테 곧잘 농담 삼아 잘 하는 것, 신부가 먹다 남긴 것 먹으면은

명오가 열린다는 뭐 이런 이야기들 하는 것처럼 완전히 명오가 열리셨다 그럴까? 지적 체험

을, 엄청나게 큰 깨달음, 지적 깨달음을 체험하시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성인께서 그러시

죠. 당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배워와서 알고 있던 것보다도 그때 그 한 순간에 훨씬 더

많은 것을 알아들었다.

 

그런데 이제 이런 것은 하느님의 뜻의 선택하고는 거리가 훨씬 많이 있고, 영적인 위안을

얻으셨는지, 안 얻으셨는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마는 그 직접 깨달음을

통해서 위로는 엄청 맛보셨을 것 아닌가 싶죠. 어쨌건 그런 체험이 있고, 끝으로 하나 더

소개하고 싶은 것은 라 스토르타 체험 하는 거예요.

 

# 첫째 시기의 예: 이냐시오 성인의 라 스토르타 성당의 체험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서품을 받으시고 나서 일 년 반 동안 첫 미사를 안 드리셨어요. 이 첫

미사, 사제들이 서품 받고 나면은 처음에 드리는 미사를 첫 미사 그러죠. 그런데 대개 이제

첫 미사를 무슨 자기 출신 본당에서도 미사를 드리고, 수녀원에 다니면서도 미사를 드리고,

제 같은 놈은 수녀원에서 오라 소리도 안 하는데 전화 걸어 가지고는 "저 혹시 첫 미사 드리

러 가면 안 되겠느냐?"고 그래 가지고 가서 미사를 드리고 난리를 치는데,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사부께서는 일 년 반 동안 미사를 안 드리신 거예요. 그게 왜 그런고

하니까 성부께서 당신을, 이냐시오 성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곁에 두시는, 마치 종처럼, 시

종처럼 예수 그리스도 곁에 이냐시오 성인 자신을 두시기를 청하는 그런 은총을 청하면서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면서 계속 기도 중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 응답이 이루어질 때까지

는 첫 미사 드리지 않겠다.

 

그래 가지고 일 년 반 동안이나 미사를 안 드리셨죠. 진짜 사부께서 우리 후예들을 기를 많

이 죽이시는 부분이죠.^^*~ 엄청나게 반성도 필요하다 싶은 거예요. 그저 신부 되고 나면은

뭔가 다 이룬듯이 온 동네방네 뛰어나니면서 첫 미사 드리느라고 난리치는 거 하고, 진짜 좀

뭔가 다른 것 아닌가?

 

그런데 어쨌거나 그래서 그 라 스토르타 하는 것이 조그마한 성당이예요. 로마에서 좀 떨어

져 있는데 조그마한 성당이라고 그러는데 저도 로마 안 가봐 놓으니까 그건 잘 모르죠. 어

쨌거나 그 성당에서 기도하실 때 이냐시오 성인께서 체험하셨던 내용인 거예요.

 

그 라 스토르타 성당에서 역시 첫 미사도 안 드리고 그런 상태로 기도하고 계셨을 때 환시

를 탁 보는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환시를 명확하게 보시는 거예요. 그렇게 보

시면서 들려왔던 이야기가 성부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더러,

예수님더러 그러시는 거예요. "이냐시오를 니 종으로 삼아라. 니 종으로 데리고 다녀라."

이 이야기를 들으시는 거예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냐시오 성인을 행해 가지고 하시는 말씀이 "너는 우리에게 와서 봉사

해라." 우리 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와서, 우리를 위해서

봉사해라 하는 이야기를 확실하게 들으시는 거예요. 이 놀라운 영적 체험. 여기에서 예수회

하는 이름이. 라 꼼빠니아데 헤수스. 이냐시오 성인께서 그 체험을 딱 하는 순간,

 

아, 우리가, 예수회 회원들이 예수님의 벗으로, 동료로서 불림 받았다 하는 확실한 영적 체

험을 하시는 거예요. 그게 예수회, 죄인이면서 예수님의 벗으로 불림 받은 수도 공동체. 이

예수회가 그래서 탄생을 하는데 여기에 보면 놀라운 영적 체험이고. 예, 이거 사전의 영적

식별 차원에서 이렇게 본다면은 사전에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 아주 강도 높은 그런 위안

체험으로 볼 수도 있고,

 

적어도 여기에는 이렇게 보면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그 첫째 시기의 요소도 어느 정도

들어와 있는 것 아닌가? 그때부터 아,수도회의 이름을 적어도 라 꼼빠니아데 헤수스, 예수

의 벗들. 이런 이름을 붙여야 되겠다. 하는 생각들, 그런 판단 내지는 결정들을 하시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예수님의 벗으로서 우리가 제대로 걸어가야 되겠다. 이런 생각들 하신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첫째 시기의 그런 선택의 모습도 다분히 들어가고 있다 싶죠.

 

그래서 이제 이런 식으로 뭔가 분명하게 하느님의 뜻임에 틀림없다 하는 것이 밝혀지고 거

기에 쫓아서 선택하는 것을 첫째 시기의 체험이라고 얘기를 하고 선택에 있어서는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영신 수련 책에서 그러시는 거예요. 먼저 여러분들은 첫째 시기의 선택을 구해

라. 그런데 첫째 시기의 선택이 만약에 안 되면은 그러면은 둘째 시기로 넘어가라. 둘째 시

기의 선택을 구해서도 이것도 역시 안 이루어지면은 그 다음에 셋째 시기의 선택으로 들어

가라. 이런 식으로 순서를 밟아 놓으신 거예요.

 

# 첫째 시기의 선택을 구하고 그것이 안 될 때 둘째. 셋째 시기의 순서로

 

그런데 그게 꼭 우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시기의 체험을 하는 사람하고, 둘째 시기 체험을 하는 사람하고 살아내는 모습은 사뭇 다르

겠다 싶은 거예요. 여러분들도 그렇겠죠. 바오로 사도 같은 그런 체험을 만약에 내가 한다면

은 그래서 사울이 바오로로 변하는 이런 체험이 만약에 내한테 일어난다면은, 마태오 복음

사가가 불림 받는 이런 체험들이 내한테 일어난다면은, 이냐시오 성인의 그 환시 체험 같은

것이 내 안에 일어난다면은 훨씬 더 강한 힘으로 살아낼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첫재 시기 하는 것이 좀 예외적이고, 좀 더 심하게 얘기하면은 뭐 기

적 비슷한 그런 체험이고 감히 우리 같은 필부들은 흉내도 못 낼 언감생신 그냥 성인, 성녀

들이나 돼야 이런 놀라운 신비체험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이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는 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아닌 것 아닌가 싶어요. 그 체험의 내용을, 강도를 그러니까 위안

을 맛보는, 신비체험의 그 강도를 조금만 떨어뜨리면은 우리도 첫째 시기의 체험을 할 수 있

는 것 아닌가? 그러고 우리 주위에서도 제법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닌가?

 

여러분들도 결혼을 하셨으니까 결혼하셨을 때 예, 뭐 그런 속된 말로 그럴 수도 있죠. 야, 나

가면은 발에  채이는 게 돌하고 남잔데 왜 하필이면 이 남자하고 결혼했냐? 그랬을 때, 우리

가 보통 표현 하느 거. "몰라, 나도 모르겠는데 맞선을 보라고 오빠가 하도 시집가라고 닥달

을 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오빠 체면 세우느라고 나가서 이 남자를 한번 턱 봤는데 그냥 딱

보는 순간 뭔가 모르게 "이 남자가 내 남자인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결혼

했다. 뭔가 모르게. 잘 모르겠는데.

 

경상도 문디 버전으로 하면은 우짠지 ^^*~~~ 우짠지 이 사람이 내 사람인 것 아닌가? 어떤

그런 이야기들.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은 안 되는데 뭔가 안에서 내적 움직임이 있고

"아, 그냥 내 길이 이거야."  그게 무슨 아주 놀라운 신비체험이고, 탈혼 체험이고 그런 것 아

닐지 모르지마는, 뭔가 모르지마는 내 길이 이 길이 아닌가? 하고 탁, 그런데 그점에 대해서

는 내가 어떻게 다른 생각을 못하겠더라.

 

꼭 진짜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했냐? 이래 물으면은 뭐라고 대답할 말은

없겠지마는. 그런데 그냥 보니까 그런 것 같더라. 이게 수도자가 되고, 성직자가 되고, 우리

성소 체험을 한다 이러면서 성소 체험 나누기도 하고 그러죠. 이런 것들도 이래 들어 보면

은 첫째 시기의 선택에 쫓아서 들어온 사람들이 제법 많이 보이는 거예요. 놀라운 체험은

아닐지 모르지마는. 적어도 제 경우에 제가 수도회의 문을 두드린 것을 봐도 저는 이거 첫

째 시기 체험이다 이렇게 보여지는 거예요.

 

첫째 시기 체험하고, 둘째 시기, 셋째 시기하고 뭐가 다른가 이래 보면은 나중에 또 설명을

하겠지마는 첫째 시기, 우리가 무슨 결혼을 해서 살아가든, 신부가 돼서 살든, 수도 생활을

하든 사람 사는데 어디 어려움이 없겠어요?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고, 위기들이 있고 그러

죠. 그런데 첫째 시기에 의해서 선택을 한 사람들, 뭔가 모르지마는 이 사람이 내 남편인 것

아닌가? 내 아내인 것 아닌가? 하고 결혼을 해가 살면은 결혼하면서 지지고 볶고 온갖 난리

들을 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막 죽일 듯이 싸우고 그렇게 해도 갈라설 생각 안 하는

것 같애요.

 

맺어진 것 이거는 그냥 당연한 대전제로 깔고 그러고 치고박고 싸우는 거지. 치고박고 싸운

결과 이혼하자. 도장 찍어라. 이런 식은 안 한다. 수도생활을 해도 어려움이 막 있고 이럼에

도 불구하고 어려움이 좀 부딪치면은 아, 이거 내 길이 아닌 것 아닌가? 하고 옷 벗어버릴려

고 하는 것. 이거는 대개 보면은 둘째 시기, 셋째 시기에 입각해 가지고 선택한 사람들이 벌

이고 있는 모습이고 첫째 시기의 선택의 사람들은 함부로 그런 식으로 바꾸는 결정들을 안

하는 것 같애요.

 

# 첫째 시기에 선택한 것은 함부로 바꾸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는 바람직하고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다. 그런데 이제 이때

이 상상적인 비전하고는 좀 구분을 해야 되요. 곧잘 사람들이 상상적인 비전 하는 거. 뭔 소

리인고 하니까 기도 중에 아까 이냐시오 성인 고기 환시처럼 나도 환시를 봤는데요. 기도 중

에 예수님 목소리를 들었는데요.

 

# 첫째 시기와 상상력 비전 구분하기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날러더 지금 아파트 있는 거 팔고 그 돈을 가지고 몽땅 주식 투자를

하라는 이야기를 분명히 내 귀로 들었는데요. 이게 하느님의 뜻이었는데요. 이런 경우.

환시, 환청 이런 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첫째 시기에 입각해서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이 문제. 이거는 대단히 조심해야 되고 어렵다.

 

신자들 경우에 왕왕 그런 경우들을 보죠. 기도 중에 어떤 것을 봤습니다. 혹은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게 하느님의 뜻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럴 경우에 그것이 과연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분간하기가 좀 힘든 거예요. 그리고 이게 하느님의 뜻인지 정말 그렇게 분명한가

이 점에 대해서도 참 자신이 없고 그저 주관적인 자기 개인적인 체험에 지나지 않는데 그걸

가지고 너무 강변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느낌을 받게 되죠.

 

그래서 조심해야 된다. 그다음에 첫째 시기의 체험이라고 이야기할 때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가? 사전에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처럼 그런

큰 위안 체험을 하고 거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야 되는가? 이래 생각을 했을 때, 아까

이냐시오 성인의 고기 환시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전에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하고 첫

째 시기 선택하고는 반드시 결부지을 것은 아니다.

 

#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이 첫째 시기의 선택에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당연히 두 개가 같이 벌어질 수도 있죠.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밝혀

지고 이런 경우가 같이 일어날 수는 있지마는 반드시 그런 사전의 원인이 없는 영적 위안이

있어야만이 첫째 시기의 선택이 된다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죠. 구분해서 생각해야 될 것

아닌가? 그런데 이제 이런 첫째 시기의 선택 작업을 했는데 결과가 안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은 둘째 시기로 넘어간다. 둘째 시기는 뭔가 하면은 영적 위안이라든지, 영적 고독이

번갈아 가면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영적 위안이나 고독의 움직임을 보면서 하는님

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것. 이게 우리가 보통 체험할 수 있는 내용들이기도 하죠.

 

#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둘째 시기: 영적 위안과 영적 고독의 움직임을 통해 선택

 

예컨대 젊은 애들이 내가 수도생활을 좀 해 볼까? 하느님께서 이런 쪽으로 부르시는가?

그래 가지고 피정이라도 떡 들어가서 8일 피정을 만약에 하고 있다면은, 오늘은 기도 중에

막 위로도 많고 야, 이거 진짜 하느님께서 나를 수녀원으로 부르는 것 같다. 그래서 수녀회

에 들어가야 되겠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위로도 맛보고 막 힘도 나고 이랬는데,

 

웬걸 하룻밤 자고 나니까 그 다음 날 바깥에 보니까 비는 막 추적추적 내리고, 마음은 스산

해지고, 가라앉으면서 그냥 뭐 수도복 생각하니까 현기증이 날 것 같고, 다 귀찮고, 힘도  쭉

빠지고. 그래서 하, 이건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 같다. 뭐 이런 식의 마음들이 올라왔다 내려

갔다 파도를 타면서 계속 움직이는 거예요. 그 움직임들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가운데 하는님

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가 봐라. 그러면서 선택한다. 이 이야기거든요.

 

# 영적 움직임을 잘 살피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지를

                               보고 선택하도록

 

그런데 이제 그랬을 때 이 둘째 시기에서는 이냐시오 성인께서 영신수련 지침서라는 게 있

는데 그 영신수련 지침서 책에 보면은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는 게 둘째 시기의 선택을 할 때

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묵상을 계속하면서 위안 중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

는지를 봐야 한다. 이렇게 돼 있는 거예요.

 

# 둘째 시기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위안 중에 하느님께서

                         어디로 이끄시는지를 보도록

 

먼저 중요한 것 하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 내지는 복음관상

기도를 계속한다. 이거는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점점 더 닮아갈 것 아니냐 하는 거예요.

다른 기도도 아니고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계속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은 예수님의

생각이라든지, 예수님의 행동하시는 모습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점점 보고 닮게 되고 우리

안에서도 신망애  삼덕고 많이 자라게 되고 하느님의 뜻을 쫓고자 하는 열정들도 막 올라오

게 되고 그러면은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해질 것 아니냐 하는

거예요.

 

# 복음 관상 기도를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게 된다

 

예수님보다도 아버지의 뜻을 잘 식별하고 선택한 사람은 없으니까 예수님을 닮으면은 그

만큼 우리의 선택은 올바른 선택이 될 것이다 하는 거죠. 그래서 둘째 시기의 선택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도를 거듭거듭 해 나간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위안 중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 선신께서 어디로 이끄시는지 봐라.

 

그리고 고독 중에 있었을 때 또 역시 어디로 이끄시는지 봐라.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건 무슨 소리인고 하니까 영적인 위안을 맛보고 있는 동안에 선신께서 혹은 성령께서 그

영혼을 이끄신다.

 

# 영적 위안을 맛보는 동안 성령이 이끄시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위안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쫓아서 하느님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고 끄집어

당기신다 하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그렇게 끄집어 당기시다 보니까 그 식별을 하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의지적인 충동, 마음의 이끌림 이런 것들이 강하게 움직이는 거예요.

즉, 뭔가 하고 싶다. 하, 이러고 싶다. 저러고 싶다. 결혼을 하고 싶다. 수도회에 가고 싶다.

무슨 직장을 바꾸고 싶다.

 

이런 선택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서 위안 중에 있을 때 이끌림이 온다. 어디로 이끄는지

보라 하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의 뜻일 가능성이 크다 하는 거죠. 그런데 또 고독 중에 있

을 때도 또 어디로 이끄시는지 봐라. 이러시는데 고독 중에 하느님께서 어디로 이끄시는지

봐라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고독 중일 때는 또 악신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

 

# 영적 고독 중에는 악신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를 보도록

 

위안 중일 때는 주로 선신이 움직이고, 고독 중일 때는 주로 악신이 움직인다. 그래서 어디

로 이끌고 있는지 봐라. 이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거예요.

그래서 이 영신 수련 책을 보면은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영의 식별에 가서 보면은 [318}

번에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 1중에 다섯째 규범이예요.

 

# 영신수련 [318] '선신과 악신을 분별하는 규범'

  위안 상태에서는 주로 선신이 우리를 지도하고 권고하고, 고독한 때에는 주로 악신이

  책동하는데, 악신의 권고를 따라서는 결코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없다

 

이 말은 즉, 선택을 할려고 하는 사람 안에서는 대개 그냥 양자택일 정도겠죠. 이 A를 택할

까? B를 택할까? 이 길을 갈까, 저 길을 갈까? 이러면서 막 갈등하고 고민을 할 거예요. 그

랬을 때 아, 이러고 싶다. 혹은 저러고 싶다. 이런 마음의 움직임이 올라오겠죠. 이끌림이

있겠죠. 이게 아무것도 안 생기면은 선택 못할 것 아니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이끌림이 이렇게 올라올 때 선신 내지는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것을 따라가야

되는데 도대체 이런 A를 향한 이끌림이 이렇게 올라온다며은 도대체 이 이끌림이 선신으로

부터 온 것인지, 악신으로부터 온 것인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어떻게 아느냐 하는 거

예요. 이걸 알아야 되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 선택을 향한 이끌림의 근원을 따져봐야 한다

 

어떤 이끌림이, 막 이러고 싶다 하는데 그게 만약에 악신으로부터 오는 거라면은 이 길을

쫓아갔다가는 오히려 망치는 경우가 생기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끌림이 있을 때 그 근원이

어디로부터 비롯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따져봐야 된다. 선신으로부터 오는가? 악신으로부

터 오는가? 그때 이 선신을부터 오는 움직임을 따라 가야 되고, 악신으로부터 오는 움직임

을 따라가서는 곤란하다.

 

자, 그러면은 어떤 이끌림이 일어났을 때 선신으로부터 오는 생각과 악신으로부터 오는 생

각이 다르다. 그리고 선신으로부터 오는 권고, 혹은 조언 이것과 악신으로부터 오는 어떤

권고, 조언 이런 것들이 다르다.

 

■ 선신의 조언과 악신의 조언 구분하기

 

여기에 우리는 착안을 해 가지고 중요한 것은 이런 권고라든지 무슨 책동을 한다든지 이럴

때 이것을 조언이라고 표현을 하면은 조언을 하는 거예요. 선신도 "야, 이게 좋으니까 너,

이렇게 하는 게 좋아." 악신도 "너, 이게 좋으니까 이렇게 하는 게 좋아." 양쪽에서 막 이런

식으로 조언, 카운셀링을 해 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조언의 내용을 보면은 그 안에 의지적인 충동이 먼저 한 요소로 들어 있는 거예요.

이끌림 하는 것. "이렇게 해라. 이렇게 해라." 하면서 그런 마음이 우리 안에 이렇게 솟아오

르도록 이 의지적인 충동이 하나 있고 거기에 덧붙여서 사실적인 판단. 이 판단 하는 것은

이거는 선신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이것이 올바르고 좋은 것이야 하는 이런 어떤 판단들,

 

혹은 아, 이거는 악신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좋지 않은 것이야. 내 성장에 오히려 방해

가 되는 것이야 하는 그런 판단들. 이것을 같이 하고 있는 거예요. 선신이나 악신의 움직임

들은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내 안에 어떤 충동이 이렇게 올라오면은 아, 이게

그 충동과 더불어서 아, 이거는 올바르고 좋은 거야. 혹은 이거는 올바르지 않고 나쁜 거야.

이런 식의 판단까지도 선신이나 악신이나 함께 한다.

 

그래서 마음의 이끌림과 그런 판단들을 동시에 고려하는 가운데 아,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

는 이 이끌림이 선신으로부터 오는 것이구나, 악신으로부터 오는 것이구나,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구나. 이런 것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 마음의 이끌림과 사실적 판단을 동시에 고려하는 가운데

                                                   선신의 조언과 악신의 조언을 분별

 

이런 점에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둘째 시기에는 이런 작업들

을 통해서 우리는 식별을 해야 된다. 그런데 그렇게 식별을 떡 하는데 이제 둘째 시기까지

했는데도 뭐가 감이 안 잡히는 거예요. 뚜렷하게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지 않는 거예요. 그

러면은 이제 셋째 시기로 넘어간다. 이 셋째 시기는 좀 전에 우리가 봤다시피 첫째 시기나

둘째 시기는, 첫째 시기는 아주 어떤 면에서는 강한 영적 체험, 하느님의 뜻임에 틀림없다

하는 그런 영적 움직임이 있죠. 영적 식별이 되는 거예요.

 

둘째 시기에는 영적 위안이나 영적 고독과 같은 이런 또 움직임이 있죠. 즉 첫째 시기와 둘

째 시기에는 이거는 전부 영적 분별을 통해서 선택하는 거예요. 영적인 움직임들이 있는 거

예요. 안에서. 내면의 움직임이. 그런데 셋째 시기는 이런 영적 움직임이 없는 거예요.

 

#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셋째 시기: 1) 영적 움직임을 통한 분별인 첫째. 둘째 시기와

             달리 영적 움직임 없이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서 이성으로 분별

 

마음이 평온할 때 영적인 위안이 따로 있지도 않고 영적인 고독이 따로 있지도 않고 이런

식으로 영적으로 움직임이 없고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할 때 이때는 이성을 사용해서. 영

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식별하는 것이 아니고 이성을 통해서 식별한다. 이미 셋째 시기인

거예요. 그래서 셋째 시기에서는 주로 이성을 통해서 하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선택

대상에 대해서 하나의 명제를 만들죠.

 

내가 결혼을 할까? 수도회에 갈까? 결혼을 하는 게 좋겠다. 나는 결혼을 한다. 결혼 하기를

원하다. 이게 하느님의 뜻인지 식별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선택을 해서 갈려고 할 때

여기에 대해서 긍정적인 요소, 플러스적인 요소와 마이너스적인 요소. 어떤 상황이든지 +

- 가 이렇게 있겠죠. 좋은 점과 나쁜 점들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결혼을 했을 때 좋은 점이 뭔지, 외롭지 않다 뭐 그런 거 하며 주욱 적을 수 있죠.

그다음에 부정적인 거. 뭐 남편한테 매이는 것. 뭐 자유가 없다. 남자 같으면은 돈벌어도

내 맘대로 못 쓰고 부인한테 갖다 줘야 된다. 뭐 이런 것들이 부정적인 요소로 등장할 수

있겠죠. 어쨌든 자기가 이렇게 봤을 때 이 명제에 대해서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생각나는 대로 쭈욱 적어가면서 그점에 대해서 이렇게 곰곰이 생각들을 좀 해 보는 거예요.

 

 

 

그래서 긍정적인 요소가 더 강한지, 부정적인 요소가 더 강한지 그 무게를 달아보는 거예요.

그래서 무게를 달아봤더니 긍정적인 요소가 더 강하다 그러면은 결혼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부정적인 요소가 더 강하면은 아, 이거는 결혼을 안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거죠.

 

# 부정적인 요소보다 긍정적인 요소가 강한 것을 선택

 

그런데 이때 마음이 평온해야 된다 이러는데 이 말마디기 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거예요.

우리는 실질적으로 피정지도를 이렇게 해 보면은 피정 동안에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이런 작업에 딱 들어가 있을 때, 그저 그냥 마음이 안 움직이고 있는 경우들이

있는 거예요. 그냥 뭐 별, 결혼을 하는데 대해서 좋다는 마음도 안 올라오고, 싫다는 마음

도 별로 안 올라오고, 그저 그냥 조용한 거. 그렇게 조용하다면은, 그래서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다면 아, 이게 그냥 셋째 시기인 모양이다. 이렇게 쉽게 이야기 하기는 좀 어려움이

있는 것 아닌가?

 

# 마음이 평온하다는 것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러니까 뭔 소리인고 하니까. 영적인 어떤 깊이의 수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은 이런 첫째 시기나 둘째 시기처럼 영적인 움직임들을 보고 식별할 수 있는 그런 좀

차원 높은 단계가 아니고 이런 것들이 없는 가운데 그냥 좀 어떤 면에서는 다소 좀 멍하다

고 그럴까? 맹하다고 그럴까?

 

이런 가운데 별 움직임 없이 고요하고 평온하게 있으면은 자, 이게 셋째 시기의 선택에 적

합하다. 이런 식으로 들어갈 게 아니고 오히려 영적인 위안이라든지, 고독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세차게 경험을 하고, 알아듣고 있는 이런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끌어안고 뛰언넘은

가운데서 움직임이 없는 것.

 

# 마음이 평온하다는 것은 영적 고독과 위안을 뛰어넘은 평온함이다

 

그러니까 이게 평온하다. 마음이 평온하다. 이래 가지고 우리처럼 살아가면서 근심 걱정이

별로 없어서 그냥 오늘은 뭐 그냥 괜찮은데요. 평온하고 좋은데요. 대충 뭐라고 그럴까?

가볍다고 그럴까? 얕다고 그럴까? 이런 차원에서의 평온함보다는 훨씬 깊은 차원의 평온

함을 이야기 하는 것 아닌가? 물론 또 그렇다 해 가지고 이때 그 평온이 위안이나 고독은

일절없이 명경 유리알처럼 평온한 것.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야 된다. 그런 것도 아닌 거예요.

 

어느 정도의 움직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선택을 하는데 영향력을 안 미칠 정도의

움직임만 있으면은 그건 평온한 상태로 보면 되낟. 그런데 이제 그렇게 평온하다고 했을 때

주의 해야 될 점은 결혼한다 뭐 이랬을 때 좋은 점, 나쁜 점 이런 것들을 그저 자기의 주관적

인 취미나 기호 거기에 따라서 뭐 이런 점을 아주 크게 평가하고 저런 점을 아주 왜소하게

평가하고 이러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 모토인 거예요.

 

# 이성을 통한 식별은 나의 취향을 따르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것은 어느 정도로 중요한 요소인가? 또 이거는 어느 정도로 방

해가 되는 요소인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이 잣대를 가지고 플러스 항목이나 마이

너스 항목의 각 항목들을 체크하는 거예요.

 

자, 이제 여러분들 쯤 되면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히여 하는 이 이야기도 그저 추상적

이고 하늘에 떠 있는 하느님이 아니고 내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 내 자신의 타고난 생명,

이것을 최대치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그것을 위해서 이

런 요소들이 얼마만큼 중요하고 덜 중요한가? 이런 것들을 면밀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다는 것은 내 고유한 아름다움과 생명을 극대화 하는 것

 

이런 점에서 이 셋째 시기는 좀 더 성숙한 모습들, 이런 것들이 전제가 돼 있어야지 그저

그냥 별  생각 없는데요. 이래 가지고는 오히려 올바른 판단을 그르칠 위험들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셋째 시기에서 주의해야 될 점은 이런 점이고. 그런데 이 셋

째 시기에 보면은 영신수련 책을 보면은 셋째 시기 안에,

 

  

 

 이런 방법이 하나 있고, 그다음에 또 크게 두 번째 방법이 하나 있는데 두 번째 방법은 니가

만약에 딴 사람이 와서 니한테 자문을 구한다고 친다면은 니가 어떻게 판단을 해 주겠느냐?

즉 상대방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오직 사심없이 제3자적인 입장에서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그 사람의 구령을위해서 어떻게 이끌어 주는 것이 좋겠다 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 그것을 너

자신에게 적용해라.

 

#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셋째 시기: 2) 다른 이에 대한 판단을 내 경우에 적용해

              보거나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고 가정하고 선택

 

이런 것이라든지 혹은 니가 만약에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 봐라. 그래서

내가 곧 주님 대전에 불려 간다고 생각을 한다면은 니가 지금 어떤 것을 선택할래? 그것을

생각을 해 보고 그걸 또 너 자신한테 적용을 해라. 이거는 두 개가 완전히 별개의 방법이

아니고, 두 번째 이런 방법이 첫 번째의 이 방법을 보충해 준다 할까,보완해 준다 그럴까

그런 식으로 작용을 하는 거라고 보여지죠.

 

그런데 우리가 이래서 첫째, 둘째, 셋째 시길를 보는데 크게 첫째 시기, 둘째 시기 때 더더

욱 그렇지마는 우리는 이거를 식별을 할 때 첫째 시기만 해도 하느님의 뜻임에 틀림이 없다

하는 것이 분명할 때 그거를 첫째 시기의 선택으로 잡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식별

작업들을 해야 되는 거예요.

 

# 하느님의 뜻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들더라도 식별 작업은 필요하다

 

내가 진짜 이것을 하느님의 뜻임에 틀림없다고, 정말 명명백백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틀림

없는가? 올바르게 내가 판단하고 있는가? 진짜 내 안에서 그런 영적 체험이 있었는가? 하

느님께서 나를 이쪽으로 이끄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아듣고 있는가? 이런 것들.

 

그다음에 뭐 둘째 시기 같으면은 영적 위안, 아까 참 이 첫째 시기나 둘째 시기 마찬가지이

긴 한대 위안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 위안과 그다음에 이끌림 하는 이런 움직임이 동시적으

로 존재해야 되는 거예요.

 

# 위안과 이끌림이 동시에 일어났는지 확인

 

위안이 끝나고 나서 그다음에 이런 이끌림, 의지적인 충동이 일어났다든지 아니면 위안이

오기 전에 그런 이끄림이 일어났다든지 이러면은 그건 아닌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들이

제대로 맞는지, 위안 중에 이런 이끌림이 일어나서 즉, 위안과 조언이 동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지, 이런 것들도 식별을 하고 여러 가지들을 엄밀하게 식별을 해야 되고 식별은 대단히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하는 거예요. 예,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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