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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말씀의초대 2014년 7월 20일 주일 [(녹) 연중 제16주일]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20 조회수70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4년 7월20일 주일

 

[(녹) 연중 제16주일]

 

성 아폴리나리스 주교 순교자 기념 없음 (농민 주일)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1995년

 추계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날 교회는 농민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억하면서 도시와 농촌이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맞갖게 살도록 이끈다.

각 교구에서는 이 농민 주일에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여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과

창조 질서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오늘 전례
▦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에서 새들이 쉴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라나고, 눈에 띄지 않는

누룩이 있어야 풍성한 빵을 만들 수 있듯이,

하늘 나라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곳에 이미 와 있습니다.

하늘 나라의 풍성한 결실로 초대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이 미사에 기쁘게 참여합시다.

 

말씀의초대

사람이 주님의 정의와 심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주님의 힘이 정의의 원천이며

주님만이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을 지니시고 그것을 돌보신다.

주님의 심판은 너그러우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서 친히

나약한 우리를 대신하여 탄식하시며

간구해 주신다고 고백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를 알려 주신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나 나무가 되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

누룩은 밀가루 속에 들어가 그것을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한다.

 

◎제1독서

< 하느님께서는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12,13.16-19

13 만물을 돌보시는

당신 말고는 하느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불의하게 심판하지

 않으셨음을 증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16 당신의 힘이 정의의 원천입니다.

당신께서는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을 지니고

 계시므로 만물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17 정녕 당신의 완전한 권능이

불신을 받을 때에만 당신께서는

 힘을 드러내시고,

그것을 아는 이들에게는

오만한 자세를 질책하십니다.


18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저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당신께서는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19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86(85),5-6.9-10.15-16ㄱ(◎ 5ㄱ)
◎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이시옵니다.
○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주님, 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애원하는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이시옵니다.



○ 주님, 당신이 만드신 민족들이 모두 모여 와,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 이름에 영광을 바치리이다.

당신은 위대하시며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당신 홀로 하느님이시옵니다.
◎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이시옵니다.


○ 주님, 당신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하느님,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와 진실은 넘치시나이다.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이시옵니다.

 

◎제2독서

< 성령께서는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26-27
형제 여러분,

 

26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27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마태 11,25 참조
◎ 알렐루야.
○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24-43<또는 13,24-30>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24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31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36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묵상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세상에 대하여,

그분께서 세상을 돌보는 방식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곤 합니다.

이 질문은 고통스러우며,

신앙생활의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는,

주님께서는 의롭고 너그럽게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인이시기에,

그분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의문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권고합니다.
사실 이것이 인생의 참된 지혜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혜에는 낙관주의적

환상으로 도피하는 것으로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각고의 노력과 인내의 시간을 통하여 세상의

 어두움 속에서도 빛나는 주님의 자비와

정의를 볼 수 있는 습관과도 같은

확고한 정신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삶을 확신 있게 이끄는 지혜가 우리의

 ‘습관’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존재의 습관』이라는 서간집을 낸

 미국의 뛰어난 가톨릭 작가 플레너리

오코너가 젊은 작가들에게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하여 조언한 말에서

앞의 질문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작가는 먼저 소설을 쓰는 것과

 신앙의 문제가 자신에게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밝힙니다.

“소설처럼 긴 글을 쓸 때에는,

 자신에게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가장 중요한 문제 이외의 것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는 늘 성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마음과 현대라는 시대에

충만해 있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불신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이

그 중대한 문제에 해당합니다.”
그녀의 이러한 소설 창작의

태도에 대하여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는 다음과 같이

 음미하고 있습니다.

“어떤 직업에도 계속해

나감으로써 자신의 것이 되는,

습관이라고도 말하고 싶은

 기능의 축적이 있는데,

그것이 일찍이 만난 적이 없는

어려움을 자력으로 극복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매일 소설을 쓰는 습관도

시간을 들인 경험으로

 길러짐으로써 쓰는 사람의 인격

그 자체가 되고 살아갈 마음의

 준비를 해 줍니다.

그것이 신앙을 지탱해 준다고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소설 창작에는

 꾸준한 생활 습관이 필요합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자비와

정의를 확신할 수 있는 지혜가

우리 ‘존재의 습관’이 되려면

‘이것이 참으로 삶의 중요한 문제’

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조급하게 답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 답이 자신의 가슴속에서

자라날 수 있게 하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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