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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밀과 가라지 구분법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20 조회수1,501 추천수6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연중 제16주일

<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


복음: 마태오 13,24-43







그리스도(Young Jew as Christ)


렘브란트 작, (1656), 베를린 국립 박물관


     < 밀과 가라지 구분법 >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이란 소설로 영국 문학계에 길이 남게 된 여성 작가입니다. 2017년부터 10파운드 신권지폐에 얼굴이 새겨질 정도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오만과 편견은, 물론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제 나름대로는 오만은 남자 주인공의 특성, ‘편견은 여자 주인공의 특성을 생각하며 썼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오만하면 편견도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사랑이란 것이 시작되기 전의 남녀의 마음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벳이라는 주인공은 매우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여인입니다. 사람을 첫인상, 사교성, 가치관, 사용하는 언어와 제스처 등으로 정확하게 판단하는 여인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걸려들어 가장 안 좋게 판단을 받는 남자가 엄청난 재벌이자 미남인 다아시 씨입니다. 다아시는 물론 돈도 많지만 무표정하고 사교성 없고 거만하게 사람을 깔보는 오만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둘이 조금씩 사랑에 빠지게 되자, 엘리사벳은 거만하고 오만하게만 보였던 다아시 씨에게서 숨어있던 따듯하고 배려 깊은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오만하게만 보이던 다아시가 엘리사벳 앞에서는 한없이 낮아지는 겸손한 모습을 보입니다. 엘리사벳은 이런 다아시 씨를 보며 지금까지 판단해 왔던 모든 것이 일순간에 허물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사랑은 둘을 더 겸손하게 만들어 상대를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일 줄 아는 한 쌍의 완전체로 만드는 힘을 지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여러 비유를 통해 설명해 주십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은데 그 씨가 뿌려지면 저절로 자라나서 새가 쉬어갈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자신 안에 뿌려지면 다른 이들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언가를 우리에게 뿌려주시는 분은 당연히 그리스도이십니다. 씨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 즉 성령이시고,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받는 그분의 씨가 우리 안에서 변화와 행복의 열매를 맺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분을 만나야만 내 자신의 오만과 편견이 사그라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여인이 밀가루 반죽에다 누룩을 넣는 것과 같습니다. 밀가루가 자기 혼자 부풀어 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안에 누룩을 넣어야하는데, 그 누룩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이신 것입니다. 그 성령이 내 안에서 작용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는 하늘 나라를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정의와 기쁨과 평화라고 정의합니다. 성령을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기에 하느님나라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참 행복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가장 어려운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마지막 날에 밀은 천국으로 가라지는 지옥으로 보내진다는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처음부터 밀은 밀이었고 가라지는 가라지였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밀은 그리스도를 만나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가라지는 그런 척 하는 사람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사람이 세례를 받지 않은 다른 종교의 사람이거나 혹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가라지와 밀은 처음엔 서로 구별이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 신앙인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마지막에 가서야 참 신앙인이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사람이 가라지인 것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대표적인 인물이 가리옷 유다였습니다. 처음엔 밀과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이 가라지였음을 스스로 드러내었습니다.

밀과 같은 인물은 많은 제자들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리마테아 사람 요셉과 니코데모를 들고 싶습니다. 그들은 암암리에 그리스도의 제자로는 살고 있었지만 유다처럼 대놓고 그리스도를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워낙 가진 돈이나 명예가 많은 이들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로 그런 것들을 잃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그 처참하게 처형당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임을 밝히고 그의 시신을 내려 자신들의 무덤에 옮겨 장례를 치렀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알았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마지막 순간에 이 세상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그리스도를 팔아넘겼습니다. , 가라지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죽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제인 오스틴이 오만과 편견이란 소설을 쓰게 된 소재는 바로 자신의 경험에서였습니다. 제인은 평생 미혼으로 살기는 했지만 한 오만한 사람과 사랑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가 비커밍 제인입니다.

제인은 오만과 편견의 여 주인공 엘리사벳처럼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시골 처녀였고 당시엔 잘 받아들여지지 않던 여성 작가였습니다. 집이 가난하여 재정난이 심했지만 그것 때문에 기가 꺾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 부잣집 외동아들이 자신에게 청원을 하지만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이 여인은 그 청원을 거절합니다.

그러던 중 도시에서 온 톰이라는 거만한 변호사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가 자신의 소설도 무시하고 바람둥이 끼도 있지만 왠지 그에게 끌려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톰도 사실은 대법관인 삼촌 때문에 근근이 많은 가족을 부양하는 가난뱅이 변호사였습니다. 삼촌이 돌봐주지 않으면 톰과 가족은 굶어야만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삼촌은 가난한 글쓰는 여인과의 혼인을 반대합니다. 물론 톰도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삼촌이 원하는 여인과 약혼을 하게 됩니다.

제인은 사랑을 위해 아무 것도 포기하지 못하는 톰을 원망하며, 자신도 가족을 위해 부잣집 외동아들의 청혼을 수락합니다.

둘이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는 했건만, 현실의 벽 앞에서는 한없이 무너지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그 현실의 벽에서 먼저 무너져버린 톰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톰은 갑자기 제인을 찾아와 서로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서 불행해지지 말고 함께 도망쳐 다시 시작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둘은 가족과 모든 것을 버리고 멀리 도망을 시도합니다. 그러던 중 톰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읽습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처지가 안 좋은 톰의 가족의 형편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가족도 마찬가지지만, 톰의 가족에게 톰이 없으면 그 가족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합니다.

결국 이번에는 제인이 먼저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고 각자의 길로 가자고 하며 톰을 떠납니다. 자신도 톰도 결국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이렇듯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당사자들을 재촉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오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밀과 가라지가 구별될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결국 열매를 맺을 때구별됩니다. 그 전에는 가라지가 밀과 구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참 사랑인지 아닌지 구별이 될 때는 그 사랑이 가장 충만한 때입니다. 그만큼 더 많은 것을 포기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밀이었음을 증명한 때는 바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때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는 것처럼, 열매란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목숨을 바칠 때 비로소 참 열매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리옷 유다는 죽어야 할 때, 죽기를 거부했습니다. 그것이 가라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막상 목숨을 바쳐야 할 때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가라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골고타 언덕까지 오를 수 있는 사람이 밀입니다. 골고타를 오른다는 의미는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상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와 똑같은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밀인지 가라지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잃게 만들고 목숨까지도 요구하실 때 아멘!’하고 응답할 수 있는지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위해 얼마만큼 포기할 수 있습니까? 평생 성당을 다녀도 회사가 부도가 나거나 자녀가 갑자기 죽는 등의 큰일을 당했을 때 자신에게 그런 고통을 주는 하느님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스스로 가라지였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목숨까지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다고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지 못하는 사람도 밀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날에 가라지로 밝혀지는 일이 없도록, 지금 당장부터라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을 통하여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는 그런 많은 열매를 맺는 밀로 자라나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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