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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제23강 예수님의 수난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7-31 조회수1,525 추천수3 반대(0)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 한국clc에서 [이냐시오 성인이 평신도에게] 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성바오로 출판사

평화방송 다시보기

http://web.pbc.co.kr/CMS/tv/program/pro_sub.php?src=%2FCMS%2Ftv%2Fprogram%2Fview_list.php%3Fprogram_fid%3D5653%26menu_fid%3D5657&program_fid=5653&menu_fid=5657&cid=&yyyymm=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23강 예수님의 수난

 

■ 오늘 이야기 ... 삶의 부정적인 면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여러분들은 사는 게 행복하세요? 어쩌면은 기쁨이라든지, 행복함 이런 것 보다는 슬픔이나

아픔이나, 고통 심지어 죽음 이런 것들로 인해서 시달리는 것이 훨씬 많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이런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것들을 어떻게 소화시켜 내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고 여겨지죠. 예수님의 수난 사건과 관련지어

서 이점을 한번 깊게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 시작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의 긴 영적 여정에 함께 하시면서 필요한 은총들을 더해 주시어 감

드립니다. 이제 저희들 둘째 주간을 마감하고 영신 수련의 셋째 주간, 예수님의 수난을 관상

하는 주간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저희들 일상의 삶에서 부딪치고 있는 여러 가지 아픔들,

슬픔들, 괴로움들, 고통들 이런 것들을 예수님의 수난에 비추어서 어떻게 알아듣고 해석

해야 되는지, 어떻게 대처하면서 나아가야 되는지 저희들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열어 보여

주시고 기꺼이 그 수난을 받아들이고 걸어갈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더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영신수련 흐름 안에서 셋째주간의 위치
    - 부정의 길을 통한 사랑의 절정 체험
    - 첫째주간 기도로 돌아가선 안된다
    - 하산할 채비할 것 아니다

2. 수난 기도에 있어 유의할 점
    - 선입견 없는 기도
    - 개념화의 위험성         
    - 수동적 기도 : 예수님도 말씀을 거의 거두심
    - 피정 때 수난 종결점을 정해 놓을 필요성

3. 수난의 신비에 대한 좀더 깊은 이해
    - 陰의 가치에 대한 적극적 수용 : 관점의 변화를 더욱 견고하게 다짐
    - 둘째주간과는 철저히 다른 행동양식을 취하시는 예수님 : 게세마니 고통의 핵심.

       대승적 차원에로 승화되는 예수님의 사랑
    - 우리가 겪는 십자가의 의미들
    - 예수님 생애의 모든 단면들에 나타나고 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

4. 예수님 무덤 앞에서의 기도
    - 역사상의 예수님이 확실히 돌아가셨음을 인지함

5. 성모님과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부활전야의  모습에 대한 기도
    - 교회가 태동한 사건

 

예, 우리 지난 주에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것. 이것 가지고 3주간 계속 봤죠.

그래서 영신 수련 맨 처음에 원리와 기초부터 시작해 가지고 첫째 주간, 회상의 기도를 중심

으로 해서 첫째 주간 마치고 그다음에 둘째 주간, 그리스도 나라에 대한 관상부터 시작해

가지고 주욱 거치면서 영의 식별이라든지,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한 설명과 덧붙여서 복음에 대한 관상기도가 주욱 진행되어 왔죠.

 

# 원리와 기초-> Ⅰ주간 -> Ⅱ주간 -> Ⅲ주간 -> Ⅳ주간 -> 사랑을 위한 관상

 

이것이 아주 길게 적어도 한 달 피정을 했다면은 한 12일 정도 원리와 기초에서 소요가 됐던

거예요. 그리고 첫째 주간에서 적어도 한 7-8일 소요됐죠. 둘째 주간에서 한 12-13일 소요되

죠. 그러니까 한 20일 정도가 적어도 여기(둘째 주간)까지의 작업에 한 달이 됐던 거예요.

이제 둘재 주간을 마치고 셋째 주간, 넷째 주간 이렇게 들어가는데 오늘은 이 셋째 주간, 이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서 관상하는 주관인 거예요.

 

■ 셋째 주간 :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관상

 

그래서 수난에 대해서 한 4-5일 정도, 부활에 대해서 4-5일, 뭐 3-4일 그쯤하고 끝에 사랑

을 얻기 위한 관상 이런 것들로 마감을 하게 되겠죠. 그래 전체적인 흐름은 이런대. 예수님

의 이 수난, 이 수난 관상을 하는데 한 달 피정을 할 때 어떤 움직임들이 있느냐 하면은,

째 주간을 참 힘들어 하고, 여기에서 나 자신을 보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어두

내 모습이라든지, 죄의 성향에 잘 떨어지는 그런 내 모습. 이런 것들을 보면서 힘들어 하는.

 

그러다가 첫째 주간이  끝나면은 큰 산을 넘었다. 그다음에 둘째 주간에 힘을 내 가지고는

정서상으로는 편안하고 나름대로 괜찮은 거예요. 예수님과 막 같이 다니면서 예수님이 멋

러지게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이러는 모습들을 막 보면서 나도 용기를 얻고, 힘을 얻어

예수님과 함께 가는. 그러면서 성장해 나가는 이런 작업들을 길게 하고 나면은,

 

그다음에 이제 수난이나 부활 이때쯤 되면은 거의 하산할 차비를 차리는 거예요. 이제 뭐

첫째 주간도 지났고, 둘째 주간까지 지났으면은 영신수련의 큰 흐름은, 큰 산들은 다 넘었다.

이제 수난에서 잠시 슬픈 표정을  좀 짓고 있다가 부활에서 웃으면서 끝내면 된다. 이쯤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경향들이 적잖게 보이는데 그러면은 곤란하다 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이 수난에 대해서 수난과 부활 이것을 제대로 알아듣지 않으면은 우리가 지금

까지 긴 시간 작업해 왔던 것이 완전히 도로묵이 될 위험성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수난

신비를 잘 알아들어야 된다. 그러면서 이 예수님 수난 관상을 할 때 우리가 곧잘 하는 이야

기가 수난 관상에 들어간다 이래 가지고 곡소리부터 내려고 하지 마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아예 수난 관상 들어가면은 만반의 울 준비가 돼 있는 거예요.

 

# 예수님의 수난 관상에 들어갈 때 울 준비부터 하지 않도록

 

가슴을 찟고,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해야 된다 하는 이런 의식이

딱 머리 속에 박혀 있고, 그러니까 아예 딱 들어가면서부터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곡소리

부터 낼 각오를 하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수난 관상에 떡 들어갔는데

곡소리는 커녕 마음의 움직임조차도 안 일어나는 그런 경우도 없지 않아 있죠.

 

막 10년, 20년 오랫동안 기도 생활에 정진해 온 사람들, 수도자들 같으면은 종신서원을 하고

났다든지, 신부님들 같으면은 서품을 받고 났다든지, 오랫동안 영적 진보를 이뤄왔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마음이 안 움직여지고 어려움에 부딪치고, 예수님의 수난을 보고 있는

데로 그냥 극단적으로 얘기를 하면은 마치 소가 닭 쳐다보듯이 멀뚱멀뚱 보게 되는 이런 것

들을 보면서 당황스럽기도 한 거예요.

 

내가 도대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옅어지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막 올라오기 쉽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런 것

에 대해서 어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고 오히려 주된 원인은 선입견 속에서 탁 보는 것. 수난

관상은 이래야 된다 하는 이런 선입견.

 

수난 관상에 들어가면은 무조건 울어야 되고, 눈물을 흘려야 되고, 통회해야 되고, 아파야

된다. 이러면서 딱 덤벼드니까 그게 그렇게 움직여질 때가 있는가 하면은 안 움직여질 때도

있다 하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그런 선입견 없이 들어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 선입견 없이 수난 관상에 들어가도록

 

그래서 성령께서 보여주시는 대로 그렇게 쫓아갈 필요가 있는 거죠. 이런 면에서 어떤 점에

서는 여러분들 영화 혹시 패션오브크라이스트 그 영화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그 영화,

사람에  따라서는 저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피정 중일 때는, 만약에 패션오브크라

이스트 영화를 본 사람 같으면은 관상할 때 그 영화에 대한 기억이나 이미지 같은 거 전부

지워버려라. 너무 한 면만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죠.

 

영화 이야기 자세하게 할 것은 아니지마는 예를 들면은 예수님이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시는

데 그러시다가 넘어지시고 거기에서 성모님도 만나시고 그러죠. 성모님과 예수님이 눈길이

탁 마주쳤을 때 그때 그분들의 그 눈길 속에 무엇이 담겨 있었겠는가? 이래 물으면은 뭐라고

얘기하겠어요. 그걸 무슨 슬픔이다. 아픔이다. 뭐 고통이다. 예, 그런 것도 당연히 있겠지마

는 그런 것만 있겠는가 하는 거예요.

 

한 두 마디로 그렇게 간단하게 자리메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대단히 복합

적이고, 총체적인 글자 그대로 오만가지 상념들이, 마음의 흐름들이  두 분의 그 눈빛의 교류

사이에 흐르고 있었을 것 아닌가?

 

#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관상은 슬픔이나 고통이란 한 두 마디로 묵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복합적이고 총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기도를 한다면은 각자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서 그렇게 이런

면, 저런 면을 맛볼 일이지 똑같이 울고, 똑같이 슬퍼하고, 똑같이 가슴을 찟고 이런 식으로

기도닥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죠.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개념화시켜 버린다 하는 거 이

거 조심해야 되죠.

 

# 예수님의 수난을 개념화 시키지 않도록

 

예수님의 수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러면은 뭐 이미 무슨 수난에 대해

서 다 아는 것인 양. 아, 저  자매, 저 자매 마리아 자매야. 그리고 어느 성당에 다니고 있고,

레지오 단원이야. 뭐 이쯤 몇 가지 얘기를 하면은 마치 그 자매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이

렇게 정리해 버리는 거.

 

우리 사람들만 해도 그렇잖아요. 다양한 모습이 있고 다양한 기질들이 있고. 한 사람이 이럴

때는 이런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지마는 또 상황이 바껴서 저런 장면이 나오면은 또 다른 모

습도 나오고, 이런 좋은 점이 있는가 하면은 이런 어두운 점도 있고. 그런데 그것을 한 모습

만 딱 보고는 아,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하고 낙인들을 꽉꽉 찍어버린다는 것은 엄청난

폭력이지 않는가 하는 거예요.

 

늘 깨어 있으십시오 하는 이런 것도 뭘 이렇게 크게 영적으로 성숙해 가지고 뭘 늘 깨어 있

고 어쩌고 이러는 것보다는, 그저 사람들을 볼 때 한 면에만 집착하지 말고 그때 그때 드러

나는 모습을 보고 받아들이고 거기에 따라서 판단하고 그렇게 움직이는 것. 이런 것들을 이

야기 하시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우리가 뭐 특히 예수님의 모습을 볼려고 할 때는 함부

로 재단해 가지고 수난은 이래야 된다. 부활은 또 저래야 된다. 이런 식으로 탁 정해 놓고

기도에 들어가면은 곤란하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것. 이 수난의 기도가 사실은 어렵죠. 이게 왜 어려운가?

셋째 주간에 피정 지도를 하면서 보면은 그런 경우를 곧잘 보는 거예요. 면담 때 들어와서

떡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 보면은 기도를 내 잘못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토록 고통을 받으시

면서 수난을 겪고 계신다. 그래서 참 내가 죽일 놈이다. 이런 식의 기도들.

 

예수님의 아픔들, 수난 당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의 부족함, 내 자신의 죄성 이런 것

들을 깊게 보고 그점에 대해서 또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면서 가슴을 치고 통회할려고.

크게 뉘우칠려고 애를 쓰는 이런 식의 기도들을 하는 것을 보는데 그렇게 기도를 하면은

이거는 기도 잘못했다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틀렸다든지, 무슨 필요가 없다든지 이런 이야

기는 아니지마는 그런 식의 기도는 우리 첫째 주간 때 있었죠.

 

# 셋째 주간의 기도가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 내 부족함을 반성하는 것은 아니다

 

첫째 주간에 내 부족함이나 죄스러움, 어두운 면들을 보면서 마음이 힘들고 아프고 이런 것

들을 어떻게 수정할 수 있을까, 보완할 수 있을까 나름대로 고민하고 애썼던 것. 이건 그때

했던 것이다. 여기(Ⅲ주간)에서는 내 잘못을 따지는, 나 자신의 부족함과 허약함 이런 데다

가 촛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이 촛점인 거예요.

 

# 셋째 주간 기도는 예수님의 사랑에 촛점이 있다

 

예수님의 사랑에다가 촛점을 맞추는 것이 이 수난 주간에 있어서 해야 할 몫이고 그 예수님

의 사랑 하는 것이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하는 이야기인 거예요.

 

# 예수님의 사랑 -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이점이 우리한테 기도하기가 어려운 그점인 거예요. 우리한테 그런 체험이 없는 거예요.

사랑을 해도 내가 있고 나서, 내 존재를 전제로 하고 나서 그다음에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

이런 식의 사랑에 우리가 익숙해 있는 것이지 내 존재를 없애가면서, 죽으면서까지 상대방

을 사랑하는 이런 체험이 없다보니까 이 수난 기도가 하기가 어려운 거다. 그래서 이 사랑의

깊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감이 안 올 정도인 거예요.

 

그래서 셋째 주간이라는 것은 영적인 흐름의 이 역동성 상에서 보면은 ?맨 처음부터 사랑이

점점점점 이렇게 에스컬레이트화 돼 가는 거예요. 첫째 주간을 거치면서 예수님의 눈으로

나를 보면서 좀 더 예수님의 사랑 같은 걸 알아듣게 됐죠. 아, 사랑의 눈으로 나를 보니까

달리 해석이 되는구나. 그런 것들이 좋아가지고 예수님 이분이 어떤 분인지 좀 더 알아야지

이러면서 복음 관상기을 계속하면서 예수님의 뜻을 쫓아가려고 애를 쓰면서 쭉 걸어왔죠.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을 점점 보고 알게 되고 사랑이 점점 자랐던 거예요. 그 작업을 우리는

지금까지 쭉 해 왔는데 셋째 주간, 넷째 주간 여기야말로 사랑의 절정에 대한 체험인 거예요.

사랑이 더할 나위 없이 극점에 다다른. 이런 사랑의 절정에 대한 체험. 그러니까 예수님의

랑을 깊게 알아듣는, 사랑의 신비를 깊게 파고드는 이 작업을 하는 것이 수난 주간인 거예요.

 

# 셋째. 넷째 주간: 사랑의 절정에 관한 체험

 

그런데 부활하고는 달리 수난에서는 부정의 길을 통한 사랑의 절정 체험인 거예요. 즉 죽음

을 통해서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것. 이런 부정을 통한 사랑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가? 이것

을 알아듣는 것. 이러다 보니까 우리가 기도하기기 만만치 않은 거죠.

 

# 셋째 주간: 부정의 길(죽음)을 통해 사라의 절정을 체험

 

그래서 수난에 들어가면은 처음 시작하는 것이 최후 만찬. 이 최후 만찬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 수난에 대한 관상기도들이 쭈욱 진행이 되겠죠. 최후의 만찬 다음에 그다음에 중요한 게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 이런 것 하며, 그다음에 이제는 체포 당하시고, 빌라도

앞에서 재판 받으시고, 골고타 언덕까지 끌려가지고,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죠. 이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는 것까지. 이게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이거는 만 하루가 안 되는 사건이죠.

만 하루가 안 되는 사건.

 

# 수난에 대한 묵상: 최후의 만찬부터 시자가 죽음까지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기를 예수님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신 게 오후 한 3시경에 돌아가셨다.

이렇게 보니까 그전 날 저녁 때 최후의 만찬 하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시고, 그다음에

체포당하시고, 구금당하시고, 재판 받으시고, 끌려가시고 이게 만 하루가 안 된 사건을 우리

가 지금 보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의 수난 주간이다 이래 가지고 묶여 있는데 우리의 기도들

도 훨씬 더 수동적이 되지 않으면은 안 된다 하는 거예요.

 

# 수난에 대한 기도는 수동적이어야 한다

 

둘째 주간까지 예수님의 공생애를 쫓아서 복음 관상을 쭉 해 오는 것. 그래서 둘째 주간이

끝나면은 원칙적으로 이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이 가르쳐 주시고 싶은 것은 전부

다 가르쳐 주셨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당신의 꿈이 뭔지, 그리고 비전이 뭔지, 계획이 뭔

지, 희망이 뭔지, 좋아하시는 것이 뭐고, 싫어하시는 것이 뭔지.

 

더군다나 그런 것들을 복음 관상을 통해 가지고 거듭거듭 당신의 단면들을 통해서 당신 모

습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보여주실 것 다 보여주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제는 셋째 주간

에 들아와 있는 여러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이제는 더이상 알아들어야 할 것이 없는 그저

예수님과 이제는 하나를 이루는 이 문제만이 남는 거예요.

 

더군다나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작업까지 거친 사람이라면은 복음 관상과 병

행해 가지고 하느님 당신 자신의 뜻이 뭔지 혹은 예수님의 뜻이 뭔지를 이미 다 알아버린

거예요. 안 사람은 그다음에는 하느님의 뜻이 이거다 하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남은 거는

뭔가? 살아내야지, 행해야지. 행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 셋째 주간은 하느님의 뜻을 행동에 옮기는 단계

 

행할 수 있는 힘, 그것을 길어 올릴 수 있는 못자리가 이 수난인 거예요. 여기에서 예수님

과 함께 머무는 것. 그래서 복음 관상기도가 둘째 주간에 쭉 진행되면서 깊어질수록 기도

많이 수동적이 돼 오죠. 성령께서 보여주시고 이끄시는 대로 그렇게 쫓아오는 거예요.

그러던 것이 수난 관상에 들어오면은 더더욱 더 기도가 수동적이 되고 ?성령께서 보여 주시

고 이끄시는 대로 그렇게 가는 거예요.

 

# 수동적인 기도: 성령께서 보여주시고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기도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수난 관상을 하면서 큰 기쁨이라고 그럴까, 위로 이런 것들을

받을 수도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은 그냥 늘 이렇게 좀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이어 가지

고 어디서 말 한 자리도 제대로 못하고 그래서 늘 손해 보는 기분도 들고 좀 멸시 당하는 느

낌도 있고 그래서 그게 늘 언짢고 이랬던 사람이,

 

예수님, 빌라도 앞에서 서 계시고 그 빌라도 앞에서 재판 받으시는 이 장면을 만약에 관상

을 하는데 예수님의 그 움직이시는 모습을 찬찬히 보는데 아무것도 없는 이 상황에서 체포

당하시고 두드려 맞으시고, 막 이러는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어떤 너무나 초연한 모습,

당당한 모습, 의연한 모습 이런 것들을 관상 중에 깊게 보게 되고 그것이 자기 모습에 비춰

지면서 엄청나게 큰 위로로 다가올 수도 있죠.

 

그럼 그런 사람은 수난 관상하면서 잘못하고 있느냐?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거죠.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고 계시는가? 이점을 이렇게 찬찬히 보는

것. 이게 중요한 거죠. 그래서 내가 처해 있는 구체적인 상황에 쫓아서 성령께서 보여주시

는 대로 쫓아가겠다. 이런 자세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딱 뱡향을 정해 놓고 성령께서 나를 그쪽으로 끌고 가도록, 내가 눈물을 흘리기를 원

하니까 흘리도록, 가슴을 찢기를 원하니까 그렇게 하도록 해 주십사 청하는 것은 괜찮은데

거기에 사로잡히고 매달릴 것은 아니다고 보는 거죠. 이제 이런 식으로 이 수난 기도가 진

행이 되는데 우리가 이 수난의 신비에 대해서는 좀 깊게 알아들을 필요가 있는 거예요. 

 

적어도 예수님께서 이 둘째 주간, 둘째 주간까지 예수님이 쭉 움직여 오셨던 그런 모습 즉

당신 삶의 모습하고 이 최후의 만찬을 기점으로 해 가지고 그다음에 이 수난으로 가시는, 

이 수난 셋째 주간에서,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움직이시는 모습하고 좀 많이 다르다.  

사뭇 다르다.

 

# 최후의 만찬 전돠 후의 예수님 모습이 다르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까, 둘째 주간만 해도 예수님, 둘째 주간 때는 늘 어느 것이 옳은지, 어

떻게 하는 것이 정말 바람직하고 좋은지 대단히 긍정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당신 사도직을 행하셨던 거예요.

 

# 둘째 주간까지의 예수님 모습 - 긍정의 방향

             바른 것을 알리고 세우시 위해 사도직을 행하심

 

올바른 것을 바르게 세우시는 것. 이것이 당신의 어떤 사도직 하시는 스타일이셨던 거예요.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 이거 바로 잡기를 원하고 겉과 속이 다르고 위선을 떨고 있는

것. 이런 것 바르게 세우기를 원하시고, 병들어서 허덕이고 있는 것 생명을 되찾게 하시고,

사회 속에서 소외되고 분리되고 있는 것을 끄집어서 일치 시키시고 통합시켜 내시고.

 

우리가 생각을 해도 정말 바람직하고 옳고 좋다 싶은 그런 쪽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적

극적인 방향으로 당신 사도직을 쭉 펼쳐오셨고, 당신 기준이, 행동 지침이 그런 것이었던

거예요. 이거는 심지어 세족례까지만 해도 그렇다고 보이는 거예요. 세족례 사건 때까지만

해도 그런 성향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데 긍정적으로 이 만찬을 지나면서부터는 거기에서

완전히 부정의 길을 택해서 걸어가시는.

 

# 셋째 주간의 예수님 - 부정의 방향

           침묵과 받아들임. 맡김의 방향으로 움직이심

 

이제는 뭘 올바른 것을 가르치시고, 잘못된 것을 꾸짖으시면서 바르게 세우시고, 일으키시

고, 낫게 하시고 이러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입 다무시고, 가르치시는 것 대신에 침묵하시는

거예요. 병을 고쳐주시는 게 아니고 당신이 오히려 병을 얻게 되었고 그대로 내맡겨 버리시

는 거예요. 모욕이나 이런 것들도 그대로 받아 버리시고. 이런 식으로 쭉 움직이시는 것.

행동 방향이 공생애 때랑 수난 때랑 당신 움직이시는 모습이 너무나 다른 거예요. 이점을

우리가 깊게 보지 않으면은 안 된다.

 

우리가 맨 처음 영신 수련 시작할 때 관점의 변화들 이런 이야기들 많이 했었죠. 음양의 대

립 문제들. 양의 가치만 추구할 것이 아니고, 음의 가치도 양의 가치 못지 않게 중요하고 두

개가 함께 갈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들.

 

예수님께서 둘째 주간까지 공생애를 하시는 동안에 이래 머무셨던 모습은 양의 가치를 추

구하시는, 양의 입장에서 쭉 움직이셨다면은 수난에 들어오셔 가지고는 음의 가치를 저극

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시는. 음의 길을 통해서 당신 사도직을 행하시는 거예요. 이 둘째

주간에, 최후의 만찬에 들어오기 전에 그 직전 사건이 성전 정화 사건이죠.

 

# 성전 정화 사건 ......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상인과 환전꾼들을 꾸짖고 쫓아내심

       (신약성경 마태오 복음서 21장 12-17절)

 

예루살렘 입성하셔 가지고 성전 정화 하시면서 막 환전상들도 다 뒤집어 엎어 버리시고,

채찍을 막 휘두르시고,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마라고 고함을 지르시죠.

그런 어떤 성전 정화 이런 것도 이제는 여기에 근접해 있는, 수난에 들어가는.

 

근접해 있는 거기에서 성전 정화 사건 같은 것을 이렇게 보면은 이것도 당신께서 성전 정화

사건을 이렇게 일으키시면은 이것이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

하는 제자들과 만남도, 같이 있는 것도 그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고통과 죽음, 어

려움이 닥칠 것이다 하는 것을 빤히 아시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내몰려 가시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움직여 들어가시는 것 아닌가 싶은 거예요.

 

즉, 성전 정화 사건이 그 이전에 당신께서 당당하게 가르치시고, 이끌고, 병 치유 시키시고

하던 그런 적극적인 양의 입장에서 움직이던 모습하고는 좀 뉘앙스가 다른 거예요. 이 성전

정화 사건만 해도. 이 성전 정화 사건에서는 수동적이고, 음의 가치가 틈타 들어오기 시작

하는 거예요.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그 사랑 때문에 몰려 가지고, 코너로 몰리면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 성전 정화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그 결과 죽음이라든지, 이별이

라든지 이런 것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이 이 길을

따라가야만 된다 하면서 움직이시는 모습.

 

양의 모습들이 점점점점 약해지면서 음의 기운이 이제는 점점점점  커져 나가는 이런 국면

인 거예요. 성전 정화 사건 그다음에 최후의 만찬 이런 것들을 기점으로  해 가지고. 그런데

이 최후의 만찬 여기에서 또 보면은 우리는 크게 세족례와 성체성사 제정하시는 이 두 면이

나타나죠. 그것도 역시 이렇게 보면은 최후의 만찬에서 세족례와 성체성사가 나타나는 것.

이 부분이 세족례 이거는 양의 연장 선상에 있다고 보는 거예요.

 

 

 

# 세족례 ......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

            (신약성경  요한 복음서 13장 1-20절)

 

드러나고 아직도 올바른 것이 그래도 무엇인가 하는 것을 조금은 더 가르치실려고 하는 것.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하는 것. 너희들이 서로 발을 씻어주면서 그런 식으로 살아내야 된다.

이런 것들이 정말 중요하다. 그나마 이 안에서도 양의 모습으로 이렇게 드러난다면은 세족

례는 이 최후의 만찬에서 또 한 축인 성찬 제정, 성체 성사를 세우시는 이 부분은 이제 완전

히 당신 몸을 내어 주시는 거죠.

 

# 성찬 제정(신약성경 마태오 복음서 26장 26-30절) ......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빵과 포도주를 들고 하신 말씀과 행위

  빵과 포도주가 몸과 피가 되는 거룩한 변화가 이루어짐

 

날 먹어라. 내가 너희들의 양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의 모습이라든지, 하느

님의 모습 이런 것들이 완전히 숨어버린, 드러나지 않는, 음의 요소가 훨씬 강해지는 국면

이죠. 최후의 만찬이 이렇게 이루어지면서 예수님 당신 스스로의 움직임도 점점 양의 모습

에서 음의 모습을 향해서 나아가시는 이런 과정 속에 계시는 거예요.

 

적극적으로 올바른 것을 선포하시고 바로 잡는 것 보다는 내주고, 당하시고, 받아들이시고,

그리고 침묵하시고. 이제는 더이상 드러내 놓고 뭘 이야기를 하실려고 안 하시죠. 뭐 헤로데

같은 사람이 물을 때는 아예 대꾸조차도 안 해 버리시죠. 빌라도가 물었을 때 겨우 필요한

말씀 몇 마디 하지죠. 침묵 속에 잠겨 들어가시는 거예요.

 

이런 전체적인 움직임들이 이 수난의 신비 안에서 쭈욱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많이 겪게 되죠. 여러 가지 아픔이라든지, 슬픔이라든지, 괴로움,

고통 이런 것들 막 겪죠. 이런 것들이 역시 우리한테는 예수님의 수난에 걸맞는 것 아닌가.

 

# 우리 삶의 어려움과 예수님의 수난

 

우리가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이다 이랬을 때는 그저 내한테 다가오는 박해라든지, 고통을

씩씩하게 이겨내는 것. 용감하게 그 고통을 받아들여 가지고 소화시켜서 극복해 내는 것.

이런 의미의 수난을 이야기 하는 것 아니다 하는 거예요. 그것은 고통을 극복해 내고, 어려

움을 극복해 내고, 장애를 뛰어넘고, 슬픔을 이겨내고 이런 여러 가지들. 인간 만세 이런

모습처럼 그런 이미지, 그런 상을 제시하는 거라면은 그것은 역시 모양만 다를 뿐이지 양의

모습인 거예요.

 

그런 식으로 적극적으로 강하고, 어떤 면에서는 이 양의 모습을 강한 모습이라고 그럴까.

강한 모습으로서 이렇게 드러나는 그 측면이라 하면은 수난에서는 오히려 약한 모습인 거

예요. 보잘 것 없고, 힘 없고, 당하고, 겪어낼 수밖에 없는.

 

# 예수님의 수난: 수난을 강하게 극복하는 모습이 아닌, 그대로 겪어내는 모습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서 알아듣는 것은 정말 의지의 한국인이 돼 가지고

순교자의 그 놀라운 사랑과 열정으로 죽음 같은 것도 초개(草芥)처럼 보면서 늠름하게 싸

워서 이겨내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이 모습이 수난의 올바른 이미지다 그러면은 뭔가 2%

부족하다 싶은 거예요. 그게 아니고 오히려 고통에 굴복해 버리는 것. 그러면서 그렇게 걸

어가는 것.

 

그렇다면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몸이 아파서 겪는 어려움들, 늙어가면서 겪는 그 괴로움들

뭔가 무기력에 떨어지면서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겪는 그런 고통들. 이런 것들을 그대로 받

아들이고, 끌어 안고 그러면서 뚜벅뚜벅 그냥 걸어가는 것. 이게 예수님의 수난을 닮을 꼴

아닌가 하는 거예요.

 

우리한테, 여러분들도 순교자처럼  휘광의 칼날에 목을 내 놔도 눈도 깜짝 안 하면서 성가

를 부르면서 태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그런 사랑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이래 물을면은

그야말로 진짜 아주 선택된 소수 성인 성녀들이 할 수 있을지 모르겠죠.

 

그런데 그것만이라고 그런다면은 우리는 그러면은 예수님의 그 수난하고 내하고는 좀 거리

가 먼. 내하고는 진짜 연이 안 닿는 그런 모습 밖에 더 될거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아파서 힘들어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에, 병에 내가 사로잡혀 가지고

어떤 재간이 없이 그저 고통을 치뤄내면서 걸어가고 이러는 것이 아니다.

 

늙어가고, 병들고, 무기력해지고 다만 중요한 것은 거기에 마지 못해서 끌려가는 것. 어쩔

도리가 없이 나는 죽음도, 늙음도, 무기력함도 전부 극복하고 딱 바뀌내고 싶은데 그게 내

가 할 재간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끌려갑니다. 이래 버리면은 예수님의 수난하고는 성격

이 다른 거예요. 오히려 그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내 스스로를 내주는. 예수님 당

신 자신의 모습이 그거였던 것 아니냐 하는 거예요.

 

고통이든, 아픔이든, 무슨 이별, 슬픔이든 그 모든 것의 종착역, 극대치 하는 것은 죽음이

겠죠. 죽음에 대해서 예수님 당신 스스로 그러시죠. 아무도 내 목숨을 건드릴 수 없다. 내

가 스스로 내주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죽는 것이지 너희들이 나를 죽일 수 있고 이러는 것

아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한테 가장 어려웠던 것이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였고 그것은

바로 이 음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문제였던 거죠.

 

# 겟세마니 동산의 기도 ......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시기 전까지 올리신 기도

    (신약성경 마태오 복음서 26장 26-46절)

 

그전에도 웬만큼 충분히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겟세마니 기도 중에 그토록 어렵게,

힘들게 빠져들고 계시는 것은 과연 지금까지는 둘째 주간 마칠 때까지는 아주 길게 잡아서

세족례 할 때까지는 양의 가치를 실현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수행할려고 하셨다. 그런데

이제는 음의 가치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사도직을 수행하시려고 하신다.

 

그런데 이것도 그전에 당신이 계속해 오셨던 양의 가치를 통한 사도직 수행, 아버지의 뜻

실행만큼 효과적이고 의미가 있는가?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 엄청난 번뇌 고뇌에 떨어져

버리신 것 아닌가?

 

# 겟세마니 동산의 기도: 음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까지의 어려움

 

아프면은 씩씩하게 병마와 싸워 가지고 병으로부터 탁 해방되는 것. 그래서 건강을 회복하

는 것. 이게 다 우리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죠. 의례히 그 길을 갈려고 그러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도 하나의 방법인데 그건 양의 가치를 추구하는, 둘째 주간까지의 방법이셨

던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병에 먹혀 버리면서 그러면서 당신의 가치를 실현해 낼 수 있는가?

병에 먹혀 버리는 이것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될 수 있는가? 병을 나수는 것 못지

않게 병에 먹혀 가지고 내가 죽어 버리는 것. 그 옛날의 그 젊고 힘이 있고 아름답던 모습

은 다 사라지고 백발이 성성해지고, 힘은 다 빠지고, 치매가 오고, 이것을 통해서도 아버지

의 뜻을 실행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게 가능한가? 말이 되는가?

 

세상을 보면은 너무나 아닌데. 이점에 대한 어떤 깊은 고뇌. 그리고 이점에서 엄청난 선포

를 하고 계시는. 내가 회당에서 가르치고 병을 고쳐주던 그 모습 못지 않게 내가 지금 두드

려 패는 대로 당하고, 침 뱉음 당하고, 재판 받고 급기야 십자가에서 죽는 이것도 가치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 이 대목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은 우리가 살아

가면서 부딪치는 온갖 고통들, 사는 것이 고통이지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삶 속에서 부딪치

는 어려움이 좀 많아요.  

 

# 예수님께서 수난을 겪어내시는 모습을 통해 삶의 고통을 대하는

                                                      자세에 관한 답을 얻도록

 

이런 것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알아듣고 어떻게 풀어내고 걸어갈 것인가? 이 이야기인

거죠. 우리는 예수님의 전생애는 태어나면서부터 돌아가시고 그다음에 부활하셨을 때까지

어느 장면이든 끊으면은 거기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전부 아버지의 모습들인 거예요.

 

# 예수님의 전 생애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

 

마굿간에 누워 있는 그 핏덩이 같은 애도 탁 잘라 보면은 거기에 아버지의 모습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나오고, 열두 살 성전에서 막 어른들하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거기도 탁 끊어서

보면은 그 모습이 나오시고, 세례 받으실 때, 광야,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 치유하실

때 어떤 모습을 잘라서 보더라도 거기에서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 이 존재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처럼 수난도 꼭 마찬가지다 하는 거예요.

 

여기에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시는, 감히 어떻게 말도 제대로

뭘 할 수가 없죠.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인 거예요. 그런 상황

에 떨어져 계시는 그 모습도 자르면은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 그대로 뚜렷하게 나오고 계

시는 것. 세족례 하시면서 발씻겨 주시는 모습에서, 재판 받으시는 모습에서, 십자가 상에

달려 계시는 모습에서 어디서든지 아버지의 모습이 쭉 드러나는 것.

 

이 말은 아버지는 양의 가치만 그렇게 다 지니고 계시는 분 아니고 음의 가치도 그대로 지

니고 계시고. 음의 가치. 우리가(세상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 하는 거는 유감스럽게도 우리

일반 신앙인들도 전부 포함된다고 보는 거예요.

 

# 양과 음을 모두 가지고 계신 하느님

 

신앙인들 조차도 입시철이 되면은, 자녀가 수험생이 되면은 어머님들 신앙생활 하는 모습

이 달라지고, 누가 아프면은 기도하는 모습이 달라지고, 이런 모든 것들이 전부 양의 가치

에만 딱 촛점을 맞추고 있는 그런 하느님 상,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지

음의 모습 하고는 거리가 먼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깊게 알아듣는다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거예요.

이 부분을 제대로 해석해 내지 않으면은, 그리고 거기에 쫓아서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은 우리의 신앙은 진짜 사기라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닐거다 싶어요. 그저 옥심 사나운 

사람들의 탐욕이지, 신앙을 빙자해 가지고.

 

그래서 이 수난, 음의 가치를 우리가 충분히 좀 기도 중에 알아듣고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이 수난의 신비를 이렇게 쭉 보고 나면은 그다음에 우리가 부활 주간으로 넘어가는

데 부활 주간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 피정의 흐름 상에서는 그래요.  

 

기도의 흐름 상에서는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이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신 것까지 전부 기

도를 하죠. 여기까지 기도 끝내고 나면은 부활 주간으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에서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좀 머무는 이 체험들이 필요하다. 이것을 기도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무덤 앞

에 있다는 이거는 빈 무덤이 아닌 거예요.

 

#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머물기

 

부활 때는 빈 무덤이지마는 여기에는 그냥 진짜, 해가 떨어지면은 곧 안식일에 들어가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서둘러서 예수님을 안장했죠. 예수님께서 그렇게 무

덤에 들어가 계시는 그 무덤 바깥에 앉아 가지고 좀 물끄러미 머무는 거예요. 여기서 확실

하게 알아들어야 할 것은 인간 예수님, 역사 상의 예수님, 이 예수님은 돌아가셨다 하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 그게 중요한 거예요.

 

# 인간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

 

예수님이 돌아가시지 않으면은 부활 사건도 없으니까. 양의 가치가 쭉 전개되어 오다가 음

의 가치로 넘어와 가지고 음양의 가치가 함께 딱 어우러지면서 통합을 탁 이루어낸 그 점에

대한 어떤 확실한 어떤 인식들. 이것이 우리한테 절실히 필요하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

도 중에는 이 무덤 앞에서, 그런데 이것도 무덤 앞에 앉아 가지고 온갖 묵상들을 펼칠 것이

아니다 싶어요.

 

뭐 죽음의 의미가 뭔가? 예수님 수난에 대해서 관상할 때 전부 그거였어요. 아까 수동적이

어야 한다. 성령께 맡겨드리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기도를 해야 된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은 묵상을 막 할려고 그렇게 애쓸 껏 아니다 싶은 거예요.

 

도대체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셨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왜 피땀까지

흘리셨는가? 이런 것들 막 알아들으려고 하는 것. 그것보다는 훨씬 더 관상적인 형태의

기도들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 그래서 무덤 앞에서도 그저 내가 사랑하는 분의 그 죽음,

그 시신 앞에서 내 안에 도대체 어떤 느낌이 올라오는지, 그 도대체 죽었다는 게 뭔지.

이런 거 좀 알아듣는 것. 그게 필요한 것 아닌가?

 

그래서 오늘까지 이래서 수난 마치고 다음 주간에는 부활로 넘어갔으면 합니다.

영광송으로 마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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