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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18주일 2014년 8월 3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4-08-01 조회수784 추천수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연중 제18주일 201483

마태 14, 13-21.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을 시켜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신 이야기였습니다. 복음서는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것을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가 그대로 사실이라면, 그 시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 이스라엘 안에 기근을 해결해 줄 분으로 잘 모셨을 것입니다. 한두 사람이 먹을 식량으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준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보도한 것이라고 가정하면, 우리에게는 많은 의문들이 생깁니다. 복음서들을 전부 뒤져보아도 예수님은 기적적 무료 급식을 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인물로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와 반대로, 돌을 빵으로 바꾸어 보라며 유혹하는 자의 말에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못하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마태 4,4)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행복 선언에서 예수님은 배부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지 않고, 굶주리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를 사실 보도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는 더 있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갈릴래아 호수 주변입니다. 그곳에 과연 오천 명도 더 되는 사람이 운집할 수 있는 광장이 있었던가? 외딴 곳이라고 말하면서 먹고 남은 것을 담은 열두 개의 광주리는 어디서 나왔는가? 현대적 음향 시설도 없고, 자동 배식 장치도 없는 시기에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배식할 수 있었나? 오늘의 이야기는 그런 의문들에 답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초기 신앙공동체가 남긴 문서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들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보도하는 역사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에 대해 알아들은 사람들이 그들이 믿던 바를 알리기 위해 기록한 문서들입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회상(回想)한 바와 그분으로 말미암은 그들의 믿음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당신을 믿는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모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다는 이야기(탈출 16)도 있고, 예언자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이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체험한 바를 구약성서의 언어를 빌려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배에서 내려 거기 모여든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군중들을 헤쳐 보내어 각자가 먹을 것을 마련하도록 하자는 제자들의 제안에 예수님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의 모세와 같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 하느님은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 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병자들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을 고쳐주셨다고 말합니다.

 

열왕기(2열왕 4,42-44)에 따르면 그 옛날 엘리사 예언자는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의 사람들을 먹인 일이 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엘리사보다 훨씬 더 큰 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의 복음에서 빵은 4분의 1로 줄여서 다섯 개라고 말하고, 먹은 사람은 50배로 늘려서 오천 명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병고와 굶주림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며, 고치고, 베풀고, 먹이는 은혜로운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각자가 자기 병을 걱정하고, 각자가 자기 먹거리를 해결하는 것이 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이웃을 가엾이 여깁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도 하느님이 베푸셨다고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기꺼이 나눕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생명이고, 은혜로운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면, 우리 주변에 굶주림이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는 말은 나눔은 그렇게 풍요롭다는 말입니다.

 

물론 오늘의 복음에는 초기신앙공동체가 실천하던 성찬에 대한 기억도 들어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말은 신앙공동체가 성찬을 위해 사용하던 표현 양식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에 있는 성찬, 곧 성체성사는 나눔의 신비를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가엾이 여기고, 베푸시는 분이라,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도 이웃을 가엾이 여기고, 이웃과 나누라고 촉구합니다. 우리가 찾는 정의(正義)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할 수 있습니다. 받은 만큼 주고, 준만큼 받아내는 것이 정의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정의로운 사회, 공평한 사회를 추구하면서, 그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의와 공평은 생명을 베푸신 하느님을 기준으로 합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최후 심판의 이야기(마태 25,31-46)는 정의와 공평을 위한 하느님의 잣대가 무엇인지를 말해 줍니다. 그 이야기는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와 공평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웃을 가엾이 여기고 축복하며, 살아야 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정의와 공평은 부족합니다. 인간이 만든 제도로써 정의롭고 공편한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모두를 평등하게 살도록 하겠다고 나선 공산주의가 얼마나 냉혹한 사회를 만들었는지 우리는 잘 보았습니다. 그것은 가엾이 여김을 모르는 냉혹한 인간사회를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은 가엾이 여기며 나누는 따뜻한 숨결을 인간 안에 불어넣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가엾이 여기는 예수님, 나누어서 모든 이를 풍요롭게 하는 예수님을 보여주면서,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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