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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시찬 신부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제25강 부활 사건 이후 오늘날의 영적 여정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8-08 조회수889 추천수4 반대(0)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유시찬 신부님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25강 부활 사건 이후 오늘날의 영적 여정

 

■ 오늘 이야기 ... 성령과 함께 걸어가는 영적 여정

예, 예수님 이제 승천하시면서 저희들 곁을 떠나셨죠. 그러면서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다

고 이야기들 하는데 이런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떻게 신앙의 여정을 걸어

가야 할지, 영적 발걸음을 떼야 할지 깊게 살펴봤으면 합니다. 성령 속에서 우리의 삶과

신앙을 어떻게 통합시켜 나가야 되는지 여러분들도 각자 물음을 던져봤으면 합니다.

 

■ 시작 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저희들 이 긴 여정에 계속 함께 하시면서 필요한 은총들을 더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 승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보이는 현상에서 이제는 저희들 곁을

떠나시고 저희들은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인 성령께서 어떻게 움직

이고 활동하고 계시는지 저희들 삶 속에서 그 움직임들을 어떻게 읽어드리고 살아갈 수

있는지 필요한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고 길 안내를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저희들의 구체적

인 삶을 통해서 당신을 더 깊이 알아듣고 더 많이 사랑하고 당신 뒤를 잘 쫓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들을 더해 주시고 이끌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승천 사건이 갖는 의미
    - 거듭된 부활체험을 통한 예수그리스도의 원리 체득 : 예수님을 못 알아보다가 어떤

       계기와 부딪히면서 알아봄
    - 아직도 의심하는 제자단의 모습
    - 성령시대로 넘어감

2. 성령강림 사건
    - 성령강림 사건의 의미 : 예수그리스도의 원리 구현 / 만인에게 적용됨
    - 예수님의 상(象)에 사로잡힐 것 아니다
    - 예수그리스도의 원리가 시공을 넘으며 확장되어 나감 : 그리스도의 나라의 확장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풂

3. 오늘날의 영적 여정
    - 자신의 삶 안에서의 그리스도 체험 내지 부활 체험 : 의식성찰을 통한 해석작업
    - 자신의 역사를 영적으로 해독하고 후손에게 이어줌

4. 교회 모습의 세 가지 양태
    - 이원대립론적 관점에서의 폐쇄된 교회
    - 에고가 중심이 된 교회
    - 예수님을 닮은 교회

 

우리 지난 시간에 부활까지 봤죠. 이제 영신 수련의 대단원을 마감하는 그런 단계에 와

있는데 [23]번부터 시작해서 Ⅰ단계, Ⅱ단계, Ⅲ단계, Ⅳ단계 그리고 우리 다음 주에 마지

막인 [230ㅡ7]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하는 것을 볼 거예요. 그런데 지난 주에 이 부활 사

건, 그 전에 수난 사건, 셋째 주간이 수난이었고 넷째 주간이 부활 여기까지 봤죠.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으로서 모든 우리의 영적 여정을 총 마무리 하기 전에 이 사이에

들어가는 하나가 승천이고 또 하나는 성령 강림하는 것. 이 두개를 우리가 좀 오늘 살펴

봤으면 하는 거예요.

 

■ 이번 시간 ...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

 

그래서 좀 전에 시작기도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마는 예수님 승천하시면서 우리들 곁을 떠

나신 다음에 그 이후로는 예수님의 시대가 끝나고 성령의 시대로서 우리는 지금 쭉 살아

가고 있죠. 물론 이 성령으로서 대표되지마는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 성부이신 하느님

아버지다 함께 들어 와 계시는 거죠. 그래서 먼저 이제 승천하는 것을 보는 건대.

 

예수님이 승천하셨다. 그래서 사랑하시던 제자들 곁을 떠나시고 우리 곁은 떠나셔서 본래

오셨던 곳으로 되돌아가셨다. 이런 표현들이 전부 어떤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할까? 은유

적인 표현들이죠. 무슨 아버지 계신 곳이 따로 어디 무슨 동, 몇 번지 하듯이 탁 계셔 가지

고, 또 승천하셨다 그러니까 로켓포라도 달아가지고 쭈욱 수직상승하시면서 이렇게 아버

지 계신 곳으로 찾아가시고 그렇게 알아들을 것은 아니다 싶어요.

 

물론 문자 그대로 이렇게 알아들으면서 함축되어 있는 의미들을 같이 알아듣는다면은 문

제 될 것은 없겠지마는 그래도 그냥 단순히 글자에서 드러나는 그런 표현보다는 거기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들 이런 것들을 제대로 알아듣고 살아내는 것이 우리한테 훨씬 중요한

것 아닌가 하는 거죠. 그래서 성경에는 보면은 예수님 승천하시는데 마태오 복음 같은 부

분에 잘 그렇게 나오죠.

 

■ 예수님의 승천에 담긴 깊은 의미들

 

# 예수님의 승천(신약성경 마태오 복음서 28장 16-20절)

 

열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 열한 제자들이 모여서 있는, 산에 모이죠. 그 모여 있는 곳에

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승천해 올라가셨다. 이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

런데 재미있는 대목은 그 열한 제자들 중에는, 그래서 이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이 승천하

시는 걸 보면서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

오는 거예요. 이게 무슨 72명의 제자라든지, 500명의 제자라든지 이런 많은 수의 제자들이

아니고 우리 교회의 초석을 이루고 있는 열한 제자 즉 열한 사도들이죠.

 

이 사도단들 중에서 아직도 예수님의 그 부활 사건이랄까 이런 것들이 미처 뼈 속 깊게 들

어가지 않고 제대로 받아들이기 힘들고 그래서 의심하고 믿기가 어려운, 어려워서 갈등하

고 있는 이런 사도들도 있었다 하는 이야기인 거예요. 이게 우리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는 것.

 

우리도 전부 같은 입으로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고, 미사에 참석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그

러기는 하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뭔가 믿음에 있어서 석연찮은 구석들, 긴가민

가 하는 것 때문에 갈등하고 방황하고 있는 면들이 많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 지난 부활 주간을 설명하면서 의문점들을 좀 던졌었죠. 부활 사건을 보면은

우리가 이해가 안 가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 그 중에서 두드러진 예 하나는 제자들이 예수

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는 그 대목하고, 열한 제자들 중에 의심하는 사람들, 아직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는 것 하고 같은 맥락이다 싶은 거예요.

 

#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

                     승천 앞에서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

 

예수님께서는 사실은 승천하셨을 때 훨씬 더 큰 기쁨과 환희에 차셨을 거다 싶은 거예요.

이제는 정말 당신께서 이 지상에 내려오셔서 하고자 하셨던 일, 해야만 하셨던 일을 완전

히 다 이뤄낸 거예요.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을 때 그때 보다도 그 부활하셨

을 때도 엄청나게 큰 기쁨과 환희에 차 있겠지만.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도 그저 당신이 그런 어려운 고통을 이겨내고,

부활을 했다 그래서 뭔가 엄청나게 큰 일을, 멋있는 일을, 놀라운 일을 해 냈다. 이게 당신

안에 큰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됐던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깔축(아주 적은 부족분)없

이 해 냈다. 조금도 남김없이, 모자람 없이 이루어냈다 하는 그 점에서 오는 큰 기쁨이고

위로였던 것 아닌가 하는 거예요.

 

# 부활과 승천을 맞는 예수님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이룬 것에 대한 기쁨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 수난하시고 돌아가시는 걸 내가 눈으로 봤는데 부활하셨다는 것

이 이때까지 인간에 대한 이해, 존재의 그 차원에서 볼 때 도대체가 이해가 안 가는 것들이

죠. 그래서 예수님 거듭거듭 발현하시면서 알아듣게 끔. 그래서 그 체험이 정말 내한테 스

며드도록.

 

# 부활과 승천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여러 번 발현하시는 예수님

 

어머님들이 그럴지 모르죠. 뱃속에서 아홉 달이나 있다가 애를 낳았는데, 그래서 그놈한테

옷을 입혀주고, 밥을 잘 만들어서 먹여 주었는데도 아직 에미 사랑을 잘 못 알아들을 수 있

겠죠. 그런데 거듭거듭 그렇게 사랑을 베풀었을 때 그때 비로소 자녀들이 엄마의 사랑을,

아빠의 사랑을 깊게 알아듣고, 그 체험이 확실하게 뿌리내리는 것처럼 거듭거듭 발현하셔

가지고 제자들에게 수난이 수난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이라는 것이, 삶의 아픔들이 그것대로 그저 괴롭기만 하고

무의미한 것들이 아니라 거기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들을 거듭거듭 가르치시고 이끄셨던

것. 그런데 그걸 한 번, 두 번 가르쳐 주어가지고는 미처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 것이 못 되

고 있으니까 거듭거듭 해 주시고 이제는 알아들었겠다. 이제는 됐겠다 싶어서 그대 승천

하시는.

 

그러다 보니까 정말 이제야말로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어냈다. 이제는 더할나위 없을

정도로. 이런 점에서 훨씬 더 큰 기쁨 속에 잠기셨을 것 아닌가? 그리고  또 그런 이야기도

하시죠.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들한테 유익하다. " 이게 예수님이라는 분이 지금도 이스라

엘 땅 위를 걷고 계신다면은 우리는 혹 그럴지도 모르죠. 야, 성지순례 가서 그 예수님하고

이야기라도 한 마디라도 하고 오면은 내 신앙이 훨씬 더 크게 자랄것이다.

 

아니, 천만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가 걸려 넘어질지 몰라요. 내 머리 속에 멋들어진 상상

을 탁 그리고 있었는데, 가서 정작 형체를 지닌 구체적인 인간 모습을 띤 그분을 딱 보니까

그냥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하고 다른데? 이러면서 걸려 넘어져 버리는 거. 그래서 당신이

떠나시는 것이 더 유익하고 그래야만이 성령께서 내려오시면서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지평

을 보여 줄 것이다.

 

# 제자들을 위해 제자들 곁을 떠나 성령을 보내심

 

성령께서 내려오신다 하는 이런 이야기들이 바로 제자단들이 부활 사건 때 체험했던 그

내용들을 우리가 되새겨 보면은 짐작이 가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 동산지

기인 줄 알고 모르고 있는데 "마리아야!" 하고 탁 부르니까 그때야 "라뽀니!" 하고 탁 돌아

서죠. 그리고 그때 예수님인 줄 알아보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그렇게 그동안의 사건 경위를 쭈욱 설명을 하고 성경을 예를 들면

서 풀어주고 그러자 가슴이 진짜 뜨겁게 달아올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인 줄 모르

고 있다가 빵을 딱 떼실 때야 "아, 주님이시구나!" 하고 알아듣죠.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얘들아, 뭐 좀 잡았느냐?" 이래 얘기를 하는데 그냥 멀뚱멀뚱 왠

아저씨가 우리한테 말거냐? 하고. 밤새도록 헛그물만 쳐 놓으니까 지치기도 하고. 그래서

퉁명스럽게 알아보고 있는데 요한의 말을 듣고 서둘러서 뭍에 올라와서 조반이 차려져 있

는 거예요. 아침 밥상이 차려져 있는 것을 탁 보고는 "아, 주님이시구나!" 하고 알아듣죠.

이것이다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그전에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쭈욱 움직였던 그때 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했던 그 예수님의 모습은

없어진 거예요. 없어졌는데 뭔가를 거기에서 접촉을 하면은 적어도 이런 느낌은, 이런 감

각은 그때 예수님하고 같이 있을 때만 체험했던 내용이다. 이런 것들이 살아있는 거예요.

 

그 감각, 그 접촉면에 탁 맞닿았을 때 우리는 "아, 주님이시구나, 아, 예수님이시다." 하고

깨어나느 것. 이러다 보니까 이제는 예수님의 그 상에 붙들려 버리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

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삶의 원리, 인생에 대한 가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이런 데

에 가서 전부 걸리면서 주님이 계시구나. 하느님께서 움직이고 계시구나. 이런 것들을 알

아듣게 되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 예수님의 겉모습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치신

                                         삶의 원리를 철저히 바라보도록

 

이런 이야기들이 그대로 성령 강림 사건, 우리 사도행전에 보면은 오순절 때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나는 것. 그 표현들을 하고 있죠.

 

# 성령 강림(신약성경 사도행전 2장 1-13절)

 

제자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각 지역에서 몰려 온 사람들, 거기에 나오는 여러 지명들이 우

리한테 그냥 좀 낯설고 잘 모르겠다 싶으면은 그냥 일본 사람도 있고, 중국 사람도 있고,

미국 사람도 있고, 독일 사람도 있고, 아프리카 사람도 있고, 각 나라에서 몰려온 사람들

이 쭈욱 있는데 거기에서 사도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전부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들어 버리는

거예요. 동시 통역이 다 돼 가지고 저절로 알아들어 버리는 거. 이것이야말로 단적인 예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이렇게 움직이시는데 드러나는 모습은

전부 다른 거예요.

 

# 제자들의 말을 각자의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 맞춰

                                                  다르게 나타나시는 성령

 

가르침을 통해서, 치유를 통해서, 위안을 통해서 온갖 것들이 드러나는 모습은 틀리지마는

알아듣는 것은 아, 주님이시구나 하고 이렇게 알아듣는 것. 그럼 여러분들한테,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뭔가? 여러분들이 그러면은 예수님을 알아보는 표가 무엇인가?

 

# 나는 무엇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보는가?

 

예수님과 아, 주님이시구나 하고 연결 고리를 찾아내는 그 접촉면이 어디인가 하는 것. 이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하는 거죠. 그래서 승천 사건에서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보여주

시면서 이제 떠나가시는 것. 즉 이 말은 이제는 내가 내 이런 어떤 형상을 띠고 구체적인

모습으로서 드러나는 것은 전부 멈춘다. 그 대신 내가 살아 생전에 움직였던 원리들이 드

러나는 형태로만 존재하겠다. 이런 이야기들이죠.

 

# 승천 사건의 의미: 구체적인 형상으로 드러나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온 삶의 원리를 따르게 하려는 것

 

그러니까 또 승천이라는 것은 우리는 그냥 예수님 이렇게 부활하시고 나서 40일 정도를

계속 이렇게 제자들에게 발현하시면서 다시 가르치시고 그러고 난 다음에 승천하셨다.

이런 식으로 숫자화하고 어떤 시각화도 시켜놓고 이러지마는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면서, 그러니까 초대 교회 예수님의 제자단들,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이 제자단

들이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하면서 알아들었던, 그리고 그것을 실마리로 해

가지고 다른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아듣는 이런 어떤 체험의 유형이라고 그럴까?

사건이 일어나는 모습이 이제는 끝났다 하는 그 의미지 않느냐 하는 거에요.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지고 그러면서 느낄 사람은 없다. 그 1세대들은 끝

났고, 그 1세대들이 외형적인 면까지도 전부 벗어던져 버리고 진짜 속 알맹이 원리들이 생

명의 논리들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그걸 보면서 알아듣는 것. 인간 존재가 깊어지는 것이죠.

 

우리가 부모님이 다 있고, 우리가 다 부모님 밑에서 나왔죠. 지금 여러분들 자녀들이 그럴

거예요. 야, 우리 엄마는 진짜 이뻐. 내가 봐도 탈렌트 빰치게 우리 엄마는 젊고 이뻐. 이러

는 엄마의 모습들.

 

#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던 체험의 세대가 끝나고 그 안에 담긴 원리들을 보고

                                             알아듣는 세대로

 

그런 시대가 있고 그시대가 더 지나서 나중에 이제 연세들이 더 드시면은 쪼글쪼글 해지고

할머니가 되고, 볼품없어지고 그런 외형적인 변화들을 뛰어넘어서 외형적인 변화가 어떻게

바꾸어 가든 그 알맹이 속에서 엄마의 원리, 엄마를 알아듣는, 부모를 알아듣는 감각들 이

런 것들은 계속 자라고 있고 깊어지고 있다면은 엄마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 모습 혹은

엄마랑 더불어서 살아가는 모습 이런 것들이 훨씬 더 깊어지고 심화되고 있는 것 아니냐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 이런 것들이 바로 이런 점들을 두르러지게 드러내고 있는 것

아니냐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성부의 시대가 있었고, 그냥 좀 거칠게 이렇게 나눠 가

지고. 그 다음에 성자의 시대가 있었고, 요즘은 성령의 시대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들을

하죠. 그 성령의 시대, 이 성령 강림의 시대에서는 성부와 성자의 그 원리, 혼, 영이 우리

안에서 전부 살아 숨 쉬고 있는.

 

# 성령의 시대인 지금은 성부와 성자의 원리가 우리 안에 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는 예수님을 이런 데서 만나야 된다. 저런 데서 만나야 된다. 예수님의

모습은 이렇다. 저렇다. 여기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다 하는 것예요. 이런 면에서 우리는 어

떤 점에서 늘 깨어있으라고 요청 받는 것이 그런 것 아닌가?

 

때로는 옆에 있는 친구의 모습으로, 땨로는 길거리에서 지나쳐 만나는 그런 사람의 모습

으로, 때로는 학교 선생님의 모습으로 여러 형태들을 보게 되고, 그럴 때 주님을 알아보는

표가 있으면은, 그 시각을 형성하고 있으면은 주님을 알아뵙게 될 것이고 그것이 부활 사

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그 예수님의 발현 사건하고 성격이 똑같은 것이

될 것이다 하는 거죠.

 

# 일상 중에 여러 형태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이것이 우리가 영신 수련 둘째 주간 처음에 [91-98]까지 그리스도 나라에 대한 관상을

하면서 모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아버지의 영광 속에 들어간다. 이것이 내

꿈이다. 여러분들 함께 하겠느냐? 이런 이야기 했었죠.

 

# 영신 수련 둘째 주간 [91-98] 그리스도 나라에 대한 관상

 

그런 그리스도의 나라가 점점 자라나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는 끊임없는 성장에 촛

점이 맞춰져 있다고 그랬죠. 그런 하느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가 계속해서 성장해 나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 강림 사건이지 않느냐 하느 거예요.

 

성령 강림 사건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성장을 위한 것

 

이제는 시간과 공간을 다 뛰어 넘는 거예요. 당연히 여기에 인종을 뛰어넘고, 남녀, 노소,

고하를 다 뛰어넘는 거예요. 그러면서 예수님의 원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거예요. 이

런 것들을 볼 때 우리는 시대적으로  뿐만 아니고 공간적으로도 전 세계적으로 뿐만 아니

고 공간적으로도,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 나가고 있는 것 아닌

가? 그래서 이런 것들이 성령 강림 사건의 대표적인 표다 하는 거죠.

 

그러면 이제 그렇게 볼 때, 성령 강림 사건에서 우리가 두드러지게 볼 수 있는 면들이 뭔

가? 지난 부활 때도 이야기를 했지마는 예수님, 첫 번째 사도직이 위로하시는 사도직이다.

그랬죠. 제자들이 기가 꺾여 있고, 두려움과 불한에 사로잡혀 있을 때 거기에 오셔 가지고

"너희들 평안하냐?" 하고 물으시는 것. 위로 하시는 모습. 이 위로의 체험, 위로를 받고 힘

을 얻는 이런 체험들. 이런 체험이 여러분들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면은 그때 성령 강림

사건인 줄 알아야 될 것이다. 그것도 나는 생각지도 안 했던 장면에서.

 

# 성령 강림의 의미: 삶 속에서 문득 얻는 위로와 힘

 

어떤 분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어떤 자매가 길거리에서 뭘 막 한참 울고 있다고 하나,

쓰러져 있었다나. 그런데 그분이 이렇게 다가 가서는 왜 그러느냐고 부둥켜 안고 일으켜

세우고 그리고 뭘 이렇게 돌봐주고 이러자, 그 자매가 그냥 그 자매한테, 같은 여자분이

다가가서 그랬는데. 그냥 거기 안겨 가지고는 한참을 그렇게 울더라네요.

 

그분은, 길거리에서 쓰러져 있던 그분 이야기는 제 눈으로 볼 때는 이거는 분명히 그냥 예

수님의 발현 사건, 부활 사건의 일종이라고 보여지는 거예요.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모

르겠지마는 그런 누구한테도 털어놓기 힘들고 막 그러는 것을 누가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

람이 한 명 오자 거기에 기대 가지고 그냥 안에 있는 것들을 털어 놓고 그걸 통해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 것. 그다음 날 그분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었다고 그러죠. 자기 부인이 어려

울 때 좀 돌봐줘서 고맙다고.

 

예를 들면 그냥 그런 거예요. 이런 모든 것들을 그저 그냥 우리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하

듯이 좋은 사람 만나 가지고 내 이야기도 좀 잘 들어주고, 밥 한 그릇 사 주고 그래서 힘이

됐다. 이런 식으로도 얼마든지 정리하고 가버릴 수 있겠죠. 그런데 이걸 우리가 영적인 눈

으로 보기 시작하면은, 좀 더 깊은 존재 차원에서 읽어드리기 시작하면은 그 경지에까지

내려가게 되는.

 

어쩌면은 좀 전에 예를 들었던 그런 분이 신자라면, 아니면 꼭 나중에 세례를 받고 신앙을

갖게 된다면은,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뭔가를 알게 된다면은, 어느 날 문득 "야, 그날 내

가 겪었던 그게 아, 예수님이었구나." 이런 생각들이 들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 삶에서 얻는 위로를 예수님으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런 위로를 받는 것. 힘을 얻는 것. 그런가 하면은 그다음에 마리아 이런 데서 보면은 호

칭을 불러주는 것. 이름을 부르는 것이죠.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가만히 있다가 니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 순간 나는

네게 다가가서 꽃이 되리라. 이름을 불러주는 것.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주는 것. 인

정해 주는 것. 수용해 주는 것. 이런 것 이것도 아주 중요한 체험들이죠. 인정한다든지,

받아들여지는 이런 체험.

 

그런가 하면은 그다음에 또 이렇게 보면은 조반을 차려놓은 것. 그런데 아침 밥상이 그저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은 밥하고 김치 뭐 요정도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빵도 있고 생선도

있었죠. 그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까 그저 그냥 목구멍에 풀칠 정도만 하는 찢어지게 가난

한 그런 삶의 모습이 아닌 거예요. 그렇다고 해 가지고 무슨 호텔에서 정식을 차려 먹듯이

뭐 휘황찬란한 것은 아니지마는 의식주의 삶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맡겨지고 있는 것. 채

워지고 있는 것. 이런 것도 중요한 모습인 거예요.

 

우리가 식사할 때마다 신앙인들이라면은 식사전 기도 혹은 식사 후 기도, 기도를 바치죠.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우리에게 강복하소서." 이런 이야기들이 그저 그냥 앵무새

외우듯이 그렇게 주섬주섬 외우는 것이 아니고, 밥상이 차려져 있다 하는 것에서, 티베리

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이 그 밥상을 받아들었던 이 체험하고 연결이 되는가? 원리는 그 원

리에 닿아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밥 한끼를 받아들고는 감사의 기도들이 나오는 것 아닌가? 물론 이제 이런

게 그래, 허구한 날 뭐 삼시 세끼 먹고사는 거 뭐 그러다 보니까 타성에 젖어서 그저 그냥

무감각하게 둥둥 떠내려가고 있는데 사실은 앞에 앉아서 깊게 한 차례 머물기라도 한다면

은 밥상이 차려져 있는 이것이 예사일로 느껴지겠는가 하는 거예요.

 

어머님들 같으면은 예수님의 체험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조반을 준비하면서.  남편과

자식들 같으면은 제자들의 그 체험, 밤새도록 일하고 났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까칠한 입

에 어머니가 정성껏 마련해 놓은 밥상을 탁 받아들었을 때, 그 식사 한끼가 그런 체험에까

지 쭈욱 연결되어 들어가겠는가?

 

그런가 하면은 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한테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를 풀어서 설명을

해 주시죠. 그래서 '안다' 하는 것이 아주 깊어지죠. '앎' 하는 것. 안다 할까, 배운다 그럴

까? 이 앎이 깊어지는 것. 새로운 것들을 알아들으면서 점점 그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여기에서 올라오는 큰 기쁨과 위로들.

 

가슴이 벅차로를 정도였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으니까 이러한 것들을 보게 되거든 여러분

들은 예수님이 계시구나 하는 것을 알아들어라. 성령 강림 사건이라는 것은 이런 식으로

벌어지는 것이고 예수님이 승천하셨다 하는 것의 본래 의미는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지

않겠느냐?

 

  

 

그런데 여기에서 이렇게 보면은 의식주, 그저 웬만큼 평범한 가정, 중류의 가정으로서

고, 입고, 자고 하는 것. 그런 것들이 충족되고 있는 것을 보거든 "주님께서 준비하셨구나."

하고 알아들어라. 마찬가지도 나를 인정을 해 주고, 받아들여 주고, 귀한 사람 대접을 해

주거든 역시 그렇게 알아들어라.

 

여러분들이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설명을 듣고, 직접 보고, 듣고 이러면서 뭔가 앎이

깊어지면은 그래서 그것이 참 기쁘고 힘이 되면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고 계신 양 알아 들

어라. 이런 일들은 우리 일상의 삶에서 지천으로 널려 있고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지 않느

냐?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을 그냥 우리는 존재의 대사슬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은,

 

마인드 차원에서, 그저 인간 차원에서, 심리 차원에서, 이성 차원에서 다 정리해 버리고

말아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현상을 한 단계 더 들어가서 스피릿의 차원에서, 영의 차

원에서 다 읽고, 해석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은 훨씬 더 깊게 음미하고, 맛들이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니냐?

 

# 우리 일상의 체험을 영적 차원으로 해석하면은 그 안에서 그리스도와 부활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은 여러분들의 삶 하는 구체적인 일상의 삶하고 분리될 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하나인 것 아니냐?

 

# 신앙과 분리되지 않는 삶

 

이런 삶을 걸어가고 있을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행복한 발걸음, 행복한 삶이 이루어지지

않겠느냐? 이런 것들이 신앙 교육에 있어서도,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참으로 필요

하지마는 모든 교육에 있어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되지 않겠느냐?

 

# 신앙과 분리되지 않는 교육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은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야 되겠는가?

이런다면은 요즘 현대 교육에 있어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 갈등들, 경쟁

일변도로 나가고, 순위를 메기고, 스펙 쌓아가지고 좋은 회사 취직하는데 혈안이 돼 있고,

점수 1점, 2점을 가지고 난리를 치고.

 

이러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풍요롭고, 따뜻한 삶을 살아낼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른들

이라는 사람들이 전부 회심을 해 가지고 애들이,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이런 식으로 바라

보고, 해석하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이끌어줬다면은, 그래서 학교라는 것이 그렇게 움직이

고 있다면은 요즘 젊은이들, 어린이들, 청소년들이 훨씬 더 다른 삶을 살게 되지 않겠는가?

 

그저 공부에 짖눌려 가지고,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취직하기 위해서 그저 외우는 데에

만 집중해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한 고유한 모습을 발견하면서,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내

읆은 내 하나 밖에 없죠. ?"마리아야!" 하고 탁 불러주는. 니는 니 나름대로의 고유한 가치

와 재능과 의미가 있는 존재다 하고 인정하면서 불러주는. 이런 것들이 어릴 때부터 교육

이 돼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걸 우리는 전부 성적 중심으로, 그저 좋은 성적 따가지고, 내신 성적 좋고, 수능

성적 좋고 그래 가지고 인류 대학, 이류 대학 죽 등급 매겨놓고 거기에 막 집어넣으려고.

공부 잘하는 이과 학생 같으면은 전부 의과 대학에 가야 되고, 문과 학생들 같으면은 전부

사법시험을 붙고, ?CPA 시험 붙고 그래야 되는 것인 양. 이런 점들에 대해서 진짜 교육에

대한 철저한 혁신들이 필요한 것 아닌가?

 

우리가 정말 신앙인이라고, 예수님의 복음대로 살기를 원하고 그점을 우리는 믿습니다라

고 이야기를 한다면은 그런 예수님의 시각,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신 이 승천과 성

령 강림의 원리가 우리 삶 안에서 직접 연결 되어 들어오지 않는다면은 무슨 의미가 있겠

는가 하는 거예요.

 

# 승천과 성령 강림의 원리를 우리 삶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교육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신앙적인 교육도 그렇고, 학교 교육도 진짜

중요하다.  이런 점에 있어서 진짜 교육의 혁신들을 느낄 필요가 있겠다. 그러기 위래서는

아, 옆집 애들 다 하는데, 내 자식 학원에 보내면서 사교육 안 시키면 그거 어쩔건대, 밀릴

건대. 이런 식으로 해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겠죠. 우리 각자가 그저 한 명, 한 명이 "그래,

세상이 그러냐? 나는 딴 길로 한 번 가 보겠다."

 

여기서 제가 여러분들한테 장담을 할 수 있는 것 하나는, 만약에 그래 가지고 엄마가, 아

빠가 간섭이랄까, 통제라 할까? 가이드 라인을 거의 다 철폐를 하고 애 하고 싶은 대로만

맡겨 놔 버리면은, 마라톤 시합을 다하고 맨 마지막에 골인할 때, 즉 죽을 때까지 한 생을

살고 나서 결산을 해 볼 때쯤 되면은 그전에 계속 학원 보내고, 시험 성적 잘 받고, 좋은

대한 가고, 취직하고 그래 가지고 살아온 사람보다도 진짜 훨씬 값어치 있는, 중요하고

의미 있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점에 대해서 확신하는 거예요.

 

우리가 오히려 이렇게 재고, 저렇게 재고, 이런 계획을 세우고, 저런 계획을 세우고 그러

면서 이끌고, 강요하고 이러는 것들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자녀를 망쳐버리는 그런 어려움

을 낳는 것 아닌가? 이점에 있어서 우리 진짜 좀 깨어났으면 좋겠다 하는 거예요. 교육의

내용들이, 교육의 질들이 완전히 좀 뒤바뀌어야 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이런 놀음을 하

면서 우리 자녀들을 내 맡겨 놓고 가겠는가?

 

제가 학생들, 자녀들을 그렇게 어떤 면에서는 자유롭게 풀어 놓는다. 방목했을 때, 한 생을

살고 나서 마감을 할 때 꼭 성적표를 보면 이쪽이 더 좋을거라고 장담을 하는 이유는, 근거

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는 거예요. 인간이 이 잔머리 굴려 가지고 계획

을 세우는 것보다 성령께서 안에서 움직이시면서 뭘 끄집어 내시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 인간의 짧은 계획이 아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계획을 따라가도록

 

우리가 애들한테 교육시키는 것은 그저 일상의 삶에서 인간적으로만 해석해 버리고 마는

이런 문제들을 영적으로까지 내려가서 해석할 수 있도록. 엄마 밥  차려준 것 앞에서, 밥상

머리 앞에서 반찬이 짜니, 싱겁니, 뜨겁니, 차니 이러면서 막 투정이나 부리고 있는. 어릴

때는 그럴 수 있겠죠. 좀 철이 들고 적어도 중.고등학생이 되고 애가 성장함에 따라서 거

기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들이 뭔지 그런 것들을 읽어드릴 수 있게 끔 교육시키는 것.

 

# 일상을 영적 차원으로 해석하게 하는 교육이 필요

 

영적 차원에까지 내려가서 친구 한 마디의 위로를, 선생님으로부터 이름 불린 것 하나를,

그리고 밥 먹고, 옷 입고 있는 그 사실 하나를 깊게 알아들을 수 있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움직이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어떻게 감각적으로 포착할 수 있겠는가? 이런 길, 이런 방법

그것만 가르쳐 주면은 거기에 대한 감각만 닦여 나가면은 그다음에는 애가 뭘 공부를 해

가지고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무슨 직장을 택해 가지고 어떻게 자기 삶을 꾸려 나갈 것인지

맡겨 놓으면은 처음에 몇 년 막 방황할지 모르죠. 4년, 5년 어렵게, 힘들게 살지 모르죠.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4-5년, 10년 정도까지 방황, 이거 아무 문제 아니라고 보여지죠.

더군다나 요즘은 평균 연령도 높아져 가지고 막 80세, 90세 막 이러죠. 그 작업이 가능해

지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요청 받는 것이 뭔가? 이제.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령 강림을 통해서, 성령 체험 속에서 가고 있는 여러분들

이 해야 할 일은, 여러분들의 구체적인 역사를, 각자 자기 자신의 역사인 거예요. 일상의

삶을 전부 그런 식으로 영적으로 재해석해 내는 작업. 자녀들한테 부모님들이 들려줘야

될 것은 그런 이야기라고 보는 거예요.

 

# 자신의 일상을 영적 차원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자녀들에게 이어주도록

 

내가 니를 배 가지고 배가 산더미처럼 불렀을 때 이런 어려움들이 있었고, 이런 어려움을

내가 그때 이런 도움을 받으면서 헤쳐나왔다. 그런데 그 도움 그것이 바로 이런 식으로 성

령 강림 사건이었다. 예수님께서 발현하셔 가지고 나를 이끄신 사건이었다. 그러면서 자녀

들한테 여러분들이 쓴 여러분 자신들의 파스카 체험을 이야기 해 주는 것.

 

이 성령 강림 사건이야말로 이제는 누구 하나 전형적인, 오직 저 사람만이 모델이고, 최고

고, 그래서 무조건 저걸 모방해야 되고 이게 아닌 거예요. 모두가 다 예수 그리수도로서,

성령의 현존으로서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가치와 의미들을 지닌 존재다 하는 것을 명명

백백하게 드러내는 것이 성령 강림 사건.

 

따라서 여러분들의 구체적인 삶, 여러분들의 지나온 한 생, 그 생을 통해서 체험했던 일들

그것들을, 그 안에는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는 거예요. 아주 유쾌한 체험이 있는가

하면은 아프고 힘든 체험도 있는 거예요. 그런 것들을 영적으로 깊게 들어가서 재해석해

내고, 그 재해석해 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아, 그때 예수님 계셨더랬구나." 이러고 알아

듣는 것.

 

아, 그때 그 남편이 내 손을 한 번 꼭 잡고 있었던 것. 그게 비로 놀라운 성령 강림 사건이

었구나. 이렇게 알아듣는 것. 이러기 위해서 여러분들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끊임없이 기

도하고, 들여다 보고, 해석해 내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 삶을 영적 차원에서 재해석 하기 위해 구체적인 일상을 기도하고

                                       성찰하는 것이 중요

 

그래서 여러분들 자신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대한 기록물이 나와야 되는 것. 여러분

들 스스로의 그 자서전을 적고 있다 보면은 사도행전의 기록들이 쭉 되어 나와야 되는 것.

더 크게는 여러분들 삶 전체에서 부딪친 장면들이 성경이 되어서 나와야 되는 것. 이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또 들여다 봐야 되는 것이 의식성찰 하는 작업이 그만큼 중

해지는 거예요.

 

# 의식 성찰을 통한 삶의 해석

 

내 일상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예수님, 어디에서 나타나셨는가? 어디서 예수님을 만났는

데 내가 못 알아보고 있었는가? 또 어떤 계기를 통해서 내가 읽어드렸는가? 그걸 매일 매

일 해 나가는 것이 의식성찰이라는 작업이고, 거기에 따라서 여러분들 자신의 삶을 해석해

내는 것이 바로 승천 이후의 성령 강림 사건, 예수님과 만난 부활 사건. 이런 것들의 기록

의 집적물이 돼 갈 것이다 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그 힘과 위로를

받았을 때 그 체험을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이웃들에게 나누면서 하느님 체험이 점점

확장되어 갈 수 있도록.

 

# 내가 직접 경험안 부활과 성령 강림 체험을 나눌 수 있도록

 

이런 면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면에서는 심각한 도전을 받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진짜 예

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정말 '아멘'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가르침에 따라 살 수 있는가?

 

그리고 거기에 쫓아서 나아갈 수 있는가? 거기에 쫓아서 자녀 교육을 시킬 수 있는가?

대학 보내려고 어떻게 하고 있는가? 사교육을 어떤 사설 학원들에 보내서 애를 뭘 만들려

고 하고 있는가? 이점에서 우리부터, 내부터 우리 각자가 깨어나고 이제는 좀 짐을, 쓸데

없는 누더기 같은 거 벗어던지고 진짜배기 살아 있는 것을 찾아서 움직일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거기에 교육이 뒤바뀌는, 새롭게 자녀

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나가는 새 모델들이 형성될 것 아닌가?

 

제가 학교에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마는 대학교의 교육이 정말 좀 쇄신되고 완전히 뒤

바뀌어져야 되겠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그 교육의 모습도 나름대로 괜찮기는 하지마는,

어려운 점이 너무 많으니까 거기에서 한 단계 더 엎그레이드 시킬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각자의 고유한 재능을 살려 내는 것. 그래서 각자가 어루러져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내신 1등급, 2등급, 수능 성적 1점, 2점 이런 것에 의해서 뭔가 막 선이

그어지고, 앞길이 탁탁 자리매김 되고, 이러는 제도는 신앙인인 우리라면은 적어도 탈피

할려고 애쓰는 것. 여기에 여러분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는 방청객인 여러분들을 향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마는 시청하고

있는 분들, 대한민국 전역에 나가고 있겠죠. 전 국민들한테 이점을 아주 강하게 좀 말씀

드리고 싶은 거예요. 내 자녀의 교육을 진짜 이대로 방치해도 되겠는가? 이점에 있어서

우리 진짜 교육에 있어서 뭔가 좀 대대적인, 근원적인 개혁을 일으킬 필요가 있는 것 아

닌가? 뜻을 모으고, 힘을 모으면은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예, 이야기가 좀 옆길로 샜는지 모르겠지마는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늘 삶이라는 구체적

인 자리를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령의 시대에는 더더욱 더 신앙

과 삶을 통합해 낼 수 있는 관점, 감각 이런 것들을 익히고 채워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애

썼으면 합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성령의 시대인 지금, 신앙과 삶을 통합하는 것이 필요.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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