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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4-08-09 조회수933 추천수8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4년 8월 9일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if you have faith the size of a mustard seed,
you will say to this mountain,
‘Move from here to there,' and it will move.
(Mt.17,20)
 
 
제1독서 하바쿡 1,12 ― 2,4
복음 마태 17,14ㄴ-20
 

제게는 이상한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펜을 구입한다는 것이지요. 연필이나 볼펜, 또는 사인펜을 바꿔서 글을 쓰면 글이 잘 써지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구입한 펜이 하나 가득입니다. 몇 년을 써도 다 못 쓸 정도의 많은 펜을 가지고 있지요. 여기서 재미있는 것 하나. 그렇다면 펜을 바꿨다고 해서 글 내용이 좋아졌고, 글씨체가 더 좋아졌을까요?

당연히 외적인 것 하나 바뀌었다고 완전하게 바뀔 수가 없습니다. 본질이 변해야 진정으로 변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펜 하나 바꾸는 것보다는 내 마음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열린 마음을 가져야 열린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본질적인 마음의 변화보다는 계속해서 외적인 것만 바꾸려는 것, 그래서 진정한 변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렇게 외적인 것만을 바꾸려는 사람은 자신의 이웃 역시 외적인 환경으로 생각하기에 남 탓을 끊임없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외적인 환경 변화 등으로 좋은 길, 즉 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변화도 얻을 수 없으며, 내가 원하는 모습을 한낱 꿈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근본적인 변화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삶, 주님께 굳은 믿음을 두는 삶입니다. 이 믿음의 변화만 있다면 불가능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간질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믿음이 매우 약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라는 말을 하지요. 마치 주님의 제자 탓인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보면, 굳은 믿음을 갖고 환자를 데리고 와서 치유의 은사를 받는 경우가 많았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제자들 탓보다도 아버지인 자신의 믿음 부족함이 치유되지 않은 근본적인 원인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으로 필요한 변화가 있다면 내 자신의 믿음입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이 있고 없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믿음이 있고 없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일로 내 안에서 또 하나의 기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적당주의자가 되지 말라.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다(휴그 왈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차동엽, ‘천금 말씨’ 중에서)

독일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라는 작품이 있다. 주인공 여류 화가는 심혈을 기울여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한 평론가가 작품을 돌아보더니 이렇게 평했다. “당신 작품엔 재능이 번득이고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가 부족하군요.”

화가는 평론가의 칭찬은 다 잊고 “깊이가 부족하다.”라는 말에 마음이 걸렸다. 그래서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잡념에 사로잡혔다. 뜻대로 되지 않자 이내 술과 약물에 빠졌다. 결국 비관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그림을 전부 찢고 139미터 절벽에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평론가는 분명히 격려와 비평을 균형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화가는 “깊이가 부족하군요.”라는 지적만 새겨 들었다. 이 소설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와 비슷한 일이 우리 일상에서도 자주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칭찬 끝에 달린 어떤 한 단어가 우리 귀에 거슬릴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꼬투리를 잡고 자신을 쥐어짠다. 여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일은 점점 더 꼬인다. 그러니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 반대 경우도 있다. 우연히 들은 말 한마디에서 생의 전환을 맞이하는 횡재 말이다. 영화 ‘대부’의 주연 알 파치노는 명배우로서 전성기를 보내던 40대 중반, 한 영화의 흥행 참패로 실의에 젖어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들은 노래 ‘마이 웨이’의 가사에서 재기할 힘을 얻었다.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고, 예외 없이 끝까지 해냈지……. 그리고 그보다 더, 그보다 훨씬 흐뭇한 건, 내 방식대로 살았다는 거야.” 이 대목을 듣는 순간, 알 파치노는 ‘내 길을 가야겠다.’라고 다짐했다. 이후 그는 긴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이 바라던 삶을 찾아갔다.

이렇게 무서운 것이 말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어떤 말일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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