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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야성(野性)의 회복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4-08-10 조회수782 추천수11 반대(1)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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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10. 연중 제19주일   열왕기 상19,9ㄱ.11-13ㄱ 로마9,1-5 마태14,22-33


                                                                                                           

야성(野性)의 회복



문명의 야만이란 역설의 시대입니다. 

야성을 잃어가는 시대입니다. 

야생화(野生花)같은 참된 야인(野人)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특히 야성(野性)을 잃은 야당(野黨)은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야성을 잃는다는 것은 순수한 열정을 잃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야성이 사라진 그 자리에 마성(魔性)이, 야만(野蠻)이 자리 잡기 마련입니다. 


예전 군생활에 윤 일병 사건과 같은 잔인한 사건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야성은 있었지만 이런 잔혹한 야만의 폭력은 없었습니다. 

야성을 잃어가기에 마성의 악마요 괴물들입니다. 


다음 신문 컬럼에 공감했습니다.


-존 그레이가 말하듯 

“기술과 과학은 축적되지만 인간의 도덕은 언제나 새로 시작된다.” 

물질과 달리 인간과 관련된 부분은 세대를 거듭한다고 해서 더 발전하는 게 아니며, 

오히려 더 퇴보하기 일쑤다. 

교양 있고 예의바른 인간들이라고 해도 

갑자기 변화한 물적 조건이나 종교가 된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쉽게 야만인이 된다. 

야만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야만을 ‘척결’한다는 불가능한 바람이 아니라, 

그 야만 속에서 미치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래서 하느님을 찾는 구도자적 열정이 필수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열정이 있을 때 야만이나 마성은 순수한 열정의 야성으로 변모되기 마련입니다. 


오늘은 야성 회복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고독을 추구하십시오.

고독을 추구할 때 야성의 회복입니다.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입니다. 

고독을 통해 삶은 깊어지고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예전부터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고독과 침묵을 사랑했습니다. 

고독의 거울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얼굴이요 내 얼굴입니다.


그러니 고독의 추구는 하느님의 추구요, 고독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없는 고독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에 승리하여 이들을 모두 죽인 후, 

이제벨의 마수를 피해 도주하는 참 고독한 처지의 엘리야입니다. 


바로 이때 그가 찾은 곳은 고독의 땅, 하느님의 산 호렙에 있는 동굴이요 여기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역시 군중을 배불리 먹인 다음 지체치 않고 그 자리를 떠나 고독의 땅, 산을 찾습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예전 사막의 고독과 침묵을 찾았던 사막의 수도승들처럼 

이 두분은 산의 고독과 침묵을 찾았고 거기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기도하십시오.

고독은 그대로 기도로 직결됩니다. 

기도할 때 야성의 회복입니다. 

마음의 순수, 마음의 열정을 회복합니다. 


사람은 '기도의 동물'입니다. 

어려서부터 기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기도 습관보다, 믿음 유산보다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아 결국 괴물이 되고 악마가 됩니다. 

기도하지 않고 존엄한 품위를 유지하기란, 야만을 극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고독은 필연 기도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가 그 모범입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마침내 고독 중에 주님과의 만남이 시작된 엘리야입니다. 

예수님 역시 기도의 힘으로 제자들의 곤경을 멀리서도 꿰뚫어 봤고 즉시 도움의 손길을 뻗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었음은 다음 대목이 입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렀다.‘


호수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 아름다운 감동입니다. 

믿음의 뚜렷한 표지요 이런 주님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믿음 약한 제자들입니다. 

그대로 제자들의 기도 부족을 드러냅니다. 

물속에 빠져드는 위기 시의 베드로처럼 우리도 곤경 중에 기도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을 만날 때 야성의 회복이요 인간성의 회복입니다. 


현대인들의 결정적 불행은 주님과 만남의 부재에 있습니다. 

아니 종파를 떠나 주님과의 만남인 신비체험은 이제 필수가 된 세상입니다. 


바오로의 깊은 고백 역시 주님을 만났기에 가능했음을 봅니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닿았기에 이런 진정성 넘치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가 얼마나 동포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랑했는지 깨닫습니다. 


주님을 만날 때 야성의 회복과 더불어 믿음의 증진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서' 사람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주님 주시는 믿음이 용기의 원천이 되고 이 믿음의 빛 앞에 사라지는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고 안팎으로 평화가 도래합니다. 

배 안에 있던 이들은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믿음을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새삼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과의 만남의 체험이 기도하게 만들고 믿음을 증진시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순수한 열정을, 야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1.고독을 추구하십시오.

2.기도하십시오.

3.주님과 만나십시오.


바로 이 거룩한 미사가 이 셋을 다 충족시켜 줍니다. 

사실 주님과의 일상적 만남에 미사보다 더 좋은 성사도 없습니다. 


바로 이 미사은총이 일상에서의 주님과의 만남 체험을 촉진시켜 줍니다. 


"나 주님께 바라네, 주님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130,5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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