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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8-12 조회수601 추천수4 반대(1)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유시찬 신부님의 성이냐시오 영신수련 깊은 데에 그물을 쳐라

 

 

제26강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 오늘 이야기 ... 사랑

우리 이제 긴 영적 여정의 막바지에 다다랐죠. 우리가 영신 수련을 통해서 걸어온 이 영적

여정의 화두는 단 한 가지 사랑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영적 여정 뿐만이 아니고 우리 삶

전체를 통해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화두는 사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

면서 겪게 되는 모든 사건들, 체험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 자연들 이런 온갖 것들 안에

서 어떻게 사랑을 읽어드리고 살아낼 수 있을 것인지 우리 함께 깊게 고민해 봤으면 합니다.

 

■ 시작 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예수님, 당신 따라 나선 비교적 긴 여정 잘 마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어 감사드

니다. 당신을 배우며 익혀왔던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하나의 화두로 정리할 수 있도

록 도와주십시오. 사랑이 무엇인지 더욱 더 깊게 알아들을 수 있게 하시고 사랑의 관점에

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신께서 어떻게 현존하시고

활동하고 계시는지 더욱 더 섬세한 눈길로 포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저희

들에게 더할나위 없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이 세상을, 교회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은총을 더해 주십시오. 좋으신 당신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영신수련 [230~237]
    - 영신수련을 마친 이로서 영신수련을 살아내는 모습
    - 4가지 요점
      1) 나를 창조하시고 온갖 은총으로 채워 주신 하느님
      2) 피조물 안에서 존재를 함께 하시는 하느님
      3) 피조물의 완성을 위해 종처럼 일하시는 하느님
      4) 모든 좋은 것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됨

2. 십우도의 입전수수(入廛垂手)
    - 애초부터 영신수련 피정이란 착륙준비를 위한 비행

3.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Finding God in all things)
    - seeking이 아니라 finding
    - 돈수(頓修)가 아닌 점수(漸修)
    -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 : 태양과 빛 / 옹달샘과 계곡물

4. [23]과 [230~7]의 역동적 성장

5. 피정을 마치는 이들이 유념할 점
    - 영적고독에 대한 대비
    - 의식성찰의 중요성 : 특히 finding God in all things와 관련하여
    - 지속적 함양
    - 기도생활과 기도자료

 

예, 우리 이제 26회 동안 영신 수련을 통해서 영적 여정을 걸어오려고 했던 것. 긴 여정이

막바지에, 마지막 정점에 이제 도달했죠. 그동안의 이 영신 수련의 흐름을 쭉 보면은 원리

와 기초 [23]부터 시작해서 Ⅰ주간, Ⅱ주간, Ⅲ주간, Ⅳ주간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230-237]까지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하는 거예요.

 

# 원리와 기초-> Ⅰ주간-> Ⅱ주간 -> Ⅲ.Ⅳ주간 ->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그래서 영신 수련 전체를 보면은 원리와 기초도 사랑이고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이것도

사랑이고. 사랑이라는 큰 두 축을 준심으로 해서 사랑의 긴 터널을 통과해 왔다. 이런 식

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싶은 거예요. 그러면서 여러 각도에서 우리는 가도들을 하고,

점검하고, 살피고 했지마는 그 하나의 화두는 사랑이었다.

 

# 영신 수련 여정은 사랑의 긴 터널과 같다

                                중심이 되는 것은 사랑

 

사랑이 뭔지 이거 탁 알아들으면은 모든 실마리가 풀려나갈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 남녀

간의 사랑도 하고, 부모 자식 간에 사랑도 있고 그래서 왠만큼은 사랑이 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알고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기는 한대. 그것보다는

좀 더 깊은 차원에 있어서의 사랑이 뭔지 이렇게 알아들어야 되는 것 아닌가?

 

■ 영신 수련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원리와 기초 때 말씀드렸다고 아마 생각은 하는데 원리와 기초를 아무리 읽어봐도 사랑이

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안 나오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그 안에서 행동 원칙 이런

여러 가지 내용들을 보면은 사랑을 핵심 원리로 해 가지고 원리와 기초가 서술되어 있다

고 보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어떤 면에서는 아직은 사랑이 활짝 꽃피지 않고 꽃봉오리 형태로 탁 물려 있

는 그런 상태가 원리와 기초라고 한다면은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에 와서는 저 꽃봉오리가

활짝 흐드러지게 핀 것. 그래서 온 천지에 꽃 향기가 진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 원리와 기초에서의 사랑이 꽃봉오리라면은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에서의 사랑은

                                       활짝 핀 꽃

 

이게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에 대한 어떤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피정을 할 때 맨 마지막에 이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이것을 하는데 여기 보면은 [230-

237]까지 묵상 요점이 네 가지가 나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네 가지를 중점적으로 기도를

하게 되는데 첫 번째는 뭔가 하면은 나를 창조하시고 빚어 만드신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

시고는 또 창조하신 가운데 그냥 한 번 살아봐라. 그러고 던져 놓으신 게 아니고 끊임없이

좋은 것들로 채워주시는.

 

# 영신 수련 [230-237]의 묵상 요점

   1) 나를 창조하시고 온갖 은총으로 채워주시는 하느님

 

온갖 좋은 은총, 은혜를 베푸시면서 나를 다듬어 가시는, 채우주시는, 나를 창조하시고

온갖 좋은 것들로 채워주시는 하느님. 이런 하느님의 이미지에 대해서 쭉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가 하면은 두 번째에서는 그것으로도 또 부족해 가지고 창조만 하시고 던져

놓으신 게 아니고 아예 내 안에 들어와서 함께 사시는. 그런데 나 뿐만이 아니고 동물 안

에서도, 식물 안에서도, 심지어 무생물 안에도 함께 하시면서 존재를 부여하고 계시는.

즉 내 안에 함께 거주하신다. 이래 가지고 내주(內住) 하시는 하느님.

 

# 영신 수련 [230-237]의 묵상 요점

  2) 모든 피조물 안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나와 하느님은 운명 공동체)

 

내 안에 함께 거(居)하시는, 그러면서 나랑 운명을 함께 하시는 운명 공동체로서의 하느님

의 모습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홀몸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그저 내 혼자 이 각박

한 세상 허덕이면서 살아가는 그런 존재들이 아니다. 상상을 뛰어넘는 큰 존재께서 함께

하고 계시는 어떤 면에서는 큰 거인 위에 이 어깨쭉지 위에 덩그렇게 올라 앉아 있는 꼬마

애 모습이랄까? 큰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작으마한 구슬 모양이라고 할까? 우리의 모습이

그런 존재들이다.

 

그러면서 우리랑 운명을 함께 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 ?여기에서 또 더 나아가서 나랑

그냥 같이 살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내 존재의 완성을 위해서 내 안에서 끊임없이 종처

럼 일하고 계시는.

 

# 영신 수련 [230-237]의 묵상 요점

  3) 나의 완성을 위해 종처럼 일하고 계시는 하느님

 

우리가 자고 있든, 깨어 있든 상관없이 24시간 끊임없이 내 성장과 완성을 위해서 일하고

계시는 그런 하느님의 모습. 이렇게 하느님의 이미지가 점점점점 깊어지고 있죠. 사랑이

점점점점 이렇게 깊어지고 있는 거예요. 비근한 예로 우리 여러분들은 특히 어머님들이니

까 어떤 면에서는 하느님의 이런 사랑을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싶은 거예요.

 

내가 내 새끼를 아홉 달 동안이나 내 뱃속에 배고 있다가 그렇게 낳아서 키워가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은 어머니가 애기를 가져서 낳고, 낳으시고는 그저 던져버리는 게 아니고 온갖

좋은 것들로 치장을 하고, 먹이고, 입히고, 그 자녀들이랑 완전히 운명을 함께 하는. 애를

위해서라면은 내 목숨도 내 놓을 수 있다 하는 것이 어머니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거짓말이

아니고 참말이죠. 그렇게 자녀들과 완전히 하나를 이루고 있는.

 

제가 신부이기는 한대 신부라도 남자기는 남자죠. 가끔 이래 이해가 잘 안 가는 게, 드라마

같은데 보면은 남편하고 이래 싸워가지고 이혼도 하고 난리를 치죠. 그러면 남편 얼굴만 보

면 막 치를 떠는 경우가 있죠. 그런데 이상하게 그 남편하고 같이 살면서 낳은 자식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받아들이는 거예요. 애는 그렇게 또 좋아가지고 어쩔줄을 모르는.

 

물론 자기게 절반은 들어가 있으니까 그렇기도 하겠다 싶기는 한대. 그래도 하여튼 좀 이

해가 잘 안 가는. 그런데 이런 게 좀 지혜롭지 못하다 보니까 자녀를 위해서 한다는 게 결

과적으로는 망치는 결과를 내는 불상사가 가끔 일어나서 그렇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렇죠.

 

그런가 하면은 또 애를 위해서, 애가 올바르게 성장하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애를 위해서 일하죠. 청소하고, 밥하고, 빨리하는 것만 해도. 그걸 위해서 하고 있는 큰 일

들 중의 한 부분이죠. 그렇게 일하시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하느님께서 점점 사랑을 심화시

켜 가면서 움직이고 계시는 모습을 가만히 보니까,

 

아, 아들내미가 그다음에 이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딸내미가 아, 내가 지금 이렇게 멋

있는 모습으로 사람 대접 받으면서 잘 살아내고 있는 것이 다 엄마, 아빠의 은덕이었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온갖 좋은 것들이 선함과, 아름다움과, 좋은 것들이, 참된 것들이 이런

모든 게 다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구나 하는 것을 알아듣는 것.

 

# 영신 수련 [230-237]의 묵상 요점

  4) 모든 좋은 것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됨

 

그러면서 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엄마의 움직임, 자녀의 움직

임. 거기에 빚대서 보면은 이 깊이에까지 속속들이 들어가서 알아듣지는 못할지 모르지마

는 웬만큼 감들은 잡히고 포착이 되죠. 그것을 더욱 더 날카롭게 열어내면은 바로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에 성공한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면들을 이렇게 보면은 이 불가에서

이야기 하는 것, 십우도(十牛圖)라는 이야기 혹시 들어보셨어요? 소 그림이 열 장인데 十

牛圖 하는 것. 그냥 소를 찾아 나선 그런 모습이죠.

 

# 십우도(十牛圖): 진리나 참된 나를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서 묘사한 그림

 

진리를 찾아 나섰다고라고 이야기 해도 좋고, 참된 나 진아(眞我)찾아 나섰다 그렇게 이야

기 해도 좋고 그래서 맨 처음에 심우(尋牛)부터 시작하죠. 소를 찾아 나서는 장면. 소를 찾

아나서는 것부터 시작해 가지고 여러분들이 영신 수련 여정을 처음 시작할려고 했던 그게

바로 심우(尋牛)에 해당했던 거예요.

 

# 십우도 중 심우(尋牛): 소(진리, 참된 나)를 찾아 나서는 장면

 

원리와 기초 이 영적 여정을 걸어가 봐야 되겠다. 진짜 내가 누군지 알아봐야 되겠다. 이런

열정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던 거예요. 그래 가지고 이 과정을 열 마당을 펼쳐서 불가에서

는 이야기를 쭉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다음에 뭐 자취를 보고 이래서 쭉 가는데 맨 끝에 열

번째 그림 맨 마지막 그림이 입전수수(入廛垂手)인 거예요.

 

# 입전수수(入廛垂手): 저잣거리에 나가 손(봉사, 사랑)을 내민다

 

入廛垂手, 전(廛), 저잣거리 전자죠. 저잣거리에 들어가서, 시장통, 저잣거리, 한 세상, 세

상의 한복판, 저잣거리에 들어가서 손을 드리운다. 손을 내민다. 봉사의 손길, 자비의 손길

사랑의 손길. 우리가 지금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을 이야기 하는 것은 마치 십우도의 맨 마

지막 장면, 그러니까 이 과정 안에 소를 탁 찾는 거예요.

 

소도 찾고, 소도 기르고 그러다가 소도 잃어버리고, 나도 잃어버리고, 대자연과 하나가 되

고, 깨달음의 경지들이 점점점점 깊어지는 거예요. 그러고는 맨 마지막 장면들이 또 뭔가

하니까 저작저리에 들어와서 여느 사람하고 똑같이 사는 모습인 거예요.

 

그렇게 살면서 누가 배고프다고 그러면은 라면 같이 끓여 먹고, 누가 술 한잔 하자고 그러

면은 술 잔 몇 잔 하고, 누가 노래 한 곡 같이 부르면서 같이 춤이나 추자 그러면은 함께 노

래 부르고 춤추고. 예수님의 모습이 딱 그 모습이었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둘째 주간의 모습 예수님의 공생애를 길게 우리는 봤었는데 그 모습들이 하나 같이 다 그저

먹고 마셨다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나왔던 것. 그것도 의인 뿐만이 아니라 죄인이라든

지, 창녀라든지 이런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그렇게 먹고 마셨다. 일상의 지극히 구체

적인 삶을 살았다. 저작거리에서 계속 다니셨다.

 

저작거리에 들어오셔 가지고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시는 이것이야말로 너무나 중요한 이야

기다 하는 거예요. 영신 수련을 마친 사람들은 영신 수련을 살아내야 한다. 이런 이야기들

을 곧잘 하는 거예요. 영신수련을 살아낼 의무가 있다.

 

# 영신 수련을 마친 사람들은 ?영신수련을 살아내야 한다

 

여러분들이 긴 여정을 거쳐서 영신 수련이라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자, 이제 비상하자.

그래서 타볼산처럼 빛이 번쩍번쩍하는 가운데 그렇게 머물면서 한 수 척 가르칠려고, 혹은

뭐 이 속세, 더러운 세상 떠나 가지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 머물려고.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저작거리로 들어가는 것.

 

# 영신 수련을 살아낸다는 것은 일상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냥 내가 왔던 그 가정으로, 그 본당으로, 그 사회로, 그 학교로 그냥 고대로 들어가서 일

상의 삶을 사는 것. 그렇기 때문에 ?영신 수련의 움직임 하는 것은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는

지는 잘 모르겠는데 한 달 영신 수련 피정 혹은 지금 여러분들 같이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

서 매일 1시간씩 기도하는 가운데 영신 수련 피정을 하는 이런 흐름을 가지고 볼 때 전에

원리와 기초부터 마치 비행기 비행하는 것처럼 활주로를 막 달리다가 그다음에 이륙하기

시작해서 그래 가지고는 첫째 주간, 둘째 주간 또 이륙하고, 그다음에 셋째, 넷재 주간.

 

 

벌써 넷째 주간 쯤 되면은 벌써 착륙한 준비하고. 그래서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쯤 오면은

완전히 이제 착륙하는. 이런 식의 비행 노선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니다 하는 거예요. 우리의

영신 수련 피정은 애초부터 처음 딱 원리와 기초 처음 시작할 때부터 아예 착륙 준비인 거

예요. 그때부터 계속 첫째 주간 지나고 둘째, 셋째, 넷째 주간,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하면

서 아주 부르럽게 착륙하는.

 

 

이 말은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하면은 성직자나 수도자들한테는 사도직, 사도직. 일하는

이야기죠. 그런 사도직에 대한 개념들을 곧잘 쓰고 하니까 사도직에 뛰어들기 위해서 처음

부터 그 준비하는 거예요. 영신 수련 한 달 전체의 흐름이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사도

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이 여정을 밟아왔다.

 

# 영신 수련 시작부터 착륙을 준비하는 것 ㅡ 삶에 제대로  뛰어들기 위한 준비

 

혹은 여러분들 같으면은 여러분들이 처해 있는, 가정 안에서, 사회 안에서 제대로 살아내

기 위해서 아예 처음부터 이렇게 착륙 준비. 일상의 삶 속에 확실하게 제대로 스며들기 위

해서. 그래서 지금까지의 긴 여정을 걸어 온 것이다. 이게 바로 입전수수(入廛垂手) 하기

위해서, 저작 거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제대로 손을 뻗어야 할 때 뻗으면서, 손길을 펼쳐야

할 때 펼치면서 그렇게 살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 이게 영신 수련 전체의 흐름인 거예요.

 

그래서 이점을 염두에 둬야 되고, 이런 이야기들이 지난 주의 표현을 빌린다면은 승천하시

고 성령 강림이 일어나신 것. 성령 강림 속에서 일상의 지극히 구체적인 우리의 삶, 내 한

애, 거룩한 성인 성녀라든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니 성모님이나 그런 어마어마한 분들

것만이 아니고 그것을 계기로 해서 내 삶 전체에 대해서 해독을 해 왔던 것. 영적인 감각

로 재해석 해 왔던 것. 이런 것들이 전부 입전수수(入廛垂手)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이러면서 이냐시오 성인이 아주 강조하는

것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거예요.

 

■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다 할까? 발견한다 할까? 하느님을 찾음. 영어로 하면은

Finding God in all things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모든 것,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온갖 체험들 안에서, 온갖 사건들 속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 안에서, 자연들 안

에서 거기에서 어디에서든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것을 음미하고 거기에

서 힘을 얻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을 했던 결과 도달하는 것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다.

이 이야기인 거예요. 이냐시오 성인께서 그렇게 좋아했다는 모토죠. 그런데 여기서 제가

굳이 왜 쓸데없이 영어를 쓰는가?  Finding 하는 이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무슨 소리인고

하니까, 이 Find 한다 하는 것 하고 영어로 하면 seeking God 하고 Finding God 하고 이

차이죠.

 

그냥 우리 말로 번역을 하면은 전부 뭐 '찾다, 발견하다' 이래만 되니까 명확하게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영어에서 그럼 좀 더 내친 김에 더 나가면은 hear하고 listen 혹은 see 하고

watch 이 차이죠. 이쯤 가면은 좀 뭔가 개념이 들어올지 모르죠.

 

 hear 하고 listen 하는 것. hear 하는 거는 이거는 그냥 내가 귀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청각

기관에 고장이 없고 정상이기 때문에 다 들린다. 소리가 저절로 들려오는 거. 그게 hear 이

고.  listen 하는 거는 이거는 귀담이 듣는 거 그거죠. 경청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 지금 개

중에는 아마 ?hear  상태도 있을 거다.^.^~~~

 

see 하는 이거는 see도 보다 watch도 보다. 그냥 보다, 보다 한글로. 영어사전을 찾으면 그

렇게만 떡 나올지 모르죠. 그런데 see 이것도 역시 시각에 이상이 없기 때문에 눈 뜨고 있으

니까 보이는 것 이게 see고.  watch 하면은 의도적으로 딱 보려고 해서 보는 것.

 

see 고 watch 하면은 의도적으로 딱 보려고 해서 보는 것.  Find 가 이쪽(see ,watch) 계열인

거예요. 하느님을 찾는다. 모든 사건들 안에서 그리고 모든 존재자들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다. 이래 가지고 그걸 그냥 막 1시간, 2시간 기도를 하고 피정을 하고 그랬더니 아, 원수 같

은 내 남편 안에도 하느님이 계시고 그때 그런 일을 한 것이 성령의 움직임이셨구나. 그렇게

알아듣는 것. 그거는 Finding God 한 게 아니고  seeking God 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냥 감각적으로 딱 부딪치면은 아, 하느님이시네. 아, 예수님이시네.

아, 성령의 움직임이시네. 이런 것들이 그저 감각적으로 툭툭툭 붙어와서 포착이 되는 것.

느껴지는 것. 그게 Finding God 인 거예요.

 

# 감각적으로 바로 느낄 수 있는 하느님

 

그렇게 될려면은 어느 정도는 수련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저 소가 닭 쳐다보

듯이 멍하게 떠서 왔다 갔다 일살 생활하고 있어 가지고는 알아 듣기가 힘들거다 하는 거예

요. 저런 것 때문에도 의식 성찰이 그만큼 중요해지는 거예요.

 

#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의식 성찰과 기도가 쌓여 있어야 한다

 

거듭거듭 삶을 보면서, 의식 성찰과 기도가 거듭거듭 쌓여가는 가운에 이제는 완전히 감각

적으로 탁탁 부딪치면 바로 알아듣고 해석이 되고 위로에까지, 힘에까지 연결되고 이런 작

업들을 하기를 원하는 것.

 

# 삶 속에서 하느님을 바로 발견하고 위로까지 연결되도록

 

이런 점에서 이게 그냥 말하기 좋아서 이렇게 막 떠들고 있을 뿐이지 쉬운 일이다라고는 절

대 이야기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어떤 면에서는 어렵다. 그리고 아까 이 요점을 이야기를

할 때 Finding God in all things , all 이라고 했죠. 모든, 모든 것 안에서. 이 모든 하는 여기에

는 우리 본성이 잘 맞는 아름답고, 맛나고, 기쁘고, 좋은 것. 그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 아니다

하는 거예요.

 

# 하느님을 발견하게 되는 대상은 좋고 선한 것만이 아닌, 모든 것이다

 

아까 우리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에서는 네 가지 묵상 요점이 있다 그랬죠. 그러면서 첫 번째

요점이 하느님께서 나를 빚어 만드시고 온갖 좋은 것들을 채워주신다 하는 것. 거기에 온갖

좋은 것들로 하는 거기에는 진짜 우리가 좋다 생각하는 건강이라든지, 아름다움이라든지,

똑똑함이라든지, 편안함이라든지, 안락함이라든지 이런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그

것과 반대되는 것들도 전부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는 은총에는 아픔, 눈물, 괴로움도 포함된다

 

때로는 아픔도, 눈물도, 괴로움, 쓰라림, 고동 이런 것들도 총체적인 안목에서 좋은 것으로

판정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읽어드릴 정도로 내공이 쌓일려면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얼굴에

저승꽃이 잔뜩 피고 있는데도, 옛날에 그 매끈하던 피부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쭈구렁

바가지가 돼 가고 있어도,

 

의식이 점점 떨어지면서 치매 증세도 가끔가끔 일어나고 있는 것을 스스로가 보면서, 경제

적인 여건이 좀 나빠지고 있으면서 그 안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의

손길을 읽어드린다 하면은 그것으로서 위로나 힘은 저절로 생길 것 같은 거예요. 우리는

보통 그래 되면은 하느님은 없다 이렇게 생각이 들어버리는 거예요.

 

#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할 때 위로와 힘을 얻게 된다

 

사랑이라는 하느님 어디가 계시느냐? 내가 그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계셨냐? 그러니까 그런

모든 것. 우리 입맛에 맞든 안 맞든 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하느님을 찾아낸

다 하는 것은 내공이 왠만큼 깊어지지 않으면은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이쯤 되면은 이제는

주위에서 난리를 치고 있어도 평온하게, 저작 거리에서 그 시끄러운 가운에서도 그냥 편안

하게 앉아서 공부가 되고 기도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성장해서 계속 나아갈 지점은 그런 것들이다 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막 시끄러운

저작 거리에서 내가 더 크게 떠들어 가지고 모든 소리를 탁 제압해 버리는, 내 원하는 대로

저작 거리를 구획 정리는 탁 해 가지고 재배치를 싹 해버리고, 힘과 권력과 돈을 막 휘둘러

대는 것. 이런 것들로 내 목표를 삼아대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바깥의

움직임 그 가운데서 태풍의 눈처럼 그 전체를 이끌고 가면서도 고요하게 머무는 것. 거기에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의 핵이 놓여 있고 거기에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모습이

있는 것 아닌가?

 

#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흔들리지 않도록

 

이러면서 이냐시오 성인 여기에서 또 재미있는 이 비유라고 그럴까, 예를 들고 계시죠. 사랑

을 얻기 위한 관상 거기 읽어 보면은 거기 나와요. 마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온갖 좋은

것과 아름답고, 좋고, 예쁘고 하는 이런 것들이 마치 하느님으로부터 다 온 것인데 그것이 마

치 태양에서 내리쬐는 이런 빛과 같다.

 

혹은 옹달샘에서 옹달샘이 물이 이래 있는데 이 옹달샘에서 물이 이래 줄줄 흘러서  계속 물

이 되고 있으면은 이거는 옹달 샘이고, 여기는 계곡 물이 이래 흐르고 있을 때 태양이 머금고

있는 그 빛이나 그 태양에서 와서 그 빛이 엄청난 먼 거리를 달려와서 내 몸에 와 닿는이 빛

이나 같은 빛이죠. 같은 빛이면서도 또 동시에 이 빛과 이 태양은 또 다르지.

 

 

이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거예요. 옹달샘에 있는 그 물이나 그 물이 흘러 가지고 계곡을 타고

흘러가고 있는 이 시냇물이나 그 물이나 이 물이나 물은 같은 물이죠. 그런가 하면은 또 옹달

샘 이것 하고 이 물 하고는 또 다르지. 이거를 불가에서 쓰는 표현을 빌린다면은 불일이불이

하는 표현이 여기에 그대로 적용된다 싶은 거예요.

 

#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 하나가 아니면서 둘도 아니다

 

不一, 하나가 아하는 거예요. 하나가 아니어서 그럼 둘인가 하고 쪼개 보니까 不二, 둘도

아니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도 아니다. 이게 우리가 관점의 변화에서 계속 봐 왔던 것. 음양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이중성의 원리. 김영효 교수님이 좋아하시는 표현이죠. 새끼 꼬듯이 이렇

게 가는 것. 음과 양이 교차하면서, 새끼가 두 가닥이 서로 교차하면서 새끼를 꽈 나가는 것.

이런 이야기들이 그대로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에서 우리가 깊게 알아들어야 될 부분이다

하는 거예요.

 

이 태극이 보니까 하나인 거예요. 하나네 하고 턱 보니가 안에 밝음과 어두움하는, 남자와

자, 정신과 물질, 하느님과 피조물, 선과 악 이런 것들이 탁 섞여 있는 거예요. 우리의 어떤

행동을 보고 무조건 아, 이거는 선한 행동이다. 이것은 악한 행동이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다.

 

선한 행동 거기에는 바로 고 이면에 손바닥과 손등처럼 악한 기운이 탁 숨어 있고 악한 행

라고 판정짓는 그 뒤에는 선한 기운이 또 딱 숨어 있고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고 그것이 함

께 어우러져서 새끼 꼬듯이 꼬여가는 가운데 생명이라든지, 존재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이런

들이 있으면서 점점 커 나가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

 

그래서 이것은 같으면서도,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고, 혹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 이런 것들이 묵상의 요점의 첫 번째 요점 에서

느님께서 빚어 만드시고 온갖 좋은 것드로 채워주셨구나 하는 그 온갖 좋은 것 하는 것 하는

것에는 내 본성과 잘 맞는 그런 좋은 것 뿐만이 아니고 반대되는 것들도 함께 녹아 들어 온다.

그런 것들을 아우르면서 끊임없이 일하시는 가운데 우리를 계속 키워나가신다. 이런 이야기

들이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중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있는 모습들인 거예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그러죠. 너희들은 만방에 가서 복음을 전해라. 그러고는 아버지와

아들괏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 그러시죠. 모든 사람들에게. 이제는 예외가 없는

거예요. 나라와 국적과 인종을 전부 초월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한테 움직이고 있는 작돋

원리는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느님의 원리가 계속 움직이고 있다.

 

그것을 사람들이 알아듣게끔 전해라. 그 전하는 내용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르 베풀어라 하는 여기에 단적으로 있는 거예요.

 

우리 삼위일체 이런 이야기 하죠. 그 삼위일체가 어럽다. 어렵다 이러는데 우리 식으로 생각

을 해 보면은 이게 크게 어려울 것도 없겠다 싶은 거죠. 삼태극 하는 것. 음양을 따지면은 음

과 양과 황극이 있고 전체가 태극을 이루는.

 

한쪽은 성부라 그러면은 한쪽을 성자라 그러고, 한쪽을 성령이라고 그러고. 아버지, 아들, 성

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이것이 우주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원리다. 이게 하나인

거예요. 하나. 삼위일체 하는 일체인 거예요. 하나인가 해 가지고 가만히 들어다 보니까 셋으

로 쭉 나뉘고 있는 거예요. 성자도 계시고, 성부도 계시고, 성령도 계시고.

 

그럼 이 셋을 다 독립된 것으로 쪼개 버리 수가 있는가? 그래서 각각 하나씩 독립시켜서 내 놓

을 수 있는가 하고 보니까 분리할래야 분리할 수 없는 것. 딱 하나를 이루고 있는 이게 삼위일

체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 관점에서 보면은 삼위일체 이야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

닌 것 아닌가?

 

그래서 이런 것들이 바로 不一而不二 혹은 덧붙여 가지고 不一而不二不三 이래도 되겠죠.

하나도 아니면서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다. 그런가 하면은 이런 것들을 기본으로 핵으로 해서

핵심 원리로 해서 하느님을 알아듣고, 인간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먹고, 마시고, 사람들 하고 다투고, 사랑을 나누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그 사건들 안에 이 잣대

를 딱 갖다 들이대 가지고 해석해 낼 수 있겠느냐? 이게 정말 우리한테 필요한 것이지 않느냐?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너랑 나랑은 다르다고. 나는 인류 대학을 다니는 사람이고, 너는 지

방의 허접대기 같은 그런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고, 니하고 내 하고는 나는 성골 계급이지마

너는 육두품은 커녕 사두품도 안 되는 천민 계급이라고. 그러면서 나누고, 다투고 하는 이

일들이 교육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계속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하는 거예요.

 

극히 일부분들 공부 잘하고,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 그 사람들만 온갖 누릴 것들을 다 누리고

그러면서 큰소리치고 그리고 많은 다수의 사람들을 어떤 면에서는 멸시하고, 무시하고, 제대

로 인간 대접을 못 받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

 

이런 것들이 자본주의에서 빚어내고 있는 큰 폐혜들이 아닌가? 이런 점들을 우리는 좀 더 수

정하고 보완하고 성장을 하되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인간과 자연이 같이 성장하고, 너와 내가

같이 성장하고 요즘 뭐 녹색 성장이라든지, 윈윈(win-win)이라든지 온갖 이야기들 많이 하죠.

 

이런 점들을 우리는 영적 차원에서 훨씬 더 깨어 있으면서 깊게 볼 필요가 있고 이런 점에서

우리는 어떤 내용을 어떻게 학교에서 교육시켜 나갈 것인가? 가정에서, 교회에서 신앙 교육

을 어떻게 시켜 나갈 것인가? 계속 우리는 고민해야 되고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내야 되는 것

아닌가?

 

이런 것들을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이라는 기도를 통해서 주욱 보는 건대 사실은 피정 중에는

맨 마지막 날, 한 달 피정을 하더라도 맨 마지막 날 하루 정도 이걸 가지고 기도를 하죠. 그러

면서 마감을 하죠.

 

그러면은 나를 빚어 만드시고 온갖 좋은 것들로 채워주셨다. 이러는데 짧게는 피정 중이라면

은 한 달 피정 동안에 혹은 8일 피정 동안에 8일 피정을 하게 되면은 저녁 때 한 차례 내지 두

차례 정도 기도할 시간, 여유 밖에 안 나오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정 중에 이 기도를 통해서

얻는 영신적인 유익함이 아주 많은 거예요. 그래서 절대 소홀히 할 대목이 아니죠.

 

그런데 어쨌거나 한 달 피정을 할 때 마지막 하루를 본다면은 나를 빚어 만드시고 온갖 좋은

것들로 채워주셨다 하는 것이 작게 보면은 한 달 피정 동안에 나한테 온갖 기도 체험들을 통

해서 이끌어 오셨다.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좀 더 크게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온갖 좋은 것

들을 나를 창조하신 다음에 좋은 것들로 채워오셨다. 이렇게 볼 수도 있죠. 이 점들을 훨씬 더

깊게 우리 안에 집어 넣은 가운데 이 세상의 모든 사건과 사물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 활동을

읽어내는 것. 이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이다.

 

# 내 안에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 안에서도 하느님을 발견

 

이러고는 이제 영적 여정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죠. 막을 내리면은 그다음에 후속 작업들이

필요하죠. 예컨대 여러분들이 한 달 피정을 했다 치자. 혹은 일 년 동안에 걸쳐서 매일 1사간

씩 기도하는 일상의 삶을 통한 그런 영신 수련 피정을 했다 치자. 피정 동안에는 여러 가지

놀라운 영적 체험, 영적 위안들을 많이 받는 거예요. 조심해야 될 것은 그 피정이 끝나고 나

면은 영적 고독이 몰려 온다.

 

# 피정 후 생길 수 있는 영적 고독에 대비

 

피정 마치고 집에 돌아갔는데 더 짜증은 나고, 기도는 이전보다, 피정 할 때처럼 잘 안 되고,

그래서 내가 피정 다녀온 놈이 내가 뭐하는 짓인가? 내가 영적 여정을 잘못 걸어온 것인가?

이런 식으로 불안해 하거나 의심할 것 아니다 하는 거예요. 당연한 작업이다.

 

식물이 햇빛을 받고 뿌리를 통해서 물을 빨아들이는 작업은 낮에 실컨 하지마는 아직은 자기

양분으로 못 만들었죠. 밤 동안에 그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낮과 밤이 지나고 하루가 딱

지나야 비로소 식물이 그만큼 성장하는 거예요. 우리의 영적 여정도 마찬가지다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한 달 피정이라든지 이걸 끝내고 나도 아주 어리고 겨우 싹을 띄우고 잎이 나기 시작

한 아주 어리고 약한 식물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피정이 끝난 후에도 끊임없이 돌보고 가꾸지

않으면은 싹이 났다가 금방 죽어버린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키

워나갈 필요가 있는 거예요. 이러다 보니까 지속적인 기도가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 영적 성장이 계속될 수 있도록 기도와 의식 성찰을 지속해야 한다

 

기도와 의식 성찰을 매일 매일 계속해 나가는 것. 이러는 가운데 영적 성장이 더불어 있을 것

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찾는 관상,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도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는 거

예요. 그럴 때 그 기도 자료로서는 성경도 대단히 중요하지마는 여러분들 자신의 구체적인 삶,

내 자신의 구체적인 역사, 생애 그것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 나의 구체적인 삶을 자료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

 

이런 작업들을 계속 쉼 없이 해 나가는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 명심할 것은 지

금 여러분들은 불완전하고 망가져 있기 때문에 그 작업들을 하면서 가꾸고 성장시켜라. 이 이

야기가 아니고 완전한 가운데 거기에서 더 큰 완전을 향해서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죄의식 속에서 두렵게 이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고 평화롭

게 편안한 가운데 당당하게, 자신있게 그렇게 걸어가는 것.

 

# 두려움과 죄의식이 아닌 평화롭고 자신있는 모습으로 영적 여정을 나아가도록

 

모쪼록 긴 여정 동안 함께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리고 더욱 더 깊게 이 여정들을 해 나아가

는 가운데 우리 각자가 행복해지고 사회가 바뀌어 나갈 수 있도록 힘들을 모았으면 합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영광송으로 마쳤으면 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영원히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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