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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말씀의초대 2014년 8월 14일 목요일 [(홍)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4-08-14 조회수55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4년 8월 14일 목요일

 

[(홍)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은

1894년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1917년 성모 신심 단체인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콜베 신부는 평생을 선교사로

살아가다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
여기서 한 수감자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용소에는 한 명이 탈출하면

열 명을 지목하여 처형하는 벌이 있었다.

 이에 따라 지목된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이 있다며

 울부짖자 콜베 신부는 그를

대신하겠다며 앞으로 나갔다.

 결국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굶겨 죽이는 아사 형벌을 받고 처절한

옥중 생활을 하다가 1941년

지하 감방에서 선종하였다.

이러한 그를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다.

 

말씀의초대

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상징으로 보여 준다.

대낮에 짐을 싸서 내어놓았다가

어두울 때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메고 나갈 것이다.

 이는 주님의 말씀에 따른 이스라엘의

 유배에 대한 예표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라고 이르신다.

 또한 하늘 나라는 자신이 주님의

무한한 자비로 용서받은

존재임을 깨닫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매정한

종의 비유를 들어 가르쳐 주신다.

 

◎제1독서

<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2,1-12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3 그러니 너 사람의 아들아,

유배 짐을 꾸려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가 사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유배를 가거라.

행여 자기들이 반항의 집안임을

그들이 깨달을지도 모른다.

 

4 너는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떠나듯이 떠나라.


5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벽을 뚫고 나가라.

 

 6 너는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가는데,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마라.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삼았다.”


7 나는 명령을 받은 대로 하였다.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손으로 벽을 뚫고,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갔다.


8 이튿날 아침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9 “사람의 아들아,

저 반항의 집안인 이스라엘 집안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너에게 묻지 않았느냐?

 

10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신탁은 예루살렘에 있는

 수장과 그 안에 있는

 온 이스라엘 집안에 관한 것이다.’


11 너는 또 말하여라.

‘나는 여러분을 위한 예표입니다.

내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갈 것입니다.’

 

 12 그들 가운데에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78(77),56-57.58-59.61-62(◎ 7ㄴ 참조)
◎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시험하고,

그분께 반항하며, 그분의 법을 지키지 않았네.

그들의 조상들처럼 등 돌려 배신하고,

뒤틀린 활처럼 어긋나 버렸네.

◎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 산당을 지어 그분의 화를 돋우고,

우상을 세워 그분을 진노케 하였네.

하느님은 들으시고 격노하시어,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셨네.

◎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 당신의 힘을 적에게 사로잡히게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적의 손에 내주셨네.

당신 백성을 칼에 넘기시고,

당신 소유에게 격노하셨네.

◎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복음환호송

시편 119(118),135
◎ 알렐루야.
○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시고,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 ― 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의 명에 따른

 에제키엘 예언자의 행동은 이스라엘의 멸망의

 예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언자들이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행위와 삶을 통해 스스로 표징이 되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만납니다.

성인들의 삶과 운명 또한 그러합니다.

그들이 살아온 모습과 죽음의 방식,

결단의 순간은 영웅적인 성덕을 보여 주는

 개인적인 사건만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아픔과 악을 드러내는

시금석이자 인간의 희망과

하느님 섭리의 표징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의 삶과 죽음은,

 한 성인이 끌어안은 ‘개인적 운명’이 때로는

‘그 시대의 역운’ 전체에 대한 살아 있는

표징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 줍니다.

콜베 신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상징되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악의 한복판에 던져졌습니다.

 굶겨 죽이는 아사 형벌이라는 죽음의 방식은

 세기 내내 수많은 비참함과 모욕과

 고통의 대표적인 표징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야만 속에서도

인간의 길이 결코 비참함과

부조리만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한 형제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방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함께 죽어 가는 이들이 서로의 존엄을

지켜 주는 기적의 근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창궐하는 악의 한복판에서도 꺼질 수 없는

 인간다움의 희망이 콜베 사제라는

한 인간을 통하여 실현되었습니다.
거듭되는 악과 고통의 현실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하느님의 섭리가 참으로

존재함을 믿고 희망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섭리는, 콜베 신부처럼

한 사람의 운명이라는 작은 창을 통하여

찰나의 순간에 번개같이 우리를

스쳐 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문득 교회는 체제가 아니라 성인들이

지켜 나가는 것이라는,

그 옛날 신학교에서 배운 원로

신부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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