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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뱀처럼 지혜롭게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8-17 조회수959 추천수7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연중 제20주일



<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


복음: 마태오 15,21-28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렘브란트 작


     < 뱀처럼 지혜롭게>

        

  

역린이란 영화는 왕을 암살하려는 많은 무리들이 득실 되는 살얼음판 위에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어떻게 왕위를 지켜가는 지가 그려진 픽션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도 정치에 휘말려 뒤주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고, 그 아버지를 죽인 이들이 득세하는 가운데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정조는 어떻게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이 질문이었고, 답은 바로 정조가 사람을 설득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두 사람을 설득할 줄 알았는데, 그 한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정조를 시해하기 위해 내시로 들어와 궁에서 살았던 상책이고 또 한 사람은 당시 조선의 군사력 대부분을 휘두르고 있었던 구선복장군입니다.

상책은 어렸을 때부터 내시가 되어 궁에 들어와 엄한 규율 때문에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그때마다 소년 정조는 자신도 아버지를 잃었고 비록 왕자지만 궁에서 발붙일 곳이 없다며 상책에게 다정한 친구의 모습으로 다가갑니다. 거지 고아로 살아왔던 내시 상책에게는 자신을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왕에게 차마 안 좋은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영화 안에서 상책이 왕을 살해하려는 살수였음이 들통 나 고문을 당하기도 하지만, 왕은 처음부터 자신을 시해하기 위해 궁에 들어온 상책을 풀어줍니다. 그리고 자신은 상관없으니 나가서 꼭 살라고 당부합니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책은 다시 돌아와 임금을 시해하려는 이들로부터 목숨을 바쳐 임금을 지켜냅니다.

정조가 설득한 또 한 사람은 구선복 장군인데 많은 군사를 이끌고 나라를 전복시키기 위해 나아옵니다. 그때 왕은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오는 이들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칼을 많은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구 장군 앞으로 던집니다. 그리고 그 검으로 자신을 치라고 합니다. 자신의 목숨은 구 장군의 손에 있으니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저항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군인들 앞에서 임금이 한 장군에게 칼을 던지며 자신의 목을 치고 싶으면 치라고 할 때 왕은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아무리 쿠데타를 꿈꾸는 장군이라도 자신 앞에서 목을 내미는 겸손하고 온유한 임금을 어떻게 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구 장군은 정조를 참 임금으로 인정하고 그의 편에 서게 됩니다.

 

정조가 하루 만에 이 두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설득할 수 없었다면 그에게 남은 운명은 죽음밖에는 없었습니다. 정조는 설득의 기술을 알았기에 목숨을 부지하고 왕으로서의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가 사람을 설득하는 방식은 놀라운 언변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그들을 공감해주고, 목까지 내밀 수 있는 자존심을 버린 행위였습니다.

실제로 설득의 전문가인, 다카시마 유키히로는 설득은 20%의 기술과 80%의 인간적 매력으로 승부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인간적 매력은 자신을 낮추고 내어주고 자존심을 버리는 데서 나옵니다. 대부분은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지 자신 앞에서 군림하려는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말하는 그 사람이 싫으면 어떤 좋은 말을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설득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인간적인 매력이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군대 있을 때 저에게도 담배를 피우게 해 주겠다고 끊임없이 언어폭력을 하던 선임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 선임 때문에 지금까지도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되었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피우라고 강요하는 미운 선임이 싫어서 설득 당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설득당하면 그 사람에게 지게 되는 것인데 그러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정조와 같은 신세입니다. 우리는 왕입니다. 그러나 또한 설득의 기술이 없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 앞으로 지나가시는 생명의 주인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며 쫓아가야만 하는 처지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의 처지를 잘 설명해 주는 모습이 오늘 등장하는 마귀 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마을을 떠나시면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을을 지나가는 동안에 예수님을 설득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좀처럼 이 여인에게 자비를 베푸실 마음이 없습니다. 들은 채도 하지 않고 걸어가십니다. 그래도 하도 쫓아오니 제자들까지도 그 여인의 청을 들어달라고 청하게 됩니다. 이 자존심도 없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하시며, 사람들 한 가운데서 여인을 취급까지 하십니다. 그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이런 굴욕에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금 예수님을 설득해야만 하는 처지임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설득하는 사람이 어떻게 화를 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원망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설득하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존심을 버려야만 합니다. 죽을 수 있는 한계까지 죽어야합니다. 그래서 화는커녕 자신이 개와 같음을 만인 앞에서 인정하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지 않습니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여인이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을 낮추는 것을 보고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장하다.”

 

모든 설득하고 유혹하는 사람들은 매우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겸손하고 온유하다는 말은 자신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매우 약삭빠른, 혹은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의 호감을 이끌어내는 법을 압니다.

이렇게 약고 지혜로운 동물이 하나 성경에 등장하는데 바로 뱀의 모습입니다. 뱀은 인간을 유혹하여 온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한 장본인입니다. 그러나 뱀이 인간을 어떻게 유혹했는지 보십시오. “다 너를 위한 거야. 이걸 따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높아질 거야. 너는 지금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야.”라며 상대를 들어 높였습니다. 여기에 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마태 10,16)되라고 하십니다. 뱀은 유혹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조심해야 하지만, 그 유혹하는 자에게서도 무언가 배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뱀의 지혜란 바로 유혹하는 지혜입니다. 자신을 죽이고 상대를 높게 만드는 것이 바로 뱀입니다.

그런데 뱀에게 속아 자신이 교만해 졌을 때 잃게 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유혹하는 자는 낮아져야만 하는데, 교만해 지니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 안에 있는 교만은 내 믿음을 갉아먹습니다. 믿음이 생기려면 교만을 죽여야 합니다. 믿음과 교만은 반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여인에게 믿음이 강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이 동시에 믿음도 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자존심이 강하면서 믿음도 강할 수는 없습니다.

 

성모님은 카나의 혼인잔치 때 그리스도로부터 첫 기적을 얻어내셨습니다. 성모님 또한 뱀처럼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교회에 은총을 내려주고 싶지만 은총의 주인은 언제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교회에 은총의 포도주를 주시기를 거부하십니다. 그럼에도 성모님은 예수님께 그 포도주를 얻어내십니다. 그만큼 겸손하고 완전한 믿음을 지니신 분이란 뜻입니다.

성모님의 지혜란 바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시며 말씀이 사람이 되시도록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순종하신 모습에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믿음때문에 모든 여인들 중에 복되신 분입니다. 믿음은 곧 자신을 버릴 때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자기 자신을 버리고 따라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면 믿음으로 채워집니다. 그 믿음이 있는 이에게 하느님은 어떠한 요구를 해도 들어주실 정도로 설득당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 들어주면 저는 성당 안 다닐 거예요.” 혹은 이것을 들어주면 봉헌금을 이만큼 내겠습니다.”라는 식의 위협이나 타협을 하려는 자세로는 절대 예수님을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완전한 순종, 너무 자신을 버려서 사람들 앞에서 개 취급을 당하더라도 절대 화가 일지 않을 정도로 낮아졌을 때, 그 사람만이 하느님을 설득시켜 은총을 받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가나안 여인으로부터 자신을 버려 낮아지는 길만이 믿음에 다다르는 길이고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번 주에 휴가입니다. 그래서 평일은 묵상이 없겠고, 다음 주일에 말씀 안에서 뵙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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