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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용민 신부님의 신학하는 즐거움 제1강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8-22 조회수1,038 추천수3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송용민 신부님의 신학하는 즐거움(http://cafe.daum.net/song0626)

 

 

 

제1부 신학의 길잡이 - 입문을 위한 주제들
 

강의 1: “신앙, 믿기만 하면 그만인가요?
 

1. 믿음, 그것으로 충분한가요?

1) 인생의 딜레마 - 나의 인생은 즐거운가?

2) 신앙 생활의 딜레마

가)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이 신앙생활에서 흔히 느끼는 어려움들

나) 신앙의 현실 앞에 선 신앙인의 두 가지 태도

① 첫 번째 유형: 물음을 던지는 일조차 의미 없다고
                         자포자기하는 삶

② 두 번째 유형: 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삶
 

3)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점

가) 오늘날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

나) 신앙의 잘못된 태도들

①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신앙의 오류: 맹신, 광신

② 내게 도움이 되는 것만을 믿으면 된다는 식의 오류; 미신(오류)

③ 내가 믿는 바가 합리적으로 타당해야 한다는 주장의 오류:
    냉소적 신앙
 

다) 오늘날의 올바른 신앙 태도

① 신앙의 현주소: 평화를 찾는 신앙

② “사랑한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

③ 물음을 던지는 신앙
 

2. 물음을 던지는 인간 - 나는 누구인가?

1) 인생은 끊임없는 물음의 연속

2) “나는 누구인가?” - 근대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1724-1804)가 던진 물음

①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형이상학적 질문)

⇒ 나는 하느님의 신비를 찾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②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윤리적인 질문)

⇒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물어야 한다

③ 나는 무엇을 바랄 (희망)할 수 있는가? (종교철학적 질문)

⇒ 나는 영원을 향해 희망하며 살아야 한다.
 

3. 물음을 던지는 신앙인

1) 신앙의 물음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왜 가톨릭 신자로 살고 있는가?

① 나의 신앙의 대상에 대한 물음 (신앙의 내적 성찰)

② 나의 신앙에 도전을 하는 사람들의 물음 (호교론적 자세)
 

4. 강좌의 취지

 1) 취지: 신학하는 즐거움 - “신앙은 과연 이해를 필요로 하는가?”(성 안셀모)

① 누구를 위한 강좌인가?

② 강좌의 취지

        ③ “신학 하는 즐거움”에로의 초대

 

■ 시작기도

 

먼저 기도로 이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코린 9,16-19의 말씀입니다.

사실은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삵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져 전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좋으신 주님, 저희의 일상 속에서 한결같이 저희 곁에 계셔주시는 주님, 당신께서 허락해

주신 이 시간을 당신께 봉헌합니다. 저희의 나약한 언어와 생각, 얄팍한 지식으로는 감추

어진 당신의 사랑의 놀라운 신비를 깨닫기에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하오나 주님,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당신께서 진리의 성령을 통해 저희에게 지혜를 심어주시어,

당신의 신비를 조금 더 깊이 깨닫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십시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신학하는 즐거움 강좌를 맡게 된 송용민 신부입니다.

우리 뜻 깊은 자리에서 신학하는 즐거움이라는 강좌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여러분들이

어떤 느낌을 갖고 시작하셨을까 궁금합니다. 저와 함께 하게 될 이번 강좌의 제목은 신학

하는 즐거움입니다. 어떤 느낌이 드실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에는 아마 이런 단어를 들으시면 첫 번째로 던지실 질문은 어? 신학이

도대체 뭘까라는 첫 번째 질문을 던질 것 같고, 두 번째는 그렇다면 신학한다는 게 도대체

뭘까라는 것도 질문을 던질 수가 있겠죠. 그다음에 또 한가지는 도대체 신학한다는 게 이

게 즐거운 일인가라를 세 가지 질문이 아마 여러분들 머리 속에 금방 떠오르실 수 있을

겁니다.

 

# '신학하는 즐거움'에 연상되는 물음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신학이라는 것이 즐거운 일일까?

 

그런데 저희가 함께 나누게 될 이번 강좌의 이 신학이라는 용어는 아마 다음 번 강좌의

중요가 주제가 될 것 같고요.그리고 신학을 어떻게 하는지, 또 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

지를 앞으로 차근차근 이야기 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풀어가는 첫 번째 시작은 이 신학한다는 것이 과연 즐거운 것이냐? 라는

이야기입니다. 뭐 간단하게 말씀드린다면은 신학이라는 말은 한번 우리들이 믿고 있는

신앙에 대햇 한번 생각해 보는 겁니다. 좀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내가 스스로 믿고 있는

것이 정말 내가 생각할 때도 옳은 것인가?

 

또 그것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가? 이렇게 묻는 것이 바로 신학이라고 한다면 내

신앙에 대해서 묻는 일이 과연 즐거우냐? 라는 질문이 이 신학하는 즐거움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요? 여러분 인생 즐거우

세요? 즐거운신가요?

 

# 나의 인생은 즐거운가?

 

인생이 즐겁다면 아마 무엇이 내 인생을 즐겁게 하는지 또 내가 인생에서 행복한 거는

무엇인지. 뭐 그런 생각들을 해 보실 겁니다. 그런데 인생의 많은 여정 중에 즐거운 일도

많겠지만 조금만 줄여서 다들 학창시절을 보내셨죠? 학창시절을 보내셨는데 학창시절에

서 내가 뭐 많은 즐거운 일들이 있었겠지요. 뭐 동창들과의 만남 또 뭐 수학 여행 갔었을

때 에피소드, 학교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이 아마 기억 나실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학창시절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을까? 무엇이었을까요?

맞습니다. 공부하는 게 굉장히 힘들었죠. 그런데 왜 학창 시절에 공부하는 것은 힘들었

까? 뭐 시험을 앞두고 받았던 스트레스, 또 수업 시간에 행여 내가 모르는 문제를 선생

이? 질문하면 어떻하나 쩔쩔맸던 것. 그리고 또 선생님께 수업 시간에 함께 겪으면서 뭐

과제를 못 풀어서  고민했던 일들. 공부하는 일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시험 보는 일이 무엇보다도 힘들었죠. 이 시험이라고

하는 거는 솔직히 너무 알아야 되는 게 많고 너무 외워야 될 게 많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 시험을 앞두고 두렵게 생각했던 것은 마치 시험이 무슨 암기력 테스트인 것처럼 짧은

시간에 엄청난 양을 외워서 시험을 치루고 그다음에 치룬 다음에 얼른 잊어버려야 이제

다른 것들을 내 머리 속에 넣을 수 있잖아요. ^^*~

 

그런데 그런 부분들이 시험 공부가 굉장히 어려운 우리들의 스트레스의 일부가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때로는 공부할 때 막 졸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재미도 없는 공부를 억

지로 해야 되고, 또 이런 공부가 어려운 데에도 제가 보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외우고 있고 공부하고 있는 내용을 왜 외우는지 또 그게 정말 

내 인생에 꼭 필요한 내용인지 이런 것에 대한 의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왜 공부를

해야 되는지에 대한 스스로 이제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면 공부하는데 동기부여가 잘 안

되죠. 그래서 요즘 많은 사람들이 뭐 취업을 위해서 자격증 시험도 보고 막 공부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목표가 있으니까 열심히 하는데 그 열심히 하는 거 만큼이나 그 공부

하는 내용들이 정말 내가 마음 속에 와 닿지가 않으면은 외워지지도 않고 굉장히 힘든 공

부가 돼 있습니다. 억지로 하는 공부나 시간을 때우기 위한 공부, 또 그 과정만 마치면 잊

어버리는 그런 공부, 또 시험을 위한 공부들은 우리가 크게 즐거움이라는 것을 얻을 수 없

도록 만들어 주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런 왜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즐거움이 많이 사라져버립니다. 우리 일반

생활하면서, 그런데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우리들의 삶에 어던 고민거리들은 똑같습니다.  

 

# 나의 신앙은 어떠한가?

 

여러분들 다 신앙생활 열심히 해 오셨고? 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신앙의 굉장한 많은

체험들을 해 오셨을텐데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도 가톨릭 신자로서 느끼는 여러 가지 어

려움들은 한결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말한다면은 "아, 난 너무 믿음이 부족한 거 같다는 생각도 들고 또 남들은 열심

한 신심 생활을 하는데 신심이 잘 그렇게 생기기도 않고 또 신앙 생활을 하기에는 내 상황

이 너무 고달프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막 이러니까 고달프니까 신

앙생활에 좀 소홀하게 되고 또 많은 분들이 성경을 읽고 성경 묵상에 대해서 권장을 하는데

실제로 성경 읽을만한 시간도 많지가 않죠.

 

또 교회에서 배우던 교리나 뭐 여러 가지 어떤 성경의 지식들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또 그러시죠. 난 열심히 하느님께 기도를 하는데 왜 하느님은 내 기도

를 잘 안 들어주실까? 왜 나를 이렇게 이뻐하지 않으실까? 왜 또 하느님은 나한테만 고통을

주시는지 모르겠다. 남들을 보면 되게 편하게 잘 사는데. 뭐 그런 생각도 하시는 분이 있습

니다. 조금 더 연세가 드신 분들은 아, 내가 죽으면 정말 어떻게 될까? 죽으면 정말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내가 부활할까?

 

때로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예수님 부활에 대한 신앙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환생이

라든지 윤회라든지 이런 게 더 우리들 마음에 끌릴 수 있는 그런 것들도 아마 한 두 번은

겪어 보셨을 겁니다.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교회 생활하는 데도 굉장히

어려움들이 있으세요.

 

예를 들면 성당에 가면 마음도 편안하고 행복해지고 그래야 되는데 이상하게 성당 가면

미운 사람 한 두 명이 꼭 있거든요. 그 미운 사람 얼굴 보면 성당 가기가 싫어지고 또 어떤

경우에는 신부님들이 미사 때 강론하시는 게 너무 재미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강론 시

간에 주보 펼쳐 보게 되고 그리고 주일 미사를 내가 가톨릭 신자로 참석해야 되는데 의무

적으로 참석해야 된다는 그런 의무감이 주일미사 참석의 즐거움보다 더 클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분들 판공 때가 되면 판공성사도 보셔야 되고 또 고해 성사를 못 보면 또 성

체를 모시기에 부담이 되는 그런 것들도 계속 이어져서 우리들 마음을 괴롭히죠. 또 요즘

가톨릭 교회가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윤리적인 것들이 많이 개방 문화가 되다 보니까 가

톨릭에서는 성윤리라든지 가정 윤리에 대해서 굉장히 엄격한 지침들을 내 놓습니다.

 

때로는 가톨릭 신자분들이 그런 것에 굉장히 여러움과 답답함을 느끼시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요즘 가톨릭 교회가 너무 사회 참여 많이 심하게 하는 것 아니냐? 교회가 열

심히 신앙생활 하고 영혼 구원에만 몰두해야지 왜 세상 일에 관여하느냐? 이런 분들도

계시고 또 어떤 때는 또 신부님들 수녀님들의 권위적인 모습들 이런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뭐 예수님 믿으면 되지 뭐 꼭 성당 나가야 되는가? 아주 단순한

그런 질문들이 많습니다.

 

이 모든 질문들이 있는데 아마 여러분들이나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내가 가톨릭 신자로

오랫동안 살면서 교회 생활을 하면서 내가 의문을 갖고 있는 것에 정말 다 풀며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문을 한쪽 구석에 놓고 살면서도 내 신앙을 정말 행복하게 살아

가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데에는 많은 그런 도전들이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 저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신앙의 현실 속에서 신앙인은 두 가지의 어떤 대조

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내 신앙에 대해서 그럼 한 번 뭐 물음을 던지

는 경우가 의미가 있는가? 그냥 교회 다니면 다니는 거고. 뭐 굳이 물음을 던질 필요가 없

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또 내가 던지고 있는 많은 신앙의 질문

들에 대해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 정말로 믿을만 한가? 그리고 나는 이것을 통해서

정말 삶의 기쁨을 찾고 있는가? 뭐 이런 분들도 분명히 계십니다.

 

# 신앙의 현실 앞에 선 신앙인의 두 가지 태도

  1) 물음을 던지는 일조차 의미 없다고 자포자기 하는 삶

  2) 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삶

 

첫 번째 부류에 해당되는 물음을 던지는 일조차 귀찮다. 뭐 자포자기 식으로 이렇게 생각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뭐 신앙에 대해서 물을 필요가 있느냐? 믿음에 무슨 물음이 필요

하느냐? 그냥 살다 보면 다 사는 거지. 뭐 이렇게 하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런데 ?그런 우리 인생의 어떤 삶의 방식하고도 관련이 있는 거 같습니다. 살다보면 사람

들이 이렇게 인생을 진지하게 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도 있어요. 귀찮니즘, 이런

것들이 있죠. 귀찮은 거예요. 다 뭐 진지하게 내 삶에서 고민할 필요는 없고 그냥 그때 그

때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살면 된다라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까 이른바 믿음이 약한 천주교 신자분들은 뭐 굳이 성경이나 뭐 교리나

이런 것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될 필요성을 못 느끼시죠. 공부할 필요 없는 신앙 생활을 하

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냥 주일 미사만 참석한다든지 뭐 가톨릭 신자라는 이름만 걸고 사시

는 분들이 많으신대.

 

그런데 이런 분들이 겪는 어려움은 대부분 어떤 종교의 분들은 가톨릭 신자라는 명패를 보

면 꼭 찾아와서 벨을 누르시잖아요. 가톨릭 신자들은 성경을 피면 잘 모르거든요. 그리고

또 어떤 교리에 대해서 구체적인 질문을 하면 신자분들이 답을 하기가 굉장히 막연해 하시

는 것들이 솔직한 우리들의 심정이십니다. 그 좀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신자 생활을 좀 우리

가 해야 되는데.

 

이 생각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달리 말한다면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로 받은 생각하는 능력,

그 생각하는 능력을 '이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거는 무언가를 헤아린다는 뜻이죠. 그

런데 그 받은 것은 어떻게 받은 거냐 하면,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 하느님이 주신 이성(理性)으로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자

 

하느님의 닮은 모습에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

다. 그래서 생각 없이 사는 것들이 우리 현대 사회에 큰 문제인데요. 그래서 여러분들 혹시

자녀분들이나 주위 분들에게 그런 말씀 한번 정도 해 보지 안으셨나요? "야,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생각 좀 해라." 그런 이야기 합니다.

 

토마스 엘리어트라는 시인이 '텅빈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이런 시를 썼습니다.

 

텅빈 사람들

                 ㅡ 토마스 엘리어트

 

우리는 텅빈 사람들

우리는 채워진 인간들

서로가 기대어서

아 두뇌조각은  짚으로 채워졌는가,

형태 없는 모습, 색깔 없는 그림자

마비된 생명, 움직임 없는 제스쳐 ...

 

그런 표현을 썼습니다. 생각 없다라는 것은 달리 말한다면 좀 어려운 말로 철학 없는 우리

현실을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철학이라는 단어를 들으시면은 굉장히 생소하시죠. 신학만

큼이나. 그런데 생각이 없고 ?또 사회에서 어떤 정신적인 가치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면

이 사회 윤리적인 가치나 정신적인 가치의 중요한 것들은 우리 삶 속에서 잃어버리기 시작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철학 없는 한국 현실을 이야기하는데요.

 

이 철학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제가 공부 마치고 와서 머리를 좀 하러 미장원엘 갔는데 그

미장원에서 머리를 만져주다 그 미용사 아가씨가 저에게 "뭐 하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그

냥 뭐 신학공부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철학 공부합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대뜸 하시는 말
씀이 "어, 그럼 그거 끝나시면 철학관 내시는 거예요?" ^^*~~~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철학이라는 단어는 그냥 뭐 운명 철학, 동양 철학, 사주 팔자 그런 것으로 우리 한국 사람들

은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철학이라는 것은 우리 인생, 내 삶,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한 것.

이 모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것은 다 철학에 혹합니다. 그래서 그런 철학 없는 우리

한국 사회 현실이 어찌보면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데서도 깊이 고민하지 않고 살게 하는 문

제를 낳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 없는 그런 신앙을 하고 있는 부류들이 있는 가 하면 또 다른 면에서는 정반대로

내가 궁금해하고, 내가 고민하고 있는 신앙에 대해서 정말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해답

을 찾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아마 여러분들 주변에 알고 계시는 열심한 신앙인들 혹은 우리 교회 역사에서 나왔던 성인

성녀들이나 이런 분들은 보면, 굉장히 자신의 어떤 삶의 고통의 문제라든지 아니면 삶에서

닥치는 모순된 문제들을 굉장히 진지하게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정말 내가 살고

자 하는 삶의 목표를 향해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애를 쓰시거든요.

 

그래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주변에 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 중에, 성당에 매일

미사 참석하시고, 묵주기도 정말 많이하시고, 성체조배 정말 끊임없이 하시고, 또 나름대로

성경 공부 열심히 하시는 여러분들의 주변 분들을 생각해 보면은 대부분 그분들은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은 뭐냐 하면, 한번은 내 인생에서 바닥을 한번 경험해

본 분들이 대부분이라는 것.

 

# 믿음이 강한 분들의 공통점: 인생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간절히 찾은 사람들

 

사실 살다보면 내 인생 행복하고 즐겁기만 하면 진지하게 내 삶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를

안 느낍니다. 그런데 한번쯤은 뭐 경제적인 문제라든지, 건강의 문제라든지 또 삶의 여러

가지 뭐 상처로 인해서 정말 더 이상 내려 갈 곳 없는 바닥을 경험해 본 분들은 정말 내 인

생이 무슨 의미인지,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정말 내가 찾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신다는 것이지요.

 

# 믿음이 강한 분들의 공통점: 

  인생이 내 힘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

 

그래서 그 결과 그런 질문 앞에 어떤 태도를 갖느냐 하면 "아, 내 인생은 정말 내 힘만으로

는 되지 않는구나. 뭔가 내 힘을 뛰어넘는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거구나." 그렇게

체험을 갖게 되면 신앙인들은 누구나 다 하느님을 찾게 되죠. 하느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께 매다리다 보면 어떤 형태로든 응답을 받은 분들이 새로운 열정을

갖게 되시는 것 같애요.

 

# 믿음이 강한 분들의 공통점: 어떤 형태로든 응답을 받은 사람

 

그래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나 어떤 경제적은 어려움이나 가정의 여러 가지 어려움

들이 그래도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신앙생활을 계속 해 갈 수 있다면 그런 신앙은

분명히 어떤 의모든 가치가 있는 것이다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또 내 현실에 수용할 수 있

는 그런 납득할 만한 이유를 어떤 형태로든 내가 찾은 분들이 이른바 열심한 신앙인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소설가 박완서씨의 체험:

  아들을 잃고 가장 고통스럽고 신의 부재를 체험하는 순간에 찾은 하느님

 

소설가 박완서씨라고 그분이 쓰신 수기 중에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수기가 있는데 그분이

이제 어린 자녀를 교통사고로 잃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잃고 가장 고통스럽고 또 정말

하느님이 계신가라를 것을 몸으로 막 외치던 그순간에 오히려 하느님을 찾았다는 그런 체험

을 수기에 써 주셨거든요. 그러니까 하느님 당신이 계셨더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 소설가 박완서씨의 체험: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는 끊임없는 질문

 

그런데 그 물음에, 물음을 계속 따라가다 보니까 어? 내가 도대체 누구를 향해서 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던지게 끔 만들고 있는 그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어찌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이런 체험을 통해서 정말 내가 질문을 던질 대상이 있다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정말 하느님의 존재를 체험하셨다는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태도를 갖고 사시나요? 한번 생각해 보시죠. 나는 어떻게 나의 신앙의 물

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좋은 성경 구절 하나

제가 소개해 드리면, 창세기 3장 9절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죠.

 

# 너 어디 있느냐? (창세 3,9)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이제 숨죠. 그랬을 때 하느님께서 아담을 찾으십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이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는 이 말 한마디는 구약 성경의 한 어

떤 창세기 역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 존재라면은 한 번쯤은 묵

상해 볼 만한 그런 구절이라고 봅니다.

 

'마리아야, 너 어디 있느냐? 요셉아, 너 어디 있느냐?' 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질 수 있을 때

내가 하느님을 찾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또 하느님이 나를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의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을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 신앙에 대한 물음을 좀 더 진지하게 해 나갈 수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결국 우리가 오늘

날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내 신앙, 내 믿음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 오늘날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내 신앙, 믿음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사는 것.

  내가 믿고 있는 바를 정말로 믿을 만하다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

 

즉 내가  믿고 있는 바를 정말 믿을 만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스스

로 생각하는 신앙인이 되는 거고, 누구나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에 댛서 지적인 즉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책임을 질 줄 아는 그런 신앙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될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될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 오늘날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누구나 자신의 신앙 행위에 대한 지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신앙인의 모습 중에 우리가 신앙에 대한 태도를 고민해 볼 때, 한 세 가지 정도

로 그 신앙의 형태들을 나눌 수가 있겠습니다. 첫 번째는 신앙이라는 것은 무조건 믿으면

되는 것은 아닌가? 무조건 믿으면 된다. 이러한 생각으로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대표적인 예로 요즘 길거리에 나가시면 많이 이제 접하시게 되겠지만 '예수 천국, 불신 지

옥' 뭐 그분들의 종교적 열성이나 신앙의 열정을 뭐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예수 천국, 불

신 지옥' 이라고 하는 믿음에 대한 어떤 확신은 그분들의 삶을 변화시킨 힘에서부터 온 겁

니다. 그런데 전혀  그러한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분들에게 '무조건 믿어라. 예수님 믿지 않

으면 다 지옥간다.'라는 것은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폭력입니다.

 

그것은 어떤 선교의 의미가 아니라 폭력이라는 거죠. 무조건 어떤 선교위 어떤 그런 원리

들이 이 우리 현실 세계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한다면

은 근본주의적인 사고, 원리주의나 배타주의를 만들어 냅니다.

 

# 신앙의 잘못된 태도들

  1)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신앙의 오류: 맹신, 근본주의

 

그래서 대부분 무조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배타적인 신앙, 배타성을 갖다가 일으키는 큰

문제가 되는데요. 이 배타적인 것이라는 것은 내 믿음만이 옳고 다른 사람의 믿음은 옳지

않다는 겁니다. 뭐 아시겠지만 모든 종교에는 이런 배타성들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종교는 하나의 신념에 대한 확신이거든요. 내가 믿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내가

믿을만한 가지가 없죠. 그러나 그런 확고한 믿음의 어떤 확실성 때문에 다른 종교인이나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체계는 옳지 않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슬람교가 뭐 전부 근본주의자라는 그런 인상을 많이 받는데 그건 언론의 오도

된 것이지 실제로 이슬람 신자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들입니다. 단지 그 종교의, 이슬람

의 어떤 원리를 다른 여타 신앙보다 우월하게 생각해서 다른 종교적인 신념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근본주의적인 배타성을 갖게 되는 것이죠.

 

우리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우리들의 신앙의 어떤 확고함

이라는 것은 분명한 신앙의 중심이지만 그것을 토대로 해서 다른 신앙적 체계를 '넌 잘못

됐다'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마찬가지로 배타적인 신앙이 되는 거예요. 또 왜 배타적인 신앙

이 되어서는 안 되냐 하면 우리들 신앙은 그 자체로 보편적이어야 되기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보편적이라는 말은 제일 많이 쓰는 게 우리가 무슨 신자예요? 가톨릭 신자입니다.

이 가톨릭이라는 말이 그 말 그대로 보편적이다라는 뜻입니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어느 시

대, 어느 민족, 어떤 장소에서도 누구나 다 믿고, 바라고, 희망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보편

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신앙의 보편성 무시

  모든 이들, 모든 시대에 통용되는 신앙의 보편성, 포괄성, 역사성에 대한 무시

  ㅡ 가톨릭(catholic)이란 말의 의미 생각

 

그래서 이 배타적인 신앙은 신앙의 보편성을 무시해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무시해 버릴 수 있는 위험이 항상 있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우리 신앙의 잘

못된 태도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고요.

 

두 번째는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겁니다. 그것을 이제 선택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사실 신앙생활 하다보면 교리 여러분들 다 공부 해 보셨지만 다 100% 이해하세요? 다 못

하거든요. 어떤 경우는 하다보면은 잘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그냥 성당 다니다 보면은

아이, 그래 내가 좋은 것만 하고 열심히 살면 되지 뭐. 성당 거룩하고, 가서 조용한 데서

기도할 수 있고 또 뭐 분위기 좋고, 또 뭐 알아서 신앙 하면 되지 뭐 다 알 필요가 있는가?

 

그래서 예를 들면 교리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게 뭐세요? 여러분들. 삼위일체 교리, 예수

님 정말 부활하셨을까? 이런 것들은 아이, 내가 굳이 이해 안 해도 다 교회가 맞는다고 얘기

하니까라고 대충 타협을 하죠. 이제 이렇게 내가 어떤 것을 특별히 선택적으로 신앙을 하게

되면 어떤 신앙이 되냐 하면 자기 중심적인 신앙이 됩니다. 편의주의적인 신앙에 빠지게 되

죠. 또 때로는 내 신앙을 합리화 시키기도 합니다.

 

# 신앙의 잘못된 태도들

  2) 내게 도움이 되는 것만을 믿으면 된다는 식의 오류:

  반쪽짜리 신앙, 편의주의적 신앙

 

아이, 이 정도까지는 뭐. 우리 가톨릭이 넓으니까 다 포용해 주겠지 뭐 이런 거. 어찌 보면

반쪽짜리 신앙을 하게 되는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런데 가톨릭 신앙의 이 정말 아름답고

풍요로운 것들이 정말 반쪽 밖에 되지 않으면 내가 뭔가 부족하니까 더 많은 것을 채워야

겠다가 아니라, 반쪽짜리가 다인줄 알고 반쪽이 가장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우리들

의 잘못된 신앙 태도가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은 본질적으로 내 실존을 전부

걸고하는 겁니다.

 

# 신앙은 인간의 실존적인 자기 결단

 

내가 뭐 한쪽 발 뭐 디밀어 놓고 또 한쪽은 적당하게 뺄 수 있는 준비를 해 놓는 게 신앙이

아니라 정말 믿습니다 하면은 믿음에 대한 발을 확실하게 집어 넣는 거죠. 그래서 내가 원

하는 것만 취해서 신앙을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절반의 신앙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적인 믿음을 갖는 분들의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사

랑할 수  있다라는 것에 대한 아주 중요한 원리를 잊어버리는 거죠.

 

#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

 

그냥 요 정도만 알면 다 됐다가 아니라 정말 알면 알수록 더 깊어지는 사랑. 그리고 우리가

취미 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알고 싶어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정말

잘 알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들을 이제 하게 되는 겁니다.

 

세 번째 부류는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이 다 합리적이어야 된다라는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 합리적이라는 말은 우리 시대가 일반 과학주의 시대라고 하거든요.

과학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눈으로 정말 보고, 내가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근거

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합리적으로 타당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한 대부분 합리적으로 타당해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대부분 하느님이 존재

하는가? 그러면 야, 하느님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어. 만약에 그분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어떻게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고통받고 죽어야 되는지. 그분이 공의롭고 정의

로운 분이라면 왜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저대로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나름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논리로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맞지 않으면 아,

이것은 잘못된 신앙이야라고 말하는 그런 분들도 많습니다. 최근에 과학자들은 창조론에

대해서 세상 창조는 교회는 무(無)로부터 창조하셨다고 보지만 그런 것도 근거가 없다.

과학을 깊이 연구해 보면 그런 어떤 종교적인 가르침은 과학적인 사실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무신론이 막 새롭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 신앙의 잘못 된 태도들

  3) 내가 믿는 바가 합리적으로 타당해야 한다느 주장의 오류:

  과학시대의 냉소적 신앙, 무신론, 불가지론

 

이러한 합리적인 것에만 자꾸 믿음을 갖는 분들은 어떤 오류에 빠지냐 하면 냉소주의에 빠

질 수 있습니다. 에이, 그냥 뭐 그렇게 사는 건대 뭐. 그리고 또 뭐 때로는 믿음에 대해서 별

로 가치는 못 느끼는 회의를 느낀다거나 또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어떤 무신적인

생각에 많이 빠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교회의 가르침이 별로 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거죠. 그래서 이러한 그 과학의 어떤 합리성이라는 것은 항상 증명을 요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그렇지만 신앙은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어떻게 해요? 증거하는 겁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정말 그것이 무엇보다도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

가 삶으로 드러내 줄 때 신앙은 살아 있는 겁니다. 과학은 실험을 통해 증명하지만 신앙은

삶으로 증거할 때 정말 살아 있는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 과학은 증명을 통해서 확신에 이르고, 신앙은 증거를 통해 확신에 이름

 

 그래서 오늘날 이런 신앙의 여러 가지 잘못된 태도들도 있지만 진정으로 우리가 찾아야 될

그 신앙의 어떤 깊은 올바른 자세도 분명 우리게에는 주어져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이제

많은 가톨릭 신자분들이 신앙에 입문하게 되는 동기가 주로 뭐라고 생각하세요? 마음의 평

화를 찾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하는 신앙.

 

내 삶이 좀 더 평화로웠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그런 대다수의 가톨릭 신자분들의 입교 동기

들이 뭐 가족들 혹은 뭐 사회에서, 내 건강에서 모든 것이 다 평화로워지기를 바라죠. 그걸

더 넘어가서 죽음을 뛰어넘어서도 내가 평화로울 수 있을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

뭐 이런 것들에 대한 그 평화를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교회에 다니는 이유도, 좀 평

화로웠으면 좋겠다. 내 마음이.

 

그리고 평화의 근원은 사실 하느님을 갈망하는 삶인데 그 하느님을 갈망하고 또 예수님 안

에서 이루어진 평화를 찾는 삶인데 자칫 평화만을 추구하다 보면 교회가 나에게 평화를 주

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떠나버리는 그런 어려움들을 우리가 이제 갖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따지고 보면 무엇인가 평화를 찾는다는 것도 내가 그 평화를 주는 것이 확실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평화가 정말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주고 있다는 것. 내 영혼이 정말

하느님을 만나서 정말 평화를 찾고 있다라는 것을 깨달을 때 진정한 신앙의 기쁨이 찾아오

게 됩니다.

 

# 오늘날 올바른 신앙태도

  1) 평화를 찾는 신앙 ㅡ 하느님을 갈망하는 삶

 

그래서 사랑한다고,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많이 하는데요. 신자분들이 흔히

사랑한다 그러면은 뭔가를 이웃을 도와야 되고, 뭔가 실천을 해야 될 것만 생각하지만 사실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사랑할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겁니다. 그 사람을 깊이 아는

겁니다.

 

# 오늘날 올바른 신앙태도

  2) 사랑한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법

 

그리고 깊이 안다는 것은 내가 사랑 속에서 정말 그를 더 풍요롭게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이런 멋있는 말을 써 주셨는데 "사랑은 지식을 갈망하고

지식은 사랑을 섬긴다."라는 말을 합니다.

 

# "사랑은 지식을 갈망하고 지식은 사랑을 섬긴다"

  (초심자를 위한 신학 이야기: 프랭크 쉬드)

 

사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깊이 상대방을 알고 싶어하죠. 그리고 상대방을 알기 시작하고

더 깊이 갈망하면서부터 그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을 존경하게 되고 또

그 사람이 내 곁에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여러분들 결혼 생활하신 분들이나 사회생활 하시는 분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인간 관계

에서 오는 어려움이잖아요. 내 배우자, 내 자녀, 또 내 직장 동료, 성당에 있는 교우들.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은데 그냥 교회에서 사랑하라니까, 사랑하라는데  이게 마음까지 움

직여지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왜 사랑하지 못하느냐 하면, 저 사람이 나랑 다른 말, 다른 행동 방식,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이해하거나 더 궁금하게 알아보려 하지 않고 그냥 무조건 사랑해야 된

다라고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정말로 상대를 더 깊이 이해할려는 마음이

정말 필요하다라는 것을 이제 생각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물음을 우리 인생에서 던질 수 있어야 되고 내

믿는 것. 그리고 희망하는 것. 또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도 더 깊이 고민하고 생각해 보

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 오늘날 올바른 신앙 태도

  3) 물음을 던지는 신앙: 내가 믿는 것, 희망하는 것, 사랑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깊이 생각해 보는 노력

 

그래서 어느 정도 공부를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내가 공부를 하거나 무엇인가 깊이

몰두했을 때 아, 내 마음에 즐겁게 막 용솟움치는 그런 체험을 하는 것은 딱 한 순간입니다.

아, 그렇구나. 감탄할 때 거기에서부터 내 마음의 어떤 놀라움, 경탄, 즐거움이 발생을 합

니다. 그래서 그 놀라움,  깨달음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가 신앙 안에서의 즐거움을 찾아가

는 중요한 여정이거든요.

 

# 물음 -> 이해 -> 경탄 -> 동감  -> 사랑

 

그런데 솔직히 우리 인생은 즐거운 것보다는 좀 안 즐거운 게 더 많죠. 이 한국 사회에서

더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많아야 되는데 즐겁게 나를 만들어 주지 않는 일들이 더 많습니

다. 그래서 한번 여러분들 개인적으로 인생을 쭉 살아오시면서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을까? 내 인생에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 언제였을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랬을 때 야, 너무 즐거워서 지금 이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라는 그러한 생

각이 들 정도의 어떤 체험이 있으셨는지. 그 체험을 되살릴 수 있다면 내가 하느님을 찾는

여정에도 야, 내가 하느님을 아는 것이 이렇게 큰 즐거움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정

말 우리 삶에는 놀라움과 경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해된 대상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

도 모두 물음을 던지는 우리 자신부터 시작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이러한 물음

들을 던지는 시간이 바로 우리들의 신앙이라고 한다면 그 물음은 틀림없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내가 있기 때문에 물음을 던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 물음을 던지는 나의 모습 첫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의 출발점이 되겠습니다.

 

■ 나는 누구인가 ㅡ 철학자 칸트(1724-1804)

 

인생에서 한 번도 우리들이 물음을 그쳐본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물음을 던지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은 분들은 없죠. 그런데 아주 유명한 철학자, 한 번쯤

은 들어 보셨을만한 임마누엘 칸트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 칸트가 인간이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그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졌을 때 인간은 누구나 세 가지 질문을 던지며 항

상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 세 가지 질문이라고 하는 것은 첫 번째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앎에 대한 이야

기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거죠.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항상 던집니

다. "아, 그게 도대체 뭐지?" 항상 알고자 합니다.

 

두 번째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인가 행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무엇인가 누군가의 관계 안에서 항상 행동을 해야 하는데 그 행동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죠.

 

세 번째는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세 가지 질문이 우리 인간이 던지는 가장 중요하

고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이 칸트라는 사람이 했습니

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이 질문은 우리들이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참된 것은 무엇일까? 즉 진리라고 하는 거죠. 眞. 참된 것은 무엇일까?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거짓들도 많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정말 참된 것인지를 사실 알기

힘듭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진리)

 

진리라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타당하고,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아주 보편적인 것

인데 그런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인간들이 찾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이 가장 확실한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 확실한 것을 찾는 데에는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많은 현대인들은

과학적으로 입증 가능한 것만 찾으려고 한다는 거죠.

 

그래서 과학의 시대에 논리적인 것.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가장 먼저여야 된다고

여기는 이런 과학적인 사실이 우선이 됐을 때 우리들이 겪는 가장 어려운 딜레마가 있습니

다. 첫째는 과연 내가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참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

는 정말 모든 걸 알 수 있을까 하면 꼭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든 걸 다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 인생에는 감추어져 있는 신비들이 있습니다.

신비는 내가 모르기 때문에 무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뒷받침 해 주고 있는 아주 중

요한 삶의 뿌리입니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하느님의 신비를 찾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 신비가 없다면 아마 우리들의 삶은 메말라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사람

들이 정말 참된 앎을 추구하고 살고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 신앙인이라면 한 번쯤

은 던질만한 질문은 ?나는 정말로 이 신비, 정말 내가 알 수 없지만 내 삶을 이끌어 주고 있

는 그런 하느님의 신비를 정말 알고 있는가? 또 알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이 첫 번째 질문

에 던질 수 있습니다. 

 

2)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자유의지, 책임, 관계)

 

두 번째 질문,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보면 윤리적인

질문인데요. 살면서 참 매 순간순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자유의지죠. 그런데 이 자유의지는 내 이웃 형제들이나 내 주변 사람들과 맺

는 관계에서도 시작되지만 동시에 하느님과 내가 어떤 관계를 맺느냐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정말 이 자유를 행할 수 있을 때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고 했을

때 그 행위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그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해도 되는가라는

그런 질문을 던질 수가 있겠죠. 그래서 잘 아시는 황금률이라는 게 있습니다.

 

# 황금률: 그러므로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이런 말씀을 ?하시거든요. 그러니까 행위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면서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될 중요한 갈등의 요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생명 윤리라든지, 성

윤리라든지, 우리들 삶에 이루어져 있는 많은 어떤 윤리적인 문제들을 인간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라는 것에 대한 물음입니다.

 

2)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물어야 한다

 

그래서 이 물음과 관련되어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은 던져야 되는 것은 그렇

다면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첫 번째 질문이 하느님의 신비

를 내가 찾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두 번째는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될 것인가? 이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종교철학적 질문)

 

세 번째로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라는 이 질문은 아주 궁극적인 종교적인 질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내 생이 정말 무엇을 바라고 살고 있는가?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가? 어떤 분은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우리 인간의 삶의 어떤 문제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미리 갈

망하며 살기 때문에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늘 기대하며

살기 때문에.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기대한다는 것은 그냥 막연히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

실을 살겠다고 결정하지 않으면, 결심하지 않으면 미래는 사실 오지 않습니다. 그죠? 그래

서 우리들이 늘 희망한다는 것은 지금의 현실은 무관하게 미래에 올 하느님의 어떤 특별한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  내 삶에 주어져 있는 현실을 내가 수용하고 받아

들일 때에만 미래는 나에게 선물처럼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바로 이런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내게 주어져 있는 현실적인 고뇌에 대

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의 근거는

뭘까? 내가 영원히 살고자 하는, 죽음을 넘어 살고자 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은 어디

로부터 오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비그

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에 보면 1항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1항

사람들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인간의 마음을 번민하게 하는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여러 종교에서 찾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

가? 선은 무엇이고 죄는 무엇인가? 왜, 무엇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참 행복의 길

은 어디에 있는가? 죽음은 무엇이고, 죽은 뒤의 심판과 보상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우

리 삶을 에워싸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저 궁극의 신비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래서 우리는 이 마지막 질문

에 대해서 신자로서 이렇게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나는 과연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한

희망에 대해서 그 희망을 바라며 살아가고 있는가? 내 삶이.

 

3)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나는 영원을 향해 희망하며 살아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질문이 아마 우리 신앙생활을 하면서 물음을 던지는 신앙이라고 볼 수 있습

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우리가 신학하는 즐거움이라는 강의로 시작을 했지마는 이 신학

하는 즐거움에는 많은 물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신앙인이라면 가장

기본적으로 던져야 될 질문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왜 나는 가톨릭 신자로 살고자 하는가?

 

#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왜 나는 가톨릭 신자로 살고자 하는가?

 

그러다 보면은 내가 신앙에서 가톨릭 신자로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신아의 내적인 문제

들, 가령 하느님은 누구이시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고, 또 교회의 정말 참된 교회는 어디

인가? 죄와 은총은 뭐고,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고, 성사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고, 또 우리

가 갖고 있는 이런 세상과의 관계는 어떻게 일궈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 신앙의 정체성

을 묻는 물음이 있을 수 있고요.

 

1) 나의 신앙의 대상에 대한 물음(신앙의 내적 성찰)

2) 나의 신앙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물음(호교론적 자세)

 

두 번째는 살다보면 내 신앙에 대해 도전을 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너는 무슨

근거로 하느님을 믿느냐? 그리고 과연 다른 종교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가? 또

다른 종교적인 수행, 요즘 뭐 불교의 수행이라든지 뭐 여러 가지 부적이나 점술 같은 것에

대해 관심이 많잖아요. 이런 것들에 대해서 가톨릭 신자들은 어떻게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할까? 이런 여러 가지 질문드을 우리가 던질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함께 이제 떠나게 되는 이 신학하는 즐거움이라는 이 여정은 무엇보다

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신 그런 신자분들 뿐만 아니라 또 신앙을 새로 찾는 분들을

모두 초대합니다. 또 신앙에 때로는 회의를 느끼는 분들도 계실 수도 있고, 또 신앙에 열성

을 가지고 또 어떤 물음을 던지는 분들, 혹은 신앙을 열심히 하고 싶은데 필요성을 잘 못 느

끼는 분들 그런 분들을 향해서 질문을 던지는 그런 시간이 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호기심일 수도 있겠지요. 불가에서 얘기하는 발심이라고 말을 하는데 우리는

이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런 삶의 어떤 궁금증을 일으켜 주는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가톨

릭 신자분들이 신앙에 대한 어떤 관심을 가질 때 내 신앙의 정체성이 정말 위기에 처해 있

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물음을 던질 필요를 못 느끼시겠죠.

 

그래서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이 하느님을 찾는 그런 여러 가지 노력 중에 물론 성경과 영성

적인 것들도 중요하지만 이런 모든 것을 지적인 앎으로 그치지 않고 내가 믿는 것을 나의

언어 그리고 우리 시대의 언어로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학하는 즐거움을

찾는 길이라고 봅니다.

 

# 내가 믿는 것을 나의,

  우리 시대의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 신학하는 즐거움으로 가는 바른 길

 

신학은 이제 다음 시간에 또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지만 뭐 신학자나 신학생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학은 하느님과 그분의 섭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해 보는 겁니다.

또 때로는 신학은 하느님이 내게 주신 생각할 수 있는 능력, 그 생각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또 나의 믿음을 이해해 보고, 공감하고, 또

삶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실천으로 끌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강좌는 우리 시대의 참된 신앙을 살아가기  위한 신앙의 자기 이해를 도와드

고 또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지혜를 통해서 확신과 용기를 가지시고 또 가톨릭 신앙을

말 선포하고, 삶의 증거를 통해서 신앙의 작은 씨앗을 뿌려보는 그런 시간으로 초대합니다.

 

# 여러분을 '신학하는 즐거움'에 초대합니다

 

그런 모든 우리들의 여정에 지혜의 성령께서 우리들을 이끌어 주셔서 신학하는 즐거움에

여러분들이 함께 자리를 해 주시고 또 이 여정을 함께 했으면 합니다. 오늘 이 시간은 이

정도로 마치고요. 예 그럼 기도로 이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영광송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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