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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말씀의초대 2014년 8월 22일 금요일 [(백)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4-08-22 조회수54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4년 8월 22일 금요일

 

[(백)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1900년 무렵부터 마리아께

 ‘여왕’의 영예가

 주어져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다.

1925년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정해지면서

이러한 요청은 더욱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1954년 비오 12세 교황은

마리아께서 여왕이심을 선언하고

 해마다 5월 31일에 그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그 뒤 로마 전례력의 개정에 따라,

 마리아를 천상 영광에 연결시키고자

성모 승천 대축일 뒤로 옮겼으며,

축일 이름도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로 바꾸었다.

이날 교회는 성모 승천의 영광을

거듭 확인하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신 것을 기린다.

 

말씀의초대

에제키엘 예언자가 계곡에 있는

 뼈들이 부활하는 환시를 본다.

주 하느님께서는 뼈들에

숨을 불어넣어 살아나게 하시고,

영을 불어넣으신다.

 이는 이스라엘을 다시 회생시켜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시고

 백성이 주님을 알게 하리라는

 약속을 의미한다(제1독서).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한 율법 교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하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며,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하신다.

 

◎제1독서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온 이스라엘 집안인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내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7,1-14
그 무렵

 

1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2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4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5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6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7 그래서 나는

분부받은 대로 예언하였다.

그런데 내가 예언할 때,

무슨 소리가 나고

 진동이 일더니,

뼈들이, 뼈와 뼈가

 서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8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숨은 아직 없었다.


9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10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11 그때에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12 그러므로 예언하여라.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13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4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7(106),2-3.4-5.6-7.8-9(◎ 1 참조)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말하여라, 주님이 구원하신 이들,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신 이들.

해 뜨는 곳과 해 지는 곳,

 북녘과 남녘,

 뭇 나라에서 모으신 이들은 말하여라.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사막과 광야에서 그들은 헤매며,

사람 사는 성읍으로 가는 길 찾지 못하였네.

굶주리고 목말라, 목숨이 다하였네.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곤경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자,

 역경에서 그들을 구해 주셨네.

그들을 바른길로 걷게 하시어,

사람 사는 성읍으로 가게 하셨네.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복음환호송

시편 25(24),4.5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
◎ 알렐루야.

 

◎복음

<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묵상

우리나라의 현대 수묵화를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월전 장우성 화백의 수필집

『월전수상』에는 ‘흑과 백’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흑과 백은 절대 상반의 두 개의 원색이다. (중략)

그래서 이 두 원색은 어떠한 경우에도

혼동이나 착란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러기에 옛날에서 현재까지 뚜렷한 대조를

표시해야 할 경우에 항상 흑백을 이용한다. (중략)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러한 색상 감각의

표준 의식이 흐려졌거나 삐뚤어져 버린 것 같다.

번연히 흰 것을 검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옻빛같이 검은 것을 눈빛같이

희다고 억지 쓰는 친구들도 있다.”
수묵화의 세계와는 달리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려운

상황들을 자주 만납니다.

판단을 해야 할 때 섣불리 자신의

직관에 의지하기보다는 찬찬히

관찰하고 경청하는 태도와,

사람마다 자기 ‘나름의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자세가

 인생의 지혜이자 현대 사회가

 조화롭게 유지되는 조건입니다.
이처럼 인생사는 오히려 마치 경계를

 꼭 집어 말할 수 없도록 미묘하게

 색이 변해 가는 수채화의 세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 지혜’가 구체적

상황에 적용되려면 역설적으로 그 중심에

 근본적 원리에 대한 분명하고 타협 없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흑백 논리’로 삶의

 복잡다단함을 재단하지 않는

 관용의 태도는 섬세하고 호의적인

배려가 아니라 무책임한 상대주의나

자기 위주의 주관주의로 귀착될 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흑이 백이 될 수 없는
수묵화의 세계처럼 우리에게도 삶의

최종 가치에 대한 양보 없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투신입니다.

 이 ‘원리’에는 어떠한 모호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계명의 분명한 요구가

삶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수묵화의 은은한 운치를

느끼며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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