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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신을 버리려거든 감정의 변화부터 살펴라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8-31 조회수940 추천수7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연중 제22주일


<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

복음: 마태오 16,21-27





예수님 십자가의 길


MEMLING, Hans 작, (1470-71)


     < 자신을 버리려거든 감정의 변화부터 살펴라 >

           

  성모상 앞에 있는 봉헌함의 돈이 자꾸 없어지자 신부님이 도둑을 잡으려 아기 예수 상 뒤에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해질녘이 되자 한 거지가 들어와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성모님, 오늘도 한 푼도 벌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아무 말씀 없으시면 허락하는 걸로 알고 돈을 가져가겠습니다.”

 그는 인자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 계신 성모님께 꾸벅 감사인사를 드린 후 봉헌함에 손을 들이밀었습니다.

다급해진 신부님이 소리쳤습니다.

안 돼!”

놀란 도둑 거지가 고개를 홱 돌리자 아기 예수상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기고만장해서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너희 엄마가 가져가라고 하시잖아!”

[박용식 신부님 글 중에서]

   

이 거지는 무릎 꿇고 기도는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뜻을 버릴 마음이 없는 도둑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기도 안 들어주시면, 성당 안 나올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도 자신의 뜻으로 하느님의 뜻까지 바꾸어버리려는 도둑과 같은 마음입니다. 도둑? 아닙니다. 마귀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할 때 반드시 그와 반대되는 감정이나 생각이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에서 자유를 주시기 위해 당신 뜻과 반대되는 뜻이 생기게 만들어 선택권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도 이런 법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로마 7,21)

이 하느님 뜻과 반대되는 뜻이 일어나게 만드는 장본인을 자아라고 하는데 우리가 자아의 정체를 쉽게 찾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아는 그때그때 자신의 모습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자존심으로, 어떤 때는 돈으로, 어떤 때는 쾌락으로, 어떤 때는 분노와 미움 등으로 바뀝니다. 사실 바뀐다기보다는 이 모든 집착들을 자아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빼앗기거나 그럴 위험이 닥치면 화를 내게 하거나 긴장을 하게 하거나 혹은 아예 무기력해지게 만듭니다.

따라서 나의 자아가 얼마나 강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매 순간 올라오는 나의 감정들을 살펴야합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긴장이나 두려움, 분노 따위를 사람이니까, 당연하지!’라는 식으로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자아는 마귀라면 그런 감정들은 마귀의 감정들인 것입니다. 자아가 사탄인 이유는 자아가 하느님의 뜻을 내 안에서 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마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시는 말씀은 과장이 아닙니다. 그때 베드로에게 하느님의 뜻에 반하여 말하게 하는 그 자아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가 살면 다른 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니면 사탄입니다. 나를 죽이면 하느님이 되고 내가 살면 사탄이 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지 않고서는 절대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위대한 인물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잘 다스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소크라테스 또한 그런 위인 중 하나인데 그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주위의 모든 환경을 통해 수련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말이 많고 성미가 고약했습니다. 사람들이 묻기를 왜 그런 악처와 같이 사느냐고 하니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말타기를 잘 하는 사람은 난폭한 말만 골라서 타지. 난폭한 말을 익숙하게 다루면 딴 말을 탈 때 매우 수월하니까 말이야. 내가 그 여자의 성격을 참고 견디어 낸다면 천하에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 없지 않겠나.”

또 한 번은 부인의 끊임없는 잔소리를 어떻게 견디느냐고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소크라테스는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괴로울 거야 없지라고 대답하며 웃더랍니다.

어느 날은 부인이 소크라테스에게 잔소리를 퍼붓다가 머리 위에 물 한 바가지까지 휙 끼얹었습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는 태연히 말했다고 합니다.

천둥이 친 다음에는 큰비가 내리는 법이지.”

보통 사람 같으면 크산티페의 고약한 언동 때문에 같이 감정이 폭발하여 화병이 들고도 남을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재치 있게 긍정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아예 분노라는 감정을 생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 끊임없는 수련으로 자아가 일으키는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수련이 결국 자아를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즘 많이 들리는 말이 감정노동이라는 단어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고객님, 사랑합니다!”를 연발합니다. 그런데 일부 고객들은 그들이 조금만 잘못하더라도 모욕적인 말과 행동들을 해 댑니다.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어떤 분은 새치기 하지 말라고 했다가 고객센터에 고발까지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계속 친절함과 공손함으로 손님들을 대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속은 썩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겉의 와 속의 가 완전히 달라 심리적 괴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감정 노동자들은 다른 곳에 가서 자신들이 당한 것을 똑 같이 다른 감정노동자들에게 풀어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서비스업비율은 2010년 기준으로 58.2%라고 합니다. 그들이 대부분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이 27%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는 징계 해직자 중 우울증 환자비율(28.5%)과 비슷하고 버스기사보다 2배나 많은 숫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서비스업 종사자가 70%에 달하는 미국과 일본에 비해서도 우리나라 감정노동자들이 훨씬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들이 스트레스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고 본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정노동 스트레스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것입니다. ,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평상시에 두 얼굴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면에는 괴물이 있고 외면에는 착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꾸며진 착한 외면에 속아서 내면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런 모습이 된 것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 자신에게 못 되게 구는 세상 사람들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화가 일어나는 것은 그 안에 그 화를 일으키는 자존심이라는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자에게 개에게 빵을 줄 수 없다라고 하시며 모욕적인 언사를 하셨을 때도, 그 여인은 개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며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자존심, 즉 자아를 죽여서 멸시를 받을 때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네 믿음이 참으로 크다라고 칭찬해주십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자아가 성령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감정 노동자라 하더라도 다 우울증에 다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 정도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화가 나는 것이 자신의 탓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런 기회를 자신들의 자존심을 버리는 기회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 감정들이 일어날 때 매번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시는 목소리를 듣는다면 자아를 버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증오나 분노, 미움이나 긴장, 혹은 두려움과 같은 감정이 일어나는데도 그것이 내 자신이 아닌 외부 요인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리기 때문에 그 자아는 계속 내 안에서 주인행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는 이런 감정들에서 우리를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며 우리를 노예로 삼습니다. 무엇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노예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워하지 않으려 해도 안 되는 것은 이미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아도 우리 주인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자아를 몰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사라졌을 때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은 평화입니다. 참 평화가 와서 감정의 변화가 급격하게 변하지 않는다면 자아를 많이 버렸다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생겨났습니다. 자아가 죽기 싫어서 반항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아의 반응이었음을 알았다면, 그런 감정인 상태에서 다시는 예수님께 말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을 잘 살펴야합니다. 평화를 깨는 안 좋은 감정들이 나타날 때 바로 그것이 자아 때문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자아가 사탄이라 불려도 무방한 놈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이용해 자신을 버리는 연습,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항상 평화로움을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삶은 매일이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으려고 해야 하는 수련의 장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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