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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용민 신부님의 신학하는 즐거움 제3강 신학이 왜 필요한가요?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02 조회수929 추천수2 반대(0)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송용민 신부님의 신학하는 즐거움

 

제3강 신학이 왜 필요한가요?

 

시작기도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베드 3,13-16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선을 행하는데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그러나 의로움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 하여도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두렵게 하여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

서워하지 마십시오. 다만 여러분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

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대답하십시오.

 

지혜의 주님, 저희에게 허락해 주신 이 은총의 시간에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게 해주시고,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진리의 빛을 나눌 수 있는 기쁨을 주십니다. 주님, 저희에게 지혜의 영을 보내 주시

어, 저희가 간직한 희망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언제든지 답변할 수 있는 지

혜의 영과 용기를 내려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안녕하세요? 지난 시간 동안 무고하셨죠?

예, 지난 두 번째 강의에서 저희는 신학이라는 것이 신학자나 신학생의 전유물만은 아니다라

는 이야기를 풀어봤습니다. 그래서 신학의 어원, 테오롤로지 그랬을 때 테오스와 로고스 합성

어라고 해서 하느님, 말씀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풍요로운 하느님

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 신학: Theology(Theds + Logs)

 

그래서 세 가지를 말씀드렸던 기억이 나는데 첫 번째는 하느님의 이야기라고 했을  때는 그것

은 신화와 같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죠.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느님께서 이 세상과 우리를 다루시는지를 우리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것을 배우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깊이 읽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깊이 깨우지기

위한 것이죠. 신학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가 거기 있죠.

 

# 하느님의 이야기 / 신화(信話)

  신학은 하느님이 이 세상과 우리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것

 

두 번째는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이 어떻게 내게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의미를 갖고 있을까?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을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래서 신학이라는 말을 썼습

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 생애에 하느님 말씀이 정말 어떤 의미로 나에게 다가오는지, 또 이것

은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신학의 과제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 / 신학(神學)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게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

 

그다음 마지막으로는 하느님을 향해서, 하느님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거는

이른바 우리가 이야기하는 신앙입니다. 영성이라는 말로도 표현하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서 어떻게 숨쉬고 계실 수 있는지를 한 번 우리 삶 속에 실천으로 이끌어 내보는

겁니다.

 

# 하느님을 향한 이야기/ 신앙(神仰)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내 삶 속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생생하게 살아야 하는지 노력

 

그래서 이렇게 신학은 하느님의 말씀, 그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또 하느님을 향해서 우

리가 영성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여러 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억나시죠? 신학은 나와 하느님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내가 믿는 것을 이해해 보려는 것이다 해서 생각하는 신앙이다. 이런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해

드렸습니다.

 

# 신학은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내가 믿는 것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다

 

오늘은 제 세 번째 강의입니다. 신학은 왜 필요한가라를 주제입니다. 물론 오늘의 강의는 지난

두 번의 강의의 내용을 조금 더 보충하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갖고 있는

신학에 대한 여러 가지 편견과 오해를 한 번 좀 더 깊이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 오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자, 첫 번째 많은 신자분들께서 이제 신학하면은 갖고 계신 여러 가지 오해들이 있는데 그 중

에 한 가지가 이제 이런 것입니다. 뭐 신앙은 체험인데, 그리고 느낌인데 꼭 뭐 이해하기 위해

서  물음이라는 것이 필요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뭐 신앙은 공부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죠.

 

# 신앙은 '체험'이고 '느낌'이지 꼭 이해하기 위해서 물음을 던져야 하나요?

 

그리고 신앙은 어쩌면 마음으로 깨닫는 게 더 중요한 것이다. 혹은 열심한 신자분들이 흔히

시는 말씀처럼 하느님을 정말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깨우치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지, 사실 공부는 그 이후가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하시거든요. 맞습니다.

사실 맞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거잖

아요. 그런데 한 번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도대체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

님을 느낀다는 것이 뭘까?

 

#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없이 그냥 마음의 느낌만으로만 가능한

일일까? 이런 생각입니다.

 

# 하느님을 체험하고 느끼는 것은 생각 없이 오직 마음의 느낌일 뿐일까?

 

사실 많은 분들이 이 체험을 하시고 싶어하십니다. 여러분들 하느님 만나보셨어요?

 

■ 하느님을 만나보셨나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열심한 분들은 "예!" 하시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 거 같기는 한대 이게 느껴

지지는 않는 하느님. 그래서 하느님 체험이라는 게 굉장히 멀게 느껴지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

다. 그런데 요즘 분들은 그래서 하느님을 좀 더 깊게 체험하기 위해서 좀 영성적으로 내가 다시

나는 그런 수행 같은 거 해보면 안 되나? 그런 것들을 많이 이야기 하시거든요.

 

요즘 사회인들이 많이 관심을 갖고 있는 뭐 명상법이라든지, 마음수련이라든지, 특히 요즘

불교에서 크게 매력을 얻고 있는 불교의 선. 이런 것들. 탬플스테이 같은 거 하시면서 그런

것들에 대한 관심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신자들도 교회를 통해서 전통적으로 신앙해 왔던 뭐 성경을 읽고, 미사 참석 열심히

하시고 또 나름대로 교리공부 열심히 하는 이런 방법보다는 좀 이제는 하느님하고 좀 직거래

하고 싶다. 교회하고 뭐 거지지 않고 아, 하느님을 내가 느꼈으면 좋겠다. 뭐 그런 이제 직접

적인 하느님 체험을 추구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런 분들 중에는 하느님의 어떤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하는 것은

좀 자극적인 어떤 하느님의 기적이 좀 나와주면 어떨까? 그래서 흔히 이제 뭐 놀라운 환시라

든지 또 환청이라든지 흔히 뭐 사적계시다. 이래 가지고 기적이라는 것을 따라다니는 분들이

이제 적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이 좀 더 강렬한 체험인데 좀

미지근한 게 싫다는 거죠.

 

그리고 뭔가 좀 자극적인데 이건 한국 분들의 특성인 거 같애요. 우리 짜고 매운 거 좋아하잖

아요. 좀 뭔가 자극적이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앙에서 하느님을

체험을 너무 자극적인 것을 찾으면요, 그것이 감각적으로 떨어지면 또 다른 자극을 원합니다.

우리가 뭔가 맛있는 거 먹고 나면 그거와 똑같은 거 먹으면 별로 맛이 없더든요. 더 맛있는 거

먹고 싶거든요. 그러니까 자극적인 것을 느끼면 더 큰 자극을 원해요.

 

# 기적은 언제나 더 큰 기적을 요구하기 쉽다

 

작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더 큰 기적을 찾는, 그런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생긴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우리 한국 사회의 조금 어려움이 되고 있고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가톨릭 교

회가 말하는 참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허황된 것을 찾는 그런 신앙이 아니라, 아주 구

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내가 발을 딛고, 그리고 하느님을 향해서 정말 물음을 던지고 그리고

현실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겁니다.

 

# 참된 신앙: 내 삶의 구체적인 현실들이 발을 딛고 하느님을 향하여 물음을 던지면서

  현실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거는 결코 현실의 땅을 벗어나서 그야말로 하느님을 믿는 그런 신앙은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착각이 될 수도 있고요. 또 망상에 빠질 수도 있습

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섰다는 것. 그것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내가 겪고 있는

고통, 병, 상처, 어두움, 좌절, 회의 이 모든 것들. 어찌보면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다라는 그런

느낌들.

 

이걸 이제 어려운 말로 비구원적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으면

서도 하느님은 왜 그런 어둠 속에서도 나를 어떻게 다루실까? 이에 대해서도 궁금해하고 그

에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정말 신앙인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 현실에 발을 딛는 것: 내가 겪고 있는 고통, 병, 상처, 어두움, 실망, 좌절, 회의

  속에서 하느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묻고, 배우고, 깨닫고자" 하는 것

 

그래서 참된 신앙인은 하느님이 정말 나의 삶의 구석구석을 다 살피신다는 그런 믿음을 전제

로 합니다.

 

# 참된 신앙인은 하느님이 나의 모든 삶의 구석구석을 살피신다는 믿음

 

그런 믿음이 있어야 되요. 우리에게는. 그리고 내가 정말 하느님이 내 곁에 계시지 않는 그런

절망의 순간에도 정말 하느님이 뭔가 뜻이 있으니까 나를 지금 이렇게 놓아두고 계시지 않을

까?라고 하는 믿음. 그게 사실 우리가 가져야 될 참된 믿음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 나의 절망의 순간에서 하느님은 어떤 뜻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냥 맨날 남들은 행복하게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가? 그래서

어느날 큰 짱돌에 한 번 맞고서는 엉엉 울고 있는데, 왜 하느님은 이거 안 막아주시냐고?

그랬더니 이래 고개를 들고 보니까 예수님이 큰 몸집으로 수없이 날아오는 돌들을 등으로

막아주고 계시는데 그 중 돌 하나가 삐져나와 갖고 한 대 맞은 건대. 우리는 그게 날 버렸다

고 이렇게 얘기하는. 그런 것들이 아마 우리들의 체험이 아닐가?

 

# 힘든 시기에 나를 업고 걸어가 주신 하느님에 대한 원망하고 있지 않는가?

 

하느님은 집채만큼 큰 몸으로 우리들을 보호해 주시는 분이신대, 우리가 그 작은 것에 너무

절망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그것을 깨닫는 분들이 정말로 참된 신앙인이겠죠? 그렇죠?

네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뭐 묵상을 하고, 교리서를 공부하고, 내 믿음에 대해

서 한 번  물음을 던진다는 것은 어떤 지식적인 뭐 신앙의 지식적인 것을 쌓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도대체 나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한 번 배워보는 겁니다.

 

#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교리서를 공부하면서, 내 믿음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는 것

  하느님이 나를 다루시는 방법을 배우는 것

 

아, 저분은 나를 어떻게 다루시길래 지금의 내 모습에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실까? 그것을

깨닫는 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건 단지 내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정말 세상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이런 어떤 해방, 자유, 치유 이

모든 것을을 겪어내는 겁니다.

 

# 하느님을 믿는 다는 것: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지금의 나의

  해방과 자유, 평화를 위한 것

 

그래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보면 분명히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시거든요. "하느님 나라가 저 멀

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 가운데 있다."(루카 17,21)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루카 복음

17장 21절에 나와 있는 하느님 나라라 하는 것을 내세에서 찾지 말고 지금 여기서 하느님께서

나를 이끄시는 그 힘을 체험하는 것이 곧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아마 신자들이 많이 깨달으려야 될 그런 부분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제 많은 분들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체험이고 깨달음이다." 하지만 사실 깨달음과 체험은 단순히 느낌이 아

닙니다. 그것은 내 삶에서 하느님이 나를 어떻게 이끄시는지를 이해해 가는 과정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건 내가 내 삶에 일어난 것들에 대해서 한

번 질문을 던져보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는 거거든요. 생각해 보는 과정이 이해

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이 나를 이끄시는 길을 잘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 하느님이 나에

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정확하게 식별해 낼 수가 없습니다.

 

# 하느님이 나를 어떻게 이끄시는지 잘 알지 못하면 내가 깨달은 것,

  내가 체험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식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 영혼의 기쁨과 평화가 생기더라도 그것이 성령께서 정말 나에게 주는 기쁨인지,

아니면 인간적인, 감상적인데 빠져서 느끼는 순간적인 기쁨인지는 바로 성경을 읽고 그 안
에서 하느님을 깊이 생각하면 식별의 은사가 우리에게 내려온다는 겁니다. 아시겠죠?

 

# 내 영혼의 기쁨과 평화가 성령의 이끄심이라는 신앙 고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자, 그래서 이런 진지한 우리 삶에 대한 물음,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정말 성령의 이끄심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들의 이런 체험, 또는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체험이 우리 삶에 대한 이

해를 필요로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성령 세미나에 아마 참석하신 분들도 아마 적지 않으실 거예요. 사실 가톨릭

교회가 성령에 대한 새롭게 자각을 하고 교회 안에서 성령에 대한 은자에 대해서 깊이 강조하

게 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입니다. 오히려 개신교에서는 19세기 말에 신앙 각성 운

동이라고 해서 내적 회심을 일으키는 그런 하느님에 대한 음성,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서 뭐 아시겠지만 개신교에서 성령부흥 운동이 먼저 시작되었죠.

 

우리 가톨릭 교회가 성령을 그렇다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닌데 성령께서 이끄시는

이 교회의 어떤 음성에 더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은 공의회 이후입니다. 그래서 아시겠지만

한국에도 80년대 이후부터 성령 운동이 많이 활발하게 진행이 됐죠.

 

그리고 요즘 왠만한 가톨릭 신자분들은 성령 세미나에 많이 가시더라고요. 뭐 저도 개인적

으로 체험을 해 봤지만 성령 세미나 가면은 심령 언어하고 막 이러는 거 되게 좀 어렵고 낯

설다라는 이야기를 하시는데요. 어느날 갑자기 성령은 우리에게 오지시 않습니다.

 

성령 세미나 가면 무엇보다도 먼저 처음부터 뭐 심령기도를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하느님

을 저 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체험해서, 정말 바닥을 치고 하느님, 당신은 내 모든 것이라고

고백을 해서 깨달음을 얻은 분들의 신앙 간증을 먼저 듣습니다. 그쵸?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 마음이 똑 닫혀 있었는데 "아, 나도 용서받지 못할, 치유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저분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야, 하느님이 나도 치유해 줄 수 있겠

구나."라는 이런  마음의 공감이 생기는 겁니다.

 

# 성령 세미나의 예/ 신앙 체험의 간증

  ㅡ 열린 마음 속에서 성령의 은사가 주어짐

 

그런 간증을 하나씩 두 개씩 들으면서 성가와 찬미를 하다 보면, 내 꼭 막혔던 마음이 열리는

거죠. 그 마음이 열렸을 때 비로소 성령께서 우리에게 활동하시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활동에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되요. 우리의 마음을 닫으면 그분은 활동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내 마음이 열렸을 때 성령께서 나를 움직였을 때 내게 치유와 해방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체험했다. 깨달음을 했다는 것도 내 죄와 내 삶과 이 모든 것을 정말

이해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열 때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 그것도 하나의 공부입니다. 아시겠죠?

 

공부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무슨 책상 앞에서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 이 동양에서는 아주 넓

은 의미에서는 정말 이 마음의 어떤 수련적인 것들, 수행을 통해서 덕을 닦는 것, 이런 것도

넓은 의미의 학문입니다. 동양의 어떤 학문의 의미에서는.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도 하나의 공부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오해

가 풀릴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는 이제 두 번째로 생각해 볼 만한 것은 많은 신자분들이 내가

믿는 내용을, 신앙의 내용을 일일이 따져 물어야 하나요? 믿을 교리인데 그냥 믿으면 되지 않

나요? 이렇게 이제 묻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그대로 믿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시죠.

 

# 믿을 교리인데 그냥 믿으면 되지 않나요?

 

그런데 그것은 교회에 대한 나의 신뢰를 전제로 했을 때만 가능한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제 전통적으로

가톨릭 교회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있었냐 하면 "교회와 함께 살아간다"  교회와 함께 살아간

다 해서 이른바 교회적 감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 전통적인 가톨릭 신심, 교회와 함께 살아간다

  Sentire cum eccleslae

 

그거를 라틴어로 센티에 쿰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 교회적 감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느님의 인도에 따라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에게 가르쳐지는 그 모

든 것들을 신뢰를 갖고 믿는다라는 그런 독특한 우리들의 감각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랑한

다는 것은 바로 가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으면서도 어찌보면 전통적으로 신자분

들이 좀 가르침에 순종하는 그런 의미의 메세지들이 강했거든요.

 

#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내가 교회를 사랑한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냥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아무런 의심 없이 그냥 믿는 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일까?

 

# 교회가 가르치는 것이 나의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과연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 그런 교리들을 생각했을 때 그 교리가 나의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교리는 죽은 교리이고, 죽은 문자에 불과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때로는 그 교리에 얽매이다 보면은 내가 율법주의에 빠질 수도 있고, 생각 없

이 믿다 보면은 그냥 내가 믿고 있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를 하는 그런 문제도 생기고 또 설명

을 해야 될 때 참 막막해지는 경우도 생깁니다. 사실.

 

#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교리는 죽은 교리다

 

그래서 몇몇 신자분들은 그런 이야기도 하세요. "그냥 믿으면 된다. 그래서 너무 의심하고

자세하게 알려고 하면 다친다." 뭐 그렇게 표현도 하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단순하고 아주

겸손하게 믿는 것이지 자꾸 알려고 하면 미혹에 빠진다. 뭐 그것도 좋은 영성 수련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은 저도 인정을 합니다. 뭐 아무려면 교회가 잘못된 걸 가르치겠는가?

 

그렇지만 많이 아는 것보다 겸손한 것이 하느님을 더 가깝게 안다는 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

신앙의 성숙이 된 사람들에게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적인 어떤 인간이기 때문에 내가 지적

으로 그것을 동의하고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유아기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

는 거죠. 그래서 문제는 교리에 대한 것들, 가르침에 대한 것들을 내가 소화해 내지 못하면

교리는 교리일 뿐 내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신앙

  교리는 교리일 뿐, 내 삶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이제 가톨릭 신자분들이 요즘 많이 이제 뭐 신학 공부도 하시고, 성경 공부도 하시고

열심히 하시는데 교리 공부는 좀 소홀히 하시는 분들도 있거든요. 그런데 교리는 예비자 교

할 때 좀 하시고 다시는 교리서는 보지 않는 거라고 생각 하시는데 사실 교리서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교리서를 잘 공부하는 것도 신학 공부의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말씀을 드렸죠?

 

그래서 조금 더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좀 이렇게 깊이 있게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한 번 이해

해 볼려고 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교리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는 가톨릭 교리에 대한 상세한 어떤 물음을 던졌을 때 언

제든지 답변할 수 있는 그런 준비를 우리가 하는 겁니다.

 

오늘 제가 시작 기도 할 때 1베드 3장을 읽었는데 거기의 말씀 중에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

오."(1베드 3,15)라고 했거든요. 이 구절은 사실 뭐 우리들이 말하는 신학의 대헌장이라고 해

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그렇다면 우리가 내 믿음을 지키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내 믿음을 설명해 줄 때 과연 얼마큼

내가 책임 있게 신앙을 설명하느냐? 과연 내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누굴까? 누굴

요? 신자분들 중에는 의외로 외짝 교우 분들이 많으세요. 외짝 교우 분들이 가장 힘든 거는

내 남편, 내 아내에게 열심히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범을 보여야 되는데, 그것들을 설명

하기가 참 힘들 때가 있어요.

 

왜 그렇게 하느냐? 왜 하느냐? 했을 때, 내가 이렇게 마땅히 대답을 잘 해 드릴 수 없는 그런

궁색함을 많이 겪거든요. 외짝 교우 분들이나 혹은 가족 안에서 부부 뿐만이 아니라, 부모 자

식 관계에서도 서로 신앙의 내용이 서로 다를 수 있고요.

 

또 더 큰 문제는 시부모님하고 며느리가 신앙이 다르면 아주 갈등이 큽니다. 며느리는 천주교

성당 다니시는데 시어머니가 개신교 다니시거나 불교 신자시면은 참 힘드시죠. 주일날 성당

가셔야 되는데 시어머니가 "왜 너는 주일 마다 가느냐?" 이렇게 물어보면은 참 거기에 대해서

내가 신념을 가지고 대답하고 살아간다는 게 쉬운 거는 아닙니다.

 

또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직장에서나 혹은 공동체의 작은 모임들인 친목회나 친구들

의 모임, 동아리 같은 데에서도 나와 다른 신념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많거든요. 그들이 가끔

"야, 너 성당 다니는데 마리아교 아니야?"라고 묻는다든지, 아니면 성당에서는 어떻게 신부님

이 죄를 용서해 줘?"라는 그런 도발적인 질문을 해 왔을 때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슬기롭게,

지혜롭게 대답할 수 있을까? "야, 그냥 몰라도 돼!" ^^*~~~ 이게 아니라.

 

정말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 줄 수 있으려면요, 제가 확실하게 알지 않으면

못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내가 모르는 것을 남에게 설명할 수 없거든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냥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가르치는 거를 내가 잘 소화해서 나의 말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겁니다.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임 있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 이것이 아마 여러분들이 평신도로서 열심하게 살아가는 그런

신자로서 아마 가지셔야 될 중요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 내 가족, 지인들에게 내 신앙을 설명하려면 신앙의 주체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이제 요즘 많은 분들이 신학자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신자분들도 그런 의식을 갖고

있는데, 과거에는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그런 질문을 많이 던졌어요. 교회란 무엇인가?

치 교회는 나와 상관 없는데 내가 교회에 가는 것처럼. "나 교회 간다." 이런 얘기들 하잖아요.

그게 아니라 지금은 "교회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바꿉니다.

 

■? 교회는 누구인가?

  내가 곧 교회이다. 우리가 곧 교회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건물이나 단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들 믿음의

공동체라는 거죠. 살아 있는 인격체와 같은 것이예요. 교회는. 그래서 교회는 누구인가?라고

했을 때 곧 내가 교회다, 우리가 교회다라는 그런 인식들이 공의회 이후에 많이 이제 나타나

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교회의 주인공으로서 나에 대한 주체성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

면 뭐 교회 조금 내가 소홀해도 상관없겠지라는 그런 어떤 약간 방관적인 자세가 될 수도 있

거든요.

 

그러니까 내 스스로가 내 믿음의 확신을 갖지 않으면 교회까지도 무너질 수 있다는 그런 큰

우리의 책임감을 느껴야 되는 거예요. 나 하나 쯤이야가 아니라, 교회에 내가 정말 필요하고

내 믿음이 확실해야 우리 교회가 굳건해진다라는 그런 책임감. 그게 우리시대에 우리에게 참

요청된다는 것이다라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성당 다니실 때 많이 상처를 받으실 때, 그 상처의 이유 중에 "아, 신부님께 상처

받았어요." 이런 분들도 많거든요. 뭐 "신부님이  저만 미워해요." 그러면서 신부님 탓하면서

성당 잘 안 나가시는 분들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데 내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신

부님이 뭐라고 그러셔도 내가 열심히 살면 되거든요.

 

열심히 살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다 보면 신부님들도 그 열심한 모습은 다 인정하시고, 신부님

스스로도 느끼시거든요. 그랬을 때 우리가 아, 이 교회는 정말 살아 있는 우리 신앙 공동체로

서로 나누고, 대화하고, 서로 배워가는 교회구나, 무조건 가르치는 교회만이 아니라 나도 배

우고 신부님들도 배우고, 신자들로부터.

 

뭐 사실 저도 사제 생활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이렇게 가르치면서 배우는 게 많거든요. 내가

얼마나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지도 배우게 되고, 또 신부님들이 본당에서 사목을 하실 때

보면, 정말 단순하게, 조용하게 살아가는 신자들 보면 신부님들이 자극을 받습니다. 아, 나도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그리고 판공성사나 고해성사를 볼 때 보면, 신자들이 정말 성찰을 잘 해서 준비를 하셔 갖고

성사를 보시는 분들을 들으면 솔직히 신부님들이라면 다 느끼시겠지만 고해소 안에서 신부님

들이 오히려 정화 되세요. 제가 치유를 받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신자분들의 그 열심한 신앙

을 보면. 이런 것들이 교회는 서로가 주인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을 좀 해

보면 우리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 볼 만한 것은, 요즘 신자분들이 이웃 사랑에 대해서 많이 얘기합니다.

실천, 봉사. 뭐 신앙은 사실 봉사하는 거죠. 예수님도 뭐 복음 말씀에 가장 큰 핵심은 "너도 가

서 그렇게 하여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

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이자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 열심한 신앙인이 되려면 교리보다 봉사를 많이 해야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람들에게 정말 가난

한 사람들에게 내가 봉사하고, 내 믿음을 그들에게 선사해 주는 그런 희생적 사랑 없이는 사

실 뭐 예수님이 늘 비판했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가 될 수 있는 그런 위험이 항상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래서 열심힌 신앙인이라는 것은 교리를 많이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봉사

를 많이 하는 것이다, 실천을 많이 해야 된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많은

분들 중에는, 열심한 신자분들 중에는 이제 가톨릭 교회 안에 여러 신심 단체들이 있지요.

 

요즘 뭐 제일 열심하신 레지오 단원 분들이나, 그리고 뭐 빈첸시오라든지, 아니면 또 다양한

성당 안에서, 바깥에서 봉사하시는 신심 단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봉사를 하시다 보면 봉사

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도 있고 또 그 봉사 단체에서 배우는 자체 어떤 신앙교육 같은 것도 있

어요. 물론 우리는 배운다는 것은 책을 통해서만 배우는 건 아닙니다.

 

삶을 통해서도 배우고, 다른 사람과 만나서 대화하면서도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 것으

로도 충분한대 뭐 굳이 신앙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공부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웃 사랑과

실천이 우리 신앙의 전부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에게 저는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맞습

니다. 그거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실천을 할 때 그 실천이 얼마나 올바

지향과 또 어떤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지는 굉장히 중요한 식별입니다.

 

# 이웃 사랑의 실천과 활동도 올바른 지향과 올바른 선택이 전제되어야 한다

 

어떤 분들은요, 본당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세요. 그런데 그 봉사하는 이면에는 좀 내가 봉사

하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라는 그런 마음이 좀 있습니다. 내가 막 퍼줬으면 좀 신부님도 나

를 칭찬해 줬으면 좋겠고, 또 신자분들도 누구 가난한 사람 도왔는데 누가 소문 좀 내줬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들을 적지 않게 인간적으로 할 수 있죠. 내가 칭찬 받고, 인정 받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힘인데 그거 못하겠어요?

 

렇지만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돕

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 더 간절한 사람들이 있는데, 올바른 지향과 좀 더 필요한 사람들

에게 우선적 선택 없이 내가 편한 사람들 중심으로, 내가 인정 받고, 되돌려 받는 그런 사랑의

실천은 사실 올바른 그리스도교적 희생적 사랑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물론 그런 어떤 봉사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도 성장을 합니다. 우리는 신앙은 한 번 가지면 그냥 끝나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

데 신앙도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서 성장해야 해요. 성장.

 

# "신앙도 성장한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신앙을 갖고 처음 기쁨을 갖고 살아가면서도 그걸 성장시키는 데는 굉장

히 소홀합니다. 성장을 할려면 그거에 맞는 양식이 필요하잖아요. 그쵸? 영적 양식이 필요한

대 그것은 바로 우리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 받고 또 사랑 받기 위

해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사랑받고 이미 용서받았기 때문에 봉사 할 수 있는

음이 생긴다면 그거는 정말로 신앙입니다.

 

# 내가 사랑받고, 용서받았기 때문에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정말 내가 많이 받고 그분의 사랑 때문에 내가 정말 감사해야겠구나

라는 그 열정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봉사한다면 그 지향은 정말 올바른 지향이 되는 겁니다.

영적 성장에 있어서 많은 분들이 고민하는 것 중에 이런 겁니다.

 

나는 교회에 봉사하고 하느님을 믿고 싶은데 나는 부족하고, 죄 많고 또 교회에 나가는데

부끄럽고, 항상 내가 모자라는 거, 부족한 거, 내 죄 이런 것만을 먼저 생각하시거든요. 그러

면 사실 하느님께 다가서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신 수련에서 영정 성장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원리 중에 하나는요, 내 죄를 묵상하기 이전에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

는 겁니다.

 

# 인간의 죄에 대한 묵상에 앞서서 먼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묵상하라

 

내가 상상하지 못했고,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말 보이지

않는 여러 순간에 하느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마음으로 느끼면요. 그다음부터는 내

죄가 보입니다. 내가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고 나서 그 사랑에 그만큼 갚아드리지 못한 것

때문에 내가 아파하는 죄가 보이는 거예요.

 

# 하느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내 죄가 보이고, 이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신자분들이 죄 그러면 성사 보실 때 그냥 늘 뭐 고해성사 제 1조 1항, 주일 미사 몇 번 빠졌습

니다. 뭐 금육 못 지켰습니다. 뭐 그거가 사실 신자분들에게 1조 1항인 것은 물론 그 죄가 고

백하기 편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죄라는 거를 묵상할 때는 교회가 이거 하십시

오라고 한 것을 지키지 못했던, 의무를 지키지 못했던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에 내가 얼마큼 갚아드리지 못했는지 때문에 마음

이 아픈 것이 먼저 죄에 대한 묵상이거든요. 그랬을 때 내 죄가 정말 순수하게 치유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정말 용서를 청하게 되는 거죠.

 

주일 미사 몇 번 빠졌는데, 빠졌어도 내 이유가 다 있거든요. 빠진 이유가 있는데 그냥 빠진

게 죄라고 하니까 고백을 한 거예요. 그 신자분은 나중에 다시 일상생활할 때 똑같은 상황이

생기면 또 빠집니다. 변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내가 주일을 거룩히 살아야 된다는 그런 의미에 대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식이

라고 생각하면 내가 "아, 맞다. 내가 바쁘고 이래도 시간을 쪼개서 하느님께 시간을 봉헌해야

지." 해야 이게 하느님 사랑하고 그거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는 거지. 이유가 있는데 어쩔 수

없이 빠진 걸 가지고 "아이, 어쩔 수 없는데 하느님도 용서해 주시겠지."라고 하면 자기 합리

화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한 것들이 우리 영적 성장에서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

이 먼저다. 그 이야기를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 분들이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시다가 뭐 신부님한테 인정 못 받고, 수녀님

한테 혼나고, 또 같은 신자 분끼리 상처 받으면 "에이, 내가 성당 안 나간다, 뭐 내가 이거 해서

영광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제 포기를 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사실 개신교하고는 다른 게요. ?맞습니다. 개신교하고 다른 게 개신교는 봉사를 하면

직함을 주죠. 뭐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그래서 그분들은 그 교회에서 그 직함을 한 번 받으

면 계속 따라갑니다. 그런데 우리 가톨릭 교회는 사목회장님, 구역장님, 반장님 돼서 임기가

끝나면 그냥 평신도예요. 그쵸?

 

그런데 사목회장님 되면 본당 가시면 신부님하고 같이 대화도 하고, 신자 분들한테 인사도

받으시고, 또 할 것도 많고, 또 구역장님, 단장님들도 내가 가면 본당에서 할 게 있잖아요.

어디 가서 뭘 해야 되는지. 그런데 그 책임을 놓고 나면 갑자기 쑥스러운 거예요. 제가 성당

가면. 그러면 미사만 참석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괜히 신자 분들 만나면 쑥스럽고,

그러니까 다른 시간 대 미사에 참석하시고,

 

러다 보면은 "아이, 또 가서 좀 그러네." 그러면서 다른 옆 본당 가서 미사 하시고. 또 그러

보면 자꾸만 이제 성당에 소홀해지는 거고. 정말로 내 봉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봉사라면

가 어떤 소명을 받든 상관없이 내가 봉사할 거를 찾아서 하거든요. 그런 것들이 우리가 좀

한 번 묵상해 볼 만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열심히 살아가는 건대요.

 

# 내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  하느님의 뜻을 찾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뜻을 열심히 따라 살기 위해서는 뭐 성경 공부나, 교리 공부, 수련, 선교를 위한

모든 것의 준비가 중요하지만 다 이 모든 것들은 성장을 위한 하나의 양식들이라고 생각하시

면 됩니다.

 

# 성경 공부, 교리 공부, 영성 수련: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가 봉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봉사를 정말 양적으로 또 이렇게 성장하기

위해서 성실하게 살아야겠다. 그래서 보통 신학교나 수도원에서 보통 첫 입회자를 받을 때

최소한 영세한지 3년 지난 분들을 받습니다.

 

# 수도원, 신학교에서 영세 후 3년이 지난 사람만을 성소자로 받는 이유는?

 

사실 처음 영세를 받으신 분들, 성인 세례를 받은 분들은요, 굉장히 신앙에 대한 열정이 커요.

그래서 막 세례 받고 나서 내가 뭐든지 막 할 수 있을 거 같고, 순교할 수 있을 거 같고 막 그러

시대요. 그런 분들이 또 여성분들은 수녀원을 보는 분들이 많거든요. 신학교도 마찬가지입니

다. 그런데 신학교와 수녀원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두는 것은 우리의 신앙은 세례 받고 나서

금방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하나씩 성장하는 과저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 신앙은 어느 정도 어려움과 혼란, 좌절을 넘어 성숙 되어야 하기 때문

 

때로는 내 믿음에 대한 흔들림도 겪어야 되고, 또 사람들로부터 오해도 받아야 되고, 또 살면

서 하느님이 정말 나를 도와주시는지에 대한 의심도 가져보고 그래서 그것을 이겨내고 나서

성장했을 때 비로소 내 의지가 선한 의지로 정화가 되는 거죠. 신앙생활을 하시다 보면 또 성

령께서 그러한 은자를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을 시켜 주신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자매님 한 분은, 일찍 남편을 잃고 신앙체험을 하면서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끄

시는지를 많이 이렇게 깨달으시게 해 주신 방법이, 새벽만 되면 잠을 못 자게 이렇게 일으켜서

성경을 읽게 해 주시더라는 거예요. 당신은 그전에 바빠서 성경책 조차 보시지 않았는데 막

갖 시련을 겪으면서 하느님을 만나면서 이제 그냥 평하게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새벽 시간

꼭 같은 시간에 나를 깨워주시고, 성경을 읽게 해 주시고, 또 성경도 누워서 편하게 읽는 것이

아니라 꼭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게 끔.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예전에는 그냥 글자로 읽었던 성경 말씀이 정말 내 삶을 하나하나 풀어

주는 말씀으로 깨우쳐 주신다는 거예요. 성령의 은사는 우리들이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안에서

성장시켜 준다. 그런 체험을 이제 하셨다는 말씀도 듣습니다. 정말 여러분들도 그런 성령의 은

사의 체험을 많이 하시고 계실 겁니다.

 

# 신학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는요. 아주 단순한 겁니다. 이제 신학공부는 많은

분들이 그러거든요. 시간이 어디 있어요? 신학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교회에 나

갈 시간도 없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뭐 사는 게 힘든데 뭔 신학입니까?

주일 미사 참석도 어렵습니다. 이런 분들은 신앙이 나의 삶에 큰 힘이 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

시는 분들이신 거 같애요.

 

# 신앙이 삶에 힘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 신앙에 관심을 가질 수 없을만큼 삶에 지친 분들도 계십니다. 또 때로는 가정과 경제적 파

탄 때문에 교회에 나가실 시간이 없는 사람들도 사실은 있거든요. 교회에 나가고 싶어도 여러

가지 이유로 나갈 수 없는 분들, 또 요즘 뭐 한국 사회에 가정 해체나 위기를 많이 겪다 보니까

뭐 이혼하신 분들, 또 조당에 걸리신 분들, 뭐 교회에 나갈 수 없을만큼 큰 상처를 받으신 분들

있습니다.

 

뭐 신부님한테 큰 상처를 받았거나, 이웃 신자들로부터 왕따를 체험했다거나 많습니다. 또 어

떤 분들은 오랫동안 성당에 나가지 않아서 성당 나가는 게 또 부담스러워 하시는 분들이 있거

든요. 그래서 우리 가톨릭 교회의 쉬는 신자분들은 대부분 고해성사를 보지 못했거나 아니면

성체를 모시기 너무 부담스럽거나 이래서 못 나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인생이 너무 바쁘다 보면 하는 일이 많아서 신앙에 관심을 못 갖는 분들도 있거든요. 뭐 신

앙이 마치 그냥 뭐 여가 생활이나 문화생활의 하나인 것인 양, 뭐 여러 가지 일들이 겹치면 뭐

친구들하고의 만남이나 여가 생활하고 성당에서 미사 참석하고 봉사하는 것에 동급으로 놓고

오늘은 여가 생활 좀 하고, 내일은 뭐 성당 좀 가서 활동 좀 하고, 이런 적당한 타협도 하는 것

이 사실 우리들의 이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분들 예를 들면 성당에 나오기 힘들고, 주일 미사에 참석하기 어려운 분들,

신앙이라는 것이 정말 그분들에게 의미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분들에게 우리 이런 묵

상 거리를 던져 줄 수 있을 거 같애요. 왜 우리가 생의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종교적인 열정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가?

 

그 종교라는 말은요, 이제 말 그대로 으뜸 종자(宗)에 가르칠 교(敎)자로 가장 으뜸이 되는 가

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종교는. 그래서 종교라고 하는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

이기 때문에 내 인생에서 가장 영원하고, 무한하고, 절대적인 것입니다.

 

# 인간의 삶은 영원을 향한 희망없이 살 수 없다,

                               고통을 넘어 초월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 영원하고, 무한하고, 절대적인 것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거 없이

는 못 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종교적인 존재라는 말을 쓰는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적인

존재라는 것은 또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그 영원하신 것을 채워주

신다는 것에 대한 갈망 없이는 안 되는 겁니다.

 

어떤 과학자는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신이 실재한다면 신의 목적은 우리의 목적과 다를 때가 많다는 것을 이해하라.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영적 성장에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찌 보면 ?하느님한테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때로는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든 이끌어 주시기

때문에 어떤 순간에 우리를 한 대 때릴 수도 있어요. 인생에서 내가 예측하지 못했던 순간에

내가 망가질 수도 있어요. 그랬을 때 한 대 얻어 맞고 그제서야 정신 차리는 거 보다 미리 영적

으로 준비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우리 신앙의 태도라는 거죠.

 

내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냥 교회에 내가 나갈 수 없는 그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내 신앙을 성숙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일을 거룩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 또 일상 속에서 정말 화살기도를 통해서는 하느님을 숨결처럼 느끼는 것. 또 선한

의지를 가지고 가톨릭 신자로서 성호경을 긋는다든지, 묵주기도를 한다든지, 우리가 바쁜 일

상 속에서도 틀림없이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 여러 이유로 성당에 나올 수 없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자

 

그래서 이렇게 하느님을 향한 목마름, 그 목마름을 살아가는 것이 어찌 보면은 종교적인 열정

이 없는 분들에게도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뭐 시간이 없어서 성당에 못 나가시는 분들

에게는 뭐 성당을 꼭 나오실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분의 삶의 자리에서 하

느님을 잃지 않도록, 하느님을 더 느낄 수 있도록 알려 주는 것도 중요한 선교의 한 방법이라

는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아까 말씀드렸던 성당에 나오는 게 좀 자존심 상하시는 분들이 좀 있잖아

요. 그런 분들은 사실 종교적인 삶의 열정은 있는데 지금 교회에 내가 나오기가 힘들어 하는

분들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현실적으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어려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조

적인 문제죠.

 

그래서 때로는 좀 성당 가면 나를 인도해 줬으면 좋겠고, 좀 가르쳐 줬으면 좋겠는데, 우리 천

주교 신자 분들 성당 가면 나 몰라라 하시잖아요. 내 옆에 누가 앉았는지도 잘 모르시잖아요.

요즘은 그래도 신부님들이 평화의 인사할 때 좀 가까이 인사하라고 그러고, 미사 전에도 인사

를 나누게 하시는 분도 있고, 또 많은 분들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지만 분명히 개신교하고는

다릅니다.

 

개신교는 입구에서부터 막 "아, 오셨냐고!" 그러고. 한 번 빠지면 찾아가서 막. 우리 천주교는

그런 면에서는 뭐 많은 분들이 노력은 하시지만 어딘가 모르게 조금 부족한 게 있거든요. 그

래서 사목적으로 신부님ㄷ르이 또 인원적으로 적다 보니까 신자 분들을 다 일일이 케어할 수

없는 그러한 어려움도 사실은 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 때문인 것도 있고요.

 

또 한 가지는 우리 가톨릭 교회가 너무 중산화 된 것도 있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 오기

가 좀 껄끄러운 것도 있어요. 또 신부님들 주변에는 또 좀 생활적 영유가 있는 분들이 이렇게

모이다 보면 신부님들도 당신 스스로 내려가지 않으면 교회에 못 나오는 분들이나 가난한 사

람들이나, 상처받는 사람들을 잘 못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조금 영혼의 어떤 새로운 관점에서 한 번 고민해야 될 점이 아닐까? 그래서

말 고해성사를 보지 못하는 분들, 또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분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분들이

정말 신앙생활을 다시 하실 수 있는지, 정말 더 영적으로 풀어주고, 또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

는 여러 가지 지침들이 있는데 그 지침들을 정말 지침이 아닌 지침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하

느님을 더 알기 위해서, 하느님을 만나가는 그런 영혼의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 교리를 장애물로 인식하지 말고 영혼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교회의 가르침은 결코 우리 영적 성장에 장애물이 아니라, 영혼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가톨릭 신자분들이 좀 더 폭넓게 우리 신앙을 이해하고 또 여러

가지들 중에 무엇이 더 본질적인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신앙의 길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 폭넓게 신앙을 ?이해하고 가톨릭 신앙의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을 깨닫자

 

그래서 우리들이 성당에 나오기 힘들어 하는 분들에게 종교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

해 주고, 이끌어 주고, 또 하느님을 향해서 신앙의 가치를 잘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 드리고

또 우리가 늘 찾아오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교회가 되

는 것. 또 봉사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교회가 되는 것. 또 중요한 것은 신자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신자들의 교회가 되는 것. 그 차이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 우리들의 과제

 ㅡ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이들을 겪려하고 하느님을 향해 신앙의 가치를 찾도록 돕자.

 ㅡ 찾아오는 교회가 아니라, 봉사하는 교회가 되자.

 ㅡ 봉사 받는 교회가 아니라, 봉사하는 교회가 되자.

 ㅡ 신자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신자들의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자.

 

늘 교회가 ?신자들을 위해서 뭔가를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면 자꾸만 신자들은 내가 뭔가 봉사

를 받아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런데 이제 신자들의 교회가 된다면 우리들이 주인인 교

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세 번째 강의에서는 신학이 왜 필요한지를 우리 일상

의 이야기로 풀어봤습니다.

 

요약을 해 드린다면, "신앙은 체험이다. 느낌이다." 하시는 분들에게는 "체험도 이해를 필요로

하는 인생 과정이다." 말씀드리고 또 "믿을 교리를 그냥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하느 분들에게

는 "믿을 교리를 이해하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길이다." 이렇게 말씀드리고요. 또 "열심

히 신앙 생활하면서 봉사를 많이 해야 된다." 하시는 분들은 "봉사만이 아니라 봉사 안에서 정

말 복음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봉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끝으로 신학 공부할 시간이 없거나, 성당에 나갈 수 없는 분들에게는, 정말 내가 왜 인

에서 신앙이 중요하고 또 우리 가톨릭 교회가 어떻게 열린 교회로서 그들을 어떻게 포용할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바로 이 모든 신학하는 즐거움의 한 과제이고

목표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이해가 되시죠?

 

# 강의 요약

ㅡ 신앙은 '체험'이고 '느낌'인데 ...

  체험도 이해를 목표로 하는 인생 공부의 과정이다.

ㅡ 믿을 교리인데 그냥 믿으면 되지 ...

  믿을 교리를 이해하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이다.

ㅡ 열심한 신앙인은 봉사를 많이 해야 ...

  봉사만이 아니라, 봉사 속에서 복음적 삶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ㅡ 신학 공부할 시간이 없어요... , 성당에 나갈 수 없어요..

  내 인생에 왜 신앙이 중요하고 열린 교회로서 '그들을 안을 수 있는가를 함께 고민해 보자.

 

# 묵상 주제: 나는 왜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는가?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 왜 신학이 필요한가를 주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톨릭

신자로 사는 이유, 그리스도교 신자로 사는 이유를 한 번 같이 묵상해 보고요. 다음 시간에는

조금 더 신학의 맛보기를 들어가 보겠습니다.

 

# 다음 강의 주제: 내 인생 이야기를 신학으로 풀어 볼 수 있나요?

 

그래서 내 인생 이야기,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어떻게 이런 신학으로 풀어볼 수 있을까?

그래서 정말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시점, 내가 태어나서 죽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의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있는데 그 일들을 내가 정말 어떻게 이해할까? 그리고 그런 것들이

정말 내가 어떻게 하느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정말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인생 이야기를 신학으로 풀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영광송으로 마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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