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에 따른 전례] 매일 미사와 전례 용기의 변화(4-8세기) 매일 미사가 언제, 어떤 이유로 생겨났으며, 미사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 그리고 용기들은 어떠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7세기부터 일반화된 매일 미사와 부속 제대 그리스도교는 본디 성찬례를 주일에만, 그것도 하루에 한 번만 거행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토요일도 전례일이 되었다. 북아프리카의 치프리아노(200?-258년)는 성찬례가 날마다 거행되었다는 증기를 제시한다. 1세기 뒤의 인물인 히포의 아우구스티노(354-430년)도 성찬례가 날마다 거행된 것에 대해 알기는 했지만 그것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다니엘 콜람의 ‘400년 무렵 라틴 교회에서의 미사 횟수’(“The Frequency of the Mass in the Latin Church ca. 400”, Theological Studies, vol.45)라는 논문에 따르면, 6세기까지는 갈리아에서 미사가 날마다 거행되었다는 증거가 거의 없었으나 7세기에 이르면서 매일 미사는 서방에서 매우 흔한 일이 되었다고 한다. 부분적으로 이 현상은 주교들이 이끈 수도원 공동체 때문이라고 한다.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요구의 증가 매일 미사에 더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은 죽은 이를 위한 미사에 대한 요구가 증가했다는 점이다. 외경인 ‘요한 행전’(170년 무렵) 같은 초기 문헌에 죽은 이를 위한 성찬례를 거행했다는 증거가 있고, 테르툴리아노(~225?년)는 북아프리카의 몬타누스주의자 공동체에서 죽은 이의 기일에 성찬례를 거행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리처드 러더포드는 「그리스도인의 죽음」(The Death of a Christian: The Order of Christian Funerals)에서, 중세의 서방 그리스도교가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게 된 데에는 누구보다 아우구스티노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한다. 특히 기도와 자선, 그리고 무엇보다 성찬례가 죽은 이에게 효과가 있다고 한 주장이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대화편’에 나오는, 죽은 수도자인 유스투스를 위한 삼십일 동안의 연속 미사가 그를 연옥의 정화로부터 벗어나 천국에 가게 했다는 이야기(라틴 교부 총서, 77,421c)는 신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미사에 대한 보속 규정과 미사 예물의 증가, 로마의 순회 미사에 대한 모방 당시 보속 목록에는 꽤 혹독한 것도 있었지만, ‘경감’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 경우는 대개 금전적인 기부를 통해서였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는 미사 예물이 발전했는데, 이는 미사가 엄격한 보속을 경감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사에 대한 요구가 늘었으며 이에 따라 미사 예물도 증가했다. 또 다른 요인은 알프스 북쪽의 교회들이 전례력에 따라 축일이나 전례 시기에 적절한 명의 성당(로마 시대에 교황청이 명칭을 지정하고 순회 미사를 행한 성당, 현재 ‘본당’의 전신.)에서 미사를 드리는 로마의 순회 미사(missa stationis)를 모방하고자 성당 내부에 다수의 부속 제대를 설치했다는 점이다. 곧 성당 내부에 전례력에서 기념하는 신비나 성인에게 봉헌한 다수의 부속 제대를 설치하고 축일에 맞추어 미사를 드렸다. 결론적으로 다수의 부속 제대 설치의 시작은 매일 미사와 연결되어 수도원 공동체의 발전, 죽은 이를 위한 미사, 미사에 대한 보속 규정, 미사 예물의 증가 그리고 로마의 순회 미사에 대한 모방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성찬례용 빵의 변화 그리스도교가 생겨났을 때는 성찬례에서 사용된 빵도 일반적인 식사 때 먹던 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4세기 무렵에는 납작한 원반 모양으로 성찬례 빵을 준비하는 전통이 생겼다. 당시의 빵틀을 통하여 원반 모양의 빵들이 후대의 제병(hostia)보다 크고 두꺼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9세기에 서방 교회에서는 성찬례 빵으로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고, 결국에는 의무가 되었다. 중세가 시작할 무렵에, 평신도들은 스스로가 은혜를 받기는 했지만 죄가 더 크다고 성찰하여 신성한 성체를 받아 모시기에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여겼다. 그래서 성찬례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예물과 빵과 포도주를 교회에 봉헌하려고 가져오지도 않았다. 그에 따라 영성체하는 사람의 숫자는 급격히 줄고, 봉헌 행렬도 많은 지역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수도자와 성직자가 성찬례에 봉헌되는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게 되었고, 수도원과 다른 종교 기관에서는 매우 예식화된 절차에 따라 성찬례 빵을 준비했다. 현재 형태의 제병 등장과 성반의 변화 성찬례의 초월성이 강조되면서, 일반 식탁에서와는 전혀 다른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게 되었다. 유다교의 성전 제사에서 사용하고자 누룩 없는 빵을 준비했던 것이, 성찬례를 위한 특별한 빵을 준비하는 성서적 선례가 되었다. 또한 성체를 신자들의 손이 아니라 혀 위에 놓는 관습이 9세기에 일반화되면서 제병의 크기가 작아졌다. 성찬례에서 일반적인 빵을 사용하던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빵 바구니와 큰 쟁반이 필요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큰 빵이 작은 제병으로 전환되면서 쟁반의 크기가 작아졌고, 참석한 모든 신자를 위한 빵을 놓던 성반이 사제를 위한 제병을 놓는 용도로 전환되었다. 반면에 신자들을 위한 제병은 성합에 넣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포도주와 성작의 변화 그리스도교의 포도주에 대한 규정은 제4차 오를레앙 공의회(541년)에서 “성스러운 성작으로 봉헌할 때, 어느 누구도 포도나무의 열매에서 나온 것과 물을 섞은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은 음료를 바쳐서는 안 된다.”라는 언급에서 처음 발견된다. 또한 「그라티아누스 교령」(1140년 무렵)은 미사 때 발효되지 않은 포도 주스를 사용해도 괜찮다고 했던 율리오 1세 교황(337-352년 재위)의 말을 인용한다. 이전의 시기에는 참석한 신자들이 성혈을 영할 수 있도록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큰 성작을 사용했다. 그러나 깊은 죄의 성찰과 성혈을 올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잔으로 성혈을 마시는 이들의 수가 줄고, 사적 미사가 점점 유행하면서 성작의 크기가 작아지고 손잡이는 사라졌다. 대신에 잔과 받침 사이에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마디’가 생겼다. 축성된 제병을 만진 뒤에 엄지와 검지를 붙이는 사제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마디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8세기에는 성혈을 흘리는 데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긴 특이한 것으로 성찬 튜브, 곧 일종의 빨대가 등장했다. * 윤종식 티모테오 - 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이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다.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였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 시복 미사 때 전례 실무자로 활동했으며, 저서로 「꼭 알아야 할 새 미사통상문 안내서」가 있다. [경향잡지, 2021년 3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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