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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용민 신부님의 신학하는 즐거움 제4강 내 인생의 이야기를 신학으로 풀어볼 수 있나요?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08 조회수1,330 추천수4 반대(0)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송용민 신부님의 신학하는 즐거움

 

  

 

제4강  "내 인생(人生) 이야기"를 신학으로 풀어볼 수 있나요?

 

시작기도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야고보서 1장 2-7의 말씀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늘 저희에게 인내와 용기를 주시는 주님, 부족한 저희들의 모습 안에서도 당신은 저희에게

지혜를 주시어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 시간 저희들의 인생에

펼쳐진 당신의 이야기를 묵상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저희가 간직한 영원한 희망을

살아갈 용기를 심어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안녕하세요?  예, 오늘 네 번째 시간입니다.

신학하는 즐거움, 이제 조금씩 신학하는 즐거움 맛을 좀 보고 계시나요?

예, 즐거우십니다. 좋습니다. 지난 세 번째 강의는 신학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이야기들을

우리 일상의 이야기들로 풀어 봤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단순하게 이야기 한다면 신앙에 물음이 필요한 이유는 올바른 하느님

체험이 무엇인지를 묻고 또 우리가 믿는 것이 참으로 우리 삶에 가치가 있다라는

깨닫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또 봉사와 실천 속에서 무엇이 복음적인 것인지를

깨닫기 위해서, 또 하느님이 정말 나의 모든 것이라는 그런 고백과 또 가톨릭  신자로서

자부심과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신앙의 물음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 지난 강의 내용 

  주제: 신학이 왜 필요한가?

  ㅡ 신앙에 물음이 필요한 이유:

      * 올바른 하느님 체험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

      * 우리가 믿는 것이 참으로 우리 삶에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

      * 봉사와 실천 속에서 무엇이 복음적인 삶인지 확신을 위하여

      * 하느님은 나의 모든 것이란 고백과 가톨릭 신자라로서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찾기 위하여

 

그래서 1베드 3,15절에 나와 있는 우리가 간직한 희망에 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는 또 신학하는 즐거움을 찾는 아주 중요한 이유라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1베드 3,15)

 

오늘 네 번째 강의는 이제까지 했던 이야기들을 한 번 신학의 이야기로 풀어보는 시간입

니다. 그래서 내 인생 이야기를 과연 신학으로 풀어볼 수 있나요?라는 주제로 오늘 여러분

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 내 '인생 이야기'를 신학으로 풀어볼 수 있나요?

 

사실 이 이야기는요, 누구나 다 인생의 이야기를 다 갖고 계시죠? 그 인생, 내가 살아 온

인생의 여정과 인생 이야기를 신학으로 풀어본다는 말은요. 우리가 배웠던 신학의 세 가지

즉, 하느님의 이야기라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각하면 도대체 하느님은 내 인생에서 무슨

말씀을 해 오셨는가? 그것을 한 번 생각해 보는 거고요.

 

# 하느님의 이야기 [말씀]: 하느님은 나에게 무것을 말씀해 주시고 계시는가?

 

두 번째 내가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라고 했을 때는 그럼 나는 내 인생에서 하느님

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왔는가?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

 

# 하느님의 이야기 [신학]: 나는 하느님의 뜻에 어떻게 응답해 왔는가?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하느님을 향해 이야기 한다는 그런 신앙의 의미로 본다면 나는 어떻

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런 여정을 살았는가? 그리고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느님과

함게 살아갈 것인가? 그 이야기들이 이 주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 하느님을 향한 이야기 [영성]: 나는 어떻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

 

그래서 우리 인생에는 정말 수없이 많은 사건과 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 하나씩 하나씩 해석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해석되지

않은 한 단 한 순간도 살아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세상의 역사가 과거에 어던 역사가 있

었다면 그것이 지금의 어떤 의미였는지를 해석하지 않는 한 그 역사는 죽은 역사입니다.

 

# 해석 없는 역사가 없듯이, 해석 없는 인생은 없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과거에 있었던 일이 지금의 우리의 사건을 어떻게 풀어줘야 그게

정말 살아있는 역사가 되듯이 우리가 살아왔던 인생의 과거의 수없이 많은 일들이 그냥

내 팔자고, 내 운명이고, 있었던 일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내 인생에 어떤 사건ㄷ르이 한마디도 정말 하느님의 말씀으로 해석이 될 때 살아

있는 하느님이 나를 이끄신다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것들을 우리는 이

제 간단한 말로 인생 피정한다, 혹은 이야기 신학을 한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 거 같습

니다.

 

# 나의 인생 여정에 대한 성찰: 인생 피정, 이야기 신학

 

그래서 오늘 신학하기의 맛보기로 이제 이런 인생 이야기를 신학으로 풀어보겠는데요.

우리가 이제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은 제일 먼저 이런 인생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체

로서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의 어떤 인생 이야기로부터 시작을 하고요.

 

# 신학하기의 맛보기

  ㅡ 나는 누구인가?

  ㅡ 나는 어떻게 종교적인 삶을 살게 되었는가?

  ㅡ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그다음에 내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다가 종교적인 사람이 되었는가? 종교적이라는 말은

나중에 풀어드리겟지만 어떻게 이 유한한 이 세상에서, 죄와 고통이 있는 한계로 갇혀 있

는 이 어두운 세상 안에서 내가 영원한 것을 향해서 무한하게 초워하며 살 수 있을까? 그

런 어떤 영원함을 향한 삶. 그게 종교적인 삶이거든요. 내가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

을까? 또 한가지는 그런 종교적인 열정에서 어떻게 내가 예수님을 정말 나의 인생의 메시

아,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엇을까? 그것을 한 번 되새겨 볼 수 있는 그런 피정 아닌 피정

이 되겠습니다.

 

■ 인생(人生)이란 무엇인가?

 

자, 인생하면 여러분들 떠오르는 아주 멋진 노래가 있죠?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이 최희준 씨의 노래는 ?대한민국의 아주 최고의 명곡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어떤 철학자 신부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당신이 클래식 음악에 푹 빠져가지고 3년 동안 클래식 음악에 심취했었는데 어느날

우연히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온 이미자 대선배님의 노래를 듣고 이 인생의 모든 것이

여기 담겨 있다고서는 그 클래식을 다 벼렸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얻고서.

 

그래, 우리 옛 가요를 보면, 참 우리 들의 삶의 아픔이 녹아 있는 정말 인생 철학이 그 안

에 담겨 있거든요. 그 노래도 인생이 나그네 길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굉장히 철학적인

이야기이고 또 신앙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뭐 작고하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많은 그 좋은 우리에게 좋은 말씀을 남기셨지만 그 중

에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추기경님이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를, 특강을 요청

받으셔서 뭘 얘기를 할까? 하고 가고 계시는데, 삶이란 뭘까? 인생이란 뭘까? 이러는데

기차 간에서 누가 끌고 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 ^^*~~~ 그래 가지고 "아, 삶은,

계란이구나!" ^^*~~~

 

그런데 이 계란인데 우리는 그냥 웃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그 계란 속에 담겨 있는 아주

중요한 메세지가 있더라는 겁니다. 사실 그렇잖아요. 우리가 부활 달걀 할 때도 계란이

가지고 있는 것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그 껍질을 깨고 나오는 그 부활의 역동적인 힘을

상징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삶은 계란이라는 말도 참 의미가 있는 거 같애요.

 

우리가 그 딱딱한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는 한, 우리 인생의 어떤 참된 가치를 깨닫지 못한

다는 그런 좋은 비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인생

에 관해서 시와 노래와 글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뭐 많이 들어보셨겠지

만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인생은 고해의 바다다, 고통의 바다다.", "인생은 돌고 도

는 것 아니냐?"

 

뭐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이란? 하면 한 마디씩은 다 하실 수 있는 시인들이 되실 수 있습

니다. 여러분들도 인생이 무엇인지를 한 번 고민해 보시면, 내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한 번

고민하시는 것 자체가 여러분이 신학을 생각하는 줄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런 말씀을 이 인

생 이야깅서부터 풀어보고자 합니다.

 

# 인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고민하는 것이 신학의 시작이다

 

자,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이제 인생 이야기를 신학으로 풀어볼 때, 제일 먼저 던져야 될

질문이 무엇일까? 그러니까 인생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 "인생이 무엇인지" 묻는 나는 누구인가?

  # 왜 나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왜 나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이것이 첫 번째 출발점입니다. 모르겠어요. 여러분들

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언제 이렇게 많이 물으세요? 내가 인생에 "어, 내가 왜 살지?" 이

런 얘기를 하시는 게 언제세요? 예, 맞습니다. 보통 고달플 때 혹은 뭐가 내 인생에 내 뜻

대로 되지 않을 때 보통 그럴 때 우리가 인생의 참 의미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거든요.

 

또 어떤 때는  내가 아무런 힘도 없이 뭔가 니 힘으로 할 수 없는 무기력 감에 빠졌을 때,

혹은 정말 죽음이라고 하는 정말 마지막 단어 앞에 서서 도대체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건지. 그런 것에 대한 막연함을 느낄 때 아마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물으실 겁니다.

 

그래 저는 이렇게 인간이란 도대체 누구일까? 이렇게 인생이 무엇인지를 묻는 나는 누구

일까에 대한 한 마디 정의를 내드리겠습니다. 요 말을 한번 우리가 풀어보는 것이 오늘의

과제가 되겠습니다.

 

■ 인간이란 역사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가족, 이웃, 동료들을 통하여 삶을 공감하고, 인격을 성숙시키며,

자기를 발견하는 존재다.

 

이것이 바로 제가 오늘 풀어드릴 인간이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첫 번째 주제

어입니다. 자, 이야기를 한 번 풀어볼까 합니다. 제가 자주 쓰고 있는 그림 중에 하나가 인

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이런 그림을 머리 속에 기억해 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 이것은 평면에 그려진 하나의 직선에 불과하지만 쉽게 말한다면 이것은 우리들이 살

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 마디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우리들의 삶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정말 끝없는 이 시간과 공간의 자리에서 우

리는 분명히 어느 순간인가 태어났습니다. 그쵸?

 

출생했고, 나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죽습니다. 이 태어나서 죽고 있는 그 어느 한 가운데

'나'라고 하는 존재가 지금 여기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그 어떤 시각 속에 또 특정한

공간 속에 살아가고 있는 존재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을 역사적 존재다. 역사적이라

는 말을 쓰는데요.

 

역사 그러면 보통 많은 사람들이 ?뭐 그냥 흘러간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일을 그냥 역사라

고 얘기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면서 그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사실은 올바른 역사의 의미입니다.

 

# 역사적 실존(實存)으로서의 인간: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現)

  존재로서의 인간

 

그래서 역사라는 것은 결코 해석되지 않고 그냥 하나의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 그 사건

이 지금 나하고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묻지 않는 한, 그 역사는 살아있는 역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가령 여러분들이 태어나셨는데 내가 태어난 것에도 다 의미가 있다는 거죠. 내가 태어난

것에 대한 의미를 지금 살면서 내가 생각해 보고, 해석해 보지 않는 한, 지금의 나는 축복

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뭐 어떤 경우는 나의 삶을 저주할 수도 있죠.

 

뭐 여러분들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욥의 이야기 보심변 아시잖아요. 어느날 갑자기 시험

을 받아서 모든 걸 다 잃었을  때 "아, 도대체 이게 뭘까?" 내가 왜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싶은 그런 우리들의 마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만큼 지금의 내가 항상 내가 이제까지 살

아왔던 수없이 많은 과거의 사건들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는 한, 지금의 나의 존재의 의미

는 사라져 버린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적 실존으로서의 인간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랫 우리 인간은 결코 내가

원해서 태어난 사람도 없고요, 또 내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좀 어려운 말로 뭐라고 그러냐 하면요, 내 의지와 상

관 없이 태어난 존재, 그래서 그런 존재를 현존재라는 말을 씁니다.

 

# 역사란 시간의 과거로부터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속에 자기의 의지와

  상관 없이 현존재(現存在 Dasein)가 생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존재라는 말은 현, 지금 여기서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역사 안에 태어난 존재.

생생하게 태어나서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존재. 그래서 참 어떤

분들은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 또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늙어가고 언젠가는 죽어야 한

다는 이 사실 때문에 참 인생 참 허망하다. 그리고 또 내가 사는 목적이 도대체 뭘까?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 현존재(現存在 Dasein):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역사 안에 태어난 존재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

 

어쨌든 그게 바로 역사적 존재라고 하는 그 말의 첫 번째 실마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존재 이후에 또 한 가지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건 뭐냐 하면, 인간은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아주 실존적인 존재라고 합니다. 이 실존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

한데요. 그러니까 실존이라는 말은 아주 생생하게 살아가고 있는, 지금 현실을 말하는

겁니다.

 

# 실존이란: 생생하게 살아가는 것

 

그러니까 상상이나 꿈이나 어떤 현실을 떠난 몽상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것. 그거니까 내가 인간이 실존적인 존재다라는 말은 정말 지금 여기서 생생학 살면

서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아주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경우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서 살고자 하는 것을 도피할려

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뭐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1992년 경이었나요? 그때 우리 한국에 시한부 종말론에 대한

굉장히 큰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포기하고, 다 집 팔고 그래

갖고 우리 휴거 될 거라고 모여 갖고 막 찬미하고 노래 부르고 난리가 났었거든요. 그때

사실 방송에서도 생중계를 했습니다.

 

정말 휴거가 되는지. 사실 다행스럽게도 휴거를 못하셨죠.^^*~~~ 그들이 그렇게 못했을

때 그럼 "아, 이거는 내가 잘못 믿었구나." 그게 아니라 "우리가 때를 잘못 맞췄구나." ^^*~

그렇게 또 오해를 해서 또 다른 휴거를 기다리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현실에 정말 살아가면서 지금 여기서 살지 않고 계속 미래를 향해서 혹은 과거의

나에 애착하며 사는 것은 실존적인 우리 인간의 모습과는 아주 거리가 떨어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지금 현실을 그대로 산다는 것은 지금의 고통이나 모순이나 삶의 회의나

절망, 때로는 불안과 이런 무의미한 여러 가지 체험들도 지금 생생하게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는 살아갈 수 없나는 겁니다.

 

# 인간, 현실을 그대로 살고 있는 존재

  삶의 고통, 모순, 회의, 절망, 불안, 무의미도 인간의 일부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실존적인 존재로서 살아갈 때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 뭘까요?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불안하다는 겁니다. 불안 하다는 거. 사실 우리

가 살면서 불안한 거 많이 느끼시죠?

 

# 실존적 현존재인 인간의 특징은 불안이다

 

지금도 불안한 분도 계시죠. 혹시 뭐 이 시간 끝나고 나서 집에 가서 뭐 해야 되는데 시간

늦으면 어떻하나? 뭐 이런 생각도 하고. 우리는 매 순간 순간 좀 불안합니다. 그런데 왜 불

안할까?

 

■ 우리 삶의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불안한 것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 보면 딱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내 인생에

서 무엇이 다가올지 예측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해서

내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내가 사는 게 의미가 있을까?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게

위미가 있을까?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값어치가 있을까라는 물음을 자꾸 던진다

는 거죠.

 

# 불안과 불확실성의 체험의 근원은 인생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의미부재의 체험이다

 

그래서 결정되지 않은 미래에 또 다가올 죽음에 대한 공포 또 내가 인정받고 사랑받지 못

하면 어떻하나? 그런 여러 가지들에 대한 체험들이 우리 안에서는 다양한 어떤 표징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발생하는 우연성의 체험들

  인간의 비구원적 상태(병, 분노, 미움, 가난 등)

 

그게 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고통을 통해서 나타나기도 하고, 미움, 가난,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어쨌든 우리는 왜 하필 나한테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또 왜 나만 그러지?

남들은 잘 사는데. 또 어떤 분들은 갑작스럽게 뭐 가족을 잃었거나 도 갑작스런 큰 중병을

앓았거나 또 재정적 파국으로 또 가난을 갑자기 겪었거나. 이런 분들에게는 왜 나만 이런

고생을 주는가? 그런 이제 고통스러운 불안을 체험한다는 거죠.

 

그래서 정말 인간이 정말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현존재이자, 실존적인 존재라는 말에

이어서 우리가 또 한 가지 중요하게 봐야 될 것은 우리들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 물음을 던

지는 존재라는 겁니다.

 

■ 삶의 의미를 묻는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해서 물음을 던진다. 이 의미라고 하는 것은요, 우리 21세기를 살아가고 있

는 우리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아주 철학적이고 신앙적인 또 신학적인 의미입니다. 의미라

는 것은 단순하게 말한다면요. 내가 하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말은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라는 물음입니다.

 

# 내가 기대하는 것과 현실적인 욕구가 부합하는 지에 대한 물음

 

사실 살다보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분

들이 많잖아요. 우리 주변에. 뭐 가정 해체 때문에, 실직 때문에, 이혼 때문에, 부부 갈등 뭐,

시부모와의 갈등, 또 주변의 시선 때문에. 이렇게 정말 사는 게 의미가 있을까? 고민하는 분

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 고통과 내 삶의 의미 전체를 묻는 것. 이런 모든 거를 포함해서 유명한 철학자는 이런 말

을 했습니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그건 누가 말했냐 하면, 이른바 빅터 플랭클

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아우슈비츠에서 굉장히 큰 수용소 고

통을 체험한 분입니다.

 

#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체험한 빅터 플랭클

 

그런데 아시겠지만 그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아우슈비츠의 이야기들은 인간이 과연 이렇게

까지 할 수 있을까를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현장이었거든요. 사람

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이렇게 쓰잘데 없는 정말 하찮은 존재로 죽어가고, 태워지는

이런 현실 속에서 빅터 플랭클이라는 사람은 왜 인간은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 인간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

  삶에의 의지 ㅡ 삶의 희망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서 이 사람이 답을 찾은 건, 인간은 자기가 살고자 하는 삶의 의지가

있다는 겁니다. 삶의 의지. 그 삶의 의지는 흔한 이야기로 이런 겁니다. "왜 살아?" 이렇게

물으면 "그냥 죽지 못해 살지." 이렇게 얘기하는 것. "왜 사느냐?"고 하면, "웃지요."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니까 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이제 바로 삶의 의지인데, 그 내가 살아 있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희망한다

라는 겁니다. 뭔가 있으니까, 뭔가를 희망한다는 것은 내 삶의 굉장히 중요한 메세지고 그

거는 지금을 살게 하는 힘이라는 거죠.

 

아주 유명한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해 줬는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끔 한 두 사람이

탈옥을 하면요, 그럼 그걸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 열 명을 이렇게 교수형을 처했다고 합니

다.  다 보는 앞에서. 그런데 어느날은 뽑힌 사람 중에는 10살짜리 꼬마 아이가 같이 교수대

에 목이 매여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10살짜리 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

 

그런데 어른들은 자기 몸무게 때문에 목을 맸을 때 금방 질식해서 죽지만 이 아이는 몸이

가벼우니까 매달려서 죽지 못해서 바둥바둥 대는 거예요. 그거를 보면서 야, 도대체 하느

님이 전능하시고, 하느님이 정말 선하신 분이시라면 어찌 이런 순간에 저런 아이에게 고통

을 저렇게 줄까? 이런 일은 말도 안 된다. 이건 우리가 하느님을 믿었던 것도 다 소용없다.

 

그런 이제 절규에 가까운 물음을 던진 거죠. 그런데 그때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울렸던

것은 "봐라, 하느님이 저기 매달려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저렇게 우리를 대신

해 매달려 있다." 아마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죄를 대신해 매달리신 그 우

리의 놀라운 신앙의 신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 하느님께서 저기 매달려 계신다

  인간을 위해 고통을 받고 계시는 하느님

  ㅡ 고통의 의미에 대한 체험

 

그래서 그러한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 것도 무엇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희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미를 찾아가고 산다는 것. 내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에 굉장히 중요한 희망의 문제입니다. 그래

서 한국 사회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다. 자살도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희망의

부재입니다. 희망이 없는 거예요. 더 이상 지금 여기서 살아갈.

 

# 여기서 의미 있음은 곧 희망적 삶이고, 의미 없음은 희망의 부재를 말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의 현실도 안타깝지만, 많은 젊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할 때 내 인생에 대한 책임보다는 요즘 많은 뉴에이지라든지 새로운

종교적인 영성에서 말하는 환생이나 윤회와 같은 것으로 많이 영향을 받다 보니까, 내가

인생 이 정도에서 끝내면 다시 새로운 인생으로 출발하겠지. 인생 리부팅, 컴퓨터 이부팅

하는 듯안 그런 증후군들이 있다는 겁니다.

 

# 오늘날 자살의 문제 : 희망의 부재의 문제

  ㅡ 잘못된 또 다른 희망의 왜곡(환생, 윤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환생이나 어떤 윤회를 믿지는 않잖아요. 우리들은 우리

가 하느님께 받은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는 겁니다. 그러한 어떤 우리 시대의 이런

타까운 현실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희망을 정말 보여줘야 된다는 것이 아주 중

한 우리들의 또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또 하나의 과제입니다.

 

또 한 가지 인간은 이렇게 살아가면서 지금 여기서 실존을 생생하게 살아가지만 동시에 이

렇게 살고 있는 나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걸 바로 '너'라고 합니다. 인간은 나와 너의 관

계적 존재다. 이제 그런 말을 하거든요. 이 관계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 누군가와 대화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통교와

교를 나누고 또 서로 대화하면서 공감을 나누는 그런 관계 속에 살아가는 존재라는 겁니다.

 

# 인간은 사회적 존재: 타인과의 삶의 필연적 만남을 통하여 생의 다양한 

  사건들을 체험하며 의미를 공유하는 존재이다

 

이 관계를 나눈다는 것은 여러분들 흔히 친한 친구분들을 좀 떠올리시면 됩니다. 나하고

좀 얘기를 해 보면 잘 통하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정말 아무리 얘기 해도 통하지 않는

친구들이 있거든요.

 

또 어떤 분들은 좀 신앙 이야기를 하면 잘 받아들여지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신앙

이야기만 하면은 딴 소리하고, 세상 이야기를 더 재미있어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걸 뭐

라고 그러냐 하면, 이 나와 너가 살아가면서 서로가 인생에서 살아온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거든요. 물론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너라는 사람은 나와 태어난 시기가 다릅니다. 그리

고 그 사람은 언제 죽을지 나하고 달라요.

 

그러나 인생을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사건들 중에 서로 대화를 하다 보면, 서로가 깨달았던

인생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순간이 옵니다. 共有, 함께 가진 것을 나누는 겁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로 내가 체험한 인생의 의미를 서로 나누는 과정이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공감하고 공유하는 그런 인간이 바로 관계적인 존재인데 이 관계적

인 존재에서 우리가 왜 내가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것은 이제 딱 한 가지 이

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인생을 살다 보면은 내가 깨닫고 느낀 것은 내 겁니다. 그러나 너를

만나서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미처 체험하지 못했던 것을 상대방으로부터 듣고 그것을 나

눔으로써 그 사람의 인생에서 가졌던 여러 가지 체험들과 그 어떤 넓은 삶의 지평, 지평이라

는 말을 쓰거든요. 그 사람의 어떤 삶의 체험과 이야기들을 내가 마주하고 만나는 겁니다.

 

그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 비록 내가 깨닫지 못했던 그 사람과의 지평과 만나서, 어려운 말인

데 이게 철학적으로, 지평이 융합 된다. 철학적으로 지평이 융합된다. 혹은 지평이 확장된다.

이런 말을 씁니다. 이 융합과 확장이라는 말은요, 사실 우리들의 삶에 눈높이와 이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롭게 열리는 겁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롭게 열린다. 이제까지 몰랐던 것이

열리는 거죠.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많이 만나고 정말 성숙해진다는 것은 바로 이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주볌에 정말 인격적인 분들이나 덕이 많은 분들은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인생의 많은 체험을 통해서 상대방의 어떤 체험을 내 것으로 만들어 낸 사람들이 성숙한

사람들이예요. 그 사람들이 또 덕이 있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여러분들 주변에서 보세요. 덕이 있고 좀 인생 경험이 많은 분들은 어지간한 일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어떤 사건들이 있으면 그것들을 다 마음으로 소화해 내고

다 받아들여집니다. 그거를 당신 것으로 만들어 내거든요.

 

이것이 이제 인생을 정말 아름답게 성숙시킨 그런 분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

습니다. 그래서 인격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내가 성숙한다는 거고, 그 성숙을 타인과의

관계에서 내 삶의 지평을 점점점 넓혀 가는 것이다.

 

# 인간 성숙의 과정: 인간은 역사 안에서 의미에 대해 질문을 하면서 타인과의 삶의

  체험(지평)과 만나 대화하며, 그 가운데 서로가 지닌 삶의 의미의 공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렇게 넓혀간 우리들의 인생에서 한 번 우리가 묵상해 볼 만한 거는 요, 그럼

나는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 중에, 그들 중에는 내 인생 지평을 넓혀 준 사람들은 도대체

누굴까?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은 묵상 거리가 될 거 같습니다.

 

#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 - 책, - 사상은

 

나는 정말 내 인생의 지평을 넓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내가

더 좁은 눈으로 볼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사람들을 혹시 가까이 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것

도 우리가 인생 묵상 중에 중요한 것이다 생각을 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관계 소에서 서로가 만나 성숙하면서 이제 인간이 하는 첫 번째 과제

는, 인생 이야기의 첫 번째 과제는 이겁니다. 앞으로 내가 살고 있는데 언제 나는 죽을

모릅니다. 세상이 언제 끝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그죠? 우리는 어쨌든 살아야죠. 그 살아야 될 희망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삽니다.

 

그 살 때 지금 여기서 내가 생생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무엇인가 내 삶의 의미를 스스

로 만들어 내지 않으면은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을 '의미 기획'이라는 말을 씁니다. 삶의 의

미를 기획한다. 그 기획한다는 것은 내가 앞으로 살면서 겪게 될 수없이 많은 일들이 나에

게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라는 그런 삶의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 삶의 기획: 내가 만난 사람들, 사건들 속에서 나의 생의 의미에 대한 확신을

  갖고 결단을 하며 미래의 가기 계획을 시도하는 것

 

그래서 많은 분들이 삶의 기획을 할 때 가장 훌륭하게 쓰고 있는 방법 중에 하나는 내 인생

의 롤모델을 잦는 겁니다. 인생에서 본받고 싶은 한 모델을 찾는 거예요. 그 모델 중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겠죠. ?내가 우연히 만났던 사람들, 혹은 뭐 책 속에서 만난 위인도 될 수

있고, 내 주변에 있는 부모님이 될 수도 있고, 형제가 될 수도 있고 많습니다.

 

# 나의 인생의 롤모델을 찾아보자

 

저 개인의 경우에는 제가 사제가 되기 전까지 어떻게 이런 성소로 성장하게 됐는가? 저의

인생의 롤모델은 누구였을까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에 저에게 큰 감명을 주었던 것은, 아

시시의 성프란치스코의 영화를 봤을 때입니다.

 

본당에서 큰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여줬거든요. 그 영화를 보면서 저는 그 프란치스코 성인

이 너무 멋있었어요. 그 너무 멋있게 살았던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아, 정말 존경하고 싶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어린 마음에.

 

그리고 그 성인 옆에 있었던 성녀 클라라가 그렇게 예뻐 보이더라고요. 야, 나도 저렇게 정

말 하느님 안에서 서로 예쁜 사랑하고 사랑하며 살면 좋겠다. 그런 어린 시절의 소망이 있

었어요. 그것이 이제 제 어린 시절의 성소의 꿈이 이제 됐던 거 같아요. 그래서 교회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본당에서 같이 어울려 살아가는 거를 행복으로 여기고.

 

그런데 그런 어떤 삶의 모델들이 또 시간이 지나면 바뀝니다. 어린 시절의 롤모델이 그대로

가지 않아요.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똑같은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영화를 봤어요.

학교에서. 그때 영화를 봤더니, 어린 시절의 감동이 안 나오더라고요. 이 머리 속에 들은 게

너무 많아서 그런지 잘 안 되더라고요.

 

그리고 성녀 클라라도 별로 안 예뻐 보이더라고요.^^*~~~ 제 눈이 좀 높아졌는지. ^^^*~~

그래서 아, 감동이, 롤모델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생각을 했는데 제가 독일 이제 독일에

유학을 가서, 신학생 때 ?유학을 가서 유학 생활을 하다 독일 신학생들하고 성지 순례를 같

이 가게 됐어요.

 

그래서 로마로 가게 됐는데 로마에서 교황님을 만나고 아시시를 5일 동안 가기로 했는데,

그 아시시를 가기 위해서는 그 독일에 있는 지도 신부님이 아시시를 가기 위해서는 아시시

의 성프란치스코 영화를 꼭 봐야 된다. ^^*~~~ 이 영화 만큼 성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

성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제가 그걸 세 번째로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아, 신학생 때 그 참 재미없게 본 걸 도 봐야 되나? 그리고서는 다시 봤는데요. 그때

는 또 감동, 새로운 감동입니다. 그 성인의 삶이 제게 주는 메세지가 달라진 거예요. 그리고

클라라 성녀도 다시 예뻐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인생의 롤모델을 정할 때

그 롤모델을 내가 살아가면서 내 삶의 여러 체험들 속에서 다른 모습들을 또 보는 것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인생의 롤모델이 있죠? 한 번 기억

해 보시면 좋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내가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여러 가지

기획들을 합니다. 그래서 본받고 싶은 사람이 생겼을 때, 내가 정말로 그 사람을 따라 살까,

아니면 그냥 에이, 뭐 훌륭한 사람인데 나랑 상관이 있는가?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과는 인

생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진다라는 이야기입니다.

 

# 내가 본받고 싶은 사람이 생길 때: 그 삶을 따라 결심하는 사람과 그냥 공감하고

  끝나는 사람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요즘 우리 시대에 종교적인 회심을 하신 분이 많죠. 그 회심을 하신 분들 중에 특히 이제 마

더 데레사의 이야기가 많잖아요. 뭐 데레사가 말씀하신 그 삶의 어떤  하느님을 향한 삶, 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삶, 또 근래에 또 아프리카 수단에서 자신을 바쳐서 봉사한 '울지마

톤즈'라는 데서 나왔던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보면,

 

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그런 분들에 대한 어떤 삶의 어떤 의미, 삶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내가 공감을 하고 뭔가 나도 좀 해야겠다 해서 정말 ?후원을 하고,

또 그 사람들에게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찾아가는 사람과,

 

아유, 훌륭하구나, 나하고는 상관없네라고 하는 것과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질적으로 다

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의 성숙이란 정말 올바를 지식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훌륭한 덕성을 갖는 것, 그리고 내가 선한 의지를 갖고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내 인생

지평을 확대시키는 것이야말로 참 좋다.

 

# 인간의 성숙이란: 참된 앎과 훌륭한 인격, 삶의 의지(선한 의지)를

  변화시키는 지평 확대의 체험에서  가능하다

 

여러분들 주변에 정말 훌륭하신 분들을 보신다면 그런 체험들이 아마 용솟움 칠 겁니다.

자, 이것이 인생 이야기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살아갑니다. 우리 인생

은 늘 지금 여기서 생생하게 살면서 동시에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너를 만나고, 그 너와

의 어떤 서로 의미 체험을 공유하면서 인생을 기획하고 미래의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 나는 왜 종교를 가졌는가?

 

자, 여기까지가 인생 이야기인데요. 자, 이 인생 이야기에서 한 단계 넘어가는 것. 왜 그럼

우리는 종교라고 하는 그런 어떤 특별한 삶을 선택했을까? 즉, 종교라고 하는 말은 가장 으

뜸된 가르침인데 그 으뜸된 가르침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겪는 정말 언젠가 죽을 수밖

에 없다는 이 죽음의 체험을 뛰어 넘는 새로운 희망의 체험입니다. 희망.

 

# 종교적인 삶: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죽음을 뛰어 넘어서 내 삶이 의미

  있을 수 있다고 희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교하고 하는 것은 달리 표현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죽음을 뛰어넘어서

도 내 삶의 인생의 기획이 의미 있을 수 있다라고 받아들이는 게 바로 종교적인 삶을 사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면서도 죽음을 뛰어넘어서도 내 인생은

살아갈 의미가 있다라는 것을 기획할 수 있고, 희망할 수 있는 것을 바로 종교적인 삶이다.

그래서 종교라는 말은 바로 죽음을 뛰어넘는 희망이다라는 말로 아주 평범하게 풀어낼 수

있습니다.

 

# 종교: 죽음을 뛰어넘는 희망

 

세상에 수없이 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그 종교인들은 모두 한결 같이 죽음을 뛰어넘는 우리

들의 삶의 영원한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죠. 우리

그리스도교도 예수님이 정말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 죽음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것을 뛰어 넘어 죽음 위의 영원한 생명의 희망, 부활 신앙을 살아가는 게 우리들의 목표잖

아요.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이전에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 다른 종교인들과 대화가 가능한 이유: 같은 종교인으로서 느끼는

                              공통의 초월의 체험을 가지고 있다.

 

종교인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 종교인이라는 말은 우리가 다른 종교적 신념을 살고 있는

사람들과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첫 출발점입니다. 뭐 불교인이든, 이슬람교인이든, 세상의

많은 종교인들이 있는데, 그 종교인들과 함게 대화할 수 있는 출발점은 바로 여기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같은, 죽음을 뛰어넘는 희망을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이런 것들은 이제 우리가 생의 궁극적 의미들을 찾아가는 그러한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러

니까 궁극적 의미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것, 정말 이 세상에서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완전한 가치, 썩어 없어질 수 없는 그런 가치, 여러분들은 그런 가치를 과연 뭐라고 생각하

실지 모르겠지만 한 번 그런 묵상해 보시면 좋겠어요.

 

■ 묵상 주제: 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단어는?

 

내가 정말 인생을 마무리 할 때, 내 인생에서 마지막 한 단어를 뽑아봐라, 가장 가치있는

단어가 무엇인지를 뽑아봐라. 많은 단어가 나오겠죠. 사랑, 평화, 구원, 기쁨. 그 중에서도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내 인생의 마지막 단어가 된다면, 우리는 정말 멋진 신앙인이 될 겁

니다. 그리고 멋진 종교인이 될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아마 우리가 신앙을 증거한 분들로부터 배우는 것이겠죠. 하느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라고 했을 때, 그분들이야말로 내 생의 모든 것의 가치를 깨달은 

분들이죠. 어쨌든 우리는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실존의 마침, 죽음이라는 것을

체험합니다. 죽는다는 것이 결코 사람들에게 편하고 행복한 일은 아닙니다.

 

죽음에 따르는 고통도 두렵고, 미지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한 신앙

인이라 하더라도 죽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신비죠. 그것이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올지는

우리는 알지만 아는 것을 정말 몸으로 느끼는 것과는 다릅니다. 내가 정말 죽음을 경험해

보지 않는 한. 그래서 모든 것들이 정말 죽음으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다면, 아마 우리는 이

세상을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가 없을 겁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희망으로 초월하는 인간, 그것이 바로 종교적인 인간이라고 한다면 종교

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삶의 희망인 하느님, 영원한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니을 갈

망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체험입니다.

 

# 종교: 영원한 삶의 희망인 하느님을 갈망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체험

 

그 체험 안에서 우리는 종교인으로서 우리 생의 모순과 갈등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사람이

되는 거고, 인간의 어떤 현실 역사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삶을 기획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가운데 영원한 생명, 구원, 해방, 치유를 갈망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종교

인이 된 이유입니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해가 되시죠?

 

# 종교인: 생의 모순과 갈등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사람을 말하며,

  현실 역사 안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삶을 기획하며 미래를 지향하는 가운데

  영원한 삶, 해방, 치유를 선사하는 절대적 초월의 하느님을 향하는 사람

 

자, 그럼 이제 다음 우리가 묵상할 수 있는 건 그겁니다. 인생 이야기의 세 번째 단계는

이런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이 희망이라고 하는 단어에 대한 우리들의 종교적인 열정,

그 열정은 어디서 발견하느냐? 하는 겁니다.

 

■ 우리 희망(신앙)의 근거는?

 

즉, 우리들의 희망의 궁극적인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내가 간직힌 희망을 설명해야 되는데

그 내가 간직한 영원한 가치이자 그 희망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가치, 희망을 누구에게서 찾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찾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

도에서 찾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찾을 때 그 찾음은 바로 우리가 인생 이야기를 풀

어가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풀어집니다.

 

내가 한 사람의 나의 동료와 같이, 친구처럼 살아오면서 서로 의미를 공감했던 그러한 사람

처럼, 2000년 전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바로 누구요? 예수님.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하는 그분이 어떤 형태로들 내 인생에 들어오셨다는 겁니다. 내 인생에.

 

# 2000년 전에 인간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이 우리 삶에 들어오셨다

 

예수님을 내가 믿게 되고, 또 예수님 안에서 내가 영원한 근거를 찾는다라는 이야기도 결국

예수님이라는 분이 나와 똑같은 역사 안에서 실존을 하셨고, 또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생생

한 고통과 아픔을 다 겪으셨고, 또 그 모든 것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정말 희망하는 인

간이었다는 것이죠.

 

# 그리스도인은 희망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그 인간으로 살다가는 예수님과의 만남, 그 만남 속에서 그 희망을 찾는 사람들을

누구라고 해요?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희망의 생명을 찾는 사람들. 

 

# 그리스도인:  

  인간으로 살아가신 예수님과 만남에서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찾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그 과정. 아마 모르긴 뭐 몰라도 여러분들 중에는 뭐 태중 교우들이 있으시죠?

부모님이 이제 오랜 천주교 신자라서 유아 세례를 받고 이제 신자가 되신 분들도 있고 또

나이가 들어서 우연한 기회에 친구나 동료들을 통해서 이제 신앙을 갖게 된 분들도 있고요.

여러 가지 입교 동기는 다양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첫 번째 출발점은요,

예수님을 이미 만난 사람들을 먼저 만나는 겁니다.

 

■ 나자렛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먼저 만나자

 

예수님 안에서 먼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일지를 깨달은 사람들과 먼저 만나서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경우는 내 부모님이 될 수도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역사 속의

한 인물이 될 수도 있고, 성인 성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나는 예수님 안에서 생의 의

미를 발견한 사람들 속에서 내 인생의 지평, 내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생의 지평이 새롭게 열

리는 체험을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생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들의 생의 지평과 체험 세계에 대한 공감을 하게 된다

 

어? 예수님의 말씀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까  야, 저렇게도 살 수가 있구나. 저

사람들 예수님 믿어 갖고 저렇게 고통 속에서 희망하며 살 수 있구나라는 걸 깨닫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들에 대한 어떤 공감을 갖게 되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첫 번째 갖는 예수님의

어떤 만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을 만난 인물들이 많아요. 그쵸?

창녀, 세리, 과부, 고아, 중풍병자 이 모든 사람들은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해서 한 마디

로 예수님한테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혹은 복음서를

읽을 때 제일 먼저 눈여겨 봐야 될 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어떻게 변화

됐는지를 먼저 보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뭘 찾았는지 그것을 먼저 보게 되면

아마 하느님이 어떻게 나를 변화시킬지도 깨닫게 되는 거죠.

 

# 성경 속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격과 삶에 대해 깊이 공감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만남 이후 어떻게 변화됐는가?

  "하느님이 어떻게 나를 변화시킬까?"의 답을 알 수 있다

 

아주 비근한 예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얘기잖아요. 그

죽음의 순간에, 그 사람들의 돌팔매질 당할 순간에 예수님의 그런 정말 바닥에 글을 쓰시고,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그리고 "너의 죄를 묻는 사람이 없느냐? 그렇다면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했을 때 그 여인에게는 정말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생명이예요.

그때는 모든 걸 예수님에게 걸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사실 성경 학자들은 그 간음하다 잡힌 여인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십자

가 밑에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에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른 여인이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같은 사람으로 영성적으로 풀어서 이야기 하기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

어떤 삶에 최고의 회심을 하지 않는 한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까지 따라갈 수 없다는 거죠.

것이 바로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먼저 눈여겨 보아야 될 이유입니다.

 

# 나자렛 예수를 만난 사람들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발견한다

 

여러분 복음 묵상하실 때도요, 중풍 병자의 이야기, 나병 환자의 이야기,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다가 치유받은 여인의 이야기 그 여인의 마음을 먼저 읽어보는 것이 복음 묵상에 되게 중요

합니다. 이것이 되게 중요한 우리들의 첫 번째 예수님과의 만남고요.

 

■ 예수님과 얼굴을 마주 보자

 

두 번째 만남은 뭐냐 하면 그렇다면 그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도 회심시킨 그분들을 만나게 해

준 예수님은 도대체 누굴까? 예수님 자신을 만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 예

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겁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어

떤 데에서 매력을 갖고 계신가?

 

그분의 가르침의 위대함, 정말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연결시켜 주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

든지,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라든지, 특히 잃었던 아들의 이야기, 용서의 정말 놀라운 체험.

또 세리와 바리사이의 기도라든지 또 예수님이 얼마나 또 당신의 삶과 그때에 맞춰서 하느님

께 기도하는 상 그리고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또 많은 기적을 하신 다음에 조용

홀로 앉아서 하느님과 함께 일치의 나눔을 하시고,

 

또 아시겠지만 정말 죄 많은 사람들 또 이 세상에 정말 바닥에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함께 가

서 식사를 나누고, 자캐오와 식사를 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시고 이런 것들.

정말 예수님은 본인 스스로도 정말 자유로운 인간이었지만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해 준 사람

이라는 겁니다.

 

# 해방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력을 느끼면 생생한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분은 해방자, 구원자이시지만 동시에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런 예수님에 대한 매력을 느끼고 성경을 읽을 때 이제 성경 속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말씀

을 우리가 곱씹으면 그분이 살아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으로 우리가 만나는 겁니다.

그게 생생한 성경 말씀으로 살아있는 거거든요.

 

우리 천주교 신자분들이 요즘 성경 필사 많이 하시잖아요.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성경 암송

계까지 들어갑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구절들을 외우는 거예요.

외워서 자꾸만 내 머리 속에 새기면은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

을 새기고, 자꾸 이렇게 외우는 이런 훈련도 참 좋은 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서 구절을 내가 책상이나 내가 가까이 있는 곳에 붙여 놓고

되새기면서 예수님이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새기는 겁니다.

 

# 내가 끌리는 성경 구절을 생활 공간에 붙여 놓고 되새겨 보자

 

그런 다음에 우리는 예수님을 이제 그리스도로 고백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나는 겁니다. 이

제 예수님을 한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이제 우리의 예수님의 어떤 신앙에 동참하는 그런 우리들의 삶

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복음서에도 많이 나오죠.

 

■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제자들을 만나자

 

백인 대장의 이야기처럼("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또 사도 바

오로가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나의 생의 모든 것입니다. 나는 살들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고백:

  ㅡ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리 1,21).

  ㅡ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이런 고백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이런 하느님의 어떤 손길을 예수님

안에서 찾은 살람들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 속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신앙이 성숙하는 것이죠.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 즉,

교회라고 하는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 안에서 함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을

살아야 하는 겁니다.

 

# 신앙공동체 안에서 함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을 살아가자

 

그래서 우리가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말을 하죠. 그것은 이스라엘을 선택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된 모든 인류 공동체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바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교회를 살아갑니다.

 

# 교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의 모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고 다 우리는 그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서 교회도 얘기하죠.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몸은 하나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1코린 12,12)

 

그래서 교회의 어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동시에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느님을 향해서 순례의 여정을 살

면서 동시에 교회가 살아온 이런 역사에 내가 동참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 교회 구성원이 된다는 것: 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느님을 향한 순례의

  여정에 동참함, 교회의 역사성에 동참하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교회에 대한 어떤 실망을 느끼고 "아, 나는 예수님만 믿고 교회는 안 나갈래." 하

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참 잘못된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에 함께 해 온 분들의 역사에 동참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동

참하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 교회는 완전하지 않죠. 우리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 교회의 역사성에 동참: 교회가 걷는 역사의 모순 속에서도 하느님을

                              찾는 여정에 동참함

 

그래서 교회도 어떤 역사 안에서 많은 죄책을 고백합니다. 뭐 아시겠지만 대희년을 앞두고

교황님께서도 우리 가톨릭 교회가 뭐 십자군 전쟁 때 있었던, 중세에 종교 재판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에서 좀 솔직하게 역사 안에 교회가 받은 상처에 대해서 고백을 했거든요.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거룩하게 만들어 준 교회지만 동시에 우리들이 정말 이 교회의 어떤

역사 안에 우리도 동참하고 있다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교회의 구성

원이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신앙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의 이 네 번째 강의가 인생 이야기에서 이제 마무리가 될 수가 있겠는데,

우리가 현실 속에서 정말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정말 종교적 열정으로 살고 또

교적 열정이 어떻게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서 희망의 궁극적 근거가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

풀어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그래서 오늘 아마 그리스도 신자로서 살아가는 우리가 고통스러운 역사를 수용해야 하는지,

또 왜 우리가 종교적인 삶을 살면서 또 이런 죽음을 뛰어넘는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 또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만난 희망, 그분이 가지신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 또 예수님을 만나

서 변화된 수없이 많은 복음의 인물들, 도 그분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는 수없이 많은 그

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오늘 나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봤는데 어떻게 좀 인생 이야기

가 풀렸습니까? 저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생을 정말 계란과 같은 것이라고 시작을 했는데,

아마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없이 많은 것들을 풀어내는

하나의 어떤 그런 훈련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인생에 여러분들 앞으로 겪게 되는 많은 이야기들을 한 번 삶으로 풀어보시고 또 신학

으로 풀어보시고, 또 하느님의 어떤 그런 말씀으로 풀어보시는 그런 시간들이 됐으면 좋겠습

니다. 다음 시간에는 신학을 할려면, 본격적으로 할려면 뭘 알아야 되는지, 또 우리 그리스도

교 신앙의 정말 핵심적인 기초적인 것은 무엇인지, 신학을 최소한 할려면 이 정도는 알아야

된다라는 그러한 메세지를 여러분들하고 좀 나눠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이제 신학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맛들여 보는 그런 시간들이 되

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고요. 또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내어주시는

놀라운 은총의 시간들, 또 축복과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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