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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의 길 - 2014.9.12 연중 제23주간 금요일(순례24일차),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4-09-12 조회수888 추천수8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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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9.12 연중 제23주간 금요일(순례24일차), 1코린9,16-19.22ㄴ-27 루카6,39-42

                       

사랑의 길


어제는 텔라딜오스에서 엘 부르고까지, 
아침미사와 식사 후 5:45분부터 오후 1:30분까지 8시간 정도, 3회 쉬고 계속 걸었습니다. 
흡사 전쟁터로 출전차 행군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또 이 모습이 각별하고 쾌감이 있습니다. 

어제는 75리의 장거리였지만 참 상쾌하고 좋았습니다. 
9시부터 거의 오후 1시까지16km 거리를, 
가을 바람 시원한 포플러 가로수 그늘 밑 오솔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스틱은 필요없어 그냥 들고 걸었습니다. 

그대로 '사랑의 길'이라 명명했고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순례자들의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포플러 나무들의 사랑이 그 존재이유듯이 
존재자체로 우리의 하늘길 순례여정에 
시원한 사랑의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같은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성인들은 물론 믿음의 선배나 도반들이 다 그러합니다. 
이런 산티야고 외적순례여정은 각자 삶의 자리에서의 내적순례여정의 상징입니다. 
본격적 순례는 제 삶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이요, 
여기서 시원한 사랑의 그늘이 되어 주는 것이 순례자의 존재이유입니다.

순례여정중 깊이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 사랑의 표지요 도구임을 깨닫습니다. 

걷기의 순례중에는 꼭 로만 컬러를 했습니다.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신원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좋아하고 반가워했으며, 
저는 순례중 손을 흔들어 주는 대신 성호경을 그으며 강복을 주었습니다. 

한국의 사제만이 아니라 거룩한 성교회의 보편적 사제임을 실감했습니다. 
'아멘'하며 겸손히 머리 숙여 강복을 받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할 수 있다면 수도복을 입고 배낭을 메고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침미사를 했지만 도착하여 6시, 마을미사에도 참여했습니다. 
주님의 집, 거룩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31명 모두가 순례자였고 여기 알베리게에 머무는 대부분 사람들이 신자임을 알수 있었습니다. 
부부가 8쌍이니 부부 순례자들도 꽤 많은 편입니다.

어제 포플러 사랑의 길을 걸으며 묵주기도를 얼마나 많이 드렸는지 모릅니다. 
묵주기도의 진수를 깨달은 날입니다. 
순례여정중 끊임없이 바칠 수 있는 정답고 사랑스런 기도가, 
예수님과 성모님 사랑에 깊이 하나로 결속시켜주는 기도가 묵주기도입니다. 

묵주기도 하나 만으로도 
사랑의 관상가가 되고 무사히 하늘길을 걸어 하늘문을 통과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기도든 활동이든 
하느님 사랑에 대한 사랑의 응답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가 되고 도구가 됩니다.

스페인의 자연이 좋다해도 사람은 결코 자연인만은 될 수 없습니다. 
마을마다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성당이 사람은 자연인 이전에 '하느님의 자녀'임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연이 좋다해도 결국 인간의 의미이자 존재이유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계시고 하느님을 믿기에 비로소 우리는 삶의 허무와 무의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연에 의미를 주는 분은 창조주이신 하느님뿐입니다. 

어제 저녁은 순례중인 캐나다 교포 자매의 정성 가득 담긴 저녁식사 선물을 받았습니다. 
자매님들 역시 하느님 사랑의 도구였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제 부끄러운 고백을 소개합니다. 
난생처음 과식으로 배탈이 나 토한 후, 
괴로운 밤 시간을 지냈습니다만 주님 은총으로 새벽에는 맑고 밝게 갠 몸과 맘으로 강론을 씁니다. 

한국인의 미풍양속인 사랑의 권고에 덥석 덥석 받아 먹은 것이 배탈의 원인이었고, 
분명 제 어리석음 이었습니다. 
밥이나 술은 권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사실 요즘은 얼마나 많이 먹는지 
밥을 먹는 것이 흡사 빈 배낭에 온갖 것들을 넣는 것과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사랑에 깊이 감화된 바오로의 고백은 얼마나 진정성 넘치는 지요.
저는 감히 바오로의 복음 대신 '강론'을 넣어 제 고백으로 삼아 봅니다. 

'내가 강론을 쓰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된 사랑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사랑은 지혜요 겸손입니다. 
결코 눈먼 인도자가 되지 않습니다. 
무지와 교만한 이들이 제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들의 눈에 티를 빼내려 합니다. 
이런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딱 둘, '너나 잘해', '네가 뭔데'입니다. 

우리의 눈 속에 들보와 티를 뽑아 낼 수 있는 분은 유일한 스승이자 인도자이신 주님뿐이요, 
주님의 사랑과 하나된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뿐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주님 친히 확증해 주십니다. 

어제 새벽길 걷는 중 새롭게 깨달은 진리가 생각납니다. 
세 사람이 걸으니 두려움도 없고 든든했습니다. 
순간 '내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고, 
주님 친히 우리의 인도자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친히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고, 
당신 따라 인생 순례 사랑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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